망가지는 세계의 양자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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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레드부기
작품등록일 :
2018.10.10 16:51
최근연재일 :
2018.10.2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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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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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DUMMY

“자아, 어쩔까 어쩌면 좋을까?”


값비싼 양복을 걸치고 술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남자였다. 얇은 안경테. 어쩐지 젊다는 인상이 가장먼저 드는 남자였다. 딱히 남자의 나이를 아는 것이 아님에도. 아마도 혈색에서, 안광에서 뿜어지는 건강한 생기덕인 모양이었다.


아무렇게 던진 두꺼운 술병이 카펫에서 둔탁한 소리를 낸다. 굴러서 같은 형태의 병과 부딪혀 다시금 단말마를 질렀다. 남자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썹을 모았다. 쩝쩝 입맛 다시면서 병의 머리를 입에 넣었다.


뚜껑을 싸고 있는 포장을 이로 뜯었다. 입안에 든 조각을 몇 번이나 뱉어가며 트득 소리와 함께 뚜껑이 돌아갔다. 그 천박하게 개봉되는 모양새는 싸구려 음료수라도 여는 모습이었으나, 수면을 찰랑이면서 유혹적으로 뻗어오는 냄새는 만만찮은 가격을 연상케 했다.


“뭐라고? 아 베놈이라고 불러. 꼭 남의 이름 듣는 것 같다.”


퍽, 주둥이와 병이 키스를 그만두자 가벼운 파열음이 일었다. 턱으로 목선으로 질질 흘린 엑채가 남자가 풍기는 술 냄새의 원인인 모양이다. 한 짝은 족히 넘는 술병이 구르는 방에 혼자 않은 남자의 뺨은 건강한 빛이었다.


미간을 모으기 전에도 눈동자는 명확한 초점을 가지고. 술에 취했다고 하기에는 몸자세가 너무도 가지런하다. 베놈이 풀어놓은 단추를 매만지며 웃었다.


“벌어놓은 거 다 털려면 이걸론 안 돼. 이게 네가 담던 리큐어랑 맛이 비슷하다니까. 아 이거 브렌디야?”


병을 들어 벌써 삼분지 일가량 낮아진 수면과 시선을 맞춘다. 그러기를 몇 초.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예의범절로 술을 빨아들였다.


“어찌 대인이 범부의 세계를 이해하겠어. 나도 막걸리랑 고량주는 잘 구분해.”


숨이 막힌지 병을 때내고 숨을 확 들이켠다. 식도로 불을 마신 것 같은 기분에 마시고도 갈증이 인다. 그것도 잠깐인 모양이었다.


"야 임마 어린애한테 술을 먹인다는 발상자체가 잘못 된 거지.“


둥근 테이블을 두드렸다. 재떨이가 덜컥인다. 술자리 같은 분위기. 넓고 높은 위치의 방. 혼자만의 목소리와 낮고 둔탁한 반향음이 구석구석을 울린다.


“범부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랜만에 만나서는, 만날 취해있는 주제에 아픈 데를 찌르는 건 여전해?”


“그래 취하지 못했지. 너도 나도.”


베놈이 번절은 넘게 남은 술병을 놓았다. 그 병의 아래는 공허. 제 내용물에 취에 안에든 것을 쿨럭이며 토해냈다. 익숙해졌던 술 냄새가 다시금 코를 찔렀다. 일종의 요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폭스가 그렇게 움직일 줄 알았어? 어쩔 거냐고? 이제 와서? 운으로 이기고 싶지는 않아? 세침한척은.”


베놈은 노려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긴 과업을 끝내고 세포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낸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 눈동자는 똑똑히 살아서.


“십년간 배가 부른 적도. 취한 적도 없어. 그 누구도 내게 일하라곤 하지 못 해.”


드미트리의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오래 쓴 의자는 삐걱이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특출한 것은 의자가 아니라 그 위에 걸터앉은 인간인 모양이다.


“애초에 그 새끼는 스폰서도 거절했다고. 아는 인간도 없어서. 써먹을 만한 게 거의 없다고.”


베놈은 나른한 표정의 얼굴에 휴대폰을 대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곧 응답이 왔다.


“그렇지만 너는 너무 날 잘 알잖아. 어디 그 잘난 실력으로 해보라고”


전화상대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드리트리 동생 드미트리는 검지와 중지를 꼬았다. 어떻게 운 좋게 죽을 위기를 넘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운이 나쁘게 슬레셔 영화의 역사에 기릴 만한 꼴로 죽어 나가는 게 아닐까. 아니 그 영화는 개인의 문제였다. 좀비는 세계단위의 문제다. 세계가 죽을 운명을 피하기라도 한 걸까.


잔해를 타넘는 발바닥이 묘하게 뜨거웠다. 이 근처는 특히 붕괴가 심하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드미트리가 있던 곳은 좀비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어나더의 일상이라도 주장해도 문제가 없었다. 할로윈의 날짜가 법적으로 뒤바뀌어 좀비 스킨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면 믿을 수 있었다.


그랬던 것이 정확히 집을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 좀비들이 마시는 음료가 혈액이어서, 빨아대는 캔디가 손가락 뼈여서가 아니다.


건물이 무너져 있었다. 뿌려져 강을 이룬 피가 썩어가는 와중에 굳어 밑창에 달라붙는다. 본적도 없는 차들이 타이어가 터지고 엔진이 불꽃에 녹아내려 형태만으로 과거의 기능을 주장하고 있었다.


허나, 드미트리는 어나더에서 자동차를 본 일이 처음이었다. 어나더의 건물이 붕괴되었다는 것도 생경했다. 그 현상을 처리할 물리 엔진이 어나더에 존재하던가. 온라인 게임에서 벌어진 일은 컷신으로 때우지는 못했을 텐데.


타인의 집에 무단으로 점거해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 철저하게 숨겨온 비밀이 눈앞에 들이대어 지는 것 같은 기분. 묘한 고양감과 긴장이 뒤섞여 뱉어낸다면 막 만들어낸 아스팔트 같은 모습이 아닐까 했다.


그런 기분속에서 새로운 특이점을 발견했다.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길목을 걷다보면. 북쪽의 어딘가에서 보았던 길안내 표지판이 오른편에 서있다. 그것을 파인더의 너머로 유심히 바라보면서 주변의 좀비를 살폈다.


많지는 않았다. 발판이 불안하여 기어 들어오지 못했고. 드미트리가 어설프게나마 은밀히 기어들어와 이목을 끈 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손에 든 카메라가 원망스럽다.


“신형이면 셔터를 울리지 않아도 찍을 수가 있는데.”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물건의 어나더 복각판이었다. 레인지 파운더로 작은 체구의 드미트리가 부담 없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벼움에 비해 심도가 깊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점. 촬영자의 스킬이 그대로 드러나는 필름의 결과물을 재현한 것이 매력인 물건이었다.


단점이라면 필름을 넣어야 해서 유지보수가 귀찮다는 점. 지금에 있어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운타운에서 랜드 마크를 찍어 홍보하는 데에는 아주 좋았다. 돈도 제법 짭짤했는데.


숨을 가슴이 답답할 만큼 죽이고 그늘에 숨었다. 좀비가 질질 발을 그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려 작업은 하나도 진행되질 않고. 딴생각만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자, 자. 드미트리의 혐의를 못 벗기면, 드릴로 아다떼는 거야. 정신 차리자.”


호흡을 극단적 단속해 약간만 빠르게 중얼거려도 숨이 찼다. 이미 정신은 몇날 며칠을 이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급한 손으로 검수도 없이 서툰 치팅을 마치고 파인더를 눈에 댔다. 가면이 거슬려서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눈앞에 번쩍였다. 구형카메라의 구동음을 어떻게 감췄는데 셔터를 깜빡했다. 솟구치는 비명을 목을 조르는 기분으로 억누른다. 몸통의 근육이 여기저기 아픈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좀비는 그저 알고리즘대로 여기저기 공허한 걸음걸이를 할뿐이었다.


다시금 후미진 곳으로 숨어들어 프롬프트를 열었다. 이번에는 익숙한 알고리즘의 치팅이다. 손가락에 익은 룬문자를 코드에서 빠르게 변환시켰다. 허공을 집게손자락으로 잡아채자 폴라로이드 한 장이 손에 쥐어졌다.


그것을 열심히 흔들자 역시나 허접한 결과물의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곤 미니맵을 열어 사진을 들이댔다. 표지판의 위치가 맵에 드러났다.


“뭐라고? 여기 에버 블루야? 분명히 레일 퍼플로에서 빠졌던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다. 혼자서 놀라 입을 손끝으로 꾹 누르고 미니맵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것을 툭툭 잘라내자 작은 폴라로이드 수십 장으로 나뉜다. 그것을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던 마커를 이용해 퍼즐을 풀듯이 재구성했다.


"뭐야 이거. 고저차가 이상하잖아?“


한참을 퍼즐과 씨름하던 다음 과제의 불합리함을 깨달았다. 맵은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건물의 옥상에 오르면 길의 한복판으로 내팽겨 친다. 평면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사차원의 미로가 되어있다. 그래도 어거지로 맞추면 큰길 정도는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드미트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잘하는 것은 사진을 찍는 것뿐이다. 경찰서에 잠입해 형제의 기록을 어떻게 조작하겠다는 기획자체가 틀려먹은 거다. 그걸 좀비가 돕고 있었다.


오늘 네시까지 해낼 수만 있다면 된다. 드미트리의 구속영장이 오늘 다섯 시에 발부된다. 그 안에 어떻게만 할 수 있으면, 보통 초조라 불리는 종류의 긴장감이 머리통을 황홀하게 물들여 갔다.


“여기서 직진. 에버 블루가 쪽으로 다시 한 번 빠지고. 중앙공원으로 우회전해서. 동쪽3 번 출구로 빠진다. 여기가 경찰서? 맞겠지? 두 시간 반 안에는 도착 하면 되니까.”


말끝을 흐리며 백팩을 끌렀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키 높이의 장애물이 그렇게 만들었다. 왼쪽 골목으로 빠지면 이번에는 이 세계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준비는 되어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모았던 저금의 대부분이 들었다. 통장의 잔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매를 걷자 러시아인 특유의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사진기술을 이용해 직접 만든 아바타였다. 미리 돈을 좀 투자해 둘 걸. 못해도 헬스정도는 해둘 걸. 후회를 머릿속에서 지운다. 사진으로 찍어서 폴라로이드로 버리는 이미지였다.


팔뚝에 검 테이프를 둘둘 감았다. 세 바퀴 정도만 감으면 근력이 1.5배 늘어나는 효과라고 했다. 일회용에 사용도 불편. 효과도 그저 그런 주제에 더럽게 비쌌다. 장갑형의 가격을 생각하면 사지도 못했다. 만들 수도 없었다.


대체 가면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제대로 작동은 하는 걸까.


두 바퀴를 감은 시점에서 손끝이 떨렸다. 제 팔뚝의 근력을 상기해 기어코 세 바퀴를 감았다. 반대편 팔에 똑같은 작업을 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며 백팩을 맸다. 숨을 가슴 가득히 채우고 까치발을 해 난간에 손을 걸쳤다.


머리모양 바꿔서 인상을 바꿀 돈으로 근력을 키울걸. 첫 번 째로 든 생각이었다. 팔을 달달 떨어가면서 발을 벽에 대자 두 번째 생각이 떠올랐다. 다리에도 감았어야 하는구나. 발바닥을 벽에 댄 다리에 힘을 주자 몸이 들썩였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결과가 그거였다.


온몸을 문질러 가며 팔꿈치를 난간에 올렸다. 반대쪽 팔을 똑같이 해보여고 꼼지락대는데 검테이프의 효과가 떨어진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맛이 간 건 자신의 팔인지도 몰랐다.


“아! 쑤까! 쑤까 린!”


여린 목소리로 욕이 절로 치밀었다. 입을 급하게 다물었으나 등 뒤에서 좀비가 발을 끄는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소름이 쭉 돋아 정신을 차리니 건물 잔해 위에 도달해 있었다.


“하면 되는 놈 이자나! 러시아선 욕이 사람을 만듭니다! 소련에선 좀비가 욕을 해요!”


이미 러시아 드립이 아니었다. 승리한 기분에 양손을 깍지 끼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난리치는 다섯 구의 좀비에게 중지를 들며 일어났다. 내려가는 것도 문제였다. 에잇! 하고 엣된 소리를 울리며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곳이 애먼 자동차의 지붕이라 소리를 크게 울렸어도 부상은 없었다.


걷어차인 강아지 같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머니가 큰 반바지를 입은 엉덩이를 문질렀다. 내려앉은 모자를 고쳐 썼다. 잿빛 머리갈을 고정시키듯 단단히 눌렀다.


가면만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기에는 불안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은커녕 시체만 여린 목덜미에 군침을 흘려대는 통이다. 목을 문지르듯이 셔츠의 깃을 세웠다.


몸을 차체에 미끄러트려 바닥에 내려섰다. 본능적으로 모자를 벗어 옷의 먼지를 털었다. 어나더에서 이런 일을 한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잊었다. 목줄 달린 카메라를 꾹 쥐고 두발이 공중에 뜬 듯이 걸었다.


악취. 오염. 대비되듯 푸른 하늘빛 잔뜩 흔적을 뿌리고 그 주인이 사라져 있었다. 이따금 낡은 창문을 흔들기 좋아하는 바람이 불었다. 몸을 차게 식히고 손가락을 얼리는 풍랑이었다. 여름에 그런 바람은 불지 않는다. 계절이 마칠 때 다가올 봄에 쫒기는 바람이 그런 식으로 불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대는 통에 처음으로 빠져나가야 할 길을 잃었다. 거기가지 오고 나자 여기는 좀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지도와 길목을 대조하며 걸었다. 발끝을 돌린 순간 눈앞에 이세계가 있었다.


돌풍이 심하게 부는 장소였다. 머리칼을 몇 개인가 칼바람에 베이는 것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집의 주인이 거기에 있었다. 높은 탑? 조형물? 이름을 섣불리 댈 수 없는 그것의 모습은 생물의 것은 아니었다.


외장은 사람으로 되어있었다. 골수가 치덕치덕 솜씨 없이 발려있다. 대장, 아니면 소장임에 분명한 것이 물에 넣으면 뜰 정도의 면적으로 드러나 있다. 심장이 몇 개인가 박동하고 있다. 너무 많은 심장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것은 실질적인 형상이 게슈탈트 붕괴에 이르게 한다.


머리가 하나 불쑥 나왔다. 심장까지 근육인지 피부인지 모를 것을 꿈틀거려 뻗어서 덮어간다. 검은 빛의 곧장 모습을 감추고 머리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 홍체의 모양을 바라보고 아 인간의 머리통이구나. 멀리서 메아리를 알아듣는 것처럼 뒤늦게 알아챈다.


좀비가 저기서 태어나고 있다. 저것이 무엇인지 간신히 파악한 것이 다행이었다. 얼마나 멈추고 있었는지 모르는 숨을 토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셔터를 누른 모양이었다. 셔터에 놀라 카메라를 놓친다. 목줄이 단단히 카메라를 붙잡아 떨어지지는 않았다.


“키에에에!”


고막에 칼날을 후비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성. 낮게 목을 끌던 평범한 객체와는 달랐다. 명백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좀비의 배꼽에 탯줄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제 손으로 잡아당길 때 마다 비명이 악기를 거칠게 연주하듯 음향이 솟구친다.


“살려 줘!”


그렇게 호소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것이 합창을 시작했다. 한 구의 시체에만 집중을 하고 있어서 몰랐던 모양이다. 여러 구의 시체가 자신의 탯줄을 끊지 못해 고막을 후비던 소리가 코로 터져버린 모양. 코피가 줄줄 흘렀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다행이다. 저걸 누가 연주 해 주겠어.”


무슨 말을 했더라? 코피를 손으로 받았다. 달리고 있었다. 무릎이 후들거려 시점이 훅 꺼진다. 넘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경찰서고 뭐고 운이 좋아서 친 도망을 이어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일요일 메인 매치. 오늘은 웍과 레빗 덕에 무산되었던 경기가 다시 벌어지는 날이었다. 각각 레빗에게 한번 씩 졌다고는 해도 그들이 강자라는 사실과 볼만한 경기를 만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 이긴 사람은 레빗과의 리벤지 메치에서 우선시드를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좀비 같은 어쭙잖은 것에 방해 당했다. 싱크는 가슴을 파 먹혀 초장에 죽어버렸고. 관객도 아비규환 승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오퍼레이터의 성화와 좀비가 시끄러워서 모조리쓸어 버리고 난 직후였다. 오퍼레이터가 로그아웃하고. 이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사를 하면서 도망쳤다.


“진짜 강하시네요! 다음번엔 분명히 그 레빗은 이길거예요! 그자식이 챔피언이라니 말도 안 되지요!”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는 사라졌다. 서까래가 부러졌다. 얌전히 두었으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지붕을 지탱했을 테지. 낙하하며 일으킨 희뿌연 먼지에 웍이 코앞을 내저으며 진저리를 쳤다.


“아이 씨 얌전히 좀 하지 그랬냐?”


웍이 눈을 부라렸다. 레이들이 담배의 첫 연기를 공중에 내 뱉으면서 돌아봤다. 오퍼레이터가 없는 탓에 한참이나 인벤토리를 뒤적여 짜증이 난 그였다.


“뭐카노? 지금 누가 잘못 했다는 기 말이 되나?”


“느작없는 새끼야 짐 사투리로 씨불이다간 맞아야?”


레이들이 급하게 빨아 이미 재가 길어진 담배를 털었다. 긴 연기에 혀가 딸려와 건조한 입술을 축였다.


“뭐 내가 화력이 좋으니까.”


“길거 짧은 거 대보다가 멈추니까 기세가 좋다?”


레이들이 시선을 손차양으로 제 시선을 표시했다. 고작 몇 센티 웍보다 높았다.


“긴 건 내가 더 긴 거 맞고.”


“내리 찍어서 모가지를 부러트리면 내가 더 길겠지?”


웍이 바싹 붙었다. 레이들이 리볼버를 뽑았다. 약실을 뻗어 마구 쥔 총알을 하나하나 빠르고 영활하게 밀어 넣었다. 손목을 털고 노리쇠를 올리기 까지 불과 몇초.


“내가 원래 돈 안 돼는 싸움은 안하거든? 근데 삥은 뜯어.”


“누가 토끼 사냥 나갈지도 정해야 되고.”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렸다. 레이들은 총을 든 손을 받힌 빈손에 총알을 잔뜩 쥐고. 윅은 평소보다 방어를 단단하게 굳혔다.


“오퍼 없으면 리볼버 밖에는 못 쓰는데 좀 봐줄까?”


“너야 말로? 지금 너 끽해야 장거한 밖에 더 돼?”


“장기예프겠지.”


“형. 무조건 마흔 넘지?”


웍이 먼저 달려들어 레이들이 박자를 맞추듯 발포했다. 경기도 아니니 탄속을 올려도 되련만. 투기장 제한의 속도로 밀어 붙였다. 웍이 풋워크로 피해내고 꺼지듯 자세를 낮추어 돌진해온다. 미간에 한발 맞아도 버틸 인간이었다.


레이들은 다리를 들었다. 타이밍을 맞춰 얻어맞기 직전까지 몸이 움직이는 것을 참았다. 들어 올린 다리로 공격이 아니라 얽히는 것에 집중한다.


웍이 체죽일 실어 다리에 처박혔다. 마운트에 깔리는 순간 끝장이다. 손을 강하게 쥔다. 레이들 본인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오른손에서 총성이 났다.


웍의 몸이 굳는 것을 느끼고 총구를 이마에 처박았다. 웍은 레빗과의 결전에서는 한번도 보여주지 못했던 서브미션을 선보인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잡히지를 않았다. 몸에 처박힌 발을 던져진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종아리와 발끝을 쥐고 발목을 어긋나게 만든다. 총성이 단단히 각오한 정신에 끼어든다. 긴장하는 움직임을 틀어막고서이마를 때리는 충격이 총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꺠달음이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바닥을 굴렀다.


웍은 일어나는 것에 앞서 적에게 레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들은 중심을 도외시하고는 총구의 방향을 수정했다.


서로의 몸통에 날카롭게 처박힌 충격은 시야를 앗았다. 모서리가 검어지고 상이 평소의 다섯 배는 늘었다. 그토록 격렬한 싸움이 가능하게 한다면 몸의 기능. 정신의 강건함 기술의 숙련. 목을 태우는 갈증. 적절한 것을 고르자면 망집.


그리고 그 망집에 혼을 불사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레이들의 총구가 웍의 머리통을 노리고 방아쇠는 당겨지기 직전. 윅의 흉수가 팔꿈치를 부수려 손끝이 움직이기 직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레이들이 손안에 든 총알을 내던졌다. 쇠가 튀는 소리를 들으며. 웍이 아마의 땀을 훔쳤다. 털어내는 손에 휴대폰이 잡혔다. 액정을 보고 숨결에 들썩이는 몸이 굳어버리듯이 정지했다.


“야, 사고 친 거 있어?”


“사장이야? 사고를 쳤대도 지금 전화가 왜 와.”


곁눈질 하던 시선을 멈추고 액정을 다시 바라봤다. 재촉하는 투의 벨을 무시하고 아직 주저 않은 레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젓는다. 손날을 목에 대고 툭툭 울대를 쳐댔다.


“그 잘난 실력으로 어디 한번 해보라고.”


그 목소리가 끊으려던 전화가 이어지며 들려왔다. 레이들이 인상을 확 찌푸리고 웍이 눈을 크게 떠가며 고개를 저었다.


“전활 받았으면 여보세요 하고 말을 해야지.”


언제나처럼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어딘가 나른한 듯이. 건드리면 불쾌한 흉을 흥미 본위로 가지고 노는 투.


“여보세요.”


“이번에는 내가 받은 거니까 괜찮아.”


“무슨 마술 같은 짓을······.”


웍이 상대가 휴대폰 본인이라도 되는 양 눈을 가늘게 떴다. 당연한 듯이 휴대폰은 웍의 눈치를 무시했다. 아니, 그게 정상이지 레이들의 머릿속을 읽은 듯이 이야기했다.


“일이다 같이 올라와.”


레이들이 파랑게 질렸다. 그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을 확인하는 틈도 기다리지 않고 베놈이 재촉하는 말을 떠들어댄다.


“오늘 경기료에 육백프로 상여금 붙여서.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의 돈을 주지. 세금은 내가 잘 처리해 줄게. 그걸로 떡 값 하라고. 이걸로 마음에 안 들면 꼰대 짓도 해 줄 수 있어.”


“진짜 누가 봐도 수상한 금액인데?”


레이들이 웍의 휴대폰에 달라붙었다. 휴대폰에서 파열음이 일었다. 마이크에 대고 숨을 분 모양이었다.


“자식아. 어른이 말을 하면 일단 네부터 하고. 느이 나라 말로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다고 했어. 나는 돈 주는 사람이 불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내 둘 다 하는 짓을 보면 속이 답답해 죽겠어. 다니는 회사가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 들어? 여기 뭐 장난으로 다니니?”


“알겠어요. 올라갈 테니까 좀 닥쳐 봐요.”


아마 자신의 말을 떠드느라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웍이 전화를 끊으려 했으나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건 쪽에서 받은 전화였다. 웍이 휴대폰을 부실까 말까 하는 사이에 레이들의 휴대폰이 같이 울었다.


베놈의 발신이었다. 그 또한 받기도 전에 스피커폰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나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나 때는 안 그랬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사장이었어. 난 순전히 너희들 거지같으라고 하는 말이야. 그러면 스스로 머리통을 굴리겠지. 너도 성인이고 나도 성인 아니냐? 나도 떠드는 거 거지같고 입 아파. 근데 내가 지금 너희 얼굴을 안보고 있잖아. 근데 내가 지금 그 얼굴이 보이는 거 같아. 대체 내가 왜 지금 귀한 시간 쪼개서 이 따위 표정을 떠올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한 번 대답을 해봐라. 내가 별풍선이라도 받냐? 시말서로 쓸래?”


“와 이 새끼 외국인 맞냐?”


애초에 듣지를 않는다 싶어 레이들이 커다랗게 말했다. 윅이 고개를 저으며 무너진 천장을 가리켰다. 저 입을 닥치게 만들려면 그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걸어 나가다가 웍이 중얼거렸다.


“케나다 아니면 미국이라던데. 무조건 한국인이야.”


레이들이 고개만 끄덕인다. 몇 분 되질 않는 거리가 무지막지하게 멀다. 문고리에 손을 올 릴 때는 어깨가 늘어지고 눈 밑에는 기미가 끼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 전화의 소리와 육성이 마구 뒤섞였다.


“노크 안 하냐? 아니다. 아니다. 잘 했어 들어와. 저기 앉아라. 정신 사납다. 물론 니들이 말이야. 전화로 불러놓고 노크는 개뿔 더럽게 대우받으려고 하네. 생각을 할 수는 있어.”


두 사람이 별수를 써도 끊을 수 없던 전화가 뚝 끊겼다. 집무용 의자에서 일어나며 한손에 담뱃갑과 라이터를 손에 쥐었다.


“니들이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나한테는 전미가 울 감동이야. 비교적 겁나게 진심이야. 근데 왜 허파가 뒤집어지냐?”


“술 마셨어요?”


레이들이 코를 찡그렸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안개처럼 피어오른 그 자극적인 냄새는 충분히 맡을 수 있었다. 일그러지는 얼굴은 술 먹고 꼽주는 중이냐고 항의하는 표정이었다. 웍이 큰 얼굴을 큰손으로 덮었다.


“취해 보여?”


담배 갑 밑동을 툭툭 치던 손이 멈춘다. 십분만 더하면 뒤집고 그만 둬야지. 생각하던 윅이 눈을 들었다. 베놈의 목소리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너희도 한 잔 할래?”


베놈이 소파위에서 눕듯이 팔을 뻗어 비싸 보이는 병을 하나든다. 레이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웍이 소리치는 기세만을 담아 거절했다.


“그만 두죠. 일이 있어서 부른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중얼대며 병을 이로 연다. 자신의 잔을 채우는 베놈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재킷의 단추를 채우고 매만지던 베놈의 모습을 떠올렸다. 셔츠의 소매를 끌러 걷어붙이고. 연신 밀어 올리던 얇은 안경테는 코끝에 걸쳤다. 흐트러진 모습은 다른 사람 같았다.


“바쁘니까 본론부터 간다.”


“바쁘기는 나발이. 뭔 일인교.”


“내가 씨 반말은 봐줘도 사투리는 알아듣기 힘드니까 쓰지 말랬지? 군대 안 나왔냐?”


웍의 바쁘다는 베놈의 말을 들먹여가면서 두 사람을 말렸다. 식은 자판기 커피처럼 술을 들이켜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 너희들은 안 나왔겠구나.”


“뭐 백 이십 두 살이에요?”


“의가사 상병전역이다. 전역증 보여줄까?”


물론 전역증을 보여줄 리는 없으나, 베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레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우리나라엔 상병 전역 없지?”


“알게 뭐냐. 우리아버지도 군대 안 갔다. 그보다. 할 말 없으면 경기료 받고 갑니다?”


베놈은 장난이 심했다며 앉으라는 듯이 손을 까딱인다.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알다시피 좀비가 나와서 우리 사업이 차질을 좀 겪었어. 이대로 면 위약금 야금야금 물어주다가 다 같이 길거리에서 서커스 하게 생겼다. 이 말이야.”


베놈이 어깨를 떨었다. 과장된 제스쳐 단정하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밀어올린 안경 너머에서 빛났다. 단추로 손을 가져가려다 재킷을 벗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으나, 어딘가 연기하는 티가 났다.


“좀비를 정리라도 하라고요? 그런 영화는 본적이 없는데?”


웍이 인상을 찌푸렸다. 선이 굵은 얼굴이 달마도를 닮았다. 베놈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했다. 낮고 숨이 잔뜩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절로 뒤로 빼게 된다.


“레빗이 먼저 가있어. 그 녀석을 도와주면 된다.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별 것 아닌 일에 돈을 그렇게 까지 주겠다고?”


“아니 레빗이 먼저 가 있다는 이야기는 뭔데요?”


레이들의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베놈은 얼굴을 구겨가면서 웃었다. 흥겨운 티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태연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섬찟했다.


“레빗이 너희를 이겼으니까. 사실 처음부터 그러라고 데려왔어. 지금부터 시간이 멈출 거야.”


베놈이 양손을 나란히 들었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달라붙듯이 공명했다. 길고긴 음을 내며 방의 구석 구석을 울렸다. 웍은 자신의 귀가 좀더 좋았다면 그 울림이 세계의 빈틈을 메우는 소리를 들었을 거리고 생각을 했다.


“무슨?”


고개를 저어 사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베놈이 손가락을 울린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조차 움직이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손을 올리자 고동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정작 그는 수상한 가면을 하나씩 양손에 들고 가까이 와보라는 소리를 했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하지? 그런 소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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