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무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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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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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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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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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열

DUMMY

김석을 앞세운 무경이 김자첨의 가옥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풍취를 한껏 살린 전통 가옥.

그 담장이 대궐을 연상시킬 만큼 길고 높았다.


무경이 앞서가는 김석의 머리를 검갑으로 툭 쳤다.


“집이 상당히 크구나.”

“크으.... 그것도 몰랐나? 이제 어쩔 셈이지?”

“어쩌긴, 이대로 들어가 담판 짓는 거지. 뭐해? 앞장서지 않고.”

“그래, 간다. 가.”


몇 개 남지 않은 어금니를 꽉 깨문 김석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곧 이 굴욕도 안녕이다. 그리고 이 소란을 피운 저 멍청한 놈은 지옥을 경험하리라.


대문을 통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 붐비던 손님들 덕에 열려있었고, 앞을 지키던 수위들도 김석의 명에 순순히 물러섰다. 김석은 제 멍든 얼굴과 엉거주춤한 걸음에 의문을 품는 무사들을 직접 진정시킨 채 당당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겉모습만 망가졌을 뿐 평소처럼 태연했다.


그도 생각이 있었던 것. 수위들로는 등 뒤의 무경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좀 더 안으로 끌어들여 완벽하게 제압해야한다.


그런 김석의 의도를 모르는지 무경은 유유자적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대문 안 펼쳐진 풍경에 넋이 나가 보였다.


김석의 눈에 경멸의 빛이 맺혔다.


'흥! 네깟 촌놈이 어디서 이런 비경을 보았을까?'


수백의 장정이 설 수 있는 널따란 마당과 그 위를 드리운 아름드리 노송.

돛단배를 띄워도 될 만큼 커다란 연못과 그 한가운데 놓인 호젓한 정자.

이것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을 사로잡는다.


어디 그것뿐이랴? 주위를 둘러싼 높다란 전각들은 또 어떤가!

화려한 연꽃 기와가 팔작지붕으로 우아한 곡선을 뽐내고, 그 아래 난 길은 사방으로 뻗으며 흡사 미로 같다.


당장 지나온 대문의 좌우, 행랑채의 방만 해도 7칸에 이른데다, 그 너머로 마주한 것도 모두 호화로운 전각이다. 당연히 칸칸마다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는 온돌과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마루가 구비됐다.


‘많이 구경해둬라. 곧 이곳이 범의 아가리로 변할 테니까.’


그렇게 잠시 무경을 돌아본 김석은 서둘러 나아갔다. 마침 마당을 쓸고 있는 돌쇠가 보였다.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지금 사랑채에서 손님을 맞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다. 하던 일 마저 해라.”


돌쇠를 돌려보내는 김석의 입가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랑채는 집안 가장 깊숙이 자리한 곳.

빈객들이 머무는 별채와 두 마장 간격으로 격해 있다.


하지만 둘은 마치 쌍둥이처럼 그 구조와 겉모습이 동일하다. 어느 게 사랑채이고 별채인지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은 결코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석은 왼편으로 향했다. 괜스레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기보다는 우선 빈객들을 이용해 무경부터 제압할 생각이다.


김석이 다시 앞장을 서고 무경이 그 뒤를 따랐다. 마당을 지나 중문을 열고 왼편으로 걷다, 곳간과 사당 등 여러 채의 건물을 지나쳤다. 그리고 꽤나 높은 문턱을 넘고 들어갔다.


드디어 별채. 마침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익숙한 중년의 얼굴이 내밀어졌다. 하얀 도포자락을 걸치고 길고 흰 수염을 휘날리는 그는 전형적인 도사의 모습이다.


“도련님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어르신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습니다. 헌데 손 어르신은 어디 가셨습니까?”

“중요한 손님이 와서 대감께 갔습니다.”

“네? 도대체 누가 왔기에.... 손 어르신까지 직접 갑니까? 혹시 아버님께 무슨 문제라도?”

“하하, 도련님도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조선 땅에 누가 대감께 위협이 되겠습니까? 단지 상대가 특이한 자다 보니 혹시 몰라 잠시 갔을 뿐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호방한 도사의 대답.


“어···! 그러면 안 되는데?”


허나 그에 못마땅한 듯 김석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 절정고수를 앞세워 무경에게 복수하겠다는 계획이 처음부터 꼬이고 있었다.


‘맨날 붙어 지내더니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우다니······.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절정고수의 위세라면 놈에게 먹히겠지.’


이내 마음을 정리한 김석이 뒤돌아서며 호통쳤다. 움츠렸던 여태와 달리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무경에게 손가락질 했다.


“네 이놈. 이분이 누군지 아느냐?”

“누군데?”

“바로 득양자 어르신이다. 너도 칼밥 먹고 살았으니 그 위명을 들어봤겠지?”


말을 내뱉는 그의 눈이 득의양양하게 빛났다.


그럴 수밖에······.

그만큼 언급된 이름이 대단했다.


득양자(得陽者) 이척.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16인의 절정고수로 상대의 오장육부를 익혀버리는 무시무시한 장법을 익혔다. 이 삼한 땅에서 양강무학에 가장 정통했다 알려진 이다.


그런 이가 자신을 지키고자 일어섰으니...

김석의 자신감이 함께 솟았다. 득양자의 사기(邪氣) 가득한 안광이 무경에게 향하자, 김석의 입꼬리도 하늘로 향한다.


‘진정한 고수의 위용을 맛봐봐라!’


김석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김석의 기대와 달리, 득양자의 시선을 마주한 무경은 그저 담담했다. 비록 득양자가 뿜어내는 기세가 날카롭기는하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절정인 거 같은데... 단주보다는 약하군.’


이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다. 그래서 여유를 찾은 그는 잠시 득양자를 향하던 시선을 다시 김석에게 돌렸다.


“어쩌라고?”

“뭐? 뭐! 어허, 이놈이! 정녕 겁을 상실했구나. 네 이놈! 득양자 어르신이 나선다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거다. 오장육부가 불타며 비명을 쏟아낼 거란 말이다. 그러니 지금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러면 이 어르신이 다시 생각해보마.”

“···.”

“허튼 생각 하지마라! 난 이미 네가 주모와 그 노인을 빼돌린 것을 알고 있다. 네놈이 지금 반항한다면 그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주막에 머물렀던 모든 연놈들의 사지를 잘라 개밥으로 줄 것이다.”


김석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본 무경은 꽤나 책임감 넘치며 혈기 가득한 인간이다. 이런 이는 힘으로 겁박해봤자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 절대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김석은 이런 자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수차례 무너뜨려본 경험도 있었다. 모두 부친 김자첨의 곁에서 보고 배운 바대로.


그 방법은 주변인들을 끌어들이는 것.

자신의 죽음에 초연한 이도 주위 사람을 끌어들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다른 이의 목숨 값, 그 무게에 짓눌려 제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그러니 김석은 확신했다.

지금 자신이 한 협박은 상대의 성정대로라면 결코 뿌리치지 못할 거다.


그러나 이런 김석의 가정은 처음부터 틀렸다.


“개소리하고 있네.”


무경은 상대의 으스스한 협박을 피식 웃음으로 날리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쇳소리를 내며 뽑힌 검신이 주위를 밝힌 횃불의 불빛에 반짝였다.


갑자기 치솟는 살기.

그에 화들짝 놀란 김석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경이 든 검에서 뿜어지는 서늘한 한기가 공기를 타고 피부에 닿았다.


뒤로 물러서는 김석의 눈이 당혹감과 공포로 물들었다. 궁지에 몰린 상대가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고 사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상대의 무모한 행동은 그의 예측 밖이었다.


“역시나 네놈은 일을 크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무경이 히죽 웃었다. 그 미소가 김석을 소름끼치게 했다.


“그, 그게 무슨!?”

“너희 두 부자의 목숨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어, 어어! 잠깐만! 나, 날 죽일 셈이냐? 아버지와 담판 짓기로 했잖아?”


말을 더듬은 김석이 땅을 박차고 도망쳤다.


하지만...

무경의 검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횡으로 그어지며 그대로 목을 갈랐다.


털썩-


붉은 핏줄기와 함께 머리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위로 무경의 차가운 목소리도 떨어졌다.


“네 가정은 모두 틀렸다. 네 말대로 되려면 저 자가 날 이길 만큼 강해야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거든. 하긴 뭐 애초부터 네놈은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무경은 원래부터 김석을 죽일 생각이었다. 주모를 구했지만 김석이 원한을 품은 이상 위험은 계속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석을 앞세워 김자첨을 찾아온 것. 그를 만난 후 두 부자 모두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생면부지인 김자첨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의 행패를 방조한 아비도 엄연히 책임이 있었다.


“뭐, 뭐냐?”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던 득양자는 지금 벌어진 일이 마치 맑은 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난데없는 소주인(少主人)의 죽음에 당황했다.


여유롭게 툇마루를 걷던 득양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뭐긴 뭐야? 쓰레기 하나 처리한 거지."

“이, 이 미친놈!”


극도로 흥분한 득양자가 무경을 향해 팔을 휘둘렀가. 장심에서 솟구친 뜨거운 바람이 무경의 복부를 노리고 쏘아졌다.


슈욱-

퍼억-


허나 무경이 검을 내지르자, 검에 중심이 꿰뚫려 작은 파편들로 흩날렸다.


득양자의 눈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내 장풍을 막다니······. 그냥 미친놈은 아니구나!”


탄성을 터트린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무경 주위를 돌았다. 들썩이는 어깨와 비틀대는 발걸음이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경이 이죽거렸다.


“보법이 특이하구나.”

“태껸도 모르는 것을 보니 삼한의 무사는 아니구나. 왜에서 왔느냐?”

“그건 아닌데... 그보다 정신 없으니 그만 돌아라. 늙은이가 추는 춤이 지랄 같아서 보기 힘들구나.”

“입이 걸구나. 어디 주리를 틀 때도 그런지 두고보자.”


눈에 살기를 품은 득양자가 양손으로 연거푸 장풍을 쏘아냈다. 그리고 득달같이 뒤따라 달려들며 다리를 휘둘렀다. 발끝에서 뭉친 반월형의 기가 칼날처럼 뻗어 나왔다.


위아래로 쏟아지는 공격들.

시차를 두고 빠르게 날아오는 그것들은 경험 많은 무사라도 쉽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경은 웃었다. 이미 이런 공격에 익숙했다. 산채에서 조 단주의 도움으로 고수와의 거리싸움을 질리도록 경험했다. 당시 단주가 보여준 기의 운영 중에는 지금 득양자가 보이는 각풍도 있었다.


물론 조 단주에게 연신 패했다. 빠른 몸놀림과 강맹한 도기에 맞대응하지 못해 손이 어지러워져 종래에는 이리저리 피하려고 고생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 또한 절정고수.

그냥 맞받아치면 된다.


무경이 팔을 휘두르자, 잿빛 검기가 연달아 쏘아졌다. 그것들이 득양자의 공격을 쳐내고 분쇄했다.


퍼벙- 펑- 펑-


순식간에 이뤄진 수차례 공방.

연이은 공격이 먹히지 않자 득양자가 뒤로 물러 나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법이구나.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봐라.”


상대의 실력을 확인한 그는 이제 두 발을 벌리고 섰다. 순식간에 그의 도포가 부풀며, 조금은 가벼웠던 그의 기운이 묵직하게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퍼러러럭-


휘날리는 도포자락 속에서 양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바닥 중심에서 붉은 빛이 솟구쳤다.


콰르르르-


공기를 태우며 날아드는 붉은 빛 덩어리.

그 안에 득양자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지금의 득양자를 만든 적열구(赤熱球)다.




무인은 피를 먹고 자라고, 저는 선작과 추천을 먹고 자랍니다.


작가의말

무인은 피를 먹고 자라고, 저는 추천과 선작으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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