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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아이-The child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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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스요한
그림/삽화
제네스 요한
작품등록일 :
2018.11.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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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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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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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서리에 박힌 햇살

DUMMY

“맞아, 녀석은 불안정하지. 하지만 불안정함이 완벽함을 만든다는 것도 알아두게.”

걱정스런 눈빛의 사람들에게, 남자가 한 말이었다.


숲은, 햇살이 대지와 입맞춤하기도 전에 깨어났다. 해님보다 일찍 일어난 땅다람쥐가, 이슬을 잔뜩 머금은 푹신한 낙엽을 휘저으며 간밤에 떨어진 도토리를 찾고 있었다. 초록 천둥 숲의 도토리는 종류도 다양하고, 풍성하게 열리는 것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덕분에 이 땅다람쥐도 나름 풍족하고 배부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위험도 존재했는데, 바로 무시무시한 천적들이었다. 땅다람쥐가 한가롭게 돌아다니다 독수리나 여우, 늑대 등 흉악한 포식자들에게 걸린다면 한 끼 식사가 될 뿐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먹거리를 볼 주머니 가득 우겨 넣으며, 땅다람쥐는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보금자리에 비축해 두었던 식량이 제법 바닥났기에, 보다 많은 열매를 챙겨가야만 했다. 평소라면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열중했던 나머지 햇빛이 키 큰 나무를 넘어,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다람쥐는 등짝이 뜨끈뜨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어느새 숲 속은 완연한 아침 풍경으로 변했고, 화들짝한 다람쥐는 몸을 번쩍 치켜세운 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준비를 마친 사냥꾼이 당장이라도 덮쳐올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위는 조용했고, 다람쥐는 눈치를 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휘이잉


바로 그 순간,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땅다람쥐는 섬뜩한 기분이 등줄기를 스치자, 본능적으로 모든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독수리의 예리한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꽤나 멀리 떨어진 상공이었으나, 독수리와 눈이 마주친 땅다람쥐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늘에서 엄습해오는 공포에 죽음을 직감했고, 흉악한 발톱이 자신을 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독수리는 흥미도 없다는 듯 무심한 눈길로 응시하더니 그대로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져버렸다. 땅다람쥐는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총총거리며 식량창고로 향했다. 볼 주머니에 있던 도토리들을 우수수 꺼낸 땅다람쥐는, 그 중 한 개를 집어든 뒤 앙 깨물었다. 딱! 하고 껍질이 깨지는 소리가 바깥으로 미세하게 퍼져 나갔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와 동시에 한 소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기억이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꿈의 여행을 마치고, 그녀는 세계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으음······.”


살랑살랑 속눈썹을 간질이는 바람을 느끼며, 소녀는 조금씩 의식을 회복시켜 나갔다. 아침 햇살로 짠 양탄자가 깔려있는 동굴 입구 쪽에선 새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고, 숲 속에서 흘러온 나무 냄새는 코끝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오랫동안 굳어있던 근육을 움직이는 것은 힘들었지만, 소녀는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부스럭 거리는 지푸라기 이불을 살짝 걷어내며 허리를 세운 소녀는 잠이 덜 깬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 깜빡 거리면서 안개 낀 것 마냥 희뿌연 시야가 맑게 개이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였고, 소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호기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 그녀는, 곧이어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가 지금껏 느꼈던 감촉은 포근하고 폭신한 느낌뿐이었는데, 실제 장소는 바위 동굴 내부였기 때문이었다. 대비되는 이질감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무엇을 덮고 있는지 관찰해 보았다. 솜씨 좋은 장인이 한땀한땀 엮어낸 이불은 추위를 막는데 안성맞춤 이었으며, 밑바닥에 여러 장 깔려 있는 지푸라기 요는, 이곳이 동굴이라는 사실 조차 잊게 해줄 정도의 아늑함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소중히 지켜준 친구들에게 마음속 감사 인사를 한 소녀는, 무언가 더 있을게 틀림없다 생각하고 다시금 두리번거렸다.


“······?”


바로 그때, 소녀는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헉, 하며 입술 위에 손을 포개었다. 조그맣고, 신비한 차림에, 특이한 가면을 쓰고 있는 꼬마가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것도 잠시, 소녀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최대한 조용하게 이부자리를 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가 완전히 일어섰는데도, 의자에 앉은 아이는 그저 간헐적으로 목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확실히 알 순 없었지만 소녀는 왠지 모를 직감에, 확인 차 팔을 위 아래로 흔들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마침내 그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


소녀는 고인 침을 꼴깍 삼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의 옷차림이나 장신구가 너무나 신기했기에,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괴상한 차림새임에도 그에게선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소녀의 작은 심장은 흥분으로 고동쳤으며, 화려한 가면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길로 가면을 쓰다듬어 그 질감을 맛보려는 순간, 아이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눈을 번쩍 떴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흐어어어억?”


“히이이익?”


우당탕탕!


두 사람은 간이 떨어지도록 놀라 펄쩍 뛰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는 뒤로 벌렁 넘어지며 등을 부딪쳤고, 소녀는 다급히 뒷걸음질을 치다 균형을 잃어 짚더미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애써 고통을 참으며 자세를 추스르던 두 명은, 어안이 벙벙한 면면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다니! 수십 년간 없던 일이었는데······. 오! 창조주님을 먼저 깨어나시게 한데다, 한심한 모습을······.’


‘나, 나 때문에 다친 걸까? 사과를 해야······.’


“죄, 죄송······.”


양측이 ‘죄송합니다.’를 말하려 했지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하는 바람에 무안해진 그들은 합! 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이후로도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니, 동굴은 자연스레 어색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어, 먼저······.’


더 이상의 무례를 저지를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세르몬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의 장을 열어젖혔다. 그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히······. 주, 주무······셨습니까?”


“······?”


난데없이 문안인사를 받은 소녀는 수많은 의구심이 한꺼번에 솟아오른 탓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모습으로 보건대, 그가 앳될 것이라 추측함과는 달리 목소리에서는 연륜이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꼭 어린 소년의 몸 안에 현자가 들어가 있는 듯, 기묘한 울림이었다. 또한 상대가 왜 저토록 정중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가 여기까지 미친 순간, 소녀는 갑작스런 두통을 느끼고 이마를 만졌다. 알쏭달쏭하게도, 그녀는 그 무엇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누구인지, 이 동굴은 뭐하는 곳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저 사람은 무엇인지 등······. 알고 싶은 것이 한가득 이었다.


“자, 잘······. 잤어요. 그런데······. 누구시죠? 여긴 어디고, 전 왜 이곳에 오게 되었나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요. 무언가 떠올리려 하면······. 머리가 아파와요.”


“무, 무리 하지 아, 않으셔도 되, 됩니다. 제, 제가 모두 차근차근 다, 답해 드릴 테니까요.”


호언장담하는 것과는 달리, 소녀는 그가 썩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말을 더듬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줄 만한 답변을 듣고, 죄다 이해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소녀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았다.


“······저기, 원래 그렇게 말을 약간 더듬으시나요?”


“그, 그, 그, 그, 그건······아, 아닙니다. 하, 항상! 이렇지는 아, 않습니다. 제, 제대로! 말 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정말, 입니다!”


그는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침을 몇 번이나 꿀떡꿀떡 삼키며 연거푸 다짐을 해왔다. 창조주 노즈라우스의 분신, ‘메리엘’과 대면한다는 것은 예측했던 것 보다 훨씬 힘겹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머릿속에 셀 수없는 생각과 할 말이 넘쳐났지만, 너무 앞서간 나머지 그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제, 이름은, 세르몬, 입니다. 이곳, 은, 제, 동굴, 이고요. 말, 하자면, 깁니, 다만······. 일, 단 당신의, 성함은, 메리엘, 이십니다.”


말 더듬는 것은 나아졌지만, 반대로 속도가 느려져 버렸다. 그래도 세르몬이 나름 애쓴 덕에 소녀, 아니 메리엘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세르몬······. 그리고 제 서, 아니 이름이, 메리엘······이라고요?”


“맞! 습니다. 또 한, 가지 더 말해두, 자면······. 하아······. 저, 세르몬, 과 메리엘, 님 모두 중재자, 로서의 위치에······. 있! 습니다. 저, 전 베룬 조, 족의 일원이고, 메리, 리엘님은 요, 용족의 아이시, 시고요.”


거짓을 고할 때가 가까워지자 세르몬의 심신은 극도로 불안해졌고, 메리엘을 ‘신룡의 분신’이 아닌 ‘용족의 아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에선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르델어’를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왜······. 아하! 메리엘님이 첫마디로 가르델어를 쓰셨던 까닭이로구나!’


메리엘이 최초로 내뱉은 ‘죄송’이라는 낱말은, 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가르델어였다. 이는 ‘용의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역사가 깊고,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다만 세르몬은 가르델어를 혀로 굴리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그에 따른 억양이나 단어의 선택 등······.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숲 바깥과의 교류가 없다시피 한 그는 강산이 무수히 바뀔 동안, ‘세크어’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최악의 예상과는 달리, 언어를 구사 하신단 것은 고무적인 일이야. 허나 내 고질적 말더듬병과 녹슨 가르델어 실력은······. 심히 부끄럽도다. 그러고 보니······. 메리엘님께서는 이 불초자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고 계신건지······?’


먼지가 덕지덕지 낀 언어를 끄집어낸 세르몬으로썬,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그, 제, 제가 하, 하는 말뜻을 이해하실 수. 수 이, 있으십니까?”


심히 불안한 그의 심신과는 달리, 메리엘은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놀란 것 같았다.


“네? 네······. 물론 세르몬님의 말은 집중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용족, 이라고요? 그치만 이런 모습인데······.”


메리엘은 자신이 용족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팔뚝이나 다리, 배를 만져보거나, 손가락과 발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혼란스러워 했다.


이런 모습을 직시한 세르몬은 재빨리 정황을 파악, 정리했다. 메리엘은 가르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중재자, 용족 등에 대한 질문이 없는 걸로 보아, 해당분야의 지식도 갖춘 듯 보였다. 그 개념이 무엇인지 몰랐다면, 자신의 신체가 왜 용족의 몸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메리엘의 눈꺼풀이 열렸을 때, 머릿속이 백짓장일수도 있다는 예견과는 꽤 다른 결과였다. 종합하자면, 비록 메리엘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며 마력 역시 미미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차후에 충분한 영양 섭취와 더불어 성심껏 지식을 전수해 준다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세르몬은 메리엘의 답답함이 스물스물 새어나오는 걸 보고, 그녀를 위한 답변을 준비했다.


“지그, 금 메리엘님은 완전히 회, 회복되지 아, 않으신 탓에 피, 필멸자, 가르델 조, 종족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시, 시간이 지나, 남에 따라, 마력이 회복된다면 추, 추, 충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실 수, 수 이, 있으실 겁니다.”


실제로 다른 중재자들은 큰 상처를 입거나 극심한 마력소모가 일어났을 때, 필멸자의 모습으로 요양을 하곤 했다. 그러나 메리엘의 경우는 좀 달랐다. 휴식 이후에 마력량이 늘어나거나, ‘형태변환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게 될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세르몬은 그 앞길에 선의의 거짓이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가능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길을 트길 원했다.


미리 마음을 가다듬었다고는 하지만 세르몬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조금씩, 조금씩 불어날 때마다 죄의 무게감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흐를 듯한 눈물을 애써 억누르고, 이것은 모두 메리엘을 위한 것이라 여기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편, 메리엘에겐 커다란 의문이 샘솟았다. 베룬족과 용족은 같은 중재자 집단에 속해있으면서도 관계가 나쁜 걸로 유명했다. 그런데 왜 세르몬은 다자란 용족도 아닌, 어린 아이에 불과한 자신을 깍듯이 대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그의 태도는 메리엘에게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매우 소심했다.


“······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그토록 예의를 차리시는 건가요? 제가 정말 용족의 아이라면, 사이가 좋지 않은 베룬족인 세르몬님이 그러실 필욘 없지 않을까요? 이유도 마땅치 않거니와 그 눈빛은······. 마치, 절······두려워하고 계신 것처럼 보여요.”


“······!”


예리한 메리엘의 지적에 세르몬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녀가 베룬족과 용족간의 과거사까지 꿰뚫고 있을 거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가 당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심, 세르몬은 메리엘이 이 모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룰 수 있다면 끝까지 미루고 싶은 사항이었다. 창조주의 분신인 메리엘과 대등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세르몬에게 있어 용납할 수 없는 무례, 그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간다면 신뢰에 금이 갈 것이고, 후에 큰 장애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오오! 이 순간만큼은, 오지 않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거늘······. 아무리 선생 일을 맡았다곤 해도 감히 메리엘님과? 아아! 창조주시여, 저를 용서해주소서······.’


세르몬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최대한 엄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두, 두, 두려워 하, 하긴! 무, 무얼 두려워 하, 한단 마, 말이냐? 나, 난 너, 널 두, 두려워 하, 한 적이 없다! 초, 초면이라 아주 조그, 금! 태, 태도를 달리 하, 한 것뿌, 뿐이다! 아, 알겠느, 느냐?”


갑자기 세르몬이 호통을 치자, 메리엘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숨기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뿜어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기 위해서였다. 세르몬이 분위기를 잡는답시고 낸 큰소리는, 떠듬거림과 합쳐져 메리엘에게 긴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풀어버렸다. 덕택에 그녀는 세르몬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려 갈 수 있게 되었다.


“네! 맞아요, 세르몬님은 절 두려워하신 적이 없어요! 제 착각이었나 봐요!”


“······.”


미소를 함빡 머금고 이해심을 베푸는 메리엘의 모습에, 세르몬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 제대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쉭쉭 열기 까지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르몬은 금세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이성을 순환시키는데 성공했다. 혼잡한 심신을 다스리는 법을 수없이 연구하고, 수행해 온 그에게 이 정도는 별일 아니었다.


“그, 그래! 다, 다음부턴 주, 주의하도록 해, 해라! 뭐, 또 구, 궁금한 것들은 어, 없느냐?”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질문은 없냐는 천연덕스런 세르몬의 물음에 메리엘은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용족인 자신이 베룬족의 보금자리에서 자고 있었으며, 부모님은 어디 계신지, 왜 이전의 일상들이 떠오르지 않는지 등······.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다. 그런 메리엘에게서, 세르몬은 서글픔과 아련함을 읽어내었다.


‘메말라 갈라진 겨울 땅을 보는 듯 하도다······. 물어보실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셀 수 없이 많으실 테지. 거짓을 고해야만 하는 절 용서해주시길······. 이 모든 것은 메리엘님을 위한 반석을 다지는, 고통스럽고도 험난한 과정입니다.’


태양이 푸른 장막을 열어 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대였고, 세르몬의 열정은 메리엘의 모든 호기심을 충분히 포용하고도 남았다. 그는 메리엘의 입술이 움직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조금 지루했었을 지도 모를 기다림의 틈새조차, 지금의 세르몬에겐 달콤한 꿀을 맛보는 것 같은 기쁨이었다. 그는 그동안 간절히 바라왔었다.


‘한낱 죄인의 앞에, 돌아온 노즈라우스님이 생명의 숨을 내쉬고 계십니다. 내 일생에 이 날이 올 줄을 상상이나 했는지요? 바라옵건대, 이것이 신기루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소서. 미천한 소인은 늘 꿈꿔왔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헛된 유혹에 빠진 죄를 남김없이 고백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그에 합당한 처벌과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나날이 도래하기를······. 창조주께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난 시절의 상처와 흉터가 아물고 있는 듯 합니다······.’


세르몬은 오래전에 얼어붙은, 자신의 핏줄을 녹이는 기도를 계속 올렸다.


‘아아! 당장이라도 제 타락과 방황에 의한 모든 대죄를 창조주께 자백한 뒤 티끌로써 스러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허나 전 끝까지 감내하겠습니다. 메리엘님이 모든 껍질을 벗어 던지시고, 진정한 자아로 거듭나실 때 까지······. 세계 모든 만물이 창조주의 부활을 칭송할 시기까지······. 이 불충 하였던 종은 참아 보이겠습니다. 견뎌내겠습니다. 지켜내겠습니다. 간청하오니, 부디 그 순간까지 제 탁한 영혼을 붙잡아 둘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세르몬의 소원이 세계에 흩날리고, 마침내 메리엘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녹림석 빛깔 눈동자는 무언가에 겁먹은 듯이 흔들렸고, 동시에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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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2화- 썩은 낙엽과 잿불 18.11.05 17 0 20쪽
2 01화- 메마른 숲속 은자 18.11.03 26 0 19쪽
1 서장- 신을 내버린 아이 18.11.02 71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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