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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아이-The child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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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스요한
그림/삽화
제네스 요한
작품등록일 :
2018.11.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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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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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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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화- 가시 박힌 독수리

DUMMY

“그녀가 우리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수많은 사체가 널브러진 들판에서, 남자가 한 말이었다.


옛적부터 세크족을 수호한 중재자, 베룬족은 방대한 지식, 문화를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정령을 부르는 법, 동물의 힘을 빌리는 법, 자연의 흐름을 느끼는 법, 화려한 색깔의 염료를 추출하는 법, 멋진 가면을 만드는 법, 쉽고도 신나는 춤을 추는 법, 식물을 약재로 이용하는 법등은 성질이 거친 세크족에게 삶의 평화와 조화, 유희를 알려주었다. 실제로 베룬족과 세크족이 소통을 시작한 이래로 소위 야생적이라 할 수 있었던 그들의 생활 방식은 보다 부드럽게 바뀌었다.


비록 이후에 벌어진 끔찍한 전쟁 탓에 원점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신세대 베룬들의 노력으로 세크족들은 내면 깊숙이 숨겨진 따뜻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양측을 보다 원활히 이어준 존재가 주술 사냥꾼들이다. 주술 사냥꾼은 자연, 동물의 힘을 사용하는 재능이 풍부한 세크족만이 될 수 있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이들은 베룬을 스승으로 삼고 지혜를 빌려 각 마을의 치유사가 되거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주술 사냥꾼 중에서도 필멸자가 능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잠재력을 보이는 자들이 있었는데, 베룬들은 그들을 ‘수호 사냥꾼’이라 칭했다. 보다 상위의 능력을 가지며, 종족을 초월한 활약을 본 베룬들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수호 사냥꾼들은 불멸자와 비등한 힘을 가지게 되었기에, 더 이상 필멸자들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토론 끝에 베룬들은 사냥꾼들을 거두어 충실한 심복으로 삼았다. 베룬들의 역할 중 하나인, 숲을 보호하고 침입자들을 쫓아내는 역할을 그들과 분담한 것이다. 이는 수호 사냥꾼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으며, 단 한명도 빠짐없이 신성한 임무를 수행했다.


‘나르반 레디르’, 그 역시 수호 사냥꾼으로써 세르몬이 관리하는 숲 구역을 정찰하며 자연적이지 않은 모든 재해로부터 동식물들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그는 가끔 세르몬이 아주 바쁠 때 요청한 일을 맡아주기도 했는데, 주로 마을에 편지를 전달하고 겸사겸사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오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독수리로 변하여 숲속을 헤엄치던 나르반은 자신의 이름이 울려 퍼질 때,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옅은 기쁨이 밀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세르몬에게 봉사할 기회가 늘어날수록, 나르반은 스스로에게 부족한 뭔가가 채워지는 고양감을 얻었다. 하지만 내면에 잠들어 있던 증오라는 괴물도 뒤척였는데, 얼마 전 동굴 안에서 새어나오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는 왜 세르몬이 ‘가르델 종족’을 보금자리로 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질문을 건네리라 생각했고 지금이 그 적기라 믿었다.


세르몬이 나르반을 호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몰아쳐 오더니 비범한 독수리 한 마리가 휘날리는 나뭇잎과 함께 등장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다 멈춘 탓에, 그 반동으로 세르몬의 옷은 물론 주변의 수풀까지 덩달아 춤을 췄다. 독수리는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영롱한 푸른빛과 함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고, 땅 위에 안착했을 땐 건장한 남성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선 미처 떨어지지 못한 깃털들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수호 사냥꾼 나르반 레디르, 중재자님의 부름에 답합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나르반은 무시무시하고도 위엄 있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 육체, 독수리의 꼬리를 연상케 하는 짙은 푸른색의 꽁지머리, 초록색과 붉은 염료로 그린 얼굴의 문양, 새들의 깃털로 장식된 의복,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대한 도끼와 여러 가지 도구들은 그가 노련한 사냥꾼임을 알게 해주었다.


“일어나라.”


세르몬의 말에 나르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두 명의 신장 차이는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다. 세르몬의 머리가 나르반의 허리에 오는 형상은 마치 어른과 아이를 나란히 세워놓은 광경이었다.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중재자시여.”


나르반은 자신을 부른 연유를 물었고, 세르몬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크흠, 신선한 고기가 필요하다. 숲 속에 가서 살찐 동물을 사냥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일반적이지 않은 부탁에 나르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세르몬은 음식물을 따로 섭취하지 않았고, 유희로써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얼마 전 들어온 가르델 계집 때문입니까?”


“······.”


세르몬은 그에게서 이끌려나온 분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록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니었지만, 나르반의 눈동자에서 뻗치는 불꽃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이글거렸다.


‘······그래, 나도 가르델 종족에 대한 세크 종족의 원한을 알고 있다. 허나 이리 깊은 흉터를 남겼을 줄이야······. 안타깝구나.’


그간 나르반은 세르몬의 명령이라면 두 말 않고 따르던 터였다. 그런 그 조차 이정도의 적대감을 표 할 정도라면, 평범한 세크족들이 메리엘과 마주쳤을 때의 반응을 세르몬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그녀는 내 귀중한 손님이시다. 다시는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중재자시여.”


단호한 목소리로, 메리엘이 ‘손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나르반은 그것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증오가 이정도로 사그라질리 없다는 걸 세르몬은 잘 알고 있었다.


‘세크족과 가르델족의 오랜 악연은 말 한 마디로 풀릴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난 믿고 있노라, 메리엘님이라면 분명 이 골을 메워주실 수 있으리라고······.’


“그럼 동물을 잡아 준비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난 잠시 숲에 다녀와야겠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중재자시여.”


말을 끝맺자마자, 나르반은 공중에 펄쩍 뛰어오르며 다시금 독수리의 형상으로 변했고 돌풍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공중엔 몇 개의 깃털만이 바람과 뒤엉켜 있었는데 그것들은 주인의 복잡한 심경마냥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슬슬, 고기에 곁들일 것들을 찾으러 가봐야겠군.’


세르몬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의 동굴 밖 나들이였지만 그 걸음을 딛는 기분은 이전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초록 천둥 숲의 맛있는 음식들을 신성하고도 존귀한 손님께 대접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작은 흥분으로 간질였다.


‘나르반이 어떤 고기를 구해올지는 모르나, 이 숲에서만 자생하는 향초와 열매는 그 어떤 육류와 곁들여도 맛이 기가 막히지. 그늘 갈풀이 좋을까? 늙은 모자 버섯도 좋다. 하늘나무 열매도 빼놓을 수는 없고, 주황 알 꽃의 뿌리도 괜찮을 텐데······. 아니면, 흠······.’


숲의 모든 동식물들을 줄줄이 꿸 정도로 세르몬의 학식은 뛰어났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초록 천둥 숲의 생태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면, 꼬박 일 년을 밤낮 없이 강의를 들어도 모자랄 수준일 것이다. 불행히도, 오히려 그것이 세르몬의 발목을 잡았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메리엘이 좋아할 만한 먹거릴 선별하는데 애를 먹는 중이었다. 결국 세르몬은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만인이 선호하는 달콤함을 우선시하고, 육류의 누린내와 맛을 적절히 보완해줄 식물을 선정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 덕분에, 세르몬은 두 다리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은 채로 숲 속을 거닐 수 있었다. 실로 풍부한 정기를 취하면서도 그는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점찍어 둔 식물을 찾고 있었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세르몬과 마주치는 동물들이 많아졌는데, 곰이나 사슴, 토끼, 다람쥐, 새들이 주류였다. 중재자를 본 그들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고, 세르몬 역시 몸을 낮추며 답해주었다.


‘여기 있었군!’


마침내 주황 알 꽃들을 발견한 세르몬은, 주변의 다른 수풀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접근했다. 그는 메리엘이 먹을 양을 계산 한 뒤, 손가락을 움직여 꽃 3개를 깨끗하게 캐 올렸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식물이 절로 떠오르는 모습은 신비 그 자체였다. 세르몬은 꽃들을 조심스럽게 잡은 뒤 흙을 살살 털어내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알뿌리를 분리했다. 상큼하고도 달짝지근한 즙을 내는 뿌리 부분은, 직접 먹거나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만족한 세르몬은 걸어오며 흡수한 정기를 꽃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다시 땅에 심어주었다. 비록 알뿌리를 잃어버렸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다면 건강하게 회복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가방을 열어 수확물을 조심스럽게 담아내었다.


‘이제 하늘나무 열매를 따러 가봐야겠군. 지금 이 시기가 가장 잘 익었을 때지······.’


하늘나무 열매는 초록 천둥 숲과 푸른 천둥 숲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산품이었다. 구름을 연상케 하는 모양에 달콤한 과즙이 있는 과육은 육식성인 세크족은 먹을 수 없었지만, 다른 종족에겐 큰 인기가 있었다. 그 까닭에 과실을 맛본 이들이 종자나 묘목을 수집하여 이곳저곳에 옮겨 심어봤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는 나지 않았다. 하늘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은 두 숲의 양지바른 곳뿐이었다.


활기찬 풍경을 즐기다보니, 세르몬은 어느새 하늘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파릇파릇한 기운을 만끽했다.


‘가끔 이렇게 산책하면서 원기를 보충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이 웅장함을, 홀로 소유하는 것이 사치스럽도다. 메리엘님께도 꼭 소개해드리리······.’


숲 속 공터의 열린 하늘에서, 풍부한 햇살을 받는 하늘나무들은 언제보아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 울창했다. 세르몬은 나무 밑으로 다가가 열매가 잘 익었는지 살펴보았는데, 군청색으로 변한 껍질은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세르몬이 검지로 빙글빙글 허공의 바람을 젓자, 미리 펼치고 있던 손바닥 위로 열매 하나가 똑 떨어졌다.


세르몬은, 이번엔 열매를 겨누고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예리한 칼이 지나듯 과피가 원형으로 돌돌 벗겨졌고, 곧이어 단물을 머금은 흰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달한 향과, 과육에 줄줄 흐르는 즙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세르몬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맛을 볼 겸,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린 뒤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실로 훌륭하도다.’


세르몬의 입 안은 풍부한 식감과 행복한 점성으로 채워졌고, 동시에 청량한 냄새도 그의 콧속을 간질여주었다.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는 열매는,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고 이내 포만감과 아늑함을 불러일으켰다.


‘좋아, 아주 잘 익었어. 이 정도면 메리엘님도 좋아하실 게 틀림없도다. 그분이 처음 맛보실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는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세르몬은 바람을 불러와 다 익은 것들만 가지에서 떨어지도록 했다. 이윽고 과실들이 하나둘 손을 놓자, 그는 그것들을 허공에 띄운 채 차례로 가방에 담아냈다. 그렇게 5개를 수확한 세르몬은 자신의 열매를 마저 먹고, 그 씨앗을 고이 심어준 다음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나르반은 멧돼지를 사냥하여 동굴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사냥감을 발톱으로 꽉 움켜쥔 그는, 하늘을 날면서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가르델 ‘손님’때문에 부리를 악 물었다.


‘가르델이 먹을 거라면 이 녀석으로도 충분하겠지.’


전통적으로 세크족이 귀빈을 대접할 때 내오는 고기는 멧돼지가 아닌 사슴이었다. 이 숲의 사슴 고기 맛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하고 감미로운데 반해, 멧돼지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나르반의 행동은, 일종의 반항심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세르몬이 정확히 ‘어떤’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은 이유도 컸지만, 손님이 가르델만 아니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사슴을 사냥해왔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가 가진 혐오감은 컸다.


‘왜 그 가르델은, 하필 내가 섬기는 세르몬님께 온 것일까? 왜 평화롭던 내 마음을, 이토록 뒤흔드는 거지? 왜! 내가 가르델이 먹을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인가? ······중재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르몬님과 그 손님의 관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르반은 몰아치는 번뇌에 울부짖으며 세차게 날개를 움직였다. 그 덕분인지 평소보다 빨리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


호흡을 다스리며, 그는 멧돼지를 손질할 준비를 했다. 동굴 옆쪽엔 사냥감을 다루는 여러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르반이 매일 깨끗하게 닦아놓았기에 당장 써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멧돼지의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 작업 선반 위로 가져갔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멧돼지가 자리 잡자, 나르반은 부위별로 해체할 준비를 했다. 예리한 손칼을 꺼낸 그는, 가장 먼저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하의 혈관을 건드리지 않으며 깔끔하게 분리하는 솜씨는 놀라울 정도였다. 나르반은 깨끗하게 벗겨낸 가죽을 한켠에 치워둔 뒤에, 아래쪽에 나무통을 놓아두고 멧돼지의 멱을 갈라내어 혈액을 모았다. 상당한 힘을 요하는 일이었기에 그의 몸에는 어느새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가죽, 목에 이어 배 쪽에 칼을 댈 무렵에 그는 어떤 기척을 감지하고, 손을 멈추었다.


‘흠······.’


살짝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아본 나르반은,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존재가 ‘손님’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흥.”


가소로운 듯, 나르반은 코웃음을 친 뒤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내장, 뼈, 근육이 잘리는 기괴한 소음이 시끄러이 퍼지고 이리저리 피가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눈앞의 멧돼지에게 자신의 모든 분노를 차갑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때 메리엘은 입과 배를 꼬옥 감싼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동굴 안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세르몬의 책을 다 읽었는데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심심한 나머지 바람도 쐴 겸 바깥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의 경고를 까맣게 잊을 만큼, ‘동굴 밖 숲은 어떤 풍경일까?’라는 호기심은 컸다. 메리엘이 빠르게 완독한 ‘숲 이야기’는 초록 천둥 숲의 옛 전설과 민담, 일화를 재미있게 풀어쓴 내용이었기에, 그녀의 등을 떠미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건 상쾌한 숲 내음이 아닌, 비릿한 피 냄새였다. 자극적 향취를 따라간 시선의 끝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갓 잡은 동물을 ‘활용’하는 과정은 메리엘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우욱······.”


그 장면이 또 스쳐가자 메리엘은 헛구역질을 했고, 몰려오는 혐오감은 서서히 슬픔으로 바뀌어 갔다. 그녀도 죽은 멧돼지가 자신을 위한 음식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멧돼지는 메리엘의 배고픔만 아니었다면······. 분명 숲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저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자책하며 지푸라기 위에 몸을 뉘인 메리엘은 밀려오는 죄책감에 눈물을 똑똑 흘렸다. 그 감정이 창조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터벅 터벅


볼일을 마친 세르몬이 도착했을 때, 나르반은 모든 작업을 끝낸 상태였다. 그는 여러 목조 그릇에 고기를 보기 좋게 나눴고, 가죽은 차후의 무두질을 위해 매만져두었다. 그밖에 쓸데없는 부속들을 잘 묻어두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르몬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나르반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중재자시여.”


“멧돼지를 잡아주었구나. 고생이 많았다.”


사슴을 안 잡은 행위에 대해 세르몬은 굳이 지적하지 말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리 나르반이 충실하다지만, 그 충성심이 메리엘에게까지 전해지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세크족이라면, 가르델에게 목숨을 빚진 경우라야 대접을 할까 말까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그래······. 이런 부탁에 항변도 없이, 무엇이라도 사냥해온 것이 어디인가. 나르반으로썬, 메리엘님을 귀빈으로 대접한다는 것부터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족한 베룬을 잘 따라와 주다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수호 사냥꾼 나르반도 이럴 지경인데 앞으로 메리엘이 평범한 세크족과 마주친다면, 불미스러운 일이 없으리라곤 세르몬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순박하고 선한 이들이 많다. 허나 그 친절이 온전히 힘을 못 쓰는 곳이 바로 세크-가르델 종족간 갈등이지······.’


역사에 새겨진 전쟁의 고통과 피, 복수는 몇 세기를 넘어 현 세대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두루 행사하고 있었다. 각자가 타 종족의 단점만을 부각시키고 장점은 보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가 꿰어져왔다. 그것을 단칼에 끊고자 한 가르델의 마지막 황제는, 새 시대를 여는 거대한 파도에 휘말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메리엘님이 취하신 외형이 가장 아끼셨던 필멸자 종족, 가르델인 것은 우연이 아닐 테지. 허나······. 그 종족과 분쟁이 있는 세크족의 땅에 머무르시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인 것인가?’


세르몬은 우연의 일치라기엔 기가 막힌 현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이 모든 조화가 감히 가늠 못할, 창조주의 깊은 뜻일지도 모른다는 고찰도 스쳐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바깥에 메리엘의 채취가 묻어있음에 세르몬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는 부디 그녀가 봐선 안 될 것을 목격하지 않았길 바랐지만, 혹시나 하던 희망은 무너져 내렸다.


“나르반! 설마, 손님께서 바깥으로 나오셨나?”


“네, 나오셨습니다. 일하던 저를······살펴보더니, 다시 들어가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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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5화- 푸르른 그 목소리 18.11.26 12 0 19쪽
5 04화- 불신의 첫 희생양 18.11.19 11 0 20쪽
4 03화- 서리에 박힌 햇살 18.11.10 19 0 19쪽
3 02화- 썩은 낙엽과 잿불 18.11.05 17 0 20쪽
2 01화- 메마른 숲속 은자 18.11.03 26 0 19쪽
1 서장- 신을 내버린 아이 18.11.02 74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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