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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아이-The child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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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스요한
그림/삽화
제네스 요한
작품등록일 :
2018.11.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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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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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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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말문을 연 나들이

DUMMY

“그 분께선 대의를 위해 많은 걸 포기하셨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진 못하셨지.”

숨겨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소녀에게, 남자가 한 말이었다.


고이 채집해온 과채는 곁들일 용도였기에, 애초에 주된 식사로 이용하긴 무리였다. 하물며, 식욕이 왕성한 어린아이의 배를 채우기에 모자란 양임은 더더욱 분명했다. 그래서 세르몬은 준비한 먹거리들이 몽땅 떨어졌을 때, 슬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메리엘이 허겁지겁, 정신없이 먹었더라면 일시적인 포만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새 음식을 볼 때마다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는지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톡톡 건드려보기도 하고, 종래에는 세르몬에게 이름과 특징 등을 질문해왔다. 결국 그는 더듬거리는 말씨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게 되었다. 자연히 식사는 길어질 대로 길어졌고, 꼭꼭 씹은 양분은 뱃속에 머무르며 허기를 덜어낼 시간을 벌지 못했다.


‘······만족스레 배를 채울 순 없으셨을 거야. 메리엘님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필요 이상의 이야길 해버렸어······.’


간단히 소개만 했어도 될 것을, ‘가르침’에 도취된 탓에 그의 설명은 약간 장황해져 버렸다. 세르몬은 걱정을 품은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식사를 끝낸 메리엘의 표정을 살짝 살폈다. 그러나 그의 불안과는 반대로, 그녀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리엘은 세르몬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는데, 수많은 풍파를 겪은 그의 판단으로는 내면에 동요를 품은 거짓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내 가슴마저 따스히 녹이는 저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배부름, 이라는 원초적인 종류는 아니다. 혹여 지혜의 탑을 쌓아올리는 기쁨을 깨우치신 것일까? 하지만 너무 이른 시기가 아닐지······.’


아무리 중재자 일족이라도 성장기에는 이성보단 본능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활동적이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성인 수준의 인내심과 학구열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도 메리엘은 스스로 지식을 갈구하였고, 또래아이들에겐 지루했을 강의도 그대로 흡수해주었다.


‘하아······. 메리엘님의 비범한 모습을 끝없이 목격함에도, 내 얕은 배움의 잣대를 계속 들이대도 되는 것일까?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구나.’


세르몬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크센에 ‘어린 신룡’이라는 존재가 최초로 등장 한 바, 그가 활용 가능한 경험이 극도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그 위엄, 능력에 있어서 신룡과 용족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몬은 그나마 통달한 분야인 ‘용’에 대한 배경지식을 무의식적으로 끌어 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후에 소통의 어려움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을 공유하는 게 좋겠어.’


실제로 세르몬 외의 중재자들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을 진리마냥 굳혀왔다. 창조주 노즈라우스와 용족의 밀접한 관계가 그런 오해를 불러올 법 했지만, 관찰할 대상 자체가 부재할 뿐더러 감히 ‘신룡의 생태 연구’분야에 도전할 위인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쌓은 탑이 무위해진 순간이로다. 세계가 품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아직도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야 할 것은 차고 넘치는구나. 용족에 대한 지식을 일부 반영하되, 메리엘님께 편견의 껍데기를 씌우지는 말아야겠어.’


세르몬이 한참동안 사색에 잠겨있자 참다못한 메리엘이 한 마디 건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아, 아무, 거, 것도, 아, 아니다. 크, 크흠. 그, 그나저나 아, 안타까, 깝게도 내가 주, 준비한 먹을 것은 이, 이제 모두 떠, 떨어졌구나. 혹시 아직 배, 배가 고프, 느냐?”


허기를 느끼냐는 물음에 메리엘은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표정이 지어보였다. 그는 내심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솔직히 말씀하실까? 아니면, 미천한 날 불쌍히 여기시어 배고프지 않다고 하실까? 명령만 내리신다면, 세상 끝에 있는 과일도 기쁘게 따오련만······.’


‘어떻게 해야지? 배가 완전히 부른 건 아닌데······.’


세르몬이 채집에 쏟은 시간은 꽤나 길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솔하게 말한다면, 그가 또 고생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을 한숨에 날려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호기심과 탐구심이었다. 메리엘은 세르몬이 가져온 다양한 먹거리들에 대한 알찬 수업을 받으면서, 자연에서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긴 잠에서 깨어난 후 동굴 밖으로 제대로 나가 본적이 없는데다가, 비록 말은 더듬었지만 그가 재미있고 맛깔나게 설명을 해준 것도 한몫했다. 어수룩해 보이는 세르몬의 말솜씨엔, 잠든 지성을 일깨워주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메리엘은 수줍은 것인지, 아니면 죄송스런 마음인지 양 쪽 검지를 연달아 닿게 하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저, 세르몬님. 그, 함께 숲으로 가서······. 오늘 공부한 식물들을 봐도 될까요? 실제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음, 바람도 좀 쐬고 싶어서요······.”


“바, 밖, 으, 으로 나가고, 싶다고?”


예상치 못한 메리엘의 부탁에 세르몬은 당황했다. 그녀가 요청만하면 얼마든지 다시 수고할 용의가 있었고, 반대로 배가 부르다고 하면 무안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의지를 산들바람에 실어 보내어 사슴이나 다람쥐들에게 먹거릴 가져오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이 외출을 하자니? 그는 뇌리의 톱니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했다.


‘허, 어찌한다? 메리엘님이 깨어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물론 내가 머무는 한, 이 숲만큼 안전한 곳은 없지만······.’


냉철한 시선으로 본다면, 메리엘은 철저한 보호와 안정을 요하는 상태였다. 그녀는 세계의 희망 그 자체였기에, 보호자 역할을 맡은 세르몬이 조심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서도, 동시에 교육자 역할을 맡은 이상 파도같이 몰아치는 지성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의무도 있었다. 단순히 듣는 것과 피부로 경험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기에,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본 그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메리엘의 눈동자에 머물던 기대감이 불안감으로 탁해질 무렵, 세르몬의 허락이 떨어졌다.


“조, 좋, 좋다. 가, 같이 바, 밖으로 나, 나가자꾸나. 그, 그 대신! 어, 어떤 위허, 험이 다, 닥칠지 모, 모르니 내, 내 마, 말을 자, 잘 들어주어야 하, 한다. 아, 알겠느냐?”


“저, 정말요? 고맙습니다, 세르몬님!”


메리엘은 두 손을 모아 폴짝 뛰며 그 기쁨을 표현했다. 해맑게 웃으며 기뻐하는 그녀는, 화사하게 피어나는 백송이의 야생화보다 아름다웠다.


‘랄라라, 신난다! 세르몬님과 소풍이라니! 숲 속에는 볼 것도 많고, 이야기를 들을 것도 많고, 맛있는 것들도 잔뜩 있을 거야! 으흠흠흠······.’


충만한 기대감이 더해진 메리엘의 환희는 바깥으로 분출되다 못해 세르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기운이 어찌나 순수하고 영롱했던지, 민감한 감응력을 지닌 세르몬의 정신도 덩달아 공명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소녀가 자아내는 광휘는 별똥별이 춤추는 것처럼, 아찔할 정도로 반짝였다.


‘이토록 눈부신 파장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메리엘님이 저리 기뻐하시니, 내가 다 흥겨워지는 것 같도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할까?’


세르몬은 예민해진 감각을 누그러뜨리고, 외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랜 세월 초록 천둥 숲을 수호해온 세르몬에게 있어, 숲속은 그 자체로 거대한 학당이자 실습장이었다. 배우고 익힐 것은 그야말로 차고 넘쳤지만, 반나절 만에 몽땅 해결하기엔 무리였다.


‘금일 방문한 장소에 메리엘님을 그대로 모실 필요는 없다. 처음이니만큼, 으뜸가는 곳을 목표로 출발하는 게 상책이겠지.’


늙은 고목 아래, 토끼에게 반쯤 갉아 먹힌 ‘풀 한 포기’의 위치까지도 줄줄 외는 세르몬은, 수십 번의 고찰 끝에 메리엘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정했다.


‘그래······. 목적지로 이동하는 도중에, 이따금 휴식하며 학식을 바치는 게 좋겠군. 다양한 간식을 대접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내가 머무르는 한, 이 숲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어둠으로부터 안전할 테니 ’그들‘이 습격하거나 미행할 걱정 또한 없도다. 그럼에도,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은 법······. 혹시라도 내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을 때에는? 신속한 대처 능력을 갖추고, 온전히 신뢰 가능하며, 가까운 데 머무는 이는, 나르반 밖에 없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세르몬은 숲에 대한 메리엘의 흥미와 관심을 촉발시킴으로써 학구열과 지성을 일깨워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활활 지펴진 호기심이 쉽게 식지 않음을 경계했다. 세르몬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할 때, 그녀가 나홀로 깊숙한 숲까지 갔다가 불의의 사건에 휘말릴 확률이 전무하다고는 단언키 힘들었다. 피부에 닿는 위기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타인이 아무리 경고를 해도 큰 효과를 거두긴 힘든 법이다. 이에 대비한 탁월한 보험은, 역시나 나르반 레디르였다. 그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숲을 관리해왔지만, 보호해야 할 대상에 가르델 종족 여자 아이가 더해지면 어떨까?


‘······나르반이 거부할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마음가짐이다. 세크족이 가진 증오심은 너무나 골이 깊었고, 나르반도 예외는 아니었지. 그 분노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만, 안타깝고도 답답할 뿐이구나. 급한 대로 귀띔을 해주고, 메리엘님께도 다시 설명해 드려야겠군.’


어느 정도 사고를 정리한 그는 고개를 돌려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한창 신이 난 그녀는 언제쯤 나갈까 기대하며 세르몬의 다음 행동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메리엘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 목격했던 끔찍한 광경은 어느새 기쁨이라는 덧칠에 흐릿해져 있었다. 운을 떼려던 세르몬은 이를 알아채고 한 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상황에서 나르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무리가 있겠군. 일단 오늘은 돌아가라고 전해주어야겠어.’


그녀의 슬픔을 되살리지 않기 위해서, 세르몬은 최대한 세심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주, 준비할 것이 이, 있으니 자, 잠시 기, 기다리거라! 내 뭐, 뭐 좀 가지러 갔다 오, 오마.”


“네!”


메리엘의 활기찬 대답과 함께 흘러나오는 콧노래 소리를 뒤로하고, 세르몬은 터벅터벅 공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걸음을 빨리하여 도착한 그는, 문을 닫은 뒤에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방 안에서 형성된 희뿌연 빛 무리가 그를 삼키고 목적지로 내뱉을 즈음, 주변을 정리해놓은 나르반이 세르몬의 기운을 감지하고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


“중재자시여.”


“일어나라.”


세르몬의 음성에서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묻어나오자, 나르반은 매우 가까운 거리임에도 그가 굳이 순간이동을 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가르델 때문이겠지.’


세르몬이 허겁지겁 들어간 뒤 나르반은 막중한 죄책감과 고뇌에 빠져야했다. 그토록 당황스러워 하던 중재자를 마지막으로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으며······. 그가 예의상 손님이라 소개한 줄 알았던 가르델이, 어쩌면 정말로 고귀한 신분일지 모른다는 판단에 나르반은 자신의 실책에 대한 후회에 휩싸였다. 하지만 반작용으로써, 평온했던 일상을 이토록 흔들고 동요시켰다는 것의 증오 역시 커져만 갔다.


기나 긴 시간을 동행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손바닥 읽듯이 헤아릴 수 있는 두 존재였기에 세르몬은 나르반에게 진심을 전해보기로 했다.


“네가 혼란스러워함을 안다. 세크 종족의 삶의 터전이자 심장부인 이 숲에서, 가르델 종족을 귀빈으로 맞이하는 것이······그간 숨죽였던 네 분노를 일깨운 것 또한, 알고 있다. 세크와 가르델이 상대방의 살과 피를 잃게 하고 뼈아픈 배신과 음모를 행한 것 역시 알고 있노라. 흐트러진 생명의 불꽃과 통한의 눈물이 번갈아 섞인 것 역시도······. 허나 냉정하게 가슴을 식혀보아라, 과연 저 어린 소녀가 이 모든 증오를 짊어져야 하겠느냐?”


“······.”


나르반은 침묵 속에서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가르델을 두 번 다시 믿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맹세한 과거가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은 기억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끊임없이 방해했다. 그러나 세르몬의 진중한 설득은, 어느 정도 그 딱딱한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신의 오랜 결심을 깨어낼, 견고한 세르몬의 망치가 필요했던 나르반은 또렷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중재자시여, 제가 감히 질문하옵건대. 그 ‘손님’은 중재자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네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는 날 용서해다오. 다만 이것은 말해줄 수 있다. 그 소녀는 내가 받아들일 새 제자로서 초록 천둥 숲에 왔노라. 난······. 저 동굴 안의 소녀를 합당한 노력을 다해 보살피고, 또한 가르치고자 한다. 그러니 내가 없다 할지어도, 네가 이 숲을 수호하였듯 그녀도 지켜주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중재자시여.”


나르반은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세르몬의 망치질은 나르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응어리를 미약하나마 부숴주었다. 한평생, 그는 세르몬이 가르델을 ‘제자’로 삼을 정도의 신뢰를 보였던 걸 경험치 못했기에, 이번만큼은 자신도 소녀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공기 중에서 믿음의 감정을 읽어낸 세르몬은 그제서야 안도의 날숨을 쉬었다.


“고맙구나, 나르반. 오늘 고기를 준비하느라 고생해주었지만, 미안하게도 먹기엔 힘들 것 같구나. 지금 떠나서, 마을에 그것들을 전해주도록 해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중재자시여.”


나르반은 미리 정리해 둔 고기와 가죽을 밧줄로 잘 동여맨 뒤에, 거대한 독수리로 자신의 형상을 바꾸었다. 하늘의 수호자로 변한 나르반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세르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발톱으로 선물을 움켜쥔 채 날아올랐다. 나르반이 흩뿌리고 간 깃털들이 바람결에 세르몬의 어깨너머로 휘날렸고, 그 시선은 자연스레 뒤편의 동굴로 향했다. 곧이어 세르몬은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릴 메리엘이 떠올랐기에, 공방 안으로 순간이동을 시전하며 확신했다.


‘메리엘님께 있어, 날 제외하면 항상 곁에서 도움이 되어줄 자는 과연 나르반뿐이로다. 성급히 무리하지 말고, 차차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파아앗


은은한 빛줄기를 걸치고 공방으로 귀환한 세르몬은, 수업에 요긴히 쓰일 물건들을 가죽 가방에 챙겨 넣었다. 잡동사니의 먼지를 치우는 건 힘들었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삽, 그릇, 흠······. 그리고 풀로 엮은 모자, 책장 네 번째 줄에 꽂혀 있던 식물그림책······.’


의식의 흐름을 더듬으며 세르몬은 손을 바쁘게 놀렸다. 왼 손으로 물건을 받치고, 오른 손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현란하게 움직일 때마다 더러움은 물 흐르듯 씻겨 나갔다. 그의 마법으로 묵은 때를 벗은 물건들은, 금방 만든 것처럼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이윽고 빠르고도 철저히 준비를 마친 세르몬은 과할 정도로 포식한 가방을 탁탁 두드리며 만족스러워했다. 한 손에는 풀 모자를 들고,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엉거주춤 히죽거리는 모습은, 숲을 다스리는 중재자에겐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안중 밖이었다.


‘어이쿠, 가야겠군.’


문득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르몬은, 서둘러 움직였다. 마침 그녀는 ‘숲 이야기’를 다시 읽는 중이었다. 어쩌면 숲을 탐방하고 싶다는 바람에 책의 내용이 한 몫 거들었을 수도 있었다. 이 책에는 숲의 방대한 자연과, 삶의 터전을 꾸리고 살아가는 동식물에 대한 민담, 서술 등이 세크족의 글로 담겨있었다.


‘헉! 저, 저 책을 읽고 계신 건가!? 어떻게?!’


메리엘의 독서를 처음 본 세르몬으로선 펄쩍 뛸 부분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세크족의 문자를 이해하는 거라면, 언어도 구사한다는 뜻이었다. 글자대신 삽화들을 훑어서 감상하는 걸까? 라는 의심도 했었지만, 메리엘의 눈동자는 그림을 보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부, 분명 글자를 보고 계시도다! 미, 믿을 수 없군, 이를 어찌 해야······. 어찌······.’


어안이 벙벙해진 세르몬이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을 동안, 메리엘이 인기척을 느끼고 눈길을 돌렸다.


“아! 세르몬님! 드디어 오셨네요, 기다렸어요. 헤헤.”


“그, 그래. 헌데, 네, 네가 어찌 그 채, 책을 읽고 있느냐? 서, 설마 거기 쓰, 여, 여진 무, 문자를 이해 하, 할 수 이, 있는 거,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떨리고 있었다. 메리엘은 그런 세르몬의 음색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으나, 이내 책을 살짝 덮고 입을 열었다.


“음······. 네! 보면서 세르몬님이나, 제가 사용하는 말이랑은 전혀 다른 게 이상하긴 했지만 의미를 이해할 수도, 따라 읽을 수도 있었어요. 그,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여기 이 책의 말이 다른 거라는 말씀이시죠? 아! 이게 제 잃어버린 기억이 조금씩 돌아온다는 증거일까요?”


세르몬은 누군가 내려친 둔기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섬광이 번쩍하는 걸 느꼈다.


‘가르델어와 세크어의 차이도 파악하고 계실 줄이야!? 짙은 안개 속에서, 이런 식으로 활로가 트일 줄은 한 치도 예상치 못했도다! 희망이 내 품에서 힘차게 맥동하는 것이, 갓 잡은 물고기와도 같구나. 오오, 창조주시여! 미천한 절 굽어 살피시어 이 천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메리엘님의 손길이 해묵은 미움을 녹여 크나큰 결실을 얻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흥분한 세르몬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들었고, 좁디좁았던 메리엘의 길은 묵었던 둑을 일순간 터뜨리는 물줄기처럼 힘차게 뻗쳐나가, 사방이 뚫린 대로로 확장되었다.


‘메리엘님은 나르반과 다른 세크족 사람들의 심성을 보듬어, 따뜻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화해의 씨앗이 대지에 뿌려지리니, 노즈라우스님의 뜻은 참으로 신묘하구나.’


세크족의 땅에서 그들의 말을 구사하는 능력,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신의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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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화- 말문을 연 나들이 19.01.04 18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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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3화- 서리에 박힌 햇살 18.11.10 19 0 19쪽
3 02화- 썩은 낙엽과 잿불 18.11.05 17 0 20쪽
2 01화- 메마른 숲속 은자 18.11.03 26 0 19쪽
1 서장- 신을 내버린 아이 18.11.02 74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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