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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아이-The child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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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스요한
그림/삽화
제네스 요한
작품등록일 :
2018.11.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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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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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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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불꽃 튄 살얼음판

DUMMY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배신하란 말인가? 그럴 순 없네.”

은밀하게 제안하는 밀사에게, 남자가 한 말이었다.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발음 구조가 완전히 다른 가르델어와 세크어의 경우라면, 양쪽에 통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르델어가 샘물 흐르듯 부드러운데 반해, 세크어는 중간 중간 바람이 몰아치는 야성적인 느낌이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역대 가르델 총독 중, 세크어에 뛰어났던 위인이 전무한 역사를 감안하면 그 차이가 심하다는 걸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가르델 종족이 특유의 억양을 어설피 흉내 내는 꼬락서니는 세크 종족들에게 좋은 조롱거리가 되고는 했다. 그럼에도 메리엘은 세크 문자를 이해하고, 발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르델어로만 대화를 하느라 미처 몰랐구나······. 실로 괄목할만한 일이로다!’


애초에 가르델의 ‘껍데기’를 쓴 그녀의 예상치 못한 재능이었기에, 세르몬이 큰 기대감을 표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만약 메리엘이 세크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면, 마을 주민들의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 용이했다.


‘주로 숲에서 생활하실 터이니, 세크족들과 친분을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하도다. 굳이 마력을 덧씌울 필요 없이, 언어를 능수 능란히 구사하신다면 가르델 종족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열 테지. 메리엘님께 마법을 사용하는 건, 꼭 필요치 않다면 삼가고 싶으니······.’


세르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메리엘의 잠재력에 대해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언어적 능력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메리엘에게 가르델어로 말을 건넸다.


“세, 세크어로 ‘바, 반갑습니다, 여행자여.’를 마, 말할 수 이, 있겠느냐?”


그의 질문에 메리엘은 잠깐 고민하더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낙후크마후, 마코후룽카흐!”


‘······이, 이럴 수가!’


발음을 비롯하여 억양, 감정까지 완벽한 세크어가 흘러나오자, 세르몬은 가면 속 입을 반쯤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나가는 세크족을 한 명 불러와 눈을 가린 뒤, 이 육성의 종족이 누구냐 묻는다면 즉각 ‘동족’ 이라고 답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오히려 본래 발음보다 우수할 정도로 메리엘의 세크어는 보다 농후하고 고귀한 풍채를 띄고 있었다. 가르델족이 그녀만큼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선 어렸을 때부터 세크족과 함께 자라거나,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학습을 해도 될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충격 그 자체로다! 이 정도의 세크어는 옛 왕족에게서나 들을 수 있던 종류인데······. 다행스럽게도 힘을 회복하시기 전까지, 원만히 지내실 수 있겠구나! 가르델 종족의 겉모습 따위는, 말 한 마디 섞기만 해도 허물어질 것이 분명하다.’


세르몬은 적잖이 흥분한 상태였다. 메리엘이 하필이면 세크 종족과 원수지간인 가르델 종족의 형상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 큰 고민이 해결된 것이었다.


“저, 정말 후, 훌륭하구나! 이 저, 정도라면 세크 족과 치. 친해지는 거, 것은 전, 혀, 혀 어, 어렵지 아, 않을 거, 것이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즐거운 세르몬과는 반대로, 메리엘은 흠칫 놀라며 스멀거리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녀의 희미한 기억은, 가르델 종족과 세크 종족이 서로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새기고 있었다.


“네? 세, 세크족요? 어······. 그, 전 용족이지만······. 가르델족의 모습을 하고 있고, 세크 종족들은 가, 가르델 종족들을 싫어하잖아요?”


“······무, 물론 그, 그렇지만! 너 저, 정도로 세, 세크어를 자, 잘 쓰는 자라면 괘, 괜찮다고 이, 내가 보즈, 증할 수 있다. 걱정 하, 하지 않아도 조, 좋다! 이, 일단 나가, 간 뒤에 자세히 이, 이야기하도록 하, 하자꾸나.”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관계로 세르몬은 우선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고, 메리엘은 마침내 외출을 시작한다는 말에 조금 전 대화는 반쯤 까먹고 말았다.


“제가 따로 준비할 것은 없나요, 세르몬님?”


“으음······. 그, 마, 맞다! 네, 네 오, 옷차림을, 조, 좀 바꿔야 게, 겠구나.”


메리엘이 기특한 질문을 해오자, 세르몬은 문득 그녀의 옷차림이 나들이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기 새의 솜털과도 같이 살랑살랑 흩날리는 순백의 상의와 치마는, 숲을 탐험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잠시 고뇌한 세르몬은 손을 들어 마력을 끌어 모은 뒤, 마법으로 메리엘의 옷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남용하면 안 되지만······. 당장 메리엘님이 입으실 옷이 없거니와, 마을에서 여벌의 옷을 얻어 오는 것도 곤란하도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쓸데없는 주목을 받을 수 있으니, 세크족 아이들의 옷차림을 재현할 수밖에······.’


세르몬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긴 손가락을 움직이자, 영롱한 빛 무리들이 나타나 기존의 옷을 새로이 탈바꿈 시켜주었다. 빛나는 입자들이 물고기 떼처럼 섬유 사이사이를 노니며 일사분란하게 헤엄쳤고, 바느질 되듯 의복의 구조가 조금씩 재구성되었다.


현란한 향연 속에서, 마법의 신비를 처음 목격한 메리엘의 입가엔 감동의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세르몬은 마력으로 의상을 짜내는, 지극히 사소한 일임에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끝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서히 빛이 잦아들고, 재창조된 옷이 메리엘에게 온전히 보일 때 쯤. 세르몬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뿌듯함의 날숨을 쉬었다.


‘휴우.’


“와아, 정말 감사합니다, 세르몬님!”


메리엘은 새 옷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바뀐 옷은 세크족 아이들이 즐겨 입는 일상복이었는데,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하며 활동하기 편한 형태는 숲을 탐방하기에 최적이었다. 세르몬 역시 의상이 생각대로 잘 만들어짊에 안도했다.


“마, 마음이 들었다니, 다해, 행이구나. 그, 그럼 이 모, 모자를 쓰고 따라오, 오너라. 크흠.”


쑥스러웠던 것인지, 세르몬은 헛기침을 하면서 들고 있던 모자를 메리엘에게 건네주었다. 깜짝 선물에 토끼 같이 동그란 눈을 뜬 그녀는, 이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제게 주시는 건가요? 머리에 쓰는 물건 맞죠? 감사합니다!”


예의바른 메리엘은 세심한 손길로 모자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 살포시 머리 위에 얹었다. 세르몬이 사용했던 모자는 원래 주인이 그녀였던 것 마냥 꼭 맞았다. 메리엘은 잘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이 새로웠는지, 흥얼거리며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세르몬이 보기에도, 그녀의 옷차림은 맵시가 아름답고 훌륭하였으며 얼핏 세크 종족의 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세크족의 푸른 머리칼 대신,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것이 옥에 티였지만 말이다. 그는 메리엘에게 따라오라는 뜻의 기척을 내며 발걸음을 떼었다.


“흐, 흐흠!”


느린지 빠른지 모를 걸음걸이로 세르몬이 움직이자, 눈치를 챈 메리엘도 뒤를 따라나섰다. 첫 소풍에 섞인 설렘이 그녀의 가슴과 머릿속을 한가득 채웠고, 입술에 뜬 무지개는 영원을 기약한 듯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일행을 반겨준 이는, 풀냄새 깃든 향긋한 바람이었다. 덕택에 세르몬은 오늘 숲의 기분이 좋음을 감지했고, 최고의 하루가 될 수 있을 거라 직감했다. 메리엘도 산뜻하고도 상큼한 향기 덕분에 나쁜 기억으로 흐르는 의식을 차단할 수 있었다.


사그락 사그락


풀밭이 눌리는 부드러운 소리로 귀를 간지럽히며 두 사람은 동굴을 떠나 숲 속으로의 여정을 떠났다. 따스하게 포옹하는 햇볕과, 몽실몽실 흘러가는 구름, 전신을 시원하게 쓰다듬어 주는 산들바람, 청아한 새소리, 달콤한 꿀을 찾는 나비 모두가 그들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회의가 끝난 이후 총리 베호엔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수행원들을 모두 물린 뒤에, 그는 하는 수 없이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최악이로군. 설마 마도 연맹이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가르티에! 그놈이 발랄카 왕국을 그 더러운 혓바닥으로 꾀다니,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베호엔은 차오르는 분노에 피가 배어나올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했던 결의가 산산이 박살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번 안건에 대해서도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다면, 크롤렌 제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명백했다. 동방 제국 고륭강에서 수입되는 사치품들은 상위 계층의 일상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그 무역의 중계는 대륙 중앙의 마로에 공국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음을 빌미로 공국이 실제로 무역을 단절한다면, 다가올 결과를 베호엔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뚜벅 뚜벅 뚜벅


오랫동안 찾는 이 없던 복도엔, 오직 베호엔의 발소리만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붉은 대리석과 비단, 순금 장식품, 조각상, 천장에 자리 잡은 역사적 회화들은 위대한 제국, 크롤렌의 영광을 장엄하게 빛내고 있었다. 또한 벽면의 화려한 촛대에서 타들어가는 향초는 그 분위기를 보다 고귀하게 덧칠했다. 하지만 그러한 웅장함이 오히려 황제의 안 좋은 건강과 대비되면서, 스쳐 걸어가는 그의 심리를 더욱 쓰라리게 만들었다.


뚜벅


베호엔의 걸음이 문 앞에서 멈추자, 내부는 촛불 흔들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침묵에 잠기었다. 그는 목구멍 너머로 기어오는 긴장을 삼키고, 조용하고도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신 베호엔이옵니다.”


“······.”


즉각적인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베호엔은 차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그는 점차 초조해졌다.


‘폐하께서 주무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큰 무례를 저지른 것이 되는데······.’


바로 그 순간, 문 너머에서 황제의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그 소리에 다시 한 번, 베호엔은 용기를 내었다.


“폐하, 소신 베호엔이옵니다.”


“······그래. 쿨럭! 베호엔······. 내 명을······잊은 것이냐? 크, 쿨럭!”


황제의 말에 그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단박에 무릎을 꿇고 자책하듯 외쳤다.


“폐하, 능력이 부족한 소신을 용서해주십시오! 긴급한 외교 사안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총리의 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기에 간청하는 모습이 보일 리는 없었겠지만, 충심만큼은 닿은 모양이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베호엔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들어, 쿨럭! 오거라······.”


“예, 폐하!”


끼이이익


베호엔이 몸을 일으켜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당기자, 벌어진 틈새에서 병들고 늙은 사자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가 안으로 진입하자, 짙은 붉은색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에 누운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장막 내부 촛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만을 얼핏얼핏 비출 뿐이었지만, 불규칙한 숨소리에선 노쇠함이 절절이 묻어나왔다.


‘폐하의 옥체가 걱정되는군. 왜 전담 치료사 및 호위병 배치를 거부하셨을지······.’


베호엔을 비롯하여, 무수한 조정 신료들이 건강이 악화된 폐하를 위해 철통같은 호위와 헌신적인 치료사들을 상주시키자 건의했으나, 황제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것을 한사코 거부해왔다. 그 때문에 과거 활기가 넘쳤던 장소에, 개미 한 마리 없는 괴이한 광경이 자주 연출되었다.


잡념에 빠졌던 베호엔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폐하,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하오나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마도, 쿨럭! 연맹 놈들인 것이냐?”


말을 이어가려던 베호엔의 입이 꽁꽁 얼어붙었다. 분명 황제는 오랫동안 방안에만 있어 외부소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마치 총리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마로에 공국 놈들이 우리 제국과 발랄카 왕국의 무역 축소 사안을 틀어잡고, 고륭강 제국과의 무역을 단절하겠다는 협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손실이 엄청날 것이며, 이는 곧 전쟁으로······.”


“······그만.”


황제의 저음에 겹치는 무시무시한 노기에, 베호엔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크크큭······. 짐이 쇠하니······그동안 꼬리 흔들던, 쿨럭! 들개들이 이빨을 들이댈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베호엔, 자네가······. 크, 언제 전쟁을 두려워, 한 적이······있었는가? 짐이 없는 제국은, 진정 허수아비 꼴이······쿨럭! 될 것 인가?”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폐부를 찌르는 말에, 베호엔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뉘였다. 닥쳐온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황제의 그늘로 돌아온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시다. 작은 화를 피하려다, 더 큰 화마를 만날 수 있을 지언데······. 지금껏 제국은 폐하께 지나치게 의지해왔어. 두 개념을 분리하여 다룬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수백 년간 그것을 당연시 해오는 사이에, 우리들의 의지는 너무나 유약해져 있었구나······.’


크롤렌의 황제, 파헬벨 마르젠 바스크가 가르곤 제국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그는 신화적 영웅이자 종족적 구심점이 되었다. 스노만족들에게 그는 현세에 강림한 전쟁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검사였으며, 전설적인 붉은 황소 용병단을 이끌었고, 가르곤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한 후 스노만 왕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자리에 올라 태평성대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위인이 영원불멸의 신성을 증명하듯, 강산이 수십 번 바뀔 때까지 제국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었으니······. 그가 스러져가는 지금 크롤렌은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물론 파헬벨도 자국의 태생적 취약점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와 총리의 상호보완적 체제를 구축하고, 알게 모르게 제도를 조금씩 정비해 철인정치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이어서 후계자인 파비앙 태자를 성심껏 지도하였으며, 그 후견인으로 현명한 베호엔을 두어 보좌케 했다.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것도 총리를 비롯한 군주, 대신들의 위기 대처 능력과 독립성을 키워주고 나아가서는 잠재된 적을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신변을 인질로 잡은 마도 연맹이 발랄카 왕국과 크롤렌 제국의 연대를 느슨하게 하고, 동방 무역을 막아버린다면 예상외로 상황이 심각해질 것은 뻔했다.


‘흐음······. 마로에 공국 놈들이 빨리도 움직였군. 이쯤에서 개입 해주는 게 상책이겠지.’

파헬벨도 예측한 것보다 신속히 행동에 나선 마도 연맹에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발랄카 왕국이 넘어갈 정도라면, 이미 진행 중인 공작이 몇 개나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놈들이, 크, 쿨럭! 짐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요구하였느냐?”


“예, 폐하······.”


“크크크, 좋다. 다음 회의 때는······. 쿨럭! 짐이······. 참석할 것이라 전하여라.”


“!”


회의에 참석한다는 황제의 의사에 베호엔은 동요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그 어떤 의문이나 의심도 품지 말고 묵묵히 일을 수행해야 할 때였다.


“소신이 준비할 것은 없사옵니까?”


“······다음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시종들을······쿨럭! 데리고 짐을 찾아 오거라.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거라.”


“네, 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덜컹


베호엔이 예를 갖추고 방을 나간 뒤 그의 발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멀어질 무렵.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쇠약했던 숨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하! 거참······.”


참았던 숨을 토하고 이부자리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난 황제는 언제 골골댔다는 냥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주름졌던 피부가 팽팽하게 펴지고, 하얗게 탔던 머리카락이 본 색깔을 회복하는 마법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연기하는 것도 고역이로군. 어서 빨리 죽어버리든가 해야지······. 베호엔, 그 녀석도 하필이면 신나게 즐기고 있을 때 찾아올 건 뭐야? 급하게 순간이동 마법과 노쇠 마법을 쓰느라 진땀을 뺐군. 크흐흐흐!’


주변 인물들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헬벨은 소리죽여 웃었다. 한참을 낄낄대던 그는, 일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나저나,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겠군. 파비앙이 제위를 물려받아, 본격적인 직무를 소화하기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어. 설사 베호엔이 거든다 하더라도, 공국 마도사들의 계략을 완벽히 간파하기엔 무리지. 결국······. 놈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건가? 거, 세월 참 빠르구만!’


크롤렌 제국은, 파헬벨에게 있어 소중한 연인의 이름을 이은 한 명의 자식이었다. 황금빛 추억 너머 미숙하게만 보였던 자녀가 독립할 날이 가까워졌고, 그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끝낼 뼈아픈 이별도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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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 그루터기 위 새싹 19.04.19 4 0 19쪽
» 09화- 불꽃 튄 살얼음판 19.03.21 7 0 18쪽
9 08화- 말문을 연 나들이 19.01.04 18 0 19쪽
8 07화- 작은 맹세의 성찬 18.12.19 9 0 19쪽
7 06화- 가시 박힌 독수리 18.12.11 10 0 19쪽
6 05화- 푸르른 그 목소리 18.11.26 12 0 19쪽
5 04화- 불신의 첫 희생양 18.11.19 11 0 20쪽
4 03화- 서리에 박힌 햇살 18.11.10 19 0 19쪽
3 02화- 썩은 낙엽과 잿불 18.11.05 17 0 20쪽
2 01화- 메마른 숲속 은자 18.11.03 26 0 19쪽
1 서장- 신을 내버린 아이 18.11.02 75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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