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2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2
“당장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난 떠나야 할 사람이다. 정해진 이별은 빠를수록 후유증이 덜한 법이지.”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당장 살인교가 언제 다시 공격할지 알 수 없습니다.”
“말씀하셨잖아요? 우린 정파의 공적이 되었다고. 그리고.... 누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태민이 호란을 거론하자 방안 분위기가 더욱 긴장한다. 방에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도 진운자와 호란이 있다. 진운자는 휴식이 필요해서 무진이 혈도를 짚어서 강제로 재웠고, 호란은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는 요즘은 잠자는 것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지금도 분명 깨어 있을 텐데 등을 돌리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계속 너희들과 같이 있을 순 없잖아?”
“그렇게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갑자기 태운이 목소리를 높인다.
“으음! 너희들도 짐작하겠지만 난 무당과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좋은 인연만 있는 게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무당은...나에게 펴..편한 곳이 아니란다.”
무진은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다 보니까 말을 좀 더듬거린다. 그는 누구보다 무당을 아끼고, 무당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또한 무당에선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 대협!”
그 때 진운자가 침대에서 내려온다. 그는 조금 전에 잠에서 깨 세 사람이 하는 얘길 듣고 있었다. 그는 무진 앞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 대협! 그대가 없었다면 우린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부탁드리는 건 사실 순전히 저희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무당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삼봉 조사께서 무당산에 자리를 잡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우린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중심세력이었으며, 중원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무당은 덩치만 클 뿐이지 강호인들로부터 삼류 문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당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와 이 아이들은 온 몸을 던져서라도 무당을 바로 세우려 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제가 부족하여 아이들을 무당까지 무사히 데려갈 처지가 못 됩니다.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무당과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무 대협! 크흐흑!”
진운자는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다.
“사부!”
“사부님!”
덩달아 제자들도 같이 부둥켜안고 운다.
“지랄한다. 지랄을 해.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움직일 것 같니? 난 피 냄새가 싫다. 더 이상 강호사에 개입하기도 싫고.”
무진은 여전히 완고하다.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오는 울음소리에 마음이 흔들린다.
“흐흐흐흐흑!”
호란의 울음소리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고, 끝내 무진이 고집을 부리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누..누님!”
“무 대협! 정말 이러실 겁니까? 원래 약속도 무당산까지는 데려다 주기로 했잖습니까?”
그걸 기회로 태운이 강하게 몰아세운다.
“형님! 정말 이럴 거요? 원래 이렇게 매정한 양반이었소?”
드디어 태민이 무진을 형님이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뭐라고 했을 무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울고 있는 호란에게 시선을 보낸다.
“좋다. 무당산까지다.”
“무 대협!”
“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진운자와 제자들은 달려와서 그에게 매달리며 좋아한다.
“대신 조건이 있다.”
“.....”
조건이란 말에 다시 모두 긴장한다. 호란조차도 우는 소릴 멈춘다.
“마..말씀해 보세요.”
진운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두 가지다. 하나는 만약 무당이 저 아일 버린다면 내가 데리고 올 것이다. 약속할 수 있느냐?”
“으음! 장담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그 정도로 만족하겠다. 두 번째는....”
무진은 의외로 진운자의 대답을 받아들인다. 그건 두 번째 조건이 더 까다롭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무당을 위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냐?”
무진은 진운자를 쳐다보며 묻는다.
“그렇습니다.”
“좋다. 그럼 무당을 위해서 한 가지 모험을 한다. 이게 내 두 번째 조건이다.”
무진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자꾸 뜸을 들인다. 그게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뭔데 말을 돌립니까? 무 대협 답지 않게.”
“넌 임마 조금 전엔 형님이라고 하더니 다시 대협이냐?”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됐다. 난 그게 더 듣기 좋더라. 형님이라고. 운이도 앞으로 그렇게 부르도록 해라.”
“예에?”
“정말입니까?”
“자식들이 속고만 살았나? 난 이백 하고도 오십 년을 더 살면서 동생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방안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진다. 차갑다 못해 아예 냉골이 된다. 무진이 말하는 이백오십 년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그가 반노환동의 경지에 오른 무림 고수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서...설마 고..고금제....”
“그만! 거기까지 만이다.”
진운자가 자신에 대해서 확인하려 하자 무진이 막는다.
“그럼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형이 동생을 얻으려면 그 정도는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아, 형님!”
“무진 형님!”
그제야 태민 사형제는 무진의 뜻을 알고는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긴다.
“쯧쯧, 다 큰 놈들이 응석은?”
“동생이 형님한테 하지 누구한테 하겠어요? 히히히!”
“그런가?”
“하하하!”
“호호호!”
태민 사형제는 물론이고, 호란까지 일어나서 웃는다.
“근데 두 번째 조건은 뭔가요?”
분위기를 환기시킨 건 호란이다. 그녀는 갈수록 정신이 맑은 시간이 길어진다.
“사천당문을 친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문을 치다뇨? 우리 힘으로 말입니까?”
“물론 세가를 치겠다는 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만 너무 멀어서 그건 어렵고, 일주일 정도면 놈들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이번에도 천리향입니까?”
“그래. 살인교의 무리 중엔 분명히 사천당가놈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곳곳에 놈들의 흔적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우리 힘으론 무립니다. 차라리 형님 혼자라면 몰라도....”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번 싸움은 무당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그럴 만 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진운자다. 그는 무당이란 이름으로 싸운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지난 번 화산에 이어 당문에게 두 번째로 당한 것이다. 이번에도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면 앞으로 정파놈들이 개나 소나 다 덤빌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
“그건 나도 아직 생각 중이다. 다만 당문의 특성을 잘 이용해서 준비하면 겁낼 것도 없다.”
“.....?”
무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일단 치료를 마친 사람들을 중심으로 준비에 들어간다. 우선 활을 비롯한 암기와 화약을 최대한 준비한다. 그리고 수련도 병행한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태운의 표정이 약간 밝아진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굳어진다.
“당문은 독의 가문이다. 그에 대응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
“독을 요?”
“독과 해독약을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그건 재료와 도구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시험도 해야 하고....”
“재료는 온 천지에 널려 있고, 도구는 필요하면 사면되고, 시험도 우리가 직접 하면 된다.”
“아!”
“그렇군요.”
태민 사형제는 자신들이 백독불침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걸 깨닫고는 안도한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사 일 정도면 치료를 마칠 수 있을 거다. 그때까지 여기에 있으면서 최대한 많은 약재를 구입하고 수련도 한다. 실험을 비롯한 나머지 준비는 이동하면서 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수련 준비를 하겠습니다.”
“활부터 하겠습니다.”
태민 사형제는 손발이 척척 맞다.
“저희 뜻을 받아줘서 감사합니다.”
진운자는 아픈 몸으로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한다.
“그럼 이제부턴 우리 둘이 있게 좀 해줘라.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본 게 언젠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진운자는 무진의 신분을 안 뒤부터는 완전히 그를 어른 모시듯이 한다.
“이리 와. 모처럼 니 찌찌 만지면서 자고 싶다.”
그가 나가자 무진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호란을 부른다.
“치! 생전 잠도 안 자면서 괜히 그래.”
“그런가? 그럼 같이 누워 있지 뭐.”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좋다는데 봐줘야지 뭐.”
호란은 싫은 내색도 없이 슬그머니 침대에 올라가 등을 지고 무진의 앞에 눕는다. 가슴을 만지기 좋게.
“히히히! 내가 이 맛에 산다. 정말 부드러워.”
“으음! 저도 좋아요.”
두 사람은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을 가진다.
“이런다고 당가를 상대할만한 독을 만들 수 있을까?”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아까 무 대협이 한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지금 장원의 뒷산에선 무당 일대제자 다섯 명이 약초를 캐고 있다.
“무 대협이 한 말?”
“응. 양 손을 허리에 척하니 올리고선 당당하게 하던 말 있잖아?”
“아! 그래. ‘당가와의 싸움은 그 어떤 문파보다 까다롭고 어렵다.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당하기가 십상이다.’라고 했지.”
“난 말이야. 실패하더라도 한 번 해보고 싶어.”
“나도 그래. 언제부터인가 무당에선 구파일방이나 사대세가를 만나면 무조건 양보하란 말만 해. 물론 양보할만하면 해야지. 근데 말이야. 분명히 상대가 잘못했는데도 양보는 우리가 해왔어. 이건 나만의 얘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양보해도 다른 문파에선 갈수록 우릴 더 무시한다는 거야. 이젠 그런 문화는 사라져야 해.”
“맞아. 그런 의미에서 무 대협의 ‘무당은 깨어나야 한다.’는 말에 절대 공감해.”
“그걸 이런 일로 해낼 수 있을까?”
“난 실패하더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 내 주먹 한 대로 두꺼운 벽이 쉽게 무너지진 않겠지만, 여러 명이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서 하면 반드시 무너질 거야.”
“하하하!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뜻을 모은 게 얼마만이야?”
“아마 내 기억엔 없어.”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내기 한 번 할까?”
“어떤 내기?”
“무 대협이 말한 약초를 가장 많이 캐는 사람에게 오늘 저녁 보초를 면해주기. 어때?”
“그거 좋다.”
“동감!”
“나도 좋아.”
“까짓것 한 번 해보자.”
다섯 명이 모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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