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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아님
작품등록일 :
2018.11.17 15:37
최근연재일 :
2019.07.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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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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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SNL - 26

DUMMY

“무서워······.”


두려움을 호소하는 김정연의 손을 공석이 꼭 움켜잡았다.


“카운트다운이 끝났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별 거 아닌 해프닝이었던 거야.”

“하지만 오빠, 카운트다운이 가리킨 건 ‘위상충돌의 시작’이었어. 끝이 아니라 무언가 이제 막 시작된 거란 말이야.”

“······.”


공석은 반박하지 않았다. 단지 김정연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일 뿐 본인도 김정연과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뿐만 아니라 카운트다운이 0이 되었을 때 어렴풋이 느껴진 대기의 진동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김정연의 부친인 김태석은 거실의 커다란 창으로 계속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빠! 창가에서 좀 떨어져!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아빠가 그대로 뒤집어쓰게 된다고!”

“어휴, 그냥 내비 둬라.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한다.”

“하지만 엄마······”


그나마 위안이라면 꼼꼼히 붙여놓은 테이프 때문에 유리창이 깨지더라도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김태석은 과민하게 반응하는 딸에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어허,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 안에서 얌전히 보기만 하는 건데 뭘 그러니. 그보다 TV 소리나 다시 키워봐라. 뉴스에서도 아직 별 얘기 없지?”

“뉴스 생방송도 사건이 터지고 제보가 들어와야 보도를 하는 거잖아요. 왜 벌써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거예요!”

“이거 원, 마누라랑 딸내미 등살에 무서워 죽겠구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뭘 무서워해야한다는 거냐. 뭔 일이 터졌으면 지금쯤 이미 난리······ 으어억!”


김태석이 갑자기 혼비백산하며 창가에서 도망쳤다. 그의 비명에 가족들도 덩달아 비명을 지르며 창가에서 먼 부엌 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 직후 시커먼 물체가 창문을 부수고 거실로 날아들었다.


몸으로 감싸 김정연을 보호했던 공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들 바닥을 굴렀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공석은 창문을 뚫고 들어온 검은 물체를 봤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공중에서 날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맨몸으로 유리창을 깼는데 상처 하나 없을까. 뭐하는 사람이기에 저런 시커먼 차림새를 하고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공석이 우선적으로 한 행동은 부엌의 식칼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공석은 식칼을 불법침입자에게 겨누고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누, 누, 누구야, 당신! 당신 지금 불법 침입한 거야! 좋은 말 할 때 당장 나가!”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카운트다운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선 상태였는데 괴한의 침입으로 마지막 이성마저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신공석.”


괴한이 나직이 공석을 불렀다.

남자와 여자의 음성을 한데 뒤섞은 듯한 음성이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변조된 목소리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었고, 특이한 복장으로 외모를 꽁꽁 숨기는 것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감추니 수상함은 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수상한 괴한이 공석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공석은 물론 김정연과 그녀의 가족들까지 깜짝 놀랐다.


“저, 절 아십니까?”

“지키고 싶은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괴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경계를 풀지 않은 공석이 식칼을 고쳐 쥐며 위협했지만 괴한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괴한은 손가락으로 칼끝을 밀어내고 공석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괴한이 방진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선팅필름을 붙인 보안경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공석은 괴한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잃고 싶지 않다면 맞서 싸워라.”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맞서란 말입니까?”

“절망으로부터.”


추상적인 대답에 공석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미치광이인가? 아니면 약에 취해 창문을 깬 고통도 못 느끼는 약쟁이인가? 어느 쪽이라도 불청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도 느꼈겠지. 세상이 변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싸워라.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너를 덮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무슨 개소리야! 당장 이 집에서 꺼······!”


괴한이 손을 뻗어 공석의 입을 막았다. 한손으로 입 주변을 가볍게 잡았을 뿐이지만 붙잡힌 공석은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읍, 읍!”

“오빠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마!”


김정연이 또 다른 식칼을 들고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공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괴한에게 직접 당한 공석은 알 수 있었다. 힘이나 속도, 풍기는 분위기까지, 괴한은 무엇 하나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괴한이 마음만 먹는다면 김정연은 순식간에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괴한이 아무렇지 않게 식칼을 쳐내자 김정연은 관성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렸다. 자칫하면 깨진 유리조각이 있는 바닥에 나뒹굴 판이었다. 그러자 괴한이 몸으로 김정연의 앞을 막았다. 덕분에 김정연은 유리파편이 온몸을 찔리는 것은 막았지만 괴한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됐다. 괴한이 김정연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해치러 온 게 아니에요.”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 같은 따스함, 그로인해 김정연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괴한은 다시 공석을 쳐다보며 김정연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음성으로 말했다.


“신공석.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네게 자격이 생긴다면 이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석은 괴한의 손을 통해 뜨끈한 쇳덩이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거칠게 저항했지만 이미 완벽하게 제압당했기에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공석은 결국 뱉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괴한이 먹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다행히 당장 몸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하려하지 마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명령조의 말투지만 어쩐지 간곡한 부탁처럼 느껴졌다.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다. 그러니······ 죽지 마라, 신공석.”


그 말을 끝으로 괴한은 부서진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나타날 때처럼 사라질 때도 홀연했다. 마치 귀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한바탕 소란에 다들 초췌했다. 다친 사람이 없는 건 천만다행이지만 진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아버님. 정연이는요?”

“정연이도 괜찮다네.”


서로 무사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다들 식탁 주변에 널브러지듯이 둘러앉았다. 거실에 유리조각이 있지만 아직까지 심장이 벌렁거려 아무도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먹으려는 건지······.”


김태석의 중얼거림은 탄식에 가까웠다.

잠시 뒤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킨 김정연이 공석에게 물었다.


“그 사람 아는 사람이야?”

“절대 아니야. 내 지인 중에 그런 미친놈은 없어.”

“하지만 왠지 오빠를 자세히 알고 있는 거 같았는걸. 걱정하는 거 같기도 했고······.”

“날 걱정하는 사람이 대뜸 쳐들어와서 이런 난장판을 만들어놓는다고? 그럴 리 없잖아.

“하지만······.”

“정연아, 그 얘긴 그만하고 거실부터 정리하자.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알았어······.”


거실 청소를 대부분 마치고 김정연이 자잘한 유리조각을 없애려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공석과 김태석은 휑해진 창틀 앞에서 4월의 쌀쌀한 밤공기를 어떻게 막아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공석은 담장 밖 20m정도 떨어진 공터에서 공간이 이상하게 일렁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엔 헛것을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는데 이상한 현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혹시 아버님 눈에도 저게 보입니까?”

“응? 그러네. 저게 뭐지? 아지랑이인가? 이 날씨에?”

“가서 확인해보고 올까요?”

“아니, 뭔지도 모르는데 가까이 가지 말게. 오늘 하루 괴이한 일이 많았더니 이젠 지긋지긋하구먼. 소방서나 경찰서에 신고하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시간이 갈수록 기현상이 커지고 있었다. 김정연과 김정연의 모친인 박정자 여사도 기현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저거······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빠. 계속 보고 있으니까 소름 돋아.”


김정연이 불안을 호소했다. 공석도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김정연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는 것으로 서로의 불안을 달랬다.

공간의 일렁거림이 2m에 달할 무렵, 갑자기 소름끼치는 기성이 울려 퍼졌다. 유리를 찢을 수 있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었다.

일렁거리던 공간이 쩌억 벌어지고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공석의 직감이 맹렬히 경종을 울렸다. 괴한이 말한 절망이 눈앞에서 피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석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


다급한 비명에도 불구하고 균열에서 나온 괴물의 울음소리는 모든 이들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부오오오─


공석은 훗날 자이언트 엘리펀트라는 명칭이 붙게 될 이 괴물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왜 균열로부터 튀어나왔고, 어떻게 코끼리를 닮은 체형으로 두 발로 서있을 수 있는지,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나 단 하나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 괴물이 이 세상에 무한한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괴끼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사냥감을 수색하는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들 숨죽이고 얼어버린 까닭에 괴끼리의 눈에는 발각되지 않았다.

그때, 공석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분 것은 우연이었다. 바람은 유리창 없는 창틀을 통과해 커튼을 흔들었고, 커튼 뒤에 숨어있던 공석이 괴끼리와 눈을 마주쳤다.


부오오오─


사냥감을 발견하고 흥분한 괴끼리가 달려왔다.

40m

인간이어도 수 초 만에 뛰어올 수 있는 거리는 체고가 3m를 넘는 괴끼리에게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공석은 김정연을 감싼 채 괴끼리의 돌진방향 밖으로 몸을 날렸다.


괴한이 유리창을 깨고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콘크리트 담장과 벽이 썩은 나무판자처럼 부서졌고 철골은 녹은 엿가락 마냥 휘었다.

충돌로부터 몸은 피했지만 돌조각이 날아와 공석의 이마에 상처를 냈다.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김정연도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폐허가 된 집을 보고 절규했다. 김태석과 박정자가 빠져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아아악! 아빠─! 엄마─!”


친부모 같았던 두 사람이 변을 당하자 슬프기는 공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슬퍼하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괴끼리에게 위치를 발각당할 터였다. 공석은 김정연이 소리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연아, 지금 큰 소리를 내면 안 돼! 괴물이 우릴 발견할 거야. 여기 꼼짝 말고 숨어있어. 내가 놈의 시선을 끌 테니 넌 그때 도망가. 알겠지?”


김정연이 발광하듯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돼! 같이 도망가. 어떻게 오빠를 버리고 나만······”

“아니야. 이건 내가 해야 해.”


괴한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런 걸 오빠 혼자서 어떻게 이겨?”

“이길 생각 없어. 도망 다니면서 시간만 끌게. 네가 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날 도와주러 오는 거야. 알겠어? 너까지 여기 있어봤자 다 죽는 거야.”

“하지만······”

“지금이야! 어서 뛰어!”


공석은 강제로 김정연을 떠밀었다. 그리고 먼지가 걷히는 순간 콘크리트 조각을 하나 주워 괴끼리에게 던졌다.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부오오오─


말이 통하진 않아도 공석의 기세로부터 말에 담긴 의지를 읽었는지 괴끼리가 분노로 울부짖었다.

괴끼리와 정면으로 마주 선 공석은 두려움을 잊고자 지지 않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야아아!”


공석의 싸움이 시작됐다.




같은 시각, 검은 복장의 괴한으로 분했던 재영은 보육원에 도착해있었다.

박수찬, 전대용과 합류한 재영은 거대균열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크림슨 빈폴과 혼 울프 무리를 대면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함께 발버둥치는 거다. 부디 살아서 만나자, 신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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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은 공기에서도 파열음이 날 수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중이었다.

괴끼리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기다란 코를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북북 갈라지며 공석의 고막을 때렸다.

어지간한 야구공 속도로 연이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려면 눈과 머리보다는 감에 의지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는 공격뿐이었다. 당연히 회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괴끼리를 무찌를 계획 같은 걸 세울 틈이 없었다.

그나마 괴끼리의 공격이 힘에만 의존한 단순한 동작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공석은 점차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공석은 폐허가 된 김정연의 집에서 벗어나 근처 주택 사이로 생쥐처럼 도망다녔다. 은엄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공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괴끼리는 일대를 다 때려 부숴서 공석이 스스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건 자살행위였고, 공석은 쉬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공석이 가는 곳마다 파괴가 일어났다. 집안에 얌전히 숨어있던 사람들은 공석이 몰고 온 재난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으로 공석 역시 자신으로 인한 피해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미안했지만 가만히 죽어줄 수는 없었다. 그가 죽어봤자 괴끼리는 다른 사냥감을 찾을 테고 결국 이웃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다를 바 없었다.


김정연에게는 도망만 다닐 거라고 한 공석이지만 기회가 되면 괴끼리를 죽일 각오도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마땅한 공격수단이 없어서 도망칠 뿐이지만, 괴끼리는 그를 친아들처럼 대해줬던 김태석과 박정자 부부를 죽인 원수였다.

다시 한 번 괴끼리에게 발각된 공석은 코 채찍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달려갔다. 이제는 몸을 숨길 곳도 여의치 않았다.


‘저런 걸 무슨 수로 이기지?’


당장 엽총을 손에 쥔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약간의 피해라도 입히려면 군대에서 쓰던 소총 정도는 있어야했다. 적어도 일반가정집만 모여 있는 주택가에서는 괴끼리에 대항할 무기를 찾기 힘들었다.

그때 공석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무너진 건물 벽 사이로 튀어나온 가정용 전선이었다. 차단설비에 문제가 생겼는지 피복이 벗겨진 전선 끝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쭈욱 잡아당기자 딸려온 전선의 길이는 약 3m쯤 되었다.


‘이걸로 될까?’


고민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괴끼리는 어느새 공석을 발견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공석은 도망가는 대신 전선을 쥐고 괴끼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공석은 몸을 비틀어 날아오는 괴끼리의 코를 피하고, 이어진 꼬리 쓸기를 점프로 피했다. 한바탕 공격을 피하고 나니 괴끼리에게 약간의 틈이 생겼다. 두 주먹으로 내리치는 공격을 한 탓에 괴끼리의 옆구리가 휑했다.


공석은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 발로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다. 괴물에게서 도망쳐도 시원찮을 판에 스스로 다가가다니. 몇 시간 전의 공석이 봤다면 죽으려고 환장한 거냐고 혀를 찰 광경이었다. 그러나 도망만 다녀서는 숨을 곳도 줄어들고 체력도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상황이었다.

괴끼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김정연이 무사히 빠져나가게끔 실컷 도발해놓은 탓에 괴끼리는 공석만 노리고 있었다. 남은 방법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아!”


공석은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괴끼리의 옆구리를 전선으로 지졌다.

괴끼리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부림 탓에 2초도 지지지 못했지만 고통을 주었다는 건 유효한 효과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것만으로도 공석은 희망을 느꼈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팔을 피해 등 뒤에서 한 번 더 지지고, 엉덩이 밑으로 들어가 오금을 공격했다. 거듭된 전기충격에 고기 타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공석은 점점 초조해졌다. 사람이라면 단 한 번에 내부가 바싹 구워질 공격을 이미 수차례 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어먹은 신체구조인지 괴끼리는 고통스러워 할 뿐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이라도 끼얹지 않는 이상 결정타를 날리긴 힘들어보였다.


‘아직 부족해!’


공석이 고민하고 있을 때 괴끼리가 한 쪽 다리를 크게 들어올렸다. 동작이 크고 느려서 공석은 어렵지 않게 위험범위 밖으로 몸을 피했다. 공석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 괴끼리는 들어 올린 다리로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진동이 땅으로 전해져왔다. 수 미터 떨어져있었는데도 다리가 저릿했다. 일순간 움직임이 마비된 탓에 공석은 이어진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괴끼리의 거대한 코가 날아왔다. 급한 김에 왼팔로 몸통을 막긴 했지만 그 정도로 치명타를 막을 순 없었다. 뒤로 수 미터 날아간 공석은 어느 가정집의 정원수에 처박혔다. 잔가지가 많은 정원수가 아니라 단단한 곳에 부딪혔다면 머리가 깨져 죽었을 충격이었다.


“끄아악!”


공격을 직접적으로 막은 왼팔이 완전히 망가진 것은 물론, 갈빗대도 몇 개나 나간 것 같았다. 내장이 으깨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였다.


‘끝이다.’


머릿속이 깜깜해지면서 든 유일한 생각이었다.

숨만 쉬어도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을 회복한 괴끼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란 코에서 거칠게 뿜어지는 콧바람을 보니 공석에게 쌓인 게 어지간히 많은 모양이었다.


─절망하지 마라.


문득 괴한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묻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냐고.

세상에 절망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치 꿈같은 소리였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정연이 아버님, 어머님의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내가 죽으면 정연이가 얼마나 슬퍼할까. 앞으로도 저런 괴물이 계속 튀어나오면 정연이가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외톨이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석이다. 그렇기에 김정연이 걱정됐다. 걱정은 이 상황을 야기한 괴물에 대한 분노로 치환됐고, 분노는 죽음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생겼다.


‘죽고 싶지 않아. 난 정연이를 지켜야 해.’


격정으로 뇌가 호르몬에 절여진 까닭일까. 고통이 한결 수그러든 느낌이었다.


공석은 비교적 멀쩡한 오른팔로 땅을 짚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뱃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특히, 아까 괴한이 강제로 삼키게 만든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갔을 때처럼 뜨겁고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끄으으으······.”


여전히 안 아픈 곳이 없지만 그럼에도 공석은 똑바로 일어섰다.

아프지만, 힘이 넘쳤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괴끼리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덤벼라, 이 개자식아아!”


부오오오오─


괴끼리가 최소 수 톤은 나갈 체중으로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당한다면 한줌 핏물이 되겠지만 공석은 질리도록 똑같은 공격패턴을 그대로 당해줄 바보가 아니었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자 괴끼리의 몸체는 애먼 주택에 처박혀 허우적거렸다.


공석은 어째선지 몸이 가볍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이 멀쩡했을 때보다 오히려 피하기 쉬웠다.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니었다. 몸에서 묘한 기운이 방출되면서 전에 없던 힘이 샘솟았다.

갑자기 자신감과 호기가 치솟았다. 평소엔 불가능했던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엇!”


공석은 괴끼리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거대한 몸체를 두드렸다. 미친 짓 같아보였고, 실제로도 미친 짓에 가까웠다.

각성의 초입에 도달해 공석의 몸에 기가 깃들기 시작한 상태지만, 괴끼리의 육중한 체구와 그에 걸맞은 방어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공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공석이 떠올린 이미지는 딱따구리였다. 그 어떤 딱따구리도 일격에 나무에 구멍을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수없이 때리고 또 때려서 커다란 구멍을 뚫는다. 공석도 그와 같았다. 쉴 새 없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이마로 받으면서 충격을 한 점에 중첩시켰다.

어느 순간, 괴끼리를 때린 주먹에 낯선 감각이 들었다. 여태 모래가 가득 찬 거대한 샌드백을 때리는 느낌이었다면, 방금 공격은 생고기를 다지는 느낌이었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이 피어난 순간, 공석은 들뜬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공격에만 몰두하다가 괴끼리의 반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전형적인 초보자의 실수였다.

거대한 꼬리는 이미 공석의 코앞에 와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고, ‘이건 정말 죽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꼬리가 공석의 몸에 부딪혔다. 코에 맞아도 온몸의 뼈가 조각나고 내장이 뭉개질 것 같았는데 그보다 길고 두꺼운 꼬리에 맞으면 뒤로 튕겨나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사지가 산산이 분리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공석은 끔직한 고통대신 뱃속에서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괴한이 뱃속으로 욱여넣었던 달군 쇳덩이 같은 기운 중 뜨거운 기운만 남고 단단한 기운이 전신혈맥을 타고 빠져나왔다. 호신(護身)의 기운은 몸을 감싸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하고 사라졌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대부분 상쇄됐음에도 공석은 펄펄 날아가 건물 잔해에 처박혔다. 각성의 초입에서 몸에 자연스럽게 기를 두르고 있던 까닭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콘크리트 가루를 뒤집어쓴 공석은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깨닫고 있었다. 괴한이 자신의 몸에 남겨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며 괴끼리가 공석에게 다가왔다. 공석은 위기의 와중에도 꼼짝도 않고 잔해 속에 누워있었다. 공석이 죽었다고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강력함을 과시하는 것인지, 괴끼리는 공석을 코앞에 두고 괴성을 내질렀다.


부오오오오─


초근거리에서 뿜어내는 폭음과 풍압에 공석의 고막이 터지고 이명이 내부를 뒤흔들었다. 내장에 고인 피가 기침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끄으으으······.”


피를 토하는 모습에 만족한 것일까. 괴끼리는 괴성을 멈추고 뱉은 만큼의 숨을 다시 들이켰다. 괴끼리의 입으로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순간, 공석의 몸이 앞으로 튀어 올랐다.

괴끼리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막으려고 팔을 들었다. 그러나 공석이 노린 것은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공석은 뱃속을 쥐어짜는 느낌으로 괴한이 불어넣었던 뜨거운 기운을 토해냈다. 그러자 공석의 입으로 거대한 화염이 뿜어졌다.


근접해있던 탓에 괴끼리는 화염의 열기를 그대로 들이켰다. 어지간한 열기로는 괴끼리의 외피에 타격을 줄 수 없지만 내부라면 달랐다.

수백 도에 달하는 마법불꽃이 폐부를 익혀버리자 괴끼리가 고통에 겨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화상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하는 질식의 괴로움이 더 컸다.

공석은 미쳐 날뛰는 괴끼리를 피해 거리를 벌린 다음, 뽑혀 나뒹구는 도로표지판을 쥐어들었다. 표지판의 쇠기둥으로 발목을 힘껏 후려치자 아까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괴끼리가 맥없이 쓰러졌다. 이어서 공석은 높게 뛰어올라 괴끼리의 입에 쇠기둥을 박아 넣었다. 한 번으로는 깊게 박히지 않았지만 두 번, 세 번 깍지 낀 양손으로 내려치자 쇠기둥이 괴끼리의 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칵,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침내 괴끼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공석도 바닥에 쓰러졌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만약 괴끼리가 다시 일어선다면 꼼짝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공석은 괴끼리가 죽었길 간절히 기도했다.

불행하게도, 괴끼리의 육신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괴끼리는 공석의 앞에 우뚝 섰다. 공석과 한 차례 시선을 마주친 괴끼리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선 채로 절명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체고 3m50cm의 거구가 공석을 향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각성을 했더라도 수 톤의 무게에 깔리면 압사나 질식사를 피할 수 없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공석도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몸은 완전히 망가졌고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덮쳐오는 괴끼리의 그림자를 느끼며 공석은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공석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발.

흙투성이의 맨발이 보였다.

괴상한 흑복을 입은 채 괴끼리의 시체를 받치고 선 괴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괴한은 시체를 옆으로 치워내고 자신의 발치에 힘없이 누워있는 공석을 보며 웃었다.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공석의 눈엔 분명 웃는 것처럼 보였다.


“멋진 발버둥이었다. 이제 쉬어라.”


이유 없이 미우면서도 너무나도 반가운, 상반된 감정을 품은 채 공석은 정신을 잃었다.


작가의말

27화를 실수로 공지에 올렸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고객지원란에 문의를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공지글을 일반글로 바꿀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여 26화와 27화를 합치고 28화와 29화의 제목을 각각 27화, 28화로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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