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끼리끼리 논다더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로난왕국 왕도의 저녁.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았고 아직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상가는 저녁에만 문을 여는 가게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길을 밝히기 위한 등을 제외하고는 어둠이 짙게 내린 거리에 세 명의 수상한 사람이 머리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빠르게 걷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빠르게 걷던 세 사람은 불이 꺼져있는 작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집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내부가 보였다.
겹겹이 쌓여있는 나무상자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중 하나가 상자 중에 파란색 염료가 묻은 상자 하나를 밀자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발견한 사람이 말 문을 열었다.
“여기인 것 같습니다.”
“좋아, 앞장 서라.”
입구를 찾아낸 사람을 선두로 세 사람은 입구를 따라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중간중간 놓여진 촛불로 어렴풋이 밝혀져 있는 지하 굴이 보였다.
셋은 다시 어두운 굴을 지나 작은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로와 달리 돌로 지어진 지하실은 중앙의 테이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셋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던 남자가 로브를 벗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희미한 촛불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금발에 삐쩍 마른 멸치 같은 얼굴.
로브 안에서 나온 남자는 테트로 로난 사이게일이었다.
테트로는 뒤에 서 있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나가서 다른 놈들이 안보이나 확인해봐!”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도 없던 방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예상치 못한 소리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경계했다.
방의 한쪽 구석, 어둠에 감싸져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테트로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라게 하지 마라 기니프.”
“큭큭큭, 죄송합니다. 몰래 다니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피골이 상접한 창백한 몰골을 한 남자로 매번 테트로와 연락을 주고받던 남자였다.
테트로는 그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굳이 이렇게 귀찮게 만나야 하는 거냐?”
“안전을 위해서이니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흥, 겁은 많아가지고. 아무튼,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저희 쪽 부하들은 모두 왕도에 잠입했습니다.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왕궁도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크큭, 좋아좋아! 그 무능하고 무식한 형님들이 없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가능하면 정상적으로 왕위를 얻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눈이 먼 아버지가 형님들만 보느라 이 몸의 재능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힘으로 굴복시켜서 왕위를 달라고 하는 수 밖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테트로의 눈에 조금씩 광기가 스며들었다.
“아니 아니지. 차라리 죽이는 게 확실하겠군. 아버지를 죽여서 왕위를 빼앗는 거야. 그리고 내 자리를 위협하는 다른 형제들도 모조리 죽여버리면 내 왕위를 노리는 은 더 이상 없어지겠지··· 크크큭!!”
테트로의 눈에 붉은 빛이 감돌며 광기는 점점 더 커져갔다.
테트로를 호위하러 따라 온 기사들은 평소와 다른 테트로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 원인이 눈앞에 있는 기니프 때문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테트로의 광기에 빠져가는 모습을 기니프는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되겠네요.”
“응?! 누구냐!!”
갑자기 들려오는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
이번에는 네 명 모두 놀라며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가벼운 레더 아머를 입고 있는 모험가처럼 보이는 여성이 길을 박고 서 있었다.
‘호오, 이 내가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다고?’
기니프는 스스로 기척을 숨기는 데에 자신이 있는 만큼 다른 이의 기척을 눈치채는 데에도 자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눈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니.
과연 어떤 자일지 흥미가 생겨왔다.
그 갑작스러운 방문자는 천천히 지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이내 촛불의 빛에 얼굴을 드러냈다.
“너, 너는?! 살아 있었던 거냐?!”
“오랜만이네요, 오라버니.”
바로 로난 왕국의 제 2왕녀이자 2달 전에 행방불명 된 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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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멸치녀석.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거지?
왕도에서 사라지기로 마음 먹은 나였지만 그전에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날 습격한 테트로에 대한 처벌과 왕국에 숨어들어온 마왕군의 처리.
딱히 왕국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두 가지 일 모두 내가 떠난 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테트로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다시 왕도로 귀환하는 시기에 맞춰 돌아온 것이다.
설마 귀환하고 나서 바로 접선 할 줄은 몰랐는데.
나야 귀찮게 기다리지 않아도 돼서 고맙지만.
왕궁에 돌아온 날 밤, 곧바로 성을 몰래 빠져나가는 테트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 뒤를 몰래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설마 매료까지 당하면서 이용당하고 있을 줄이야.
물론 그렇다고 봐줄 마음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에, 엘라이자? 이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녀석 멀쩡히 살아있잖아!”
테트로는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보다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멸치 투에게 따지듯 물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저쪽은 더 심하긴 하네.
멸치라기 보다는 해골?
스켈레톤인거 아니야?
하지만 살펴본 결과 아쉽게도 스켈레톤은 아니었다.
최상급 마족이기는 했지만.
레벨은 573에 프라임 뱀파이어?
그래서 매료 스킬을 쓰고 있던 거구만.
“아무래도 운이 좋으신 분 같군요. 설마 살아서 돌아올 줄이야. 그래도 멍청하네요. 설마 불구덩이에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오오, 그, 그래! 크큭. 멍청한 년. 차라리 잘됐군.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당장 잡아와!”
““네!””
테트로의 말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하며 내게 다가오는 두 명의 기사.
테트로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측근인 기사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텐데도 거리낌 없이 움직이는걸 보면 동류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큭큭, 발악해봤자지. 애초에 그 꼴은 뭐냐? 모험가라도 돼볼 생각인 거냐?”
“가능하면 대화로 풀어볼까 했는데, 저로 모자라서 제 가족들까지 손을 대려고 할 줄이야. 정말 최악이네요.”
촤악!!
“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정확히는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리고 그곳에 있던 머리는 어느새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내 검에서는 두 사람의 피가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테트로는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그 목숨, 제가 거두어 드리죠.”
이번에는 내가 테트로를 향해 걸어갔다.
녀석도 슬슬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네 년! 뭐, 뭘 한거냐! 다가오지마!”
“그럼 잘가세요, 오라버니.”
챙!
한번 더 날아오르는 목을 기대하며 뻗은 검.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쇠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테트로의 목 앞에서 멈춰있는 검과 그 검을 막고 있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
아, 이 녀석이 있었지.
털썩···
“허···! 허억!”
눈앞에 있는 검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테트로.
하지만 그 마족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를 바라봤다.
“이런, 제가 있다는 걸 잊으시면 곤란하죠.”
아, 미안 완전히 잊고 있었네.
“그 멸치를 지키는 건가요?”
“크큭, 안됐지만 아직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오··· 오오!! 잘했다 기니프!! 크하하하! 그대로 저 건방진 계집을 당장···!”
쾅!!
자신이 살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분노하며 명령하는 테트로.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차기에 마족의 몸이 벽에 처박혀 버렸다.
“그럼 더더욱 살려둘 수 없겠네요. 잠시 빠져주세요.”
“히이익!!”
테트로는 주저 앉아있는 채로 다시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아까 대화로 풀어보자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래 어디 대화로 얘기를···”
“아, 당연히 그건 한번 해본 말이었죠. 그럼 오라버니, 부디 다음 생에는 벌레로 태어났으면 좋겠네요.”
“자, 잠까···!”
촤악!!
이번에 내 검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피를 뿜는 테트로의 목과 바닥으로 떨어져 뒹구는 머리.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테트로의 최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크으··· 대단하군요. 절 이 정도까지 몰아 붙일 줄이야···”
그리고 그때서야 벽에 처박혔던 마족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미안해요, 죽여버렸네요. 이거, 당신들한테 중요한 거라고 했었나요?”
“크큭··· 그래. 덕분에 지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서 말이야···!”
뚜득! 뚜드득!
우와, 뭐야. 변신하는 거야?
기분 나쁜 변신이네.
마족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뼈 소리와 살가죽의 소리가 들리며 기형적으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진심으로 상대를 해줘야 겠군.”
쿵.
소름 끼치는 변신이 끝나고 난 후에 그곳에 서 있는 건 아까의 삐쩍 마른 남자가 아닌, 덩치 큰 박쥐 같은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이야, 마족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이렇게 변신 하는구나.”
“크크큭, 신기한 인간이군. 이 몸이 마족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그 여유가 고통 속에서도 지속될까?”
아까보다 더 듣기 거북할 정도로 쇳소리가 섞여 있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비슷한 기척은··· 셋 정도?
나머지는 잡놈들인 것 같고.
좋아, 적어도 왕도는 깨끗하게 청소하고 갈 수 있겠네.
“하! 무시인가? 그럼 저승에 가서 후회하거라!”
챙!
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화를 내며 달려드는 마족.
하지만 내 눈에는 너무 느리게 보였으므로 내게 휘두르는 손톱을 검으로 막았다.
“잠깐,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너무 날뛰지 말라고.”
“어떻게...?! 이익!!”
챙채챙챙!!
“아니, 물어볼게 있다니까...”
녀석은 내가 공격을 막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손을 휘둘렀다.
이쪽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충격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칼을 휘둘렀다.
“크아악!!!”
“조금 진정하지?”
천천히 얘기를 하기 위해 일단 양팔을 베어버렸다.
공격할 수 있는 팔이 없으면 조금 말이 통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양팔에서 쏟아지는 피들이 곧바로 다시 팔이 되면서 상처를 회복했다.
“크윽! 죽어죽어!!”
아무래도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조무래기들은...
멘탈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귀찮네.
딱히 심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끝내자.
촤악!
“커헉!”
내 검이 마족의 몸을 세로로 갈랐다.
마족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가루로 흩날렸다.
“그래, 딴 놈들한테 물어보지 뭐.”
나는 조용해진 방안을 둘러보다가 테트로의 머리를 발견했다.
“일단은 집으로 보내둘까?”
나는 일단 테트로의 몸과 머리를 챙기고는 지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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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왕궁의 안에서 왕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왕궁 안에서는 소란이 일며 사망 원인을 알아내려 애썼지만 시신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생채기 하나도 없었고 독이나 마법에 당한 흔적도 없었다.
며칠간이나 왕자의 죽음에 대해 조사했지만 결국은 그저 미스터리로 막을 내렸다.
왕자가 죽은 날, 왕도의 몇몇 귀족과 기사들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지만 왕자 사망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던 왕도에서는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이야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목을 따버렸네요.
2부가 끝나가서 그런가?
왜 이리 글이 안써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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