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은백의 천사.
대륙 북쪽에 넓게 분포되어있는 마물의 숲.
그 숲은 짙은 어둠에 마력에 잠식되어 있어 수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안에서는 몬스터들 사이의 생존경쟁도 치열했는데 경쟁에서 밀린 몬스터들이 주기적으로 숲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흘러나온 몬스터들 탓에 오래 전부터 인간들은 매번 홍역을 치러왔다.
그리고 그것이 영웅 중 한명인 학원장이 마물의 숲 가까이에 아카데미를 설립한 이유 중 하나였다.
숲에서 넘쳐 나온 몬스터들을 미리 처리하기 위해서.
실제로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 각국의 몬스터 플러드로 인한 피해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와서는 그 두려움도 점차 희미해져 보통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지난번 플러드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또 이런 대규모 플러드라니, 학원국도 참 경사로군요.”
“허허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거 매번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멋모르고 망언을 내뱉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습격이 끝나고 부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활발한 경제활동과 막대한 이득 뿐이니 말이다.
물론 몬스터 플러드가 끝날 때마다 학원국은 매번 큰 이득을 보고는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랜 노하우와 철저한 사전 준비로 큰 피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아카데미 측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부상자는 물론, 사상자도 수없이 많았다.
수많은 이들이 인류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온 것이다.
그 피해가 줄어든 건 수십년의 경험이 쌓이고 나서부터였다.
물론 그럼에도 피해가 전혀 없을 수는 없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다면 농담으로라도 저런 소리는 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어리석은 행태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흥, 멍청한 놈들. 막상 눈앞에 있으면 도망치기 바쁠 놈들이.’
그는 로난 왕국에서 온 귀족으로 회담을 위해 학원국으로 파견된 외교사신이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넓은 방 안에 모여 앉아 있는 이들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타국에서 모인 사신들로 학원장인 헬레니르가 긴급하게 불러 모은 이들이었다.
‘한 국가를 대표해서 온 자들이 저런 놈들이라니. 나까지 격이 낮아지는 기분이군.’
그만이 아니라 몇몇 사신들도 비슷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제국은 유일하게 마물의 숲과 국경이 닿아 있었고 학원국과 마찬가지로 몬스터 플러드를 겪고 있었기에 그 시선은 남들보다 차가워 보이는 것 같았다.
‘···뭐, 신경 쓰는 만큼 손해지.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남자는 이곳에 오기 전 받아 본 자료를 떠올렸다.
아카데미 안에 심어둔 정보원들이 모은 최근 학원국 내에서 얻어낸 정보들이 적혀있는 자료였다.
갑작스러운 몬스터 플러드가 있었던 만큼 무언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급히 확인한 자료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의 보고가 들어 있었다.
학원장과 같은 영웅급의 새로운 교사에 대한 이야기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놀라운 정보는 몬스터 플러드를 단신으로 종결시킨 존재에 대해서였다.
전투 후반에 갑자기 등장해서 몬스터 사이로 뛰어들더니 몇 번의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모두 쓸어버렸다는 마법사.
솔직히 자료를 보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증언하고 있으니 완전 엉터리는 아니겠지.’
당시 목격자만 수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그 목격자들 중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인 학원국의 인사들이 함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눈속임은 불가능에 가깝다.
즉, 영웅 헬레니르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다만 전투 후반이니 만큼 몬스터 수는 많이 줄었을 테고, 어느 정도 과장도 섞였을 테니 적당히 걸러서 들어야겠지만. 그럼에도 요주의 인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타국의 소속되어 있는지 길드나 다른 단체의 소속되어 있는지.
어쩌면 학원국의 비밀병기나 학원장의 지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럴 확률이 더 높다.
그 존재에 대한 정보는 은백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로서는 이번 회담에서 조금이라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로난 왕국은 마물의 숲과 꽤 가깝지 않습니까? 이번 플러드에 방비가 없으면 꽤 큰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충분히 대비해뒀기 때문에.”
“호오, 그런가요? 이거이거 괜한 소리를 했나 보군요. 뭐, 아무쪼록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후후후···”
남자는 미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말투와 웃음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내용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에 감사를 표했다.
남자에게 말을 걸어온 건 제이하크 왕국의 사신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제이하크 왕국은 사사건건 로난 왕국에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크게 소란을 떨 수준은 아니었지만 인접 지역에서는 나름 충돌도 있었던 모양이다.
각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남자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웃 왕국의 변화에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회담을 개최한 장본인인 헬레니르가 입실했다.
남자는 불편했던 마음을 고치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조금씩 떠들던 소리로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에는 침묵이 찾아왔고 자리해 있는 이들 모두 헬레니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헬레니르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이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나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였다.
“모두들, 제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주신 점에 대해서 우선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안 그래도 최근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걱정이 되던 차에 이렇게 불러주시니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의 영웅인 헬레니르의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단 둘뿐이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지금 말을 내뱉은 남자, 제국의 사신이었다.
제국의 공작 신분으로 오랜 세월 외교를 맡아온 그는 그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그 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하기로 유명했다.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명이지.’
그와 이야기 하다 보면 어느새 그의 페이스의 말려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그는 고위 마법사이기도 하기에 연륜이나 언변과는 상관 없이 실제로도 굉장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흥, 당연히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항상 한가로이 지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바쁜 업무에 치이는 사람들을 이렇게 급히 불러들인 겁니까.”
불편한 감정을 전혀 감추지 않고 건방진 말투로 말을 꺼내는 비대한 체형의 남자.
몸 뿐만이 아니라 얼굴까지 기름기가 가득한 모습에 심술이 가득해 보이는 인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한 불쾌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헬레니르에게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남자, 신성국 레기아스의 사신이었다.
그 또한 신성국 24명의 추기경 중 한 명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이였지만 그에게서는 제국의 사신과 같은 카리스마나 공손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발언에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학원장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크흠,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무례하군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뭐, 그대들처럼 한가한 사람들은 상관없겠지만 말입니다.”
“뭐라구요?!”
“자자, 모두들 진정하시죠. 헬레니르님 앞에서 무슨 추태입니까.”
무례한 추기경의 말에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그들을 비난했다.
이대로 두면 자리가 소란스러워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국의 사신이 중재하며 나섰다.
“하지만 추기경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저희들을 급히 부르신 만큼 뭔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으신 거겠죠. 예를 들면··· 은백의 천사라거나···?”
‘저 능구렁이 같은 영감···’
로난 왕국의 사신은 제국의 사신의 말에 무심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몬스터 플러드에서 대 활약한 정체불명의 소녀를 세간에서는 은백의 천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역시나 그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이를 위해 일부러 추기경을 부추기는 듯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흐름은 나쁘지 않다. 우리로서도 그녀의 정보는 얻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그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회담에 오기 전 최대한 정보를 끌어 모아 준비하고 왔을 테니 말이다.
다만 어디에나 게으른 자는 있기 마련이었고 준비는 커녕 아무런 생각도 없이 회담에 참석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신성국의 사자도 그 중 하나였다.
“은백의 천사라니··· 뭐요 그건?”
“이번 몬스터 플러드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놀라운 능력을 선보인 인물입니다. 흐음, 어쩌면 학원국에서 몬스터 플러드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전력일지도 모르겠군요.”
추기경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질문에도 제국의 사신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히 대답을 이었다.
그리고는 학원장을 향해 대답을 촉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학원장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 은백의 천사에 대해서는 저희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섬멸하고는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밖에.”
“호오, 헬레니르님께서도 전혀 모르는 일이셨다니. 그래도 학원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만큼 뭔가 단서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뒤로 저희도 백방으로 조사해보고 있습니다만, 단서는 커녕 짐작도 가지 않더군요.”
“흐음··· 소문을 듣자하니 그 힘은 학원장님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하던데요. 물론 과장이 섞여 있는 이야기겠지만. 어찌됐든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걸 보면 인간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엘프나 드워프라거나···”
그 말에 학원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에 비해 손색이 없다니, 손색은 자신 쪽에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글쎄요, 그것 또한 전혀 짐작할 수 없다고 밖에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으음··· 그런가요. 그건 아쉽군요.”
실제로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감추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학원장에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신성국의 사자가 또 다시 그 무례한 입을 열었다.
“허어, 듣자하니 꽤 위험한 인물인 것 같은데, 그런 인물의 정보가 전무하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기에 얼마 전에는 한 학생이 폭주까지 하는 바람에 큰 피해가 났다고 들었는데 말이지요. 이래서야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카데미는 운영을 중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흐흐흐...”
신성국에서는 아카데미의 존재가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매 회담마다 질리지도 않고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아카데미의 문을 닫으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지겹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제국의 사신만은 눈을 빛냈다.
“하하, 추기경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아니, 딱히 농담이...”
“하지만 그렇군요. 이번 이례적으로 빠른 플러드도 그렇고,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폭동 사건도 그렇고. 이대로 아카데미를 운영 하기에는 각국의 인사들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각국에 아카데미 지부를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국에서는 얼마든지 지원해드릴 용의가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역시 운영을 중단하는 게...”
“오, 그런 좋은 방법이!”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매년 위험하게 국경을 넘는 위험도 없을 테고. 그야말로 명안이군요.”
제국 사신의 말에 회담장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신들이 찬동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학원국의 노하우를 자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이익이 될 거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런 가운데 로난 왕국의 사신만이 냉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앞에 이익에 눈이 먼 놈들이군. 그랬다가는 결국 제국에 힘만 더 키워주는 꼴인걸. 그나마 이 아카데미로 인해 세계가 균형을 잡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카데미가 각국에 흩어지게 되면 당연히 아카데미 별로 수준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제국에서 저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이미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얘기다.
그런 이들의 교환을 가만히 지켜보던 학원장이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이렇게 이야기 하시니 빨리 본론을 꺼낼 수 밖에 없겠군요.”
“...본론이라 하시면?”
학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제국 사신이 묻는 말에 학원장의 이야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여러분들이 말씀 하셨다시피 우리는 꽤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학원국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학원장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의 중심으로 밀어 냈다.
그건 짧게 잘려진 뿔이었다.
“이건...?”
“마족의 뿔입니다.”
“마, 마족?!”
“무슨...!”
“추기경?”
“...네, 분명 마족의 뿔입니다.”
아무리 썩었다지만 교회에 몸담고 있는 만큼 뿔에서 느껴지는 짙은 마족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리 없었다.
“헬레니르님 설마...?”
“네, 그렇습니다.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
학원장의 말에 회의장은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까와는 다른 무거운 침묵이.
이번만큼은 제국의 사신도, 신성국의 사신도 놀란 표정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몬스터 플러드가 발생한 날 나타난 마족의 뿔입니다. 아마 이번 몬스터 플러드도 그 마족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즉, 마왕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급히 소집할 수 밖에 없었어요. 다행이 이곳은 결계가 쳐져 있어 안심이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충분한 대비가 필요할거에요.”
학원국에 쳐져 있는 결계에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힘이 있다.
게다가 전 마왕을 쓰러트린 영웅과 수많은 강자들도 함께.
마왕군이 나타났다면 학원국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란 얘기다.
“게다가 제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이미 대륙 전체에 그 마수를 뻗치고 있더군요. 그러니 지금부터 대책을 함께 생각해 볼까요?”
그날의 회담은 꽤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작가의말
잊을만 하면 돌아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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