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 지금 이 경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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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진)
작품등록일 :
2018.12.13 14:36
최근연재일 :
2019.01.30 19:4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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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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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5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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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 배신자들(5)

DUMMY

전날 피로가 덜 풀렸든, 팔이 띵띵 부었든, 마력이 바닥이든, 일단 눈을 뜨면 어떻게든 하루가 시작된다는 거다. 나는 졸린 눈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에 머리에 닿으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오늘은 또 어떤 새끼가 튀어나올까, 좀 쉬운 상대였으면 좋겠는데.


거품을 씻어내고 남은 물기는 수건으로 대충 털어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완연한 병색을 띠고 있었다. 감염 이후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던 게 이제는 아예 밀가루처럼 변해버렸다. 바뀐 인상에도 가족들은 알아보려나?


간만에 서랍에 넣어둔 가족사진을 꺼내봤다. 아버지, 동생, 그리고 나. 어머니는 아주 어릴 적에 가셔서 변변찮은 사진조차 없었다. 그나마 동생이 조르지 않았다면 이 사진도 없었겠지. 그때는 싫다고 버팅겼었는데, 그게 사진 속에서 그대로 담겨 있었다.


기왕 찍는 김에 웃으면서 찍을 걸 그랬다. 아빠도 좀 웃지 그랬어. 내가 댁들을 보려면 이렇게밖에 못하는데.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이려나. 아마 가족들은 내가 죽은 줄 알 거다. 명목상은 실종이라지만 그도 2년이나 넘겨버렸으니. 멀쩡히 살아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전염 우려 때문이라지만, 가끔은 다 집어치우고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그도 조금씩 무뎌져 간다. 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방을 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요원이 있어 붙잡고 물었다.


“오늘 저녁 뭐 나와?”

“오뎅 볶음에 오뎅국입니다.”

“시팔. 안 먹어.”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밥은 똑띠 줍시다. 첫 끼부터 오뎅 콤보라니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이럴 땐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까먹어야지. 번거롭지만 외출엔 허락이 필요해서 지부장실을 찾았다.


“중위 서건입니다. 지부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웬 출입법이냐?”


평소라면 그냥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제가 아쉬운 처지라 그렇습니다. 나는 바로 용건을 꺼내들었다.


“외출 신청하러 왔습니다.”

“또 컵라면 처먹을라 그러지. 밥 먹어야 키 큰다고. 가서 밥 먹어.”

“키 들먹이실 거면 밤에 잠이나 재워주고 말씀하십쇼.”


맨날 올빼미 생활을 하는데 키가 크길 바라는 건 놀부 심보지. 미련은 남았지만 그만 놓아줘야 할 때가 됐다. 희망고문 보다야 당장 컵라면이 쓰린 속을 달래주겠지. 그런데 순순히 허락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또 홀랑 하나만 까먹고 올 거지? 그럴 거면 왕창 사들고 오라고 했잖아!”

“이번에 사오겠습니다.”

“안 돼. 저번에 그래놓고 빈손으로 왔으면서.”


앗, 패턴이 읽혔네. 그렇지만 순순히 물러날 순 없지. 인간적으로 소시지가 나왔으면 나도 이렇게 까진 안했다. 나를 나쁘게 만든 건 오뎅이라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되 오뎅은 미워해야지.


“안 그럼 탈영해서라도 먹고 올 겁니다. 허락해주십쇼.”

“지금 배 째라는 거지?”

“아 다른 것도 아니고 컵라면 먹겠다는데 너무하십니다.”


작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외출증을 손에 넣었다. 휘파람을 불며 정문을 통과하려는데 1팀이랑 딱 마주쳤다. 이럼 계획이 틀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에 들린 외출증을 보고선 팀원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서 중위님 외출하십니까?”

“오늘 저희랑 매칭인데 시원한 음료수 먹고 싶습니다.”

“방에 물티슈 떨어졌는데 그거도 사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 팔 하나 뿐 인거 안보이십니까.”


깁스한 팔을 내밀었는데 쳐다보지도 않네. 너무하다 정말. 1팀은 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한명이 재빠르게 로비에서 메모장을 가져왔다. 뭘 그렇게 많이 적는지, 막상 받아들고 보니 별게 다 있었다. 과자, 음료수, 컵라면, 즉석식품 및 기타 생필품.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이걸 다 사오라는 겁니까?”

“부탁드립니다.”


아 이걸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몇 개만 남기고 볼펜으로 죽죽 그어버렸다. 나야 사관이라 외출이 프리한 편이지 부사관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선임들이 심부름을 대신 해주지도 않으니 그냥 받아들여야지 뭐.


그래도 바깥에 나오니 뭔가 공기부터가 달랐다. 작전 때야 원 없이 마신다지만 그거랑은 다른 감회다. 짧은 유희지만 행복하다. 딸랑, 편의점 종이 울리는 것마저 경쾌하게 들렸다. 컵라면에 삼각 김밥도 짬밥에 비하면 7성 호텔 급이지.


배도 두둑이 채웠겠다, 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려는데 문제가 있었다. 아차, 한 팔 깁스했는데.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팔을 다쳐서 그런데 계산할 것들 카운터 위에 올려놔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흔쾌히 수락해줬는데 막상 하나 둘 올려두다 보니 알바생이 질겁했다. 그나마 잘라내서 이 정도지, 다 받아줬다간 몇 번 왕복할 뻔 했어요. 근데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가져가지, 막막해하는 내게 알바생이 농담을 건넸다.


“어디 피난 가세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돌아가 봐야 쌈질만 할 텐데, 방금 나왔지만 복귀하기 싫었다. 사실 그노시스 애들이 탈영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죽을 때까지 놔주질 않는데 이게 사람 사는 거냐, 죽지 못해서 사는 거지.


“겨우 다 찍었어요. 14만 8500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시죠? 30원입니다.”


미친, 이거 내가 꼭 받아낸다. 부들부들 떨며 카드를 내미니 알바생이 미소 지으며 응대했다.


“가입하신 멤버십 카드나 번호 있으세요?”

“아뇨.”

“포인트 쌓이면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거든요. 핸드폰 번호만 불러주시면 가입 금방 하니까, 이참에 하나 만들어 두시는 건 어때요?”

“괜찮아요. 그냥 결제해 주세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나라고 돈이 썩어나서 그럴까, 핸드폰이 없어서 못하는 걸 어떡해. 바른 대로 고해봤자 믿지도 않을 거다. 하기야 21세기 성인이 핸드폰이 없다면 그게 말이야?


“디지털 다이어트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폰이 없어요.”


마냥 무시하긴 뭐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놈의 기밀 유지가 뭐라고 헌병들이 폰이며 컴퓨터까지 근처도 못 가게 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알바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드를 돌려줬다. 그 맘 이해합니다.


“음료수 사왔어요.”


개쪽 당한 내 맘은 누가 알아줄까. 보따리를 풀어두니 대기하던 요원들이 알아서 하나씩 집어갔다. 근데 예의상 고맙다는 말은커녕 불평을 했다.


“저 탄산 안 좋아하는데 이온 없어요?”

“그냥 처먹으세요.”


꼭 입에서 험한 말 나가게 만들어. 선임들한텐 취향에 맞게 음료를 드리고 나는 남은 것 중에 하나를 집었다. 부팀장님은 달력을 보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막냉아 내일 보름인데 뭐 할 거야?”

“글쎄요,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지부장이 허락해줄지 모르겠어요.”

“출타하려고?”

“네. 간만에 나가볼까 싶어서요.”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재발주한 제빙기가 오기 전까진 찬 음료로 더위를 식혀야지. 그나저나 벌써 내일이면 보름이구나. 이번 한 달도 금방 지났구나 싶었다.


음력으로 그 달의 열닷새째 되는 날, 보름. 현실에서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괴수는 출현하지 않는다. 비록 웬수같은 새끼들이라지만, 이렇게 하루라도 쉬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우리도 쉴 수 있으니까.


부족했던 마력도 보충하고 늘어지게 잠도 자고. 어디 놀러가기엔 피곤해서 말이다. 평소엔 늘어져 시간을 때웠지만 이번엔 할 일이 있었다. 이따가 허락받으려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하여간 그놈의 신입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일단 오늘부터 무사히 끝내야겠지. 선발대로 출격한 수색팀을 따라 우리도 현장으로 이동했다. 게이트를 통과하니 적색 만월에 세상이 붉게 비쳐 보였다. 어둑해진 시야임에도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호박색으로 물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이윽고 높이 떠오른 신호탄을 쫓아 우리는 1팀과 합류했다.


“부팀장, 마수 확인됐습니까?”

“아직 입니다.”

“그럼 보고 받는 대로 알려주세요.”


직접 찾아 나서기보다는 수색팀에게 일을 미뤘다. 전날 2연전을 치르다 보니 몸이 무겁다. 게다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던 마력은 채 반절도 차오르질 않았으니, 여러모로 피곤한 일은 사절이다.


“건아 담배나 피자.”

“좋지 말입니다.”


평소였다면 후딱 끝내자며 닦달했을 텐데 조장님도 별 말이 없었다. 그도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렇다고 내색도 못하니 우리는 애먼 담배만 피워댔다. 우리가 동요하면 수색팀까지 흔들려버린다.


나란히 쪼그려 앉아서 침 찍찍 뱉어대는 걸 보곤 부조장님이 인상을 찌푸렸다.


“막냉아 너는 이제 미자 뗐으면서 벌써부터 담배야.”

“안 피우고 배깁니까. 할 것도 없는데 부조장님도 한 대 하시겠습니까?”

“됐어.”


한 대를 다 피우고 한 개피를 더 입에 물었다. 그즈음 노이즈 섞인 무전이 왔다.


[마··· 확인. 현재 ··· 유지 중. 베이스 기준 동북서 ··· 지점. ···상.]

[여기는 전투조. 수신확인. 이상.]


“아 방금 불붙였는데.”


물었던 담배를 뱉어 발로 비벼 껐다. 수신 감도가 떨어지는 게 거리가 꽤 되는가 보다. 막 이동하려하는데, 갑자기 허공이 환하게 빛났다.


“뭡니까, 저건.”


마수의 출현지점과는 정 반대 방향에서 떠오른 신호탄이었다. 백색의 광점은 진입과 유도의 의미. 우리 말고도 누군가 던전에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게이트 통과 전제 조건이 [시동]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같은 요원임은 분명한데.


“타 지부에서 지원 온 거 아닙니까?”


부팀장의 의견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부장한텐 들은 게 없었다. 무엇보다 이쪽 상황도 모르면서 무작정 사람을 보낸다고? 그쪽 사정도 별로 좋지 않잖아. 수상한 낌새에 경계하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신호탄이 쏴 올려졌다.


“조장님!”

“야 일단 아군 아니겠냐. 설마 괴수가 그러겠어?”


태연한 조장님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사람이기야 하겠지. 근데 누군지가 중요하잖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신호를 확인한 실루엣들이 저 멀리서부터 지붕 위를 넘나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는 전투조, 현장 도착까지 지연이 있을 예정. 다시 한 번 알림. 현장 도착까지 지연이 있을 예정. 마수와 접촉중인 수색팀원은 기도비닉을 유지할 것. 이상.]


“조장님, 저게 아군입니까.”


마치 나들이 나온 것처럼 보였다. 반팔에 반바지, 바깥에서나 입는 옷차림에 하마터면 민간인으로 오해할 뻔 했다. 동공이 세로로 쪼개지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쪽수는 셋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배신자들이 여긴 왜 왔냐.”


탈영자들의 집단, 그노시스. 소문이야 익히 들었어도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작가의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점점 제로로 수렴하는 연독률에 눈물 좀 흘리고 갈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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