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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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지에드
작품등록일 :
2018.12.17 03:12
최근연재일 :
2019.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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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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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향가

DUMMY

늘의 앞에 겨레와 혜성이 나란히 섰다.

겨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늘을 살피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대장군이 다른 이였다니 눈치채지 못했다면 놀랄 만도 했다.


“저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 그자의 얼굴을 봤다.”


“얼굴을 봤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봤다면 왜 무사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까?”


“내 그들을 믿으라는 것이냐.”


늘이 혜성을 흘기자 혜성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혜성이 복병이었다.

의리가 투철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기류왕을 죽인 사실이 께름칙했다.

전쟁 중에 살해한 것이지만, 살해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고 그의 상황은 글자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는 옆에서 직접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자객을 쫓으러 간 위장 무사 말이다. 입 왼쪽 부분에 큰 점이 있었다. 자객의 얼굴은 못 봤지만, 목을 꺾어놨으니 모습을 드러낸다면 금방 찾을 것이다.”


“그자를 직접 찾으시겠단 말입니까?”


“어느 세월에 한라를 뒤져 그자를 찾는단 말이냐.”


혜성은 곰곰이 생각했다.


“내 그자를 유인할 것이다.”


자객은 소문에 따라 대장군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군은 늘이었다.

늘을 찾으려 숨어든 대장군의 거처에서 묘한 여인과의 접촉.

여인은 자객과 대등하게 싸우며 얼굴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왼쪽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고 위장 무사와 마주쳤다.


위장 무사와 마주친 순간은 아주 짧은 찰나.

위장 무사가 늘의 얼굴을 봤지만, 대장군과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아주 적었다.

어둠 속에서 기본적인 인상착의가 다른 순간적 이미지였다.


그들의 표적은 둘이 되었다.

살아 있는 대장군과 묘한 여인.


그들의 표적은 둘이 되었다.

살아 있는 대장군과 묘한 여인.


늘의 계획은 이러했다.

비교적 내일과 외형이 비슷한 혜성에게 대장군의 위장을 부탁하고 자신은 그대로 여인의 행색을 한다.

대장군과 여인 행색을 한 채로 사랑하는 연기를 할 것이다.

그것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겨레는 둘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 자객의 행적을 찾기로 했다.

그는 기척을 숨긴 채 누군가를 쫓는 게 특기였다.


날이 밝자 늘은 장터에서 여인의 옷을 여러 벌 사들였다.

질 좋은 비단옷이었다.

그곳의 주인이 늘의 머리를 다듬고 담장 정도의 치장을 도왔다.

혜성은 이미 대장군 차림새로 가게가 보이는 곳에서 늘을 기다렸다.


겨레는 장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보이는 곳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기다란 창을 쥔 채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모습이 꽤 늠름한 장군 같았다.


늘이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채 혜성을 찾았다.

늘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가슴이 빠르게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아, 죄송합니다.”


혜성은 상인에게 밀린 몸에 힘을 주며 늘을 바라봤다.

천막 기둥을 잡지 않았더라면 늘을 껴안은 모양새가 됐을 거다.


혜성은 길게 뻗은 늘의 속눈썹을 보며 그대로 굳었다.

대장군과 같은 얼굴이라 해도, 애초에 내일 역시 꽤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혜성은 뛰는 심장 소리가 늘에게 들릴까 싶어 괜히 큰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는 늘의 관심 밖이었다.

늘이 표정 없이 혜성을 재촉하자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은 임무 중이다.


늘과 혜성이 언덕으로 올라오자 겨레는 삐딱하게 선 몸을 바로 세웠다.


“수상한 자는?”


“없었습니다.”


“천룡은?”


“완벽합니다.”


겨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겨레는 청소년부 천룡을 통해 장터의 아이들에게 향가를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향가의 내용은 대장군의 은밀한 연정에 관한 내용.

장터의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며 장터에 향가를 흘렸다.

대장군과 여인을 찾는다면 구룡성 근처만 한 곳이 없었다.

그들에게 분명 향가가 닿을 것이다.


늘과 혜성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겼다.


정이 언덕의 우물 앞에서 아씨를 기다린다는 대장군의 외로움을 담은 가사는, 대장군의 위치를 알린 것이었다.

그곳에 늘과 혜성이 있을 것이다.


늘은 여인 차림을 하고서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 되면 정이 언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혜성은 대장군 차림으로 꼭두새벽에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마른 우물의 두레박을 끌어올려 매일 의문의 서찰을 주고받았다.


정이 언덕은 한라의 수도인 천양 내에 있는 낮은 언덕이었다.

갈라진 땅과 썩은 나무 덕분에 그 경치가 흉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곳을 오가는 사람의 흔적을 찾으면 의심되는 자를 쉽게 추릴 수 있다는 게 겨레의 의견이었다.

늘과 혜성은 늘 같은 길로 걸었고 겨레는 매일 정이 언덕을 돌며 흔적을 살폈다.


사흘째.

무사의 목을 치기로 한 당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땅거미가 지는 시각에 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쪽에 겨레가 몸을 숙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늘은 두레박을 끌어올려 서찰을 확인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내 연정을 너에게 보낸다.]


고이 접어 올곧은 글씨로 써내려간 서찰에서 혜성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늘은 혜성의 서찰을 챙기고 가져왔던 서찰을 두레박에 넣어 두었다.


그 순간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늘 자신을 겨냥한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촉은 살의보다 빨랐다.


늘은 재빨리 우물 위에 덮어주는 판자를 밟아 세웠다.

무언가가 순식간에 판자를 뚫고 들어왔다.

늘의 코앞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활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판자가 조금이라도 더 얇았다면 활이 그대로 판자를 통과했을 것이다.


늘이 판자를 던짐과 동시에 겨레가 뛰었다.

혜성이 있는 방향에서 날아왔다.

늘도 치마를 올리고선 활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겨레가 이미 한참을 앞질러 언덕 아래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정이 언덕을 며칠간 활보한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상대는 겨레의 속도를 경계하지 못했다.

언덕을 뛰어 내려가던 자객의 옆으로 겨레가 달려들었다.

그 힘으로 인해 둘은 언덕을 나뒹굴었다.


늘이 빠르게 그들에게 달려갔다.

근처에 있어야 할 혜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겨레는 자객의 다리에 창을 내리꽂은 채 팔을 발로 짓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자객은 순식간에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됐다.


늘이 그의 손에 들린 활을 걷어차며 복면을 벗겼다.

입 왼쪽 주변의 점.

늘을 덮친 자객이 아니라 위장 무사였다.

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너를 산 채로 잡아다 고문하겠다.”


늘은 그에게 재갈을 물려 자결하는 것을 막았다.

뒤늦게 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디서 뛰어다닌 것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잡았네요.”


늘은 혜성의 말에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역시 아니다.




늦은 밤, 의자에 묶인 위장 무사 주위로 그를 찾아 헤맸던 오 가문의 무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구천전 내에 있는 여섯 개의 횃불이 그를 밝혔다.


“저자가 네 목숨을 살렸다.”


오늘 목이 잘릴 뻔한 무사가 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이 직접 그를 잡아오다니 면목이 없었다.


늘은 의자에 묶인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잔혹성을 시험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소멸되고 싶진 않았다.

당신들은 재생할 거고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인물이 되어야 하니까.


“그대는 내가 하는 말에 답하라. 대답하지 않으면 입안에 인두를 넣겠다.”


재갈을 물린 입 주변으로 침이 흘렀다.

아직 고문을 하기 전임에도 그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늘이 불에 달군 인두를 들었다.

그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늘은 그런 위장 무사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고정했다.

늘의 눈은 불을 담은 채 반짝였다.

석곤은 그 모습에서 상장군인 근범을 느꼈다.

지켜보던 혜성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이래서 사람은 재생을 하며 저승과 전생을 모두 잊는구나.

재생 사실을 계속 되뇌며 잔인함이 무뎌지는 이 상황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얼른,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모든 걸 다 잊고 싶은 순간이다.

그것만을 기다리며, 온전히 잔인해질 수 있는 게 모순이었다.


“대답한다면 그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늘이 그의 재갈을 내렸다.

위장 무사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자결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뜬 늘을 마주보지 못하고 인주만을 내려다봤다.


“어디서 온 자이냐?”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긴장과 위협을 피해 눈을 둘 곳을 찾았다.


“···문호, 문호입니다.”


늘의 고개가 혜성을 향했다.

대답을 갈구하는 표정에 혜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같이 온 자객과 무슨 사이지?”


위장 무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에서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늘이 그에게 재갈을 다시 물리고 허벅지에 인주를 짓이겼다.

재갈에 채 막히지 못한 비명이 굵게 새어 나왔다.

그는 경련하듯 온몸을 떨었다.

늘이 재갈을 풀고 다시 물었다.


“무슨 사이지?”


“···그가 저를, 고용했습니다. 그저 돈만 받고, 그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자는 뭐하는 자인가?”


“모, 모릅니다.”


“그의 정체를 모른다, 이 말이냐?”


늘이 그에게 다시 재갈을 물리려는 순간 그가 기함하며 늘에게 소리쳤다.


“정말 모르는 사이오! 그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데 제 정체를 어찌 떠벌리겠소!”


그에게 거짓이 보이지는 않았다.


“천양의 축제 때를 기억하느냐?”


그는 덜덜 떨던 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늘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잘···.”


“오 가문의 대장군 오내일이 활을 맞았을 때 말이다.”


“아···.”


그가 무언가를 기억해낸 듯 입을 뻐끔거렸다.

늘은 그에게 재갈을 물린 후 지졌던 곳에 인주를 또 가져다 댔다.

석곤도 고개를 돌렸다.


“이건 그때를 기억하는 그대에 대한 내 분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을 뚝뚝 흘렸다.

늘이 그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 현장에 같이 있었느냐?”


“치, 침입을 도왔습니다.”


“그대는 그놈의 쓸모인 모양이구나. 그때 무슨 독을 썼는지 아느냐?”


“문호에서만, 자라던, 독사가 있습니다···.”


“네가 독을 내주었느냐?”


“그가 직접 키우셨습니다.”


그가,

문호의 독사를.


늘이 옅은 미소를 짓자 위장 무사는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다른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기 시작했다.

문호의 무사가 거짓말까지 가르치기엔 아직 수행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문호의 사람들은 어찌 이렇게 나를 괴롭게 만드느냐.”


가늘게 뜬 늘의 눈에서 살기가 비쳤다.

늘은 허벅지에 진 그의 상처를 가린 뒤 인주를 화로에 올려두었다.


“이제 네가 답할 것은 없다. 수고했다.”


위장 무사가 몸을 떨며 늘의 눈치를 살폈다.

끝난 것인가.


“대답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다.”


늘은 달군 인주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대는 죄인에 관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함구한 죄, 대장군 살해 계획에 공모한 죄, 오 가문의 무사로 위장한 죄, 대장군의 여인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죄가 있으므로 벌을 내리겠다.”


“제, 제발···!”


“걱정하지 마라, 목숨은 살려준다 하지 않았느냐. 가기 전에, 내 얼굴과 더불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그대가 나는 두렵다. 그래서 그대가 다시 죄인에게 가 지금 이 사실을 말할 수 없게.”


늘은 그의 턱을 잡아다 인주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입꼬리가 그을린 채 찢어졌다.

그에겐 비명을 지를 방도가 없었다.

목울대가 울렸다.

늘은 그의 혀를 지진 뒤 검을 꺼내 손가락을 잘랐다.

끝까지 참던 겨레마저 눈을 감았다.


“불구가 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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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PILOGUE 19.02.23 45 0 5쪽
40 40. 비극의 희곡 19.02.22 42 0 16쪽
39 39. 재생 19.02.20 43 0 14쪽
38 38. 화형식 19.02.18 43 0 16쪽
37 37. 청룡과 적룡 19.02.16 49 0 16쪽
36 36. 뱀들의 반란 19.02.15 48 0 14쪽
35 35. 분란 19.02.13 47 0 16쪽
34 34. 변화하는 한라 19.02.11 40 0 17쪽
33 33. 우리의 진심 19.02.09 42 0 14쪽
32 32. 재회 19.02.08 38 0 15쪽
31 31. 사라지는 이름에 대하여 19.02.06 44 0 13쪽
30 30. 멸(滅) 19.02.04 45 0 17쪽
29 29. 골 19.02.02 41 0 17쪽
28 28. 추풍 잔치 19.02.01 47 0 19쪽
27 27. 혼례 19.01.30 49 0 16쪽
26 26. 특별대 19.01.28 44 0 14쪽
25 25. 레이 왕자 19.01.26 53 0 14쪽
24 24. 하담의 마음 19.01.25 45 1 17쪽
23 23. 용왕(龍王) 19.01.23 49 0 18쪽
22 22. 심문회 19.01.21 60 0 17쪽
21 21. 연정 19.01.19 51 0 14쪽
20 20. 오늘의 삶 19.01.18 56 0 14쪽
19 19. 전생 기억법 19.01.16 57 0 16쪽
18 18. 지는 오늘 오는 오늘 19.01.14 61 0 12쪽
17 17. 두 명의 대장군 19.01.12 65 0 16쪽
16 16. 불타는 학살자 19.01.11 63 0 15쪽
15 15. 전쟁의 불씨 19.01.09 62 0 11쪽
14 14. 태양과 달 19.01.07 62 0 16쪽
13 13. 복귀 19.01.05 65 0 13쪽
12 12. 문호 19.01.04 64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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