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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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지에드
작품등록일 :
2018.12.17 03:12
최근연재일 :
2019.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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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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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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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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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4. 하담의 마음

DUMMY

“누이가 드디어 미쳤구나.”


내일이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네 말마따나 아비가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느냐.”


“그건 나도 모르겠어. 누이는 죽을 수도 있거든.”


내일이 멍하니 결의에 찬 늘을 바라봤다.

근범이 상장군일 때랑은 달랐다.


“나를 지키는 게 네 일이잖아.”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나도 이곳에 있는 사이, 가만히만 있던 게 아니다. 이곳에 내 편이 몇 명이나 있는지 알고 있느냐.”


“알고 싶지 않아. 나한테 말하는 순간 분명 아버지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건 누이만 알도록 해.”


내일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하담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늘을 바라봤다.


“오늘 자정에 천룡관으로 오시겠다니요?”


“말 그대로다. 문만 열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가도록 한다는 말이다.”


늘은 근심 없는 얼굴로 침상에 앉았다.

내일과 하담만이 한 대 맞은 얼굴로 멍하니 늘을 바라봤다.


“애초에 화린전을 벗어나는 게···.”


말을 하다 멈칫한 내일이 얼굴을 구겼다.


“설마 무사들을 피해 화린전을 벗어난 적이 있던 거야?”


“아니.”


“하, 내 누이의 속을 도저히 모르겠다.”


내일이 탁자를 붙잡고 미간을 만졌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하담은 내일이 왕께 허튼소리 하지 않도록 구천전까지 잘 모시고.”


“알겠습니다.”


하담이 늘에게 허리 숙인 후 내일을 붙잡았지만, 내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룡관에 가기만 해.”


내일과 늘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저···, 대장군.”


천룡관 숙사에 내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았다.

내일 덕분에 잠에서 깬 것은 물론, 동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된 혜성과 겨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담을 바라봤다.

하담은 침소복 차림에 가부좌로 앉아 문 앞에 선 내일을 가만히 바라봤다.


“상장군, 걱정하지 말고 구천전으로 돌아가 쉬세요.”


“내 어찌 그 말을 듣고도 구천전으로 가만히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하담은 옆에 앉은 동방생들을 흘기며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천룡관까지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얘긴데 둘이 그렇게 기 싸움을 하는 겁니까?”


겨레가 이불을 걷어차고선 문지방까지 기어갔다.

내일은 그들에게서 뒤돈 채 마루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연유나 알고 잠 좀 설칩시다.”


“어허.”


겨레는 입술을 물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선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서하담.”


겨레가 하담의 허리를 팔꿈치로 치며 속삭였다.

하담이 그의 손을 내치며 앞을 바라봤다.

늘이 이곳으로 온다 하여도 내일에게 들키면 곧장 화린전 행이었다.

늘이 근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늘과 천룡의 만남이 썩 좋지만은 않은 내일이었다.

천룡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일을 보며 하담은 그의 틈을 노렸다.

어디 쓸 만한 게···.


“설마 공주님?”


속삭인다고 속삭인 겨레의 말이었지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혜성의 귀에도 들렸다.

하담은 혜성의 눈치를 살짝 보고선 눈을 찌푸렸다.


“아니야.”


“그럼 뭔데? 상장군이 우릴 보호하려 온 건 아닐 테고.”


“마음 편히 그렇게 생각해.”


“이게 날 뭐로 보고···.”


겨레가 덤빌 듯이 주먹을 들자 하담이 재빨리 베개를 던져 내일의 머리를 맞췄다.

제법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베개가 마루에 떨어지자 겨레가 얼어붙었다.

혜성마저 헛기침을 내뱉으며 긴장했다.

내일이 뒤통수를 만지며 뒤를 돌아볼 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상장군! 아니, 제가···. 아니, 이 자식이···.”


겨레가 허공에 양팔을 흔들며 당황하는 사이 내일이 동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을 저지른 하담마저도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일이 문 앞을 비켜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담이 동방을 빠져나갔다.

날쌘 게 특기였던 하담의 장점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내일이 황급히 하담을 뒤따랐지만, 내일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겨레 때문에 휘청거렸다.


“뭐야?”


“죄송합니다, 대장군!”


“이거 놔!”


“못난 벗을 둔 제 잘못입니다. 제 부족한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한겨레!”


내일은 찰떡처럼 달라붙은 겨레를 떼어내기 위해 발을 휘저었지만, 겨레의 악력은 손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


내일의 외침이 천룡관을 울렸고 숙사 곳곳에서 잠에서 깬 천룡들이 뒤척였다.



“헉, 헉.”


하담은 제법 멀리까지 돌아갔다.

뒤를 돌아봤지만, 내일이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겨레와 내일의 성격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하담에게 딱 알맞은 시나리오였다.

겨레가 훌륭하게 내일을 붙잡아준 덕분에 내일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서하담?”


하담이 깜짝 놀라 앞을 돌아봤다.

늘이었다.


“서하담!”


동시에 뒤쪽에서 겨레를 떨쳐낸 내일의 외침이 들렸다.

하담은 재빨리 늘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팔각정을 받치고 있던 기둥 아래였다.

평소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공간도 아니었고 팔각정을 청소하기 위해 들른 자가 아니라면 확인할 곳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헉, 잠시만···.”


하담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은 뒤쪽을 계속 확인했다.


“왜 침소복 차림으로···.”


“그게, 하아···. 상장군께서···.”


내일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하담이 늘을 돌아봤다.

돌아본 하담의 코앞에 늘의 얼굴이 있었다.

하담이 깜짝 놀라 딸꾹질을 뱉었다.


“미안.”


“아니, 딸꾹. 괜찮습니, 딸꾹.”


하담이 손으로 입을 막고서 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늘이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살짝 당황해 웃음을 흘렸다.

하담이 입을 막은 채로 웃는 늘을 돌아봤다.


“아, 대충 상황이 이해돼서 조금 웃었네. 미안하다.”


하담은 숨이 찬 상태로 딸꾹질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가슴을 내려쳤지만, 효과는 없었다.


“놀리는 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늘이 잠시 고민하다 괴로워 보이는 하담을 딸꾹질에서 구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담의 양볼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이 그의 얼굴을 당겼다.

서로의 콧등이 닿을 듯 말 듯했다.

늘이 가만히 하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렇게 하면 멈출 거야.”


하담은 잔뜩 굳은 상태로 늘을 바라봤다.

늘의 모든 얼굴이 눈에 담기자 다른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눈을 담은 흰 피부 하며 굵은 곡선을 이룬 속눈썹, 곧게 뻗은 코, 살짝 벌어진 입술, 그 사이에서 나오는 나직한 목소리까지.

모든 게 다 하담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냥, 그대로 늘로 가득 차버렸다.


“정말 멈췄네.”


반은 장난이었지만, 정말 딸꾹질이 멈춰버렸다.

늘이 손을 떼고선 하담과 멀어지자 하담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의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괜찮아?”


“아, 조금 진정이 됐습니다.”


하담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부여잡고 앞을 바라봤다.

담을 이룬 돌무늬를 세면서 무언가를 잊어야 진정될 것 같았다.


“이렇게 하니 꼭 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던 네가 생각나네.”


하담은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로 온다하니 내일이고 너고 마음이 쓰였겠지.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싶네.”


하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늘의 목소리가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더 빠질 데가 없을 정도로 단단히 빠져버렸다.


“내일 몰래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래도 용케 내가 원하는 대로 내일에게서 도망쳐 온 네가 용하다고 칭찬도 해주고 싶고.”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


하담이 무늬를 스물다섯 즈음 세다가 늘을 돌아봤다.

언제나 제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입이 문제였다.


“솔직히 저는 근범왕의 눈밖에 난 공주님의 행보가 조금 걱정됩니다.”


근범은 늘에게 전혀 무사의 직책을 줄 생각은 없어보였고 하담은 그것을 걱정했다.


“난 전혀 두렵지 않은데 내가 이상한가?”


“근범왕과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싸우게 된다면 물러서지 않을 거야.”


“뭐가 공주님을 바꾸신 거죠?”


하담의 질문에 늘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승이라고 답하면 하담은 믿어줄까.


“옛날 마음은 모두 불에 타 사라졌잖아.”


하담은 늘이 사고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공주님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해도, 무엇이 공주님을 바꾸게 된다고 해도 공주님을 향한 제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무엇이 날 바꾸게 된다고 해도?”


“무사가 검을 뽑았으면 베야죠.”


“나는 왕을 향해 검을 뽑을지 몰라.”


하담이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늘을 바라봤다.

팔각정이 달빛을 가리고 있는데도 하담의 눈에는 작은 달이 살아 있었다.


“저는 왕을 지키고 한라를 지키기 위해 무예를 배우고 천룡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었죠.”


“그렇지. 천룡도는 왕을 지키는 사부가 만든 단체니까.”


“공주님은 어쩌다 불타는 사고에 휘말리셨고 저는 어쩌다 공주님을 만나게 됐을까요?”


늘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저는 공주님을 만난 이후로 바뀌었습니다. 뭐가 잘못됐고 뭐가 옳은 길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됐죠.”


“나를 따르겠다는 소리를 거창하게도 하는구나.”


“맞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라를 지키는 무사지만,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한 무사이기도 합니다.”


늘이 살짝 미소 짓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룡도가 이렇게 바뀌다니, 내가 참 대단한 일을 벌이고 있구나.”


하담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늘의 웃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공주님께서 웃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 내일을 제외하곤 네가 유일한 내 벗이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둘은 그 작은 공간에 쭈그려 앉아 웃음을 삼켰다.

정말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느낌이었다. 하담과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속이 안 좋다고 처소에서 나온 뒤 시녀를 협박했다.”


하담이 늘의 말에 놀라 어색하게 웃다가도 제가 저지른 일인 것처럼 고민하기 시작했다.


“들어갈 땐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뒷일은 나중이다. 어떻게든 들어가겠지.”


“정말 누가 모시는 공주님인지, 배짱 한 번 크십니다.”


“네가 모시지 않느냐.”


늘은 장난스럽게 검지를 튕겨 하담의 이마에 맞췄다.

하담이 따끔한 이마를 매만지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혜성의 미소가 달이라면, 하담의 미소는 태양 같았다.

늘이 머문 어느 삶에도, 하담만큼 환한 미소를 가진 자는 없었다.


“아픕니다. 공주님은 공주님 힘이 얼마나 센지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손가락 한 번 튕긴 거로 사람을 이렇게 몰아가는 것이냐.”


하담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다 문득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생각해냈다.


“정말 궁금하다면 이번 천룡제에 참관하실 때, 단련장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천룡제?”


춘기에 이뤄진 천룡제도 벌써 옛일이었다.

가을 천룡제가 열릴 날도 머지않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천룡제가 열리기엔 더없이 좋은 시기였다.


“아비가 천룡제까지 반대하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대장군께서 허락을 받아내셨다 합니다. 궐내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이니 공주님도 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네가 원하는 건 내가 칼을 쥐고 참여하는 모습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하지만···.”


하담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번엔 근범왕도 참관하실 텐데 공주님이 칼을 쥔다면 천룡제가 무사히 끝나지 않겠죠···.”


근범이 상장군이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천룡제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제 일로 바쁜 것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유희라고 생각했다.

왕이 된 이상 궐내 모든 행사에 관여해야 했으니 추기 천룡제 참여는 필시 이뤄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공주님이 언제 또 칼을 쥘 수 있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전투에서만큼은 능동적인 늘이었다.

하담은 늘이 분명 칼을 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담의 말에 무언가 생각난 늘이 살짝 미소 지었다.


“구경만 하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정말입니까?”


“내가 천룡도의 중요한 행사를 축하하겠다는데, 지엄한 아비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벌하지는 못할게야.”


늘은 머리를 굴리며 또 다른 일을 꾀했다.

하담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가도 정말 그녀가 천룡제에 나타나 천룡제를 빛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의 파장은 하담이 모두 책임지면 되는 일이었다.

공주는 잘못이 없다.


“정말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공주님입니다.”


하담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읊었지만, 닿을 듯이 붙어 있던 늘의 귀엔 간단히 닿은 말이었다.


“그러게.”


늘이 굽힌 무릎을 들어 팔로 감쌌다.


“왕에게 무시당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지.”


“절대 과분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의 반도 전하지 못했는데 과분할 수 없었다.

주고 줘도 모자란 게 공주를 향한 마음이겠지.

닿을 데에 모두 닿아 꽉 차버린 마음은 바다처럼 조용히 흘러가다 고일 뿐이다.

보고만 있어도 벅찬 마음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혜성처럼 글공부에 더욱 매진했다면, 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마음이다.

더 소중한 형태로 늘에게 전해졌겠지.


“네 눈빛 말이다.”


늘은 하담과 똑바로 마주 보고서 그늘로 낯빛을 숨겼다.


“너무 알기 쉬워서 내가 정말 미안할 지경이다.”


알기 쉬운 눈빛이라니···.

하담이 당황하며 눈을 끔뻑였다.

늘은 자신이 하담을 아끼는 것과 하담이 자신을 아끼는 감정이 다른 감정인 것을 알아차렸다.


하담은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한 벗이지만, 그에게 마음을 줄 순 없었다.

그를 보면 뭔가 가슴이 아팠다.

분명 이 마음만큼은 하담과 같겠지.

그러니 내게 너무도 간단히 마음을 준 거겠지.

늘은 조심스럽게 하담의 시선을 피해 앞을 바라봤다.


작은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한다.

하담이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을 다른 감정과 헷갈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담은 너무 순수했다.

두 번이나 탄 자신의 까만 마음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하담만큼은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거야.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런 솔직한 눈을 볼 기회는 많이 없거든. 다들 지쳐버렸으니까.”


“가끔 공주님은 세상을 모두 깨달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걱정이 많기도 하지.”


늘이 웃음을 삼켰다.

늘이 그를 알 듯이, 하담도 늘을 아는 것처럼 걱정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걸 아는 사람처럼.

늘은 자신이 사라진 뒤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 각오 정도는 있어야 했다.


“이렇게만 있어 주십시오.”


하담이 늘의 손을 붙잡았다.

손 사이로 빠져나갈 것 같은 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소중히, 더 꽉 힘을 주었다.


“세상에 두 명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봐.”


늘 역시 하담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두려움이 없는 사람.”


늘은 자신만을 떠올렸다.


“나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해.”


제 할 일을 끝내고 모두를 등질 수 있어야 돌아갈 수 있는 삶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담은 단호한 눈빛으로 늘을 바라봤다.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자의 바람은 가벼운 것이 아닐 테지요.”


팔각정 기둥 아래로 여름을 끝내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고 말 것입니다.”


늘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넌 그럴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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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PILOGUE 19.02.23 45 0 5쪽
40 40. 비극의 희곡 19.02.22 42 0 16쪽
39 39. 재생 19.02.20 43 0 14쪽
38 38. 화형식 19.02.18 43 0 16쪽
37 37. 청룡과 적룡 19.02.16 49 0 16쪽
36 36. 뱀들의 반란 19.02.15 48 0 14쪽
35 35. 분란 19.02.13 47 0 16쪽
34 34. 변화하는 한라 19.02.11 40 0 17쪽
33 33. 우리의 진심 19.02.09 42 0 14쪽
32 32. 재회 19.02.08 38 0 15쪽
31 31. 사라지는 이름에 대하여 19.02.06 44 0 13쪽
30 30. 멸(滅) 19.02.04 45 0 17쪽
29 29. 골 19.02.02 41 0 17쪽
28 28. 추풍 잔치 19.02.01 47 0 19쪽
27 27. 혼례 19.01.30 49 0 16쪽
26 26. 특별대 19.01.28 44 0 14쪽
25 25. 레이 왕자 19.01.26 53 0 14쪽
» 24. 하담의 마음 19.01.25 45 1 17쪽
23 23. 용왕(龍王) 19.01.23 49 0 18쪽
22 22. 심문회 19.01.21 60 0 17쪽
21 21. 연정 19.01.19 51 0 14쪽
20 20. 오늘의 삶 19.01.18 56 0 14쪽
19 19. 전생 기억법 19.01.16 57 0 16쪽
18 18. 지는 오늘 오는 오늘 19.01.14 61 0 12쪽
17 17. 두 명의 대장군 19.01.12 65 0 16쪽
16 16. 불타는 학살자 19.01.11 63 0 15쪽
15 15. 전쟁의 불씨 19.01.09 62 0 11쪽
14 14. 태양과 달 19.01.07 62 0 16쪽
13 13. 복귀 19.01.05 65 0 13쪽
12 12. 문호 19.01.04 64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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