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언 - 1.
“ 이곳은 칼리어스 공작가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
100미터도 채 남지 않은 거리를, 마음만 먹으면 한 걸음에도 달려올 수 있는 거리를, 수없이 많은 날을 잠 못 이루게 한 고민의 무게만큼 그렇게 서서히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더 이상 참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한눈에 보기에도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진 젊은 기사가 몇 걸음 먼저 다가와 묻는다.
“칼리어스 공작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 그래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말한다.
차림은 빈곤하나 추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된 아머와 검, 떡 벌어진 어깨, 투구 때문에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에는 충심이 가득한 이십대 초반의 모습이다.
“ 죄송하지만, 공작 전하와 사전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
“ 없습니다 ”
잠시 쳐다보던 기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예의를 잃지는 않은 채 말한다
‘없다’는 너무 쉽고 단호한 대답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는 듯,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이 자리에 있다 해도 느낄만 큼, 얼굴에는 황당하고 난처한 기색이 완연하다.
누구라도 저 입장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사는 무시하거나 책임감을 회피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칼리어스의 전통인지, 이름 모를 젊은 기사의 태생적 성품인지, 그도 아니면 철저한 기사 훈련을 받은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곳은 칼리어스 공작가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공작 전하는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
" 네 알고 있습니다 "
" 혹시 어느 분이신지, 그리고 용무를 말씀해 주시면 보고를 드린 후 연락을 드리겠습니 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처음 와서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공작을 만나겠다는 평범한 외양의 젊은이에게, 이 만큼의 관심과 배려를 주는 것 만해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 지고 여기까지 온 수고로움이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든다.
“ 이것을 공작 전하께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쪽 주머니속에서 작지만 견고한 보석 주머니를 열어 작은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소중한 보물은 만지듯 -실제로 소중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기사에게 반지를 건넸다.
순간 반지를 쳐다본 기사의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지어졌다.
저 충심스러운 기사도 꽤나 놀란 모양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저 기사가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그도 아니면 저 반지로 인해 내가 해야할 이야기와 거쳐야 할 과정들이 훨씬 줄어듬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 이 반지와 함께 전해 드릴 이야기는 없으신지요?”
기사의 몸짓과 목소리에 긴장과 초조, 호기심, 궁금함, 조급함 등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온갖 표정이 동시에 나타났다.
저 충심의 기사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득 새로워져,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맺치는 것을 참을 수 가 없다.
“ 그 반지는 아버지께 물려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루이스입니다“
“ 아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한스입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습니다“
“ 그 반지를 공작 전하께 전해 주시고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저는 나그네의 쉼터란 여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없으면 여관 주인에게 말씀을 전해 놓으시면 됩니다 “
“ 알겠습니다”
...
그렇게 언젠가는 부딪쳐야할 일이라며,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기사를 등지고 돌아섰다.
아직 이곳에 이렇게 서있는 것도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 정도의 대우만으로도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아마 다른 귀족가였다면 벌써 욕설이 난무하고, 매질이 쓰나미처럼 덥쳤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곳으로 보낸 사람의 이야기를 저 젊은 기사에게 조금 자세히 말했다면 기사는 또 다른 표정을 지었을 지도 모른다.
등 뒤로 기사가 성급히, 품위도 잊고 공작성을 향해 달리는 것이 너무 선명히 느껴진다.
눈앞으로 칼리어스 공작령의 수도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작성이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는지라 내려다보는 경관은 칼리어스 공작가의 색채를 느끼고도 남는 그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움 속에 나름 조화로움을 갖추고, 500년 도시를 관통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큰 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밝음보다는 어두움이, 화려함 보다는 침침함이 보는 이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공작령 수도의 모습은 칼리어스의 현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혼란스러운 칼리어스 공작령 수도의 모습만큼이나 머릿속도 복잡하다.
과연 지금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과연 잘하는 것인가란 의문이 꼬리를 문다.
몇 달을, 어찌보면 10년 가까이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이 되니 또 다시 상념이 밀려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아버지 유언과 어머니가 남긴 말의 의미가 너무 무겁고 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앞으로 얼마나 큰 변화가 내게 닥칠지, 그리고 그 변화로 인해 내 앞에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호기심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 잘 다녀 오셨습니까?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나그네 쉼터의 종업원이, 아침에 쥐어 준 몇 페니 덕을 톡톡히 보는지 아니면 한끼라도 더 팔려는 욕심때문인지 인사와 함께 주문하겠느냐는 말이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나온다.
어차피 공작과의 접견이 당장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이곳 여관에 먼저 짐을 풀었었다.
“ 간단한 요깃거리를 좀 준비해 주게! 그리고 약한 술도 있음 좀 주고”
“ 네. 저희 주인님께서 직접 담근 와인이 잘 익었다고 하시던데...”
“ 그래 내방으로 좀 갔다 주게 ”
“ 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
신이나 달려가는 모습에서 또 다른 댓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였다.
하긴 지금 이곳의 상황은 여관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기회는 아니다.
하물며 주인도 아닌 어린 종업원에게는... 그리고 저 또한 상술이겠지....
직접 담갔다고 하고는 아무 양조장에서나 대량생산한 술을 가져다가는 가격을 올려 판매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현 상황에서는 말이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저 소년은 주인에게 칭찬과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지...
아니면 현 칼리어스 공작령의 상황은 주인이 직접 담근 것이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내일의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구해 마실 수 있는 술이니까...
아니면 이런 나의 생각이 처음부터 틀렸을 수도 있겠지.
이곳은 칼리어스공작령의 수도이니까.
순간 이런 기대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낮설게만 느껴졌다.
무슨 과일로 담갔는지는 모르지만 직접 담갔다는 술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비록 포장도 볼품 없고 보존마법도 걸려있지 않아 신선함은 떨어지는 듯 하나, 맛과 향은 종업원의 말이 사실임을, 이곳이 칼리어스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른손으로 술을 따라 왼손으로 마시며 복잡한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들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귀를 찢어놓을 듯 밀려온다.
영지민의 삶을 존중하고 영지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가장 큰 벌이라는 이곳 칼리어스에서, 저러다 말에 사람이라도 치이면 어쩌려고....
“ 공자님! 급히 모셔오라는 공작 전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여관문이 부숴질 듯 비명을 지른다.
아까 본 그 기사다. 한스라고 했던가?
서둘러 말을 마치곤 내 답도 듣기도 전에, 숨돌릴 틈도 없이 길을 잡는다,
있는 그대로의 차림에 얼굴에는 약간의 취기를 머금은 채 뒤를 따랐다.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술기운을 빌어 말을 쉽게 풀어갈 수도 있으니까...
한스 기사도 차림새와 술을 먹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래도 공작을 만나는데...
그리고 그렇게,
기사 한스덕분인지 아니면 별도의 명령이 있었는지 암튼 공작가에서 보내준 마차를 타고 아무런 검문과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곧장 영주성안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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