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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노아
작품등록일 :
2019.01.01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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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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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4페이지

DUMMY

어렸을 때의 기억은 잊고 싶어도 쉽게 잊혀 지지 않았다. 몸에 남은 흉터처럼.

라테르. 레인이라는 이름의 마법을 얻기 전의 나의 이름.

나는 에스트 라테르. 어느 한 고아원의 버려진 아이였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였을 때 버려졌기에 부모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왜 나를 버렸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떤 이유였을까. 어떤 이유 때문에 나를 이런 지옥에 버리고 갔을까.

힘이 들 때마다 생각하던 것이다.

내가 버려진 라테르 고아원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장이 고아원을 차린 이유는 나라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지,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눈에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자신을 위한 돈줄로 보였을까? 아니면 귀찮은 짐으로 보였을까?

원장은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주로 잡일을 시켰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화를 내며 욕을 했고 폭력을 행했다.

보통은 주먹으로 때리거나 걷어 찰뿐이었지만,

가끔은 머리를 물이든 항아리에 밀어 넣거나 달군 쇠 꼬치로 피부를 그어버리는 등의 심한 고문행위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만 잘하고 말대답만 안하면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원장에게 조금의 반항심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따르기만 했다.

맞는 것은 무서웠으니까.

어린 내가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만 한다면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

원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술이나 약을 달고 살았고, 아무 잘못이 없더라도 기분이 안 좋으면 지나가던 아이들을 괴롭혔다.

나도 아무 잘못 없이 맞은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멍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지만, 화상흉터는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라테르 고아원은 그런 지옥이었지만, 밖도 우리에겐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고아원을 나가더라도 갈 곳이 없었으니까.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적은 단 하나 뿐이었다.

누군가가 입양해 가는 것.

그것만이 고아원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온다 하더라도 자신이 뽑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리 기대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할 때도 입양을 기대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나도 그리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모든 아이들은 아마 마음속으로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었다.


“네가 에스트니?”


어느 날 고아원에 찾아온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부부. 원장은 두 사람 중 여성을 레인 부인이라고 불렀다. 레인 부인은 꽤나 나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

나도 레인 부인의 인상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레인 가에 입양 되었고 에스트 라테르가 아닌 에스트 레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삶을 부여받았다.


레인으로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가 되신 분은 남작의 지위를 갖고 있던 레인 남작이었기에 나는 귀족의 신분을 얻게 되었으니까.

고아소녀가 귀족의 신분을 갖게 되다니. 엄청난 신분 상승이다.

어머니가 되신 레인 부인은 친절한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원장과는 천지 차이다. 자기 직전에는 책을 읽어주셨고, 내가 집안일을 하면 칭찬을 해주셨다.

내가 다치면 걱정하며 상처를 치료해주셨고, 천둥에 겁을 먹고 있으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듯하게 안아주셨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투성이였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따듯했기에. 너무나도 따듯하고 행복했기에 나는 내가 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레인 가에 오게 되고 꽤나 시간이 흘렀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그 날은 어째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눈을 뜨고 감는 행동을 반복하다 시계가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살짝 열었고 그 틈으로 어머니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미안해. 아들. 미안해.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머니는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을 끌어안고 울고 계셨다. 내가 레인가에 입양되기 전 원래 레인의 아이였던 그 아이의 사진이다.

듣기로는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그 아이가 없어진 덕에 나는 레인가로 올 수 있었다. 무척이나 이기적인 이야기란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그 지옥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들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졌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억지로 의식저편으로 날려 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윽!!”


전신을 얻어맞는 감각. 달군 쇠꼬챙이가 피부를 찢어나가는 감각.

머리를 붙잡혀 물에 쳐 박히는 감각.

그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괴롭고, 괴롭고 괴로웠다. 아프고, 아프고 아팠다.

무슨 표현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저 괴롭고 아프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하지만 곧 아프다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이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탓에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나를 향한 불합리한 폭언과 욕설들이 몇 번이고 들려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딘가에 사과를 하고 있었을까. 정상적인 판단조차 불가능했다.

사과의 말을 제외하고 모든 말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폭언은 들려오지 않았고 아픔도 없어졌다. 방금 전의 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 나는 머리를 들었고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뭐야 이거?”


원래의 내 머리색이 아니었다.

평범한 갈색이었던 내 머리는 잿빛으로 더럽혀진 회색이 되어있었다.

--------------------------------------

아자일 저택의 응접실.

아리스와 그레이는 후작의 저택에 찾아와 이곳에서 후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차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늙은 집사는 방금 막 우려낸 홍차를 아리스와 그레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는 두 사람의 감사인사를 들은 후에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아가씨. 계획은 있으신가요?”

“일단 후작님과 에스트 씨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렇습니까.”

“별말 없으시네요. 솔직히 불안한데.”

“뭐. 아가씨의 선택이니까요. 게다가 저는 이미 한 번 아가씨의 그 진심에 설득 당했었으니까. 아가씨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왠지 부끄럽네요.”

“미안.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지?”


문이 열리고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는 모습의 페르디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후작님? 피곤해보이시는데요.”

“어제는 파티 때문에 일을 다 빼먹었으니까. 그거 처리하느라 밤을 새다보니. 그래서 그쪽이 어제 말한 일행?”

“그레이 리슈타인입니다.”

“페르디 아자일이라고 합니다.”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페르디에게 손을 건넸고 페르디는 그 손을 맞잡아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 후 페르디는 두 사람과의 이야기를 위해 건너편의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니? 그레이 씨를 소개해줄 목적으로?”

“아뇨. 그것도 있지만. 실은 어제 에스트씨를 만났었어요.”

“정말이야?”


페르디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격하게 반응했고 아리스는 그의 반응에 놀란 듯 살짝 위축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페르디는 평정을 되찾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실례했네. 미안. 그래서 에스트를 만났다고?”

“네.”

“잘 지내고 있었어?”

“네.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네. 그 날 무도회 이후로 만나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은 후작님을 만나러 올 수 없어요.”

“어째서?”

“에스트 씨는 후작님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으니까요.”

“흐음.”

“에스트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어서 후작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요. 설령 모두가 허락하더라도. 후작님이 자신을 받아들여준다 하더라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어요. 오늘은 그 말을 전하러 왔어요.”

“그렇구나.”


페르디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에 꽤나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가면무도회의 의미를 알아주지 못한 것 같네.”

“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에스트 라테르라는 이름도 사실 거짓말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름이 거짓일지라도.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건 더 이상 상관없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야.”


자신의 품으로 손을 가져다댄 페르디는 품속에서 붉은색의 눈 가면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면무도회는 그런 의미였어. 하지만 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네.”


페르디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나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마음이.

네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것 같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을.

어떤 과거를 갖고 있더라도,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테이블에 놓인 가면을 어루만지며 페르디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것은 나를 실험하려고 한 거니?”

“실험보다는 후작님이 어떤 마음으로 에스트 씨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냐. 나도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었으니까. 방금 이야기는 그녀에게 전할 생각이니?”

“네. 혹시 싫으신가요?”

“아니. 그렇다면 한 가지 더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뭔데요?”


대답을 위해 입을 연 페르디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역시 이건 직접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가요.”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와.”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디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자 늙은 남성이 모습을 보였다.

아리스와 그레이에게 홍차를 건네주었던 집사다.


“무슨 일이야?”

“그게.”


아리스와 그레이를 신경쓰는 듯 망설이던 집사는 페르디에게 다가갔고 작은 소리로

페르디에게 속삭였다.

집사의 답을 들은 페르디는 놀란 듯 커다래진 두 눈으로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고, 혀를 차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미안해. 갑자기 약속이 생겼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 수 있을까?”

“알겠어요.”

“정말 미안해. 찾아와줬는데.”

“아니에요. 저희도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


페르디는 집사에게 두 사람을 마중해줄 것을 부탁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꽤나 얼굴이 좋지 않아보였기에 그가 걱정되어 아리스는 저택을 나가는 길에 집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집사는


“죄송하지만 집안 사정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라는 답밖에 주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저택 밖으로 보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쪽도 꽤나 궁금하지만, 일단은 다른 일부터 생각하도록 하죠. 후작의 마음은 충분히 들은 것 같습니다. 다음은 에스트 씨의 차례죠?”

“그렇네요.”


에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에스트를 설득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을, 저주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까. 아리스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말은 결국 타인의 말일 뿐이니까.


‘후작님과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텐데. 하지만 에스트 씨는 스스로의 과거 때문에 멀어지려 하고 있잖아. 무슨 말을 해야 좋은 걸까.’


그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준다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에스트가 했던 말이 계속 아리스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 정말로 페르디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녀는 페르디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은 하더라도 페르디가 싫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다시 한 번 페르디를 만나주기를 바랬지만 그녀의 저주와 과거를 알아버리니 그 말을 쉽게 꺼낼 수도 없었다.

이도저도 못하겠는 상황에 답답한 아리스는 생각이 깊어졌고 그에 집중하느라 위험한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가씨!”


그레이가 아리스를 부르며 뒤로 끌어당겼다.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아리스의 눈앞으로 마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만약 그레이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마차에 치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리스는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하아. 놀랐습니다. 앞을 보고 걸으셔야죠.”

“죄송해요.”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게. 실은 에스트 씨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그에 대해 생각하느라 좀 멍했던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레이는 흐음 하고 목소리를 내다 아리스가 아직 주저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건넸다. 그레이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 아리스는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그레이가 손을 놓아주지 않아 벗어날 수 없었다.


“선생님?”

“잠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네?”


아리스는 그레이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지만 그레이는 비밀이라 말하며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아리스를 이끌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 외곽의 낡은 시계탑이었다.

시계탑이라곤 해도 시침과 분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에 시계탑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런 마을 외곽에 있는 시계탑이니 활용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은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는 설마.”

“네. 에스트 씨가 후작과 만난 곳입니다. 미리 어디인지 들어놓았기에 한 번쯤 와보려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있었던 장소.

그런 곳에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아리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이끌며 그레이는 시계탑을 올랐다.


“오래된 탓에 많이 낡아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레이의 말대로 시계탑의 내부는 밖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바닥과 계단은 낡아서 금방 무너질 것 같았고, 창문은 깨져서 곳곳에는 유리조각도 떨어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에는 나무가 어긋나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그레이는 앞장서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유리조각은 발로차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혹시라도 바닥이 꺼지는 곳이 없는지 자세히 확인했으며, 계단을 오를 때는 위에서 아리스의 손을 잡아주었다.


“생각보다 높네요.”

“거의 다 왔습니다.”


끄트머리에서 빛이 보였다. 어두운 시계탑 안을 비추는 빛을 향해 그레이가 먼저 나갔고, 뒤따라오던 아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이끌었다.


“도착했습니다.”

“와아. 여기선 산드리온이 다 보이네요.”

“기분전환하기엔 좋은 곳이죠.”


그 말을 통해 아리스는 그레이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이유를 이해했다.

기분전환. 아마 고민에 빠진 자신을 위해 이곳에 데려와준 것 같다.


“고민에 너무 빠져버리면 좋지 않죠. 기분전환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하늘을 보는걸 좋아하시는 것 같았으니까, 좋아하실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마 그녀의 행동을 줄곧 지켜봤기에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자신을 향한 친절과 배려의 따듯함에 아리스의 가슴에서 다시 한 번 붉은색 감정이 피어올랐다.


“너무 혼자 고민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의지하셔도 되요. 같이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에스트 씨를 설득시킬 방법을.”

“고마워요. 선생님.”


자신을 대해주는 따듯한 태도에 붉은색 감정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는 이 태도들이 그저 제자를 위한 것이라면 어쩌지. 라는 불안이었다.

그레이가 뒤돌아봐주길 원하여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예전이었다면 이런 생각에 금방 우울해졌겠지.’


더 이상 이런 불안에 깊게 빠지진 않는다. 소꿉친구를 통해 당당히 나아기로 결정했으니까.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면 어떤가. 그건 예전에도 같았다.

시간을 들이더라도 천천히 자신을 의식하게 만들 것이다.

아리스는 작은 불안을 의식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과 에스트를 비춰보는 것이다.

둘 다 힘든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 포기하고 내려놓으려 한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아리스는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에스트는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려고 하고 있다.

에스트가 포기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걸까.

자신과 에스트의 차이를 생각하던 아리스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생각해냈다.


“선생님. 해답을 떠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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