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 그리고 만남2
"형, 어디 아파?"
"아파 보여?"
"새벽에도 일찍 로그아웃했고, 잠 안 온다고 수면제도 먹었잖아. 그리고 눈이 빨개."
광해는 피식 웃었다. 속에 맺힌 멍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방금 샤워했잖아. 샴푸 눈에 들어가서 충혈된 거야."
광해가 점심 먹으면서 일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자 셋도 게임 하루 쉰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광해가 치가 떨려 몽둥이로 패고 싶을 휴가 계획을 세웠다. 20대 남자 셋이서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셋이 현성이 차로 신나게 출발했고, 광해는 미적거리며 겨우 떠났다. 뭐든 명확하게 잘 정리하고 결론도 빠르게 내렸는데, 지금 광해 마음속은 마치 양념통이 뒤집힌 듯 온갖 맛으로 범벅되었다.
'운전면허 딸까? 되게 쉽다고 하던데.'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표를 사고도 마음속에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았다.
'잘하는 일인가? 찾아내도 후회 평생 못 찾아도 후회라면, 어느 쪽이 덜 후회할까?'
심지어는 자신이 뭘 고민하고 있는지도 헷갈릴 정도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택시들이 있었다. 평소라면 버스를 타든지 좀 걸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든지 하겠지만, 마음이 복잡해서 그냥 바가지 쓸 각오로 터미널 택시에 탔다.
"병원은 왜? 서울에서 왔으니 환자는 아니겠고. 친척이 입원하셨수?"
"네, 병문안 왔습니다."
"내가 잘 아는 꽃집이 있는데, 중간에 들려서 꽃이나 사야지 않겠수?"
"괜찮습니다."
"병원 근처는 꽃도 비싸고 과일 바구니도 엄청 비싼데."
"괜찮아요."
광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기사는 그 뒤로 입 다물고 조용히 운전했다. 병원으로 가는 손님이라면 십중팔구 기분이 좋을 수 없다. 퇴원 축하하러 가는 길이라면 괜찮겠지만, 임종을 지켜봐야 하는 손님이라면 말실수로 얻어맞을 때도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기사는 사전에 얘기한 금액이 아닌 미터기에 찍힌 금액으로 받았다. 운전 내내 광해의 어두운 기운에 눌려서 숨이 가빴다. 인상은 평범하지만 덩치도 꽤 큰 편이어서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사정이 별로 안 좋은가 보구나.'
허름해 보이는 병원 외관에 마음이 아팠다. 몇 분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마음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으로 4층에 올라간 광해는 입원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몇 번 두드려도 아무 반응 없어 살짝 문을 밀었다. 안에는 얼굴을 찡그린 채 잠든 환자 한 명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옮겼다. 체구는 큰 편인데 왜소해 보였다. 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얼굴과 밖에 내놓은 앙상한 팔뚝 때문일 수도 있고, 거무칙칙한 낯빛과 피부색 때문일 수도 있다.
'제대로 찾았구나.'
얼굴을 보니 부정할 수 없었다. 오관 하나하나는 똑같은 느낌이 아니지만, 얼굴 형태랑 오관의 위치가 판박이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서 질문했다.
"문병 왔습니다."
"너무 아프다 하셔서 진통제랑 수면제 놔드렸어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야 깨실 거니까 6시 이후에 오시면 됩니다. 지금은 깨워도 못 일어나요."
"무슨 병이고 차도는 좀 있으신지요?"
"담당 의사 선생님께 직접 들으세요. 이런 거 아무한테나 함부로 말하면 안 되거든요."
조금 더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꾹 막혀있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가서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니 갑자기 오한이 몰려왔다. 미처 몰랐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땀이 흠뻑 나서 몸이 다 젖었다.
황급히 일어난 광해는 갈아입을 속옷을 사서 찜질방으로 갔다. 감기 걸려서 게임 못하면 동생들에게 민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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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운은 경매장 사이트를 몇 초에 한 번씩 새로고침 했다. 새로운 입찰자가 생기면 알아서 정보가 바뀌는데, 마음이 울렁거려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다.
"뭐지? 늑대왕 세트는 죽일 듯이 가격 올리더니, 이번엔 왜 이렇게 잠잠하지?"
현재 인터넷은 레전드 경매장에 올라온 아이템 하나 때문에 난리가 났다. 레전드 게임은 여태껏 최고로 비싼 아이템도 5만 골드를 넘은 적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200만 골드, 현찰로 26억의 아이템이 올라와 버렸다.
사실 가끔 재미 삼아 아이템을 엄청 비싼 가격으로 올려 장난치는 유저들도 있었다. 관심 좀 끌어보려는 관종들이 어그로를 끌곤 했다.
다만, 이번엔 아이템이 올라오자마자 누군가 200만 골드로 입찰했다는 점이 달랐다. 이미 레전드 26억 아이템이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속보] 레전드 26억 아이템 새로운 경쟁자 출현.
└ 미친, 누가 천 골드 올려버렸어.
└ 전함이 무슨 템이지? 무기 아님 갑옷? 설마 그 귀하다는 귀걸이?
└ 안녕하세요. 최신 입찰자입니다. 지금 현금 30억 쌓아놓고 있으니 괜히 덤비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 현금 30억씩 쌓아두고 사는 분이 참 한가하네요. 매일 댓글만 수백 개씩 다시네.
└ 유저 유입이 줄어서 유니콘이 수작 부리는 거라는데 왼쪽 파이어 에그 건다.
└ 시발. 가상현실 기기 주문이 10만 개 이상 밀렸다는데 유입이 줄긴 개뿔.
└ 곧 최적화한 기기를 450에 팜. 친구가 유니콘 직원임.
천 골드 올려버린 건 반경운이었다. 최저 시작가가 100만 골드인 템이기에 1골드만 올려서 약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최소 천 골드 올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 경매 마감 시간이 거의 다 되는데 최종 입찰자는 여전히 반경운이었다. 200만1천 골드로 게임 속에서 전함을 사게 되었다.
"뭐야? 이 시발 새끼가. 날 갖고 노는 거야?"
안절부절못하던 반경운은 끝내 참을성이 바닥났다. 어렵게 마음먹고 전화 걸었는데 연결음이 길어지면서 반경운의 속이 재가 되었다.
[뭐야? 명절에도 문안 없던 놈이 갑자기 왜 전화해?]
"흐하하. 이번엔 내 승리인 것 같구나. 전번에 늑대왕 세트는 셋 다 너한테 뺏겨서 분했는데, 이번엔 너도 쫄리나 보지?"
[음. 경매 마감까지 5분 남았네? 원래 마감 전에 가격 올리려 했는데, 네가 이토록 기뻐하니 형인 내가 양보해야지. 이번엔 네가 먹어라.]
반경운은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아까부터 손을 계속 닦아서 바지가 흥건하게 젖었다.
"천하의 고려신문 황태자께서도 쫄리나 보구나. 이번에 양보한 정을 생각해서 다음에 탐나는 물건 있으면 미리 말해줘. 내가 한 번은 양보해줄게."
[씹새끼야. 짖지 말고 꿇어. 그럼 이번은 봐준다.]
"본색을 드러내셨군. 속이 부글부글 끓나 보구나."
[허세는. 네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면 마감 전에 내가 입찰한다. 네가 이대로 뻗대면 난 입찰 포기할 거야. 경쟁자 템이라서 빼내오는 게 주목적이었어. 어차피 템이 그놈 손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야. 각도기 잘 재라.]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마감까지 4분 남짓. 시계를 보니 또 화가 치밀었다. 할아버지가 사촌 형인 반형운에게 사준 시계를 보고 똑같은 걸 사려 했는데, 한정품이라서 못 구하고 디자인이 비슷하지만 훨씬 싼 모델로 구매했다.
반경운이 주저하는 사이 통화가 종료되었다. 반형운 쪽에서 말도 없이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벽에 던지려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다이얼을 겨우 눌렀다.
"형, 나 지금 무릎 꿇었어. 제발."
[발바닥 말고 무릎을 땅에 대라고.]
분노, 후회, 억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왔지만, 저 셋이 가장 강렬하게 반경운을 괴롭혔다.
"형, 진짜 꿇었어. 내가 이렇게 빌게. 다신 형한테 안 개길게."
무릎을 꿇은 반경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코가 갑자기 막혀와서 입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미국 가서 거기 대학 다니면 날 이길 것 같더냐? 개의 새끼는 강아지고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예요. 시발, 개새끼가 똥 안 먹는다고 늑대 될 것 같아? 똥개 씨를 받아 태어났으면 그냥 똥개인 거야. 평생 고기 먹어도 똥개라고.]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줘."
[네 아비한테도 똑똑히 전해. 지금까지 가만 놔둔 건 귀찮게 앵앵거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근데 내가 요즘 기분이 별로 상쾌하지 않아. 그러니까 알아서 기라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빨리 입찰해줘."
[가족끼리 웃는 얼굴로 볼 수 있도록, 네가 좀 노력해줘. 알았지?]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를 안고, 반경운은 무릎을 꿇은 채 콧물까지 흘리며 엉엉 울었다.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쾌청한 하늘이지만, 반경운의 하늘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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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가 울리는 소리에 깼다. 감기 걸릴까 봐 찾은 찜질방에서 그만 잠들어버렸다. 매너모드로 전환하지 않은 광해에게 사방에서 책망의 눈길이 쏟아졌다.
황급히 전화를 받은 광해는 구석으로 도망갔다.
[형. 경매장에 전함 올린 거 형이야? 해킹당한 건 아니지?]
"어, 미안. 내가 너희한테 말 안 했어?"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계속 멍해 있었던 거야? 어차피 그거 형 물건이잖아. 팔든 말든 형 자유지 뭐. 근데 나 같아도 제정신은 아닐 것 같다.]
"미안, 나 지금 일 있어서 길게 통화 못 해. 일 끝나면 전화 줄게."
[알았어. 우리 지금 맛집 찾고 있거든. 인터넷에 의지하지 않고 감으로 찾는 거야. 다음엔 형도 같이해. 이거 진짜 레전드만큼 재밌어.]
광해가 26억 번 거로 길게 호들갑 떨지 않았다. 오히려 맛집 찾는 데 더 열성인 모습이었다.
[속보] 레전드 아이템 26억 원에 낙찰. 레전드 아이디 네크로는 누구?
내용은 보지도 않고 바로 꺼버렸다.
'여유가 갑자기 엄청나게 커졌구나. 그럼 가서 왜 날 버렸는지나 들어보자. 그리고 어떤 대답을 들었든 내 인생의 궤적을 비틀지 말자.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행복을 향해 전진하는 거야.'
옷을 차려입고 나가서 병원으로 걷다가 꽃집이 보였다.
"조화 있나요?"
"네, 있습니다. 혹시 병문안 가시나요?"
"어떻게 아셨어요?"
"병문안엔 생화를 안 가져가죠. 꽃가루 때문에 문제 되기도 하지만, 생화는 며칠 안 가서 시들거든요. 그럼 환자분 기분이 엄청 언짢을 거잖아요."
"중간 크기로 하나 주세요."
광해는 알레르기만 생각했지 생화가 시들면 환자 기분이 어떨지 생각도 못 했다.
"사실 갓 꽃망울 맺은 생화를 선물하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보통 생화는 환자 병실에 못 들이게 해요. 요즘 기술이 좋아서 조화도 생화랑 구분이 어렵고 향수로 좋은 냄새도 나게 한답니다."
'생화는 진짜, 조화는 가짜. 그런데 내겐 입양해서 길러주신 부모님이 진짜고, 낳아서 버린 부모가 가짜야.'
여러 향이 섞여서 마음마저 상쾌하게 해주는 꽃다발을 들고 병원으로 걸었다. 겨울이라 이미 가로등이 켜졌다. 저녁놀이 처량하게 보이는 건, 광해 마음이 아직도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도 잠자고 있었다.
'김태영, 나 원래 김 씨구나.'
문자로 이름을 이미 받아봤는데,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꽃바구니를 적당한 곳에 두고 오후에 왔을 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늙으면 저런 얼굴이 되겠구나. 인상은 나쁘지 않은데. 그땐 마음의 여유가 엄청 부족했었던 거겠지? 세상이 각박한 거지 사람이 나쁜 건 아니라고 했었지.'
이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그 여자가 생각났다. 상대가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말 몇 마디로 광해 인생에 밝은 불을 밝혀줬으니.
"저, 누구세요?"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도 자그마하고 얼굴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그런데 복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차림새와 비슷해 보였다.
"김태영 씨 병문안 왔는데요. 어떻게 되세요?"
"우리 아빠 알아요? 아빠 지금까지 친구 한 명 없었는데."
'유전이었구나. 나도 친구 없는데.'
현성이와 성필이는 동생이다.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에 광해는 피식 웃어버렸다.
"사기꾼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세요."
"죄송해요. 가끔 지리산 도사요 북한산 보살이요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돈 뜯어내려고 하거든요. 당한 적은 없지만,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덴 다들 재주꾼이라서."
'요즘 또래 말투 아닌데.'
"오해해서 미안해요. 여기 앉으세요. 남은 침대 모두 사람 없거든요. 저는 가서 차를 끓여올게요."
2분도 안 되어 컵에 녹차 한가득 따라서 광해에게 건넸다. 대놓고 살피진 못하고 곁눈질로만 봤는데, 광해 자신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아빠랑 어떻게 아시는데요?"
"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나면 맞는지 확인하려고요."
"그럼 그렇지. 아빠는 지금까지 친구 한 명 없었어요. 오죽하면 전화기도 없어요."
병실을 청소한 여자아이는 광해에게 저녁 먹었냐고 질문했다.
"병원 밥 싸거든요. 게다가 안면 다 익혀놔서 나랑 같이 가면 밥도 채도 많이 줘요. 여기서 저녁 드실래요?"
"아니요. 점심 늦게 먹어서 배가 안 고픕니다. 이따 따로 먹을게요."
여자아이는 저녁 먹으러 나갔다. 20분도 안 되어 식판에 죽에 나물 몇 가지를 담아서 돌아왔다. 양이 적은 걸 보니, 환자 몫의 식사인 것 같았다.
"언니,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깨요?"
"평소랑 똑같은 양으로 넣었는데. 그리고 오래 주무시면 좋은 거야. 근데 저런 듬직한 남자친구는 어디서 주워왔어?"
"언니도 참.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에요. 아빠랑 아는 사이라던데."
"난 또. 네 미모에 홀려 찾아온 열혈 청년인 줄 알았지."
'다 들려. 일부러 들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장 전혀 안 한 얼굴임에도 무척 귀엽고 호감 가는 얼굴은 맞았다. 그래도 겨우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인데, 병원까지 따라오는 멍청이가 있을까 싶었다.
"나 오늘 밤 당직이니까 피곤하면 숙직실에 가서 자."
"나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언니 말동무해 줄게."
여자아이 목소리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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