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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19.01.01 12:57
최근연재일 :
2019.08.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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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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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1(재업)

DUMMY

마침내 질풍의 카에르는 악룡 ‘헤와이 카 예아’의 심장에 창을 꽂았지.

악룡은 크게 울부짖었어.

그 엄청난 소리에 대지가 솟아올라 마리차이 산맥이 생겨났다 하지.

악룡은 다섯 영웅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을 노려보며 말했어.

지금 내 마지막 힘을 다해 나에게 대항한 너희 모든 종족들을 저주하리라.

내가 죽어도 나의 권능과 나의 피조물들이 너희를 사냥하리니

그 기간은 너희가 멸절될 때까지 지속되리라.

그리고는 큰 빛에 휩싸여 폭발과 함께 소멸해 버렸어.

그 폭발이 있던 그곳은 지금의 돌아오지 않는 땅,

안바이람이 되어버렸지.

영웅들과 그 일행들은 간신히 그 폭발에서 살아남았지만

악룡의 저주가 실현될 것이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누군가 그 저주를 막아야 했지.

그때, 질풍의 카에르가 다른 영웅들에게 말했어.

내가 이곳의 바로 앞에 남아 저주가 퍼지는 것을 막을 테니 사람들을 이끌고 먼 곳의 안전한 땅으로 이동하라고.

그리고, 질풍의 카에르는 그의 용기에 감동해 남기를 자처한 사람들을 이끌고 안바이람이 끝나는 이곳에서 우리나라인 아사롬을 세웠어.

그가 바로 우리 아사롬의 첫 왕이신 영웅왕 카에르시지.

영웅들과 함께 악룡 ‘헤와이 카 예아’에 대항했던 수인족들 중 황금 갈기족, 검은 산족, 하얀 송곳니족, 밤 소리족은 카에르와 함께 남아 그와 함께 소하라로 가서 나라를 만들었지.

그들은 그때부터 대대로 안바이람과 마수의 숲 ‘카 네아’에서 몰려오는 마수들을 막으며 살게 되었단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가죽으로 벽을 댄 작은 방 안이었다.

남자치고는 살짝 톤이 높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노래처럼 운율을 타고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회색빛 작은 방, 거친 양탄자 위에는 작은 사각 테이블 하나에 의자 3개가 놓여 있었다.

그 중간 의자에 한 남자가 거꾸로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처럼 선이 고운 외모였다.

회색 망토를 걸친 남자의 머리 위에 갈색 귀가 솟아 오른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의 앞에는 7명의, 역시 갈색 귀가 머리 위에 솟아난 아이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방문 옆에는 거구의 한 남자가 역시 회색 망토를 걸치고 기대어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을 헤 벌리며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한 아이만이 유독 불만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열심히 듣던 한 아이가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바리아!! 우리 모래바람 족은 어떻게 됐어요?!”


바리아라 불린 남자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투라는 호기심이 많구나. 호기심은 사람을 발전시키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 투라는 훌륭한 사람이 될 자질이 있구나. 어디보자. 투라는 악룡과 같이 싸웠던 우리 부족이 아사롬을 세우는 데 함께 하지 않은 게 궁금한 거겠지? 나도 어렸을 때 그게 참 궁금해서 이야기를 해주셨던 할아버지를 재촉했었지. 그럼 할아버지는 항상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호기심은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과하면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호기심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항상 인내심이란 덕목 또한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


아이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헤벌쭉 웃었고 다른 아이들은 킥킥 거렸다.

그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바리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영웅왕 카에르님이 아사롬을 세우기 위해 여러 인간족들과 수인족들을 이끌고 소하라로 떠나던 그때, 우리 모래바람족의 ‘가장 멀리보는 길잡이’셨던 사야타 님은 카에르 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

‘우리는 비록 돌아오지 않는 땅 ‘안바이람’이 된 우리의 고향을 떠났지만 언젠가 저주가 끝나는 날 그곳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래서 그곳과 가장 가까운 이곳 시후에 남아 가장 먼저 악룡의 저주를 막으며 그때를 기다리겠다고.‘

그러자 카에르 님은 사야타 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피가 아닌 영혼을 나눈 나의 형제여. 가장 험한 곳에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그대와 그대의 일족에게 모든 신들의 어머니 화야와 생명과 비의 신 우나의 축복이 영원히 가득하기를. 우리는 이제 헤어지지만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남아 악룡의 저주를 뚫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마침내 다시 함께하기를.’이라고.”

“우와아~~~”


짐짓 목소리를 굵게 해서 대사를 읊는 바리아의 능숙한 이야기 솜씨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바리아는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탄성을 지르던 아이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근데 사야타님은 왜 카에르님과 함께 가시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우리도 아사롬의 소하라에서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아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바리아는 빙긋이 웃었다.


“자쿠야는 이곳 시후가 싫으니?”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다기보다는 소하라는 이곳보다 물과 먹을 것도 훨씬 풍부하고 또 그때 함께 갔었다면 아사롬의 귀족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랬다면...”


바리아는 빙긋이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아이의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아. 소하라는 이곳보다 훨씬 살기 편하지. 물과 식량도 많고. 번화하고 사람도 많고. 또 그때, 소하라로 갔다면 지금 황금 갈기족처럼 귀족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우리 모래 바람족이 지금처럼 뿔뿔이 흩어져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어렸을 땐 사야타 님을 원망하기도 했단다.”

“정말요? 바리아도요?”

“그럼. 특히나 어렸을 때 물을 구하러 나갔던 누나가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갔을 땐 정말 많이 원망했었지.”


바리아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바리아는 아이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모두 그 비슷한 경험을 한 개 이상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가족이거나 자기 자신의 얘기이거나.

모래바람족의, 아니 수인족의 아이로 태어나 이런 아픔 하나 없이 성장하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던 바리아는 다시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어른이 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만약 그때 우리가 아사롬의 귀족이 되었다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땅 시후를, 그리고 우리 종족들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아이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바리아는 시후를 사랑해요?”

“그럼, 나는 이곳 시후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겪고 많은 것들을 받았으니까.”


바리아의 표정이 꿈꾸듯 몽롱해졌다.


“눈 덮인 겨울이 되면 천막 안 불가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여앉아 할아버지께 듣던 이야기들은 정말 재미있었지. 지금 너희에게 해주는 얘기들도 그때 들었던 것들이고.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가 끓여주셨던 우유죽은 정말 맛있었어. 우리 어머니는 우유죽을 정말 맛있게 만드셨거든. 봄이 되면 아버지와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곤 했었지. 그럴 때가 되면 아버지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어. 별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별들로 방향을 보는 법, 바람으로 비를 예상하는 법, 수많은 동물들, 마수들의 이야기와 그 것들을 사냥하는 법, 또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말을 거는 법까지도. 그 황무지의 밤에는 별이 참 많았지.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내 첫사랑 소녀와 했던 많은 얘기들과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바리아는 흠 흠 헛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그리고 무엇보다 시후의 황무지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있단다. 많이 갖지 말라고. 정말 소중한 것을 찾고 그것들을 지켜나가라고. 지금 힘든 시기가 있어도 버텨내면 언젠가 다시 봄이 올 거라고. 그런 가르침들이 우리 모래바람 족을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시켜 주는 밑바탕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 실제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황금 갈기 족을 제외하면 검은 산족, 초원 바람족, 밤 소리족 들은 모두 아사롬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종족의 이야기조차 후대로 전해 내려오지 못하는 뿌리를 잊은 종족이 되었으니까. 황금 갈기족도 사실 마수의 숲 카 네아를 방어하는 인간족의 칼로 쓰이고 있을 뿐, 지금은 아사롬에서 진정한 귀족으로 대접받고 있다고는 볼 수 없지. 아마 사야타님은 수인족이 인간족과 섞이게 될 경우 그들에게 섞여 우리의 전승을 잊게 될 것을 예견하셨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


몇 아이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아는 다시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 힘들다고 해서 선조를 원망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그분들은 악룡이 지배했던 어려운 시기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셨고 우리에게 훌륭한 것들을 남겨주셨지. 모든 수인족과 인간족들의 자유를. 그걸 그 후손들이, 그러니까 우리 전대에 지켜내지 못했을 뿐이고. 하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영웅왕 카에르가 형제로 인정한 모래바람 족이니까.”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

“응?”


바리아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줄곧 불만스런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였다.


“유조 지금 뭐라고 했니?”


유조라 불린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악다문 입과 붉어진 눈이 보였다.


“다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바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조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요. 인간족들은 우리 수인족들을 노예로만 생각해요. 영웅왕 카에르가 우리를 형제라고 생각했을 리 없다구요. 우리 가족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제 5살 밖에 안된 내 동생도 다 팔려갔다구요. 나를 사갔던 주인이 그랬어요. 수인족은 원래...”


유조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바리아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가 뭐라고 했니?”

“그가, 그랬어요. 수인족은 동물과 사람이 교접해서 나온 기형종족이라고. 그래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신에게도 보호받지 못한다고. 노예 이외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들이라고.”


힘들게 말을 내뱉은 유조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리아는 안타까움과 난감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조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랬구나. 유조는 그의 말을 믿니?”


유조는 흐느끼면서도 힘겹게 그 말에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잖아요. 아빠도, 엄마도, 나도, 모두 다. 으으으. 신의 가호 같은 게, 어디 있어, 아무데도 없어. 거짓말 하지 마요. 으으으.”


주변의 아이들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바리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유조와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려고 했다.


“유조, 그건...”

“진짜 못 들어주겠군.”


방문 쪽에서 회색 망토를 걸친 금발 머리의 여자가 들어오며 말했다.

도도하고 당당한 목소리와 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

여자의 뒤로 푸른색 망토를 걸친 거구의 남자 둘이 같이 걸어 들어왔다.

붉은 머리의 여자와는 달리 두 남자의 머리 위로도 갈색 귀가 솟아올라 있었다.


“소나 아가씨, 바란, 다말, 돌아왔구나.”


바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아아, 사실 아까부터 방 밖에서 듣고 있었어. 어린 시절 어머님께 듣던 이야기 생각이 나서 끊을 수가 없더군.”


바리아는 두 남자 중 바란이라는 남자에게 반갑게 다가가 오른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고 서로의 왼쪽 가슴에 번갈아 대며 말했다.


“벗의 발자국을 보살펴주신 우나께 감사와 영광을.”

“벗의 발자국을 보살펴주신 우나께 감사와 영광을.”


바리아는 다말이라는 남자와도 같은 인사를 하고는 여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나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고마워, 바리아. 그리고 얘기에 끼어들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사실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바리아는 빙긋 웃으며 소나의 사과를 받아넘겼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 그 얘기 내가 좀 끼어들어도 될까?”


바리아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가씨가요? 네, 그러시죠.”


소나는 유조라는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갔다.


“내 이름은 프시바크 라 소나라고 한다. 너희도 들어본 적이 있겠지. 내 선조인 프시바크 라 주몬님은 영웅왕 카에르를 도와 아사롬을 세웠던 개국공신이고, 현재 아사롬의 여섯 공작 중 한명인 프시바크 라 도우즈가 내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그런 아이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바리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내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수인족들은 우리와 함께 아사롬을 세운 친구이며 지금처럼 노예로 부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들이라고. 지금 이렇게 된 건 간악한 에피제임이 남긴 그들의 잔재이며, 반드시 우리가 타파해야만 하는 악습이라고.”

“우와아!”


풀이 죽어있던 아이들은 소나의 말에 환성을 터트렸다. 유조도 눈물을 그치고 멍하니 소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내 말은 믿을 수 있겠나?”


유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소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한심하구나.”

“네?”

“너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들의 얘기는 믿지 못하면서 이제 처음 본 내 말은 믿겠다는 거냐? 그것도 내가 인간족의 귀족이라는 이유로?”


당황한 유조의 얼굴을 잠시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소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과 자신의 종족의 긍지를 한낱 이방인들의 말 따위에 의지해 판단하려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저기 뒤의 바란을 잘 봐라.”


소나는 뒤에 서있는 바란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손가락을 따라 뒤를 향했다.

그 곳에는 강철처럼 단단한 거구의 그러나 깊고 부드러운 눈을 가진 갈색귀의 전사가 서있었다.

“나는 바란을 열 살 때 처음 봤다. 그는 노예로 팔려온 상태에서도 다른 학대받는 동족을 구하려 나서다 매질 당하고는 격투장으로 보내졌다. 너희는 상상할 수 있겠나? 열 살의 나이에 다른 수인족의 어른들과, 심지어 마수들과도 싸우러 나가야 했다는 거다. 그는 매일 졌고 맞았고 굶주렸다. 나는 그를 가끔 봤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전사의 눈을 잃은 적이 없었다. 늘 동족들의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고, 자신의 어려움을 당당히 맞이했다. 패배했어도 당당했고 승리했어도 오만하지 않았다. 그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환경에 내던져졌고, 그 곳에서 십년을 버틴 후 소하라 왕실 무투대회에서 무려 마갑을 착용한 상대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하며 당당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와중에 9년의 계약이 법률로 제정됐지만 그가 자유가 된 건 그것과는 상관없는 소하라 무투대회의 우승자였기 때문이었지. 황제폐하의 직접 윤허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된 세 번째 수인족이 바로 그다. 그리고 그 후에는 노예가 된 모래바람 족들을 구하기 위해 지금처럼 마수 사냥꾼으로 살고 있다. 자유인들은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안바이람과 카 네아를 자기 집처럼 오가며 말이지. 난 그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를 보기 전까진 모래바람 족의 일화를 어려서부터 여러 번 들었지만 그냥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바란을 보며 알게 됐다. 모래바람 족이 얼마나 긍지 높은 종족인지를. 왜 영웅왕 카에르님께서 그들을 친구라고 칭했는지를. 그는 자신의 부족의 긍지를 스스로 만들고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덕분에 너나 저 다른 친구들처럼 수많은 모래 바람일족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 그런 니가 지금 저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난 바란이, 그리고 저 바리아와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해서 너 같은 아이를 구해내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유조가 새 빨갛게 달아올라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보고 있던 바리아가 소나 앞으로 살짝 끼어들며 말을 끊었다.


“소나아가씨,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가족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엔 이른 나이지요.”


그리고는 유조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유조. 니가 당한 일들은 선대들과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야. 니 잘못이 아니란다. 괜찮아. 괜찮아. 니가 잘못한 게 아니야. 또, 이제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이제까지보단 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바리아는 아이들을 슥 둘러보고는 바란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말했다.


“저기 있는 바란을 비교대상으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모래바람 족 어른들은 다 함량미달의 부끄러운 못난이들일 수밖에 없어. 굳이 우리 집의 높이를 마리차이 산맥과 비교하거나 베이모스를 기준으로 사자의 크기를 비교할 필요는 없단다. 안 그래? 다말, 모람바.”

“큼.”


바리아의 말에 바란의 옆에 서있던 다말과 벽에 기대고 서있던 모람바가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뱉었다.

바란은 피식 웃으며 바리아에게 말했다.


“민망해서 얼굴이 남아나지 않겠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가 굶주려 쓰러지기 전에 점심을 좀 주지 않겠나?”

“아, 아직 식사 전이겠군. 좀 기다려. 너희들도 간식을 챙겨줄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리아는 나가며 소나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소나아가씨,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나는 예의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움을 준 기억 따윈 없어. 한심해 보여 참을 수 없었을 뿐.”


바리아는 싱긋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가씨다운 대답이군요. 드릴게 우유죽과 소고기밖에 없지만 함께 나가셔서 식사하시죠.”


소나는 바리아를 따라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다 바란과 눈이 마주쳤다.

바란은 빙긋이 웃으며 소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나는 약간 당황한 눈으로 바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딱히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내가 본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이지.”


바란은 그런 소나를 빙긋이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열 살 때 처음 만났었다는 걸 기억하고 계셨군요. 몰랐습니다.”


소나의 얼굴이 순간 붉어지며 바란의 시선을 피했다.


“말을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는 휙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란은 그런 소나의 모습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말이 바란에게 말했다.


“소나 아가씨는 바란 자네 옆에 있을 때만 가끔 소녀 같아지는 것 같군.”

바란이 씁쓸히 웃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다말. 소나아가씨는 원래 따뜻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분이야. 차가운 표정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래. 그런 분이지. 하지만... 아니야. 식사나 하러 가지.”


무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말도 방 밖으로 걸어 나가자 바란이 벽에 기대어 선 모람바에게 말을 걸었다.


“모람바, 자네도 같이 먹지?”


시종일관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모람바도 그 말에몸을 세우고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래야겠지. 할 얘기도 있고.”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가죽으로 벽과 천장을 댄 집은 중앙의 거실과 거실의 각 면으로 연결된 세 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중 거실의 가운데 면과 연결된 방에서 바란과 소나 일행들은 타원형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바리아는 오른쪽 구석에 만들어놓은 흙으로 된 화덕에서 우유죽을 데우고는 나무로 된 국자로 그릇에 담아 사람들의 앞에다 한 그릇씩 놓아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말린 고기와 우유죽을 담은 그릇 5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 불만이 가득하신 우리 코린경이 안보이시는군.”


바리아의 말에 다말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빨리도 물어보는군. 우리 고상한 코린경은 바리아 네가 만든 우유죽으로 점심을 때울 바에는 차라리 굶겠다고 하셔서 말이지.”


다말의 대답에 바리아도 피식 웃었다.


“지난번 대접이 영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군. 진짜 굶으실 리는 없을 테고, ‘바람의 울음소리’로 간 건가?”

“음, 그럴 것 같더군. 전에는 절대 그런 누추한 여관 따위는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만. 그래도 많이 발전한 건가? 혼자서 사고나 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지.”


그때, 바란이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사롬의 귀족이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분이다. 무례한 말은 그만하도록 하지.”

“그게 진짜 도와주는 거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늘 투덜거릴 바엔 그냥 소하라로 돌아가는 게 오히려...뭐, 하긴 소나아가씨의 수호기사로서는 충실하긴 하지.”


바란의 말에 다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다 소나의 표정을 살짝 살피며 말을 얼버무렸다.

말없이 우유죽을 떠먹고 있던 소나가 여전히 시선을 우유죽에 고정시킨 체 입을 열었다.


“내 눈치 볼 필요는 없어. 나도 코린이 투덜거리고 비아냥거리는 게 거슬리는 건 사실이니까. 또, 혼자 여관에 가서 괜히 사람들에게 시비나 거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고. 내 입장에선 돌아가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아무 얘기 못하고 있을 뿐이지. 여러모로 미안하군.”


소나의 말에 다말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미안하시다니요. 아가씨가 주신 도움이 얼마나 큰데 그런 말씀을. 사실 코린경의 말투도 이제 적응되니까 나름 정겹고 귀엽고 그렇습니다. 아하하...”


다말의 말에 바리아가 숟가락으로 죽을 입에 넣다가 ‘풋’ 하고 내뱉었다.


“정겹고 귀엽다고?”


조용히 죽을 먹고 있던 바란이 덧붙였다.


“그렇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는 몰랐군. 이따 코린경을 데려오는 일은 다말이 하는 것도 괜찮겠는데.”


이번에는 다말이 떠먹던 죽을 푹 내뱉었다.

바리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왜 이번만? 앞으로 계속 다말이 전담하면 되겠네.”


다말의 표정이 점점 썩어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나도 피식 웃으며 죽을 떠먹었다.

잠시 부드러운 분위기가 지나고 바란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유조란 아이가 한 얘기. 이번이 처음은 아닌 거지?”


그 말에 바리아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아, 얼마 전부터 계속이야. 처음 들었을 땐 불쌍한 아이가 이상한 놈에게 팔려갔었구나 생각했었는데 얘기를 들은 장소도 한두 곳이 아니고 시기상으로도 갑자기 이렇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건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꼭 누군가가 일부로 그런 말들을 퍼뜨리고 있는 것 같아.”

“심각한 일이군. 9년의 계약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둘의 심각한 대화를 듣던 다말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9년의 계약 때문이라니?”


바리아가 다말을 보며 설명했다.


“소나아가씨의 아버님이신 프시바크 공작님께서...”


여기까지 말한 바리아가 힐끗 소나의 눈치를 살폈다.

소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유죽을 천천히 떠먹고 있었다.


“9년의 계약을 법률로 제정해 주셔서 이제 모든 노예들은 9년간 노예생활을 하면 모두 자유인이 될 수 있게 됐잖아. 어쩌면 아까 유조에게 들은 그런 얘기로 수인족들의 노예화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지.”


다말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미 법률로 제정이 됐는데 그런 얘기들이 의미가 있나?”

“의미가 있지. 지금 노예 상태에 있어도 원래 노예가 아니었다는 자부심이 있으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만 원래 노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다시는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일들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테고. 우리가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더 간단하겠군. 역사를 잊은 부족은 뿌리를 잃은 식물과 같아.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을지 몰라도 훨씬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어.”

“음.”


다말이 신음소리를 흘리며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너무 과한 생각 아닐까?”


그러자 소나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권력에 기생하는 귀족들에게 그런 여론조작 같은 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프시바크 공작...아버님이 9년의 계약을 법률로 제정할 수 있었던 건 귀족들에게 그것을 묵인할 수 있을 만큼 먹음직스러운 대가를 주었기 때문이지.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법률에 찬성하지 않아. 언제고 법률을 다시 폐지할 수 있는 기회만 노리고 있겠지.”


소나의 말이 끝나자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바란이 입을 열었다.


“어찌됐든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손에 닿지 않는 것까지 걱정하지는 말기로 하지.”


바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톤 높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렇지. 어찌됐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그럼 저절로 그런 음모들이 해결돼지 않겠어?”


그때,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앉아있던 모람바가 입을 열었다.


“그 우리가 할 일에 대해 좀 말할 게 있는데.”


그 말에 바리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모람바를 바라봤다.


“바란, 노포크 쪽의 노예시장에 갈색 귀의 아이들이 팔려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바란이 잠시 모람바를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


“구하러 가야겠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거기에 대한 얘기야. 지금 있는 저 7명의 아이들 대금도 아직 지불하지 못했다는 건 너도 물론 알고 있겠지? 우리 재정은 이미 작년에 바닥났다. 자유민이 된 마을 사람들의 정착비를 보태주기는커녕 이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부담을 더 짊어지게 됐지. 더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 종족이 발견되면 너는 늘 그랬듯 달려가 그들을 살 거란 거고, 노예상인들은 이미 그걸 알기 때문에 모래바람 족의 가격을 높여 우리에게 비싼 값에 팔고 있다는 거지. 앞으론 더 높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다시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바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모람바. 다들 힘들다는 것도, 너희가 내 옆에서 많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고마워하고 있고. 하지만, 모람바. 우리는 그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우리가 하루를 늦으면 그 하룻밤 사이에 한 아이가 죽을 수도 있고, 한 여자아이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힘든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하지만 이미 늦은 건 되돌릴 수 없다. 너도 알지 않나.”


모람바는 답답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너의 뜻은 잘 알고 있다. 존경하고 있고. 그래서 너를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바란. 이제 곧 황무지에 겨울이 온다. 마을에는 겨울을 날 식량이 필요해. 아직 사람들은 자유민으로 정착해서 살아가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저 아이들의 대금조차 구하지 못해서 아이들을 마을로 데려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 자그마치 7000지언이야. 마정석 7개를 구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이지. 그나마도 한 달이란 시간 내에 구하지 못한다면 저 아이들은 다시 노예사냥꾼에게 돌아가야 하고. 정확히는 이제 20일 남았지. 근데, 우리는 작년 내내 구했던 마정석수가 5개였단 말이다. 이번에 마수의 숲 ‘카 네아’에 가서도 하나도 못 구해오지 않았나.”


여기까지 말한 모람바는 일그러진 얼굴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내가 싫다. 바란. 하지만, 우리는 잠시 멈춰야 해. 그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 이미 구해낸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할 때다.”


테이블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둑한 방 안의 무거운 공기가 테이블 가운데 있는 촛불의 흔들림마저 내리 누르는 듯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란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저 아이들의 대금 7000지언을 마련해보고 그 다음 일을 논의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리아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바란을 바라봤다.

방문 앞까지 걸어간 바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모람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람바, 어려운 얘기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항상 그랬듯이. 그리고 미안하다. 너에게도. 바리아에게도.”


밖으로 걸어 나가는 바란을 바라보다 모람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천막집 주변은 온통 모래바람 가득한 황무지였다.

군데군데 나 있는 풀들은 모래 바람에 쓸려 땅으로 누워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몸을 일으키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 듯 황량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풀잎 사이 벌레들이 움직이고 가끔 들쥐들이 후다닥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얗게 빛나는 해는 중턱쯤 내려오고 파란 하늘에는 몇 점의 하얀 구름이 한가로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바란은 조용한 표정으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황무지 가득 낮은 둔턱들이 여기저기 둥그스름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바란의 뒤로 따라 나온 바리아가 다가왔다.


“바란.”


바리아의 부름에 바란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간 참 빠르군. 햇볕은 아직도 이렇게 뜨거운데 어느덧 겨울을 대비해야 하는 시기라니.”

“괜찮은가?”


바란이 고개를 돌려 바리아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안 괜찮을 게 있나? 편안하고 술술 풀리는 현실 같은걸 기대하며 살아본 적은 없는걸. 이쯤 돼야 뭔가 해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좋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바리아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참. 어떻게 늘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


바리아의 말에 바란은 아무 대답 없이 잔잔히 웃어보였다.

바리아는 그의 높은 어깨에 손을 얹고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바란 너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지금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 일들이 사실은 별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해. 그렇게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나름 잘해나가고 있지. 하지만, 때론 자네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한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해.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모든 일을 감당하곤 하지만 사실 자네도 우리와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인데 말이지. 그래서...”


바리아는 잠시 침을 삼키며 말을 끊었다 조금 눌린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바란. 내가 좀 더 힘이 될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말한 바리아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리아.”


바란은 자신의 큰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놓인 바리아의 작은 손 위로 얹었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바리아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바리아가 감정을 추스르고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네. 제일 힘든 짐을 진 자네 앞에서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못난 모습일랑 부디 술이라도 마셨다 생각하고 잊어버리게나.”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서둘러 천막 쪽으로 걸어가려했다. 그러자 바란이 자신의 어깨에 놓인 바리아의 손을 놔주지 않고 오히려 꼭 잡으며 말했다.


“아까 그 말 인상적이었네.”


바리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응? 그 말이라니?”

“그, 역사를 잊은 부족은 뿌리를 잃은 식물과도 같다...였던가?”


바리아가 피식 웃었다.


“아, 그 말? 평상시에 생각하고 있던 얘기였지. 너무 폼을 잡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괜찮게 들렸나?”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해봤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 생각해보니 그동안은 그 이유를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더군. 어이없게도. 근데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나는 결국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우리 부족의 이야기, 노래들에 홀려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 아까 자네가 아이들에게 해줬던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 그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들. 나는 이미 몇 번을 내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네. 지금 목숨은 덤으로 얻은 것이라 별로 아쉬울 것도 없지. 그런 내 삶이 뭔가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에 쓰인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생각했었네. 그 일이 그 시절의 행복을 다시 우리 부족에게 되돌려주는 일이었지. 우리 부족이 모두 가족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 시절을, 그때의 기억을 모든 부족의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덕분에 자네와 같은 친구들도 만났고 소나아가씨의 도움까지 받아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많은 부족 사람들을 구해내고 그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사실 내 생각보다 너무 잘 풀려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만든 게 아마 자네가 말한 우리 부족의 뿌리가 갖고 있는 힘이라는 게 아닌가 싶어. 수인족이 갖고 있는 무력이 아닌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노래들과 함께 내려오는 그런 종류의 힘.”


여기까지 말한 바란은 두 손을 모아 바리아의 손을 굳게 잡으며 깊은 눈으로 바리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바리아, 나는 마수와 싸워 돈을 마련할 수도 있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구해 올 수도 있네. 하지만 자네가 말한 그런 것들을 나는 아이들에게 줄 수 없어. 나는 그런 걸 할 수 없네. 내 주변엔 오직 자네 밖에 없어.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나는 자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울 수밖에 없네. 부디 나를 도와줘. 우리 부족이 다시 함께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뿌리를 간직하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자네가 계속 나를 도와줬으면 해. 부탁하네.”


바리아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고개를 한번 푹 숙였다 다시 들었다.

눈물이 고인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바란, 너란 놈은 정말...이렇게 뻔히 보이는 말에 감동받아도 되나 모르겠다만 그냥 넘어가주지.”


바리아는 바란에게 잡힌 손을 빼 바란의 단단한 아랫배를 힘껏 ‘퍽’ 한 번 때리고는 손이 아픈 듯 다른 손으로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아야야, 이 마수보다 무서운 놈. 자네 그거 아나?”

“뭘?”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우리 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자네는 아마 엄청난 바람둥이가 됐을 거야.”

“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사람들은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엔 자네를 따라가려면 한참은 멀었어. 과묵하게 있다가 그 진심어린 눈빛으로 여자들 앞에서 한마디 툭 내던지면 버텨낼 여자가 없었을 텐데 말이지. 내가 여자였다면 분명히 반해 버렸을 거야.”


장난기 어린 말투로 너스레를 떠는 바리아의 말에 바란은 피식 웃었다.


“그거 끔찍하군. 그리고 안타깝군. 나의 결백을 확인시켜 줄 방법이 없으니.”

“킥. 내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자고.”


그렇게 장난을 치던 바리아는 천막 입구 쪽을 바라봤다. 입구 옆에는 어느새 소나가 팔짱을 끼고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 빨리 입증하게 될지도 모르지. 아무튼 난 들어가네. 아, 가서 다말에게 코린경을 데려오라고 얘기하지. 자네가 그러라고 말했다고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반응이 기대되는군.”


바리아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손을 흔들며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입구 옆에 서있는 소나에게 미소를 띈 얼굴로 정중히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입구를 가린 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바리아의 인사에 마주 고개를 숙인 소나는 바리아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바란에게로 걸어왔다.


“심각한 분위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바란이 그런 소나를 마주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심각해진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소나는 바란의 눈을 마주보지 않고 황무지 쪽을 바라보며 섰다.


“뭔가 방법이라도 찾은 거야?”


소나의 물음에 바란은 쓰게 웃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요. 그래도 뭐라도 하려면 기운이 있는 쪽이 좋을 테지요.”


소나는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태도로 황무지를 바라보며 발로 바닥을 긁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바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나아가씨. 하실 말씀이라도.”


한참을 망설이던 소나가 입을 열었다.


“7000지언 정도는 내가 본가에 연락을 하면 금방 받아올 수도 있어. 아, 물론 이건 빌려주는 거니까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할 거야. 딱히 나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니란 거지. 그렇게 올 겨울을 나고 나면 내 년 쯤엔...”

“아가씨.”


조금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소나의 말을 바란이 끊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란의 말에 소나가 놀란 눈으로 바란의 눈을 바라봤다.


“그럼!!!”

“근데 그러기 위해선 소나아가씨가 먼저 공작님께 연락을 해야 하겠군요. 혹시 공작님과 화해하시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바란의 말에 소나의 표정이 순간 굳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내 자존심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 우기는 귀족 아가씨가 아니야, 바란. 아이들 7명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아.”


바란은 잠시 말없이 소나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윤기 있는 금빛 머리카락 아래 그린 듯 볼록한 이마와 그 아래로 내려오는 오똑한 코, 작은 입과 도톰한 입술의 곡선. 그 모든 걸 합친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눈과 신비로운 붉은 눈동자.

하지만 바란은 이 차갑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가씨는 저를 평생도록 고용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옆을 지켜드려야 이 신세, 그 마음을 갚을 수 있을지 저는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바란의 말에 소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알면 더 열심히 일하라고. 소하라 왕실 무투대회의 우승자를 호위무사로 고용하는 데 이정도 투자는 충분히 해줄 수 있으니까. 내일 본가에 편지를 보내겠어. 바람의 울음소리 여관에 가서 비둘기를 띄우면 일주일 안에 회신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 방법은 잠시 미루도록 하지요.”


바란의 말에 소나는 휙 뒤돌아 차가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무슨 뜻이야?”

“말씀 하신 데로 회신을 받는 데는 일주일이면 되지만 저희에겐 아직 20일이란 시간이 남아있지요. 2주 정도 여유가 있겠군요. 그 안에 할 수 있는 걸 해 볼 생각입니다.”

“내 신세를 지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라면.”

“아가씨가 말씀하신 데로 저 또한 자존심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아닙니다. 단지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신세부터 지려고 하는 건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또, 저는 아가씨가 공작님과 화해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게 이런 이유이길 바라진 않습니다. 아가씨가 단지 자존심 때문에 공작님과 소원하게 지내시는 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구요.”


소나의 눈매가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바란은 고개를 돌려 해가 내려가는 쪽 먼 황무지를 바라봤다.


“조만간 비가 올 것 같군요. 비가 오는 황무지는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생물들이 여기저기서 기어 나오곤 하죠. 야생쥐, 여우, 토끼와 뱀, 심지어 가재 같은 것들도 기어 나옵니다. 그리고 마수들도 그런 동물들을 먹기 위해 여기저기 출몰하곤 하죠. 그래서.”


바란은 다시 소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은 말로만 듣던 안바이람을 한번 구경해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마수사냥을 하겠다는 거야? 마수 수백 마리를 잡아도 하나 찾을 수 있을까 말까한 게 마정석이잖아? 2주 동안 그 마정석을 7개 구하겠다고? 게다가 안바이람은 마수가 많이 출몰하는 곳도 아니라며?.”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죠. 예전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애롭지만 또한 엄격하신 ‘우나’께서는 항상 여행자가 지쳐 쓰러진 곳에서 하루거리에 오아시스를 마련해 두신다고. 오아시스가 있음을 믿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혹시 도저히 못할 것만 같은 힘든 일이 눈앞에 닥칠 때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죠.”

“어떻게?”

“‘그냥 시작해라. 그리고 포기하지 마라.’라고.”


소나는 화가 풀린 눈으로 시선을 내리며 그 말을 반복했다.


“‘그냥 시작해라. 그리고 포기하지 마라.’라. 그러네.”


소나는 고개를 들고 바란을 바라보며 생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 생각해보니 나도 안바이람이 구경해 보고 싶어졌어. 그 유명한 ‘돌아오지 않는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운이 좋으면 베이모스도 구경할 수 있겠지?”


바란은 소나의 웃는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 말을 잇지 못하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뭐, 그런 걸, 보게 된다면 저희도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소나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때를 위해서 호위무사를 고용한 거잖아. 열심히 일하라고. 아사롬 최고의 호위무사양반.”


바란은 빙긋 웃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목숨 바쳐 열심히 지켜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소나는 예의 엄격한 얼굴로 답했다.


“기대하겠어.”


그리고는 휙 뒤돌아 천막의 입구로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어.”


바란은 천막으로 걸어가는 소나의 뒷모습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사된 금빛 머리카락주변으로 은은한 황금빛이 맴도는 듯했다.

그 모습이 지상이 아닌 천계의 존재가 이곳에 내려온 것 같다고 바란은 문득 생각했다. 잡을 수 없는, 잡아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

그리곤 씁쓸히 웃었다.


작가의말

외전은 예전 진욱이가 처음 만났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도 합니다.

참고로 주인공은 여기서 전혀 비중이 없습니다.

손톱만큼 있지요.

그래서 그냥 주인공을 따라 벌어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으신 분들은 안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냥 외전 이후의 5부로 건너뛰셔도 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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