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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19.01.0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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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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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2(재업)

DUMMY

아사롬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프시바크 공작가에 소속된 프시바크 기사단의 젊은 기사이자, 스스로 아사롬의 젊은 기사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라 자부하는 드클레어 코린은 요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3년 전 소하라 황실 무투대회에 나가 4강에 오르고 프시바크 기사단에 영입될 때까지도 그의 앞날은 창창한 이곳 시후의 하늘만큼이나 맑게 개는 듯했다.

아니, 프시바크 공작가의 외동딸 소나아가씨의 개인 호위기사로 배정될 때는 저 찬란한 태양만큼이나 빛날 듯 생각되기도 했다.


‘프시바크 라 소나’라니...


그 이름은 소하라가 아니라 아사롬 전역에 널리 퍼져있을 만큼 유명했다. 1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아사롬 3대 미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뿐 아니라 19세의 나이에 소하라 황실 무투대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4강에 올라 자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꽃이 아님을 아사롬 전역에 알렸다.

물론 출력 0.4리온의 최고급 마갑을 착용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상대들도 대부분 그 정도의 장비를 착용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여자가 4강 이상 오른 것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공작가의 기사단에 들어가 처음 맡게 된 임무가 그 소문으로만 듣던 소나아가씨의 개인 호위기사라니.


코린은 처음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내심 0.2리온의 하급 마갑을 입고 4강에 올랐다는 사실에, 사실은 우승도 가능했다고 스스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코린은 그런 점들을 공작가에서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거라며 기뻐하기도 했었다.

그 기분은 소나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소문으로만 듣던 소나아가씨는 정말 천상에서 내려온 듯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차가운 표정이 좀 무서워 보이긴 했지만 뭐, 원래 그래서 별명도 ‘얼음불꽃의 여신’이라고 불린다는 것 쯤은 미리 알고 있었지 않은가.


기분이 꺾이기 시작한건 자신 이외에도 아가씨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호위무사가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그리고 그 한 명이 천한 수인족이란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밑바닥까지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그 천한 수인족이 무투대회 4강전에서 마갑도 없이 자신을 꺾었던 그 바란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뭐, 천한 수인족이야 어차피 마갑을 안 입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수인족이 입을 수 있는 마갑이 있다면 이상한거지.

오히려 자신이 다른 유수 가문의 참가자들처럼 0.4리온의 마갑을 입었다면 충분히 꺾을 수 있었을 텐데, 운이 좋아서 자신의 우승을 가로챈 미천한 수인족이 자신과 동급의 호위무사라니. 코린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가라앉았다.

이보다 더러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호위무사로 배정받자마자 소나아가씨가 소하라를 떠나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입성한 소하란데. 그 ‘부로사’ 깡촌에서 이를 악물고 수련을 했던 이유가 뭔데. 소하라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꿈꾸며 그 모진 고생을 참아왔는데. 이제 드디어 소하라에서 인생의 황금시대를 열어보나 했더니 어딜 나간다고?!!!!


그리고 그런 그녀에 대해 프시바크 공작가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외부의 시선과는 달리 소나 아가시는 프시바크 공작가의 울타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코린은 이제 왜 자신이 기사단에 입단하자마자 소나 아가씨의 호위기사로 배정됐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코린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코린의 시련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과 동급이었다고 생각한 바란이 사실은 동급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호위무사가 가고 싶은 곳마다 따라가 주는 고용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나중에 얼핏 얘기를 들어보니 그게 고용조건이었단다. 바란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따라가 주는.

이런 XX, 뭣 같은!!!!!!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고용인가. 소나아가씨는 자선사업가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프시바크 공작가의 기사가 된 이후 코린이 주로 있었던 곳은 모가토, 노포크, 포일란 지방의 노예시장이나 아니면 시후의 모래바람족 마을, 또 그 유명한 마수의 숲 ‘카 네아’.

세상에... 마수의 숲 ‘카 네아’라니.

그런 곳은 황금 갈기족 무사들을 제외하면 수인족 노예들이나 죄인들이 가는 곳 아닌가.

대체 공작가 아가씨가 왜 그런 곳에 가서 수인족들과 함께 마수사냥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바란이 자신의 동족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은 알겠다. 나름 의미 있고 좋은 일이지. 근데 그건 갈색 귀를 가진 그 종족들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지. 우리가 뭐라고.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걸 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수련했던 게 아닌데.


처음엔 ‘카 네아’로 가신다고 해서 그걸 말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정말 딱 부러지게 안 된다고, 보내드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아가씨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나아가씨는 무미건조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따라오기 싫으면 돌아가서 아버님께 말씀드려. 도저히 아가씨를 못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아버님 성격상 싫다는 일을 억지로 시키시지는 않을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기사단 가입 후 첫 임무를 도저히 못하겠다고 보고하라고 하면 그게 기사단을 나가라는 얘기지!!!


“어떻게든 막고 싶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좋아. 무인다운 대결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거 나도 좋아하니까. 근데 나와 바란 둘 중 누굴 막아볼 건데?”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얘기긴 하지만 당시 코린은 최후의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면 해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여자인 아가씨와 대결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막아야 하는 것이 아가씨인 만큼 아가씨를 선택하기로 했다.

절대 바란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출력 0.4리온의 마갑도 지급받았겠다, 그따위 미천한 수인족 따위를 꺼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 본 ‘카 네아’는 정말 마수들의 천국이었다. 말로만 듣던 고블린, 코볼트 같은 것들은 물론 오크, 트롤 같은 것들이 심심할 때 마다 나왔다.

오거도 몇 번 봤다. 크다는 얘기만 들었지 직접 보니 진짜 심장이 벌렁거릴 만큼 무서웠다.

아, 이건 사실이 아니다. 절대 무섭진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느덧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린은 지금 여관‘바람의 울음소리’의 낡은 테이블에 앉아 나무 컵에 담긴 마유주를 마시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

생각하면 근 3년간 이 얼굴이 펴진 적이 있었나 싶었다. 늘 불만스럽고 짜증만 났다.

이러고 살려고 그렇게 수련해서 수도로 왔던 건 아닌데.


문득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부로사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의 친구였던 그를...그 경멸을 담은 눈빛과 마지막 말. 코린이 마침내 놓아버렸던 그의 유년.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털어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4인용 테이블 6개만으로 꽉 차 보이는 여관의 좁은 홀에는 코린을 제외한 두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한 테이블은 3명, 또 다른 테이블은 4명.

두꺼운 망토로 머리까지 덮어써 알아볼 수 는 없지만 커다란 체구를 보면 분명 수인족 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시후의 황무지에 서있는 이런 외딴 여관으로 오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노예 사냥꾼, 마수 사냥꾼, 그것도 아니면 탈주 노예를 포함한 뒤가 구린 범죄자들 정도였다. 저들 또한 마찬가지겠지.


코린은 시비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덩치만 큰 미천한 수인족들을 두들겨 패다보면 이 더러운 기분이 조금 풀리곤 했다.

얼마 전에도 시비를 걸어 수인족들을 두들겨 패다 소나아가씨에게 걸렸었다. 다시 사고를 치면 본가에 호위 기사를 교체해 달라고 하겠다고 했었지.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지금 이 일을 때려 치고 소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입단해서 첫 번 째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에게 출세 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거란 걱정.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저들을 두들겨 패서 오늘 풀어버리고 말겠다고 결심했을 때 쯤 바 안쪽 작은 문에서 작은 체구의 여인 한명이 걸어 나왔다.


“토푸란, 혼자서 고생했죠?”


바 안쪽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나이든 여관 주인은 그녀를 반기며 대답했다.


“츄나, 왜 벌써 나왔어? 아직 여독도 안 풀렸을 텐데 좀 더 쉬지 않고.”

“저는 토푸란이랑 같이 일하는 게 제일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라서요.”


노래하듯 운율감 있는 맑은 목소리가 좁은 여관을 신선한 공기로 채우는 듯했다. 허름한 치마로 가릴 수 없는 가녀린 몸매와 햇살처럼 싱그러운 미소. 소나아가씨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 밝은 미소는 이 좁고 칙칙한 공간에서 홀로 밝게 빛나는 듯했다.


코린은 방금 전까지의 끓어오르던 답답함은 모두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바 밖으로 나비가 춤추듯 사뿐사뿐 걸어 나와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베이든, 마수는 많이 잡았어요?”

“무토는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요? 더 잘생겨졌어요.”


다른 손님들과 웃으며 인사의 말을 건네고는 혼자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코린에게 눈을 돌렸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이렇게 멋있는 분이 우리 가게를 찾아주시고 무척 영광인데요.”


코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리가 하얗게 돼서는 그냥 어버버 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츄나는 다시 말했다.


“저는 츄나라고 해요. 우리 여관에 처음 오신 거죠?”

“아, 네네”

“어쩐지. 이렇게 멋있는 분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오신 기념으로 식사대접을 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무료로요.”

“아, 네네. 아니아니 그러시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꿈속을 헤매는 기분에도 기사로서 함부로 숙녀에게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코린이었다.


“괜찮아요. 대신 드셔보시고 맛있으면 자주 와주셔야 해요. 사실 우리 주인어른 요리 솜씨는 시후에서 따를 사람이 없거든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생긋 웃으며 다시 바 안으로 춤추듯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코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츄나...”

“정말 생기발랄한 미인이죠?”

“그러게 정말 요정 같군. 그녀는. 와악!!!!”


언제 들어왔는지 다말이 옆에서 씨익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음, 코린 경이 ‘아, 네’ 라는 말을 반복하는 걸 두 번 정도 봤을 만큼?”

“크흠. 비천한 수인족이라 그런지 역시 예의를 모르는군. 기척도 없이 기사의 뒤로 다가오는 것은 죽어도 상관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나?”

“흠,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못 들으시더구려. 삐걱 거리는 소리가 꽤 컸을 텐데. 아마 내 생각엔 그 비천한 수인족에게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소만.”

“네놈 무슨 헛소리냐?”

“츄나양 말이요. 우리 모래바람족인 거 모르겠소?”

“무슨 헛소리를, 응?”


이를 악물고 대화하던 코린은 고개를 휙 돌려 바 안에서 웃으며 여관주인과 얘기하고 있는 츄나라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머리엔 갈색 귀가 쫑긋 솟아있었다.

아까는 왜 보이지 않았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분명하고 선명한 갈색의 큰 귀.

코린은 순간 무너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츄나양이 수인족?”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저 별빛처럼 영롱한 여인이 하필이면 비천한 수인족이라니.

게다가 재수 없는 바란과 같은 모래바람족.


“으윽.”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말은 으흐흐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런이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고귀한 기사인 코린경이 첫 눈에 반한 여인이 하필 비천한 수인족이라니. 안 그렇소? 푸하하하.”


코린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어 다말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놈 죽고 싶으냐? 누가 첫눈에 반했다는 거냐? 이 내가 비천한 수인족 따위를!!!”

“아, 그렇구료. 내가 오해했다니 사과하겠소. 이거이거 그렇다면 혹시 츄나가 고귀한 기사인 코린경에게 무례할지도 모르니 그녀에게도 코린경이 비.천.한. 수인족들을 싫어한다고 전해줘야 겠구료. 어이!! 츄나!!”

“와아악!!! 뭐하는 거냐?!!!”


기겁하는 코린을 바라보는 다말의 눈은 매우 사악해보였다.


“왜 그러시오? 방금 코린경이 한 말을 전달해주려고 하는데.”


코린이 그런 다말을 보며 이를 갈았다.


“네 놈, 기사를 놀리고 목숨이 붙어...”

“어머, 다말, 오랜만이야. 잘지냈어?”


다말의 목소리에 테이블로 걸어오는 츄나를 보며 코린은 순간 다시 얼어붙었다.


“잘 지냈지, 츄나. 전보다 더 예뻐졌는 걸?”

“어머, 고마워. 다말도 여전히 멋있어. 근데 이 멋진 분이랑은 아는 사이야?”

“잘 아는 사이지. 무려 소하라에서 근무하시던 기사님이야. 근데 이 분이 수인족들을 싫...”

“와아악, 츄, 츄나양. 반갑소. 근데 요리는 멀었소? 배가 매우 고프구려!!!”

“아, 죄송해요. 이제 곧 다 될 거예요. 근데 기사님이셨군요. 어쩐지 멋있더라.”


코린은 또다시 구름 위로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기사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저 지금 무례한 말 한 거죠? 기사님께 함부로 성함을 알려달라고 하다니. 죄송해요.”


밝게 웃으며 이름을 묻다 스스로 깜짝 놀라 표정이 어두워지는 츄나를 보며, 코린은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지다니, 세상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아니, 그럴 리가요. 제 이름은 드클레어 코린. 프시바크 공작가에서 기사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하하.”


자랑스럽게 자기를 소개한 코린의 말을 들은 츄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프시바크 공작가라면, 그 소나아가씨의. 소나아가씨는 저희 모래바람족의 은인이나 다름없다고 들었어요. 코린님도 그 분을 도와서 저희 모래바람 일족을 도와주시고 계신 거군요.”

“아, 그, 그런 셈이죠.”


다말은 순간 입을 허 벌리고 코린을 바라봤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비천한 수인족 따위 알바 없으니 소하라로 돌아가자고 소나아가씨께 떼를 쓰던 사람이...

츄나는 코린의 오른손을 그녀의 두 손으로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너무 감사해요. 정말. 너무 훌륭한 분이세요. 고귀한 기사시면서 다른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그런 고생을 자처하시다니. 저희 일족을 대신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자, 자처라고? 매우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코린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진정한 기사라고 할 수 없지요. 그렇게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하하하.”


너무 기분이 좋았다.

고기만 찾던 늑대가 자기는 사실 채식주의자였다고 우기는 모습을 본 듯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다말의 표정 따윈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쩜. 잠시만 기다리세요. 빨리 요리를 갖다드릴게요. 우리 주인아저씨의 우유죽은 정말 최고예요. 분명히 만족하실 거예요.”

“우, 우유죽이요?”


옆에 있던 다말이 끼어들었다.


“아까 코린경은 분명히 우유죽이 싫...”

“우유죽!!!!! 정말 맛있겠군요!!!! 맛있는 음식은 오래 기다려주는 것이 예의. 츄나양. 서둘지 마시고 천천히 갖다 주십시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싱그런 미소를 남기고 츄나는 사뿐사뿐 춤추듯 바 안으로 돌아갔다.

그런 츄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코린, 그리고 그 코린을 바라보는 다말.


“우유죽을 그리 좋아하셨다니 전혀 몰랐구려. 코린경. 바리아가 들으면 무척 좋아하겠소.”


다말의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노려보며 코린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코린을 보며 다말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코린경. 지난번엔 분명히 모래바람족이고 뭐고 비천한 수인족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없다고 하시지 않았소. 그사이 그렇게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미처 몰랐소만. 오, 생각해보니 그 지난번이 바로 어제였구만. 아니, 오늘 아침이었던가?”


코린은 당장 뭐라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천한 수인족의 우유죽 따위를 먹을 바엔 굶어 죽어버리겠다고 소나아가씨에게 말하고 뛰쳐나온 게 오늘 아침이었다.

코린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깐죽거리는 다말을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런 적 없다.”


너무 뻔뻔한 부정에 이번엔 다말이 당황했다.


“뭐요?”

“원래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고귀한 기사가 일일이 그런 걸 기억할까. ‘넌 탈렌해를 마음에 담지 못하면 사내가 아니다.‘라는 옛말도 모르느냐. 그런 쓸데 없는 거나 마음에 담아두는 거 보니 모래바람족 사내의 격도 별거 아니구나.”

“허, 그러는 코린경은 ‘두발로 선 자는 두 말을 하지 않는다.’ 라는 옛 말은 기억나지 않으시는 모양이오. 어째, 오늘부터 네발로 걷기라도 하시려오?”


말로는 도무지 당할 수 없자, 코린은 이를 악물고 다말을 노려보았다.


“네 놈,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러자 다말은 바로 츄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츄나!!! 코린 기사님이 읍!!”


코린은 다급히 다말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이쪽을 돌아보는 츄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츄나양, 그다지 시장하지 않으니 더 천천히 해도 된다는 얘기였소. 아주, 아아주 천천히 하셔도 되오.”


그 말에 츄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코린은 다말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놈!!!”


다말은 그런 코린을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재미있어 보이는지 얼굴을 자근자근 밟아 땅속 깊이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욕구를 참아내고 있는 코린의 속에선 화산이 솟아오를 것 같았다.


“으흐흐, 코린경. 우리 굉장히 좋은 사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려. 그렇지 않소?”


무슨 개소리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아니, 우린 원래 좋은 사이 아니었느냐? 무려 3년 가까이 같이 마수도 잡고 했으니.”

“정확히는 마수는 우리가 잡고 코린경은 귀찮은 표정으로 도망다녔던 걸로 기억나지만 말이오. 뭐 어쨌든 사람은 원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는 거 아니겠소. 으흐흐”

“그, 그래. 그렇지.”


아무래도 좋았다. 그 입만 다물게 할 수 있다면 저 얄미운 다말에게 여동생도 시집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코린은 남동생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기대하지 않았던 우정을 쌓아가던 그때, 문이 거칠게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딱 보기에도 ‘나 나쁜 놈이오’ 라는 흉악한 웃음을 짓고 있는 거구의 남자 셋이 문을 박차고 여관으로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셋 중 맨 앞의 제일 나쁜 놈처럼 생긴 녀석은 흙먼지 쌓인 망토 어깨 위로 거대한 대검을 얹고 건들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졸개처럼 야비하게 생긴 둘은 역시 롱소드가 들어있는 검집을 하나씩 등에 매고 있었다.


“여어 츄나. 이 게로프 님이 널 보러 오셨다.”


한 번도 미소를 잃은 적 없었던 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며칠 동안 어딜 갔었단 얘기를 들었지. 오늘쯤 돌아왔을까 싶어 와봤는데 역시 우리는 보통 인연이 아니야. 우나 여신님이 손가락을 이어준 사이가 아닌가 싶단 말이지.”


우나 여신이 손가락을 이어준단 표현은 보통 결혼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코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혹시 결혼할 사이란 말인가? 저런 부랑자같은 놈이랑?


“재밌는 농담이네요. 게로프님. 자리에 앉아계시면 주문을 받으러 가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도 츄나는 정중함을 잃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농담이란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코린이 이번엔 분노에 찬 얼굴로 일어서려 했다.

감히 츄나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만들다니.

우나여신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묻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실천할 시간이었다.


그때, 다말이 코린의 어깨를 잡았다.


“저놈들, 레하타 패거리요.”


레하타 패거리?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지금 저 자식들을 츄나양 옆에서 치워버리는 것보다 중요한가?

그런 의미의 사나운 시선을 다말에게 보내자 다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시오? 이번에 데려온 7명의 아이들.”


그제야 기억이 났다.

7명의 아이들을 사온, 정확히는 아직 돈을 내지 않았으니 외상으로 데려온 그 노예사냥꾼 두목의 이름이 레하타였다. 그리고 다말이 왜 그를 막았는지 그제서야 이해했다.


“7000지언을 갚아야 하는 그놈들?”


다말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린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나 아가씨가 돕고 있는 일을 나서서 깽판을 치기는 찝찝했다.

게다가 레하타라는 놈의 노예사냥꾼 패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마갑을 사용하는 놈들도 꽤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앞에 있는 몇 놈을 손봐주고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이 그 게로프라는 놈은 츄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집적대고 있었다.


“츄나, 주문은 나중에 받도록 하고 일단 우리의 긴 헤어짐과 감격적인 만남을 기념할만한 일을 하자고. 키스라던가 그런 것 말이지.”

“게로프님과 다시 만난 지 2주밖에 안됐는걸요. 만남을 기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잖아요? 테이블로 가서 앉아계시면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게요.”


치근덕거리는 게로프 패거리 앞에서도 츄나는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고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어떻게든 그들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정도로 넘어가주지 않았다.


“이것 참 서운하구만. 난 그 2주가 2년처럼 길었는데 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화가 나려고 하는데.”


그러고는 츄나의 손을 잡고 확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악!!”


츄나가 들고 있던 쟁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것 봐 츄나. 내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신사적이고 온화하게 대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돼. 천한 수인족 주제에 이 정도 애를 쓰고 진심을 보여줬으면 받아들여 줬어야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테이블들의 남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게로프의 뒤에 서있던 두 명의 남자들은 그들을 향해 바로 롱소드를 뽑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여어, 용감한 마수사냥꾼 패거리들이시구먼. 마수를 잡다 간이 부어 이제 우리 레하타 조직의 앞도 막아보시려고? 가족들 모두 노예로 팔아버려도 상관없단 뜻인가? 응?”


레하타 패거리들의 악명은 유명했다.

그들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인간족, 수인족 가리지 않고 처참하게 응징하곤 했다. 이미 자유민이 된 수인족의 혀를 자르고 얼굴을 망가뜨려 다시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대항한 자의 손발을 자르고 그 앞에서 가족들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온갖 잔인한 일들을 저지르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게다가 앞에 있는 게로프는 레하타 패거리 중에서도 마갑을 사용하는 5부대장 가운데 한명이었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남자들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게로프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병신들이 그래도 주제파악은 하니 다행이군.”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츄나를 보고 혀로 입술을 핥고는 그녀의 입술로 자신의 혓바닥을 가져갔다.


“안돼!”


그걸 본 츄나는 몸부림쳤지만 몸과 머리가 붙잡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게로프의 아랫도리가 부풀어 올랐다.


퍼억!!!!!


게로프는 순간 자신의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 사이 풀려난 츄나는 재빨리 바 안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깨달은 건 바닥을 굴러다니는 나무컵을 보고 나서였다.

분노에 찬 게로프가 소리를 질렀다.


“어떤 미친놈이냐!!!”


그 미친놈은 이미 불꽃이 나올듯한 눈으로 게로프를 쏘아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태어나 이렇게 화가난건 처음이다. 개가 뜯어먹다 만 썩은 돼지머리 같은 얼굴을 한 놈이 감히 츄나양의 입을 맞추려 하다니, 츄나양의 몸에 손을 대다니, 츄나양의 얼굴에서 웃음을 뺏어가다니!!!”


참지 못하고 나서려다 코린에게 선수를 뺐긴 다말은 그 순간에도 나중에 이 말로 그를 놀리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리지 마라. 다말. 이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말리지는 않소만 살려는 두시오.”


게로프는 코린과 다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네놈은 바란과 함께 있던 모래바람족 떨거지 아니냐. 네놈이 우리한테 이래선 안 될 텐데.”


다말이 대답했다.


“네놈이 상식적으로 행동했으면 그랬겠지. 그리고 이 사람은 모래바람족 떨거지가 아니라 고귀한 기사님이시라 내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어쩌냐?”


게로프는 순간 움찔했다.


“기사라고?”


코린은 당당히 말했다.


“프시바크 공작가의 기사 드클레어 코린이다. 네 놈이 감히 기사 앞에서 숙녀를 희롱하느냐.”


게로프는 순간 움찔했다.

프시바크 공작가의 이름은 아사롬의 사람들이라면 어려서부터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건국왕 카에르와 함께 했던 6영웅들의 후손. 아사롬 최강을 다투는 검가. 그런 곳의 정식 기사를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게로프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력은 본 적 없지만 프시바크 기사단 소속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데리고 온 똘마니 두 놈은 이미 사색이 되어 게로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문득 뒤에 있는 츄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츄나는 이미 자신이 아닌 저 갈색머리 기사 놈을 향해 선망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태어나며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레임을 주었던, 그래서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여자를 놀이개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를 1년이나 애태우게 했던.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다른 남자를 향해 있는 것이었다.

분노가 솟구쳤다.


“기사?!!! 웃기고 있군. 마갑 성능만 믿고 개폼 잡는 떨거지들!!!! 안전한 곳에서 보기 좋게 검만 휘두르던 것들이 피 튀기는 실전을 알 리가 없지. 옛날부터 기사란 놈들을 만나면 피떡을 만들어버리겠다고 결심했었다!!! 네 놈에게 오늘 진정한 시후 남자의 힘을 보여주마!!!”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소리치던 게로프는 실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도 비리비리해 보이는 저런 놈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네 놈, 자신이 있으면 밖으로 나가자!!!”


코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변방의 날건달이 기사에게 1대1 대결을 요청하다니.

그 와중에 츄나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너 같은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 정의의 검으로 너를 처단해주마!!”


스스로 말해놓고도 뭔가 부끄러웠다. 옆에 다말이 ‘큭.’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 느껴졌다. 웬 정의의 검.

츄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바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 나와라!!!”


괜히 말했어. 괜히 말했어. 속으로 되 뇌이며.

그 순간 게로프의 눈빛이 빛났다.

역시 멍청한 기사놈.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다니. 진정한 실전을 보여주지.

바로 대검을 뽑아 돌진하며 기사의 등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츄나가 비명을 질렀다.


“안돼!!!”

캉!!!

“어이, 그렇게 폼을 잡고는 뒷치기나 하면 쪽팔리지 않냐?”


뒤의 급박한 소리에 코린이 뒤를 돌아봤을 때, 게로프의 대검을 다말이 자신의 곡도로 막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코린은 순간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지만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역시 변방의 떨거지들이 하는 일은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그리고는 게로프를 향해 피식 입꼬리를 올려 비웃어 주고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놀란 심장은 두근두근 거렸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멋있었다고 생각하며.

그 뒤를 부끄러움과 분노로 불타오를 듯 붉어진 얼굴의 게로프가 대검을 거두고 쫒아나갔다. 나가면서 다말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다말은 그 모습들을 보고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천천히 따라 나갔다. 이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람은 자기일거라 확신하며.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어이구, 그러셨어요? 저는 전혀 예상도 못했네요.”


혼잣말을 하며 한심한 눈으로 코린을 쳐다봤다. 그 매사에 불퉁거리고 시크했던 코린경이 저런 성격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황토색 먼지가 가득한 평원, 나무로 만든 허름한 객점 ‘바람의 울음소리’는 홀로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 앞 공터에 코린과 게로프가 마주 섰다.

게로프는 이미 대검을 세워 들고 있었다.

코린은 망토 안쪽에서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색 손잡이 끝 폼멜에 하얀 빛을 내는 보석이 박혀있고, 손잡이 가드 부분에도 은빛 물결무늬 장식이 되어있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검신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딱 봐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명검.

게로프는 다시 한번 기가 죽는 것을 느끼며 기합을 질렀다.


“으와아앗!!!!!”


돌진해서 내리치는 대검의 경로는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고 파괴적이었다.


팅!!

“하품이 나오겠군.”


게로프는 자신의 대검을 옆으로 살짝 비껴내고 어느 샌가 자신의 목 앞에 와있는 검신의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 이런.”


코린은 피식 웃으며 검을 치웠다.


“너무 시시하구나. 어째, 다시 해주랴?”


게로프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강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이상이었다.

하지만 물러날 순 없었다.


“으와악!!!!”


게로프는 정신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원을 그리며 대검의 무게를 십분 살린 폭풍 같은 연격.


팅! 팅! 팅!


그 몰아치는 검격을 코린은 살짝살짝 걷어내는 것만으로 다 무위로 만들고 있었다.

거구의 게로프에 비해 평범한 체격의 코린이 발걸음 한번 움직이지 않고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대검을 걷어내는 모습은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게로프의 실력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일반 용병이나 무사들 중에선 거의 일류라고 할 만 했다.

하지만 상대는 아사롬의 젊은 층에서 최소 5손가락 안에는 든다고 자부하는 코린이었다.


코린은 지금 고민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멋있는 모습을 보이며 이길 수 있을까.

목을 쳐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소나아가씨와 바란이 곤란해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무엇보다 츄나양이 무서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선순위가 살짝 바뀐 것 같지만 코린은 게로프를 상처 없이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로프는 미칠 노릇이었다.

프시바크 기사단이라는 얘기에 강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했다.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다니.

두목인 레하타도 상대가 안될 것 같았다.

두 손을 모으고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츄나의 얼굴이 힐끗 보였다.

터질 듯 한 분노.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는 온 힘을 모아 대검을 내리쳤다.


“으아아아앗!!!!!”

팅!!!!


대검이 하늘 높이 떠올라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내려 땅에 꽂혔다.


온 힘을 다한 게로프의 일격을 코린은 역시 한발자국 움직임도 없이 살짝 검을 쳐올리는 것 만으로 게로프에게 검을 놓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넋을 잃은 채 자신의 빈손을 보고 있는 게로프를 보고 피식 웃으며 코린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꽂아 넣었다.


“너의 죄는 목을 쳐버려야 마땅하지만, 그 피로 츄나양의 눈을 더럽힐까 두려워 살려둔다. 행운인 줄 알아라.”


그리고는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확히는 츄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과 화사한 미소가 코린의 눈을 가득 채웠다.

그때, 뒤에서 게로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여 오라.”


응? 저 말은 익숙한데?

문득 저 말이 하급 마갑의 시동어라는 걸 깨닫고는 코린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게로프의 주먹이 눈앞에서 보였다.


퍼억!!!!!!


코린은 10여 미터를 튕겨 날아갔다.


“꺄악!!!!!”

“흥!! 마갑만 입으면 별것도 아닌 놈이. 죽여 버리겠다!!!”


어느새 벗어버린 게로프의 망토 안에는 진회색의 마갑이 입혀져 있었다. 진회색 마갑의 관절 틈새 부분에선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원래 안에 입고 다니던 마갑을 작동시킨 것 같았다.


“마갑이라니, 비겁한 놈!!!”


여유 있게 보고 있던 다말이 다급한 표정으로 초승달 모양의 곡도를 뽑아 게로프를 내리쳤다.


“흥!”


게로프는 팔을 휘둘러 마갑의 팔뚝 보호대 부분으로 그 곡도를 쳐냈다.

다말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


“넌 좀 이따 상대해주마.”


게로프는 뒷걸음질 치는 다말을 무시하고 쓰러져 있는 코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엄청난 탄력이었다.

한 걸음에 몇 미터를 뛴 후 다음 걸음에 위로 뛰어 올라 쓰러진 코린을 향해 두 손을 잡고 망치처럼 내리쳤다.


쿠와왕!!!!


큰 바위가 떨어져 내리듯 큰 소리를 내며 땅이 깊게 파였다.


“쳇, 피했나?”


코린은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던지 몸을 날려 피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오른 손으로 왼 팔뚝을 감싼 채였다.

다행히 아까 그 순간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 정타를 맞지는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왼 팔뚝의 뼈가 부러진 듯 욱신거렸다.


게로프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코린을 향해 돌진하며 주먹을 날렸다. 코린은 바로 발검하며 옆쪽으로 팔뚝을 쳐냈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쳐냈음에도 몸이 반대로 밀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게로프는 지체하지 않고 왼손으로 다시 주먹을 날렸다. 광분한 야수를 보는 듯 한 엄청난 속도였다.

코린은 검으로 공격을 흘리고 쳐내는 중이었으나 아까완 달리 몸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겨우 이 정도냐?!!!”


비웃으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게로프를 보며 코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게로프의 비웃는 말투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지금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 게로프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0.2리온 출력의 마갑을 입었던 자신을 쉽게 꺾었던 남자.

바란. 그 괴물을.


소하라의 무투대회 4강에서 코린은 지금 게로프가 하는 것처럼 마갑의 압도적인 운동능력으로 바란을 몰아쳤었다.

하지만 바란은 조금도 곤란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작은 힘, 작은 움직임만으로 평범한 곡도를 움직여 자신의 마검을 쳐냈었다.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검을 내리쳐도 바란을 흔들 수가 없었다.

큰 나무를 향해 입김을 후 불고 있는 것 같은 무력감. 그때의 자신은 지금 저 게로프처럼 바란을 비웃을 수 없었다.


“기분이 더러워지는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바란 사이의 실력 차는 저 게로프라는 잡배와 자신과의 실력 차보다 훨씬 크다는 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열등감과 질투심.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게로프는 신이 나서 코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프시바크가의 기사를 압도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게로프의 온몸을 채우고 있었다.


“어떠냐? 마갑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들아. 기사는 무슨!!! 크하하하!!!”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쳐내고 있던 코린이 그 말에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마갑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라. 그래 니 말이 맞다. 그럼 이제 기사가 마갑을 입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빛이여 오라.”


순간 검의 폼멜에 박혀있는 하얀 보석이 밝게 빛을 뿜으며 코린의 온몸을 감쌌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눈앞에서 빛에 휩싸였던 코린은 어느새 게로프의 뒤쪽으로 이동해 뽑았던 검을 검집에 꽂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한듯한 몸놀림이었다.

매끄러운 검은 광택의 갑옷을 온몸에 휘감은 채. 은빛의 줄무늬가 새겨진 검은 광택의 전신 갑옷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고, 그 갑옷의 연결 부위마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갑작스런 빛에 당황했던 게로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게로프는 자신의 오른쪽 팔이 천천히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과 뿜어 나오는 핏줄기.


“아아악!!!!! 내 팔!!!!”


게로프는 뿜어 나오는 핏줄기를 한 손으로 막으며 정신없이 절규했다.


“빨리 팔을 치료사에게 가져가 잘 붙이면 나을 수 있을 거다. 감히 0.2리온의 하급 마갑으로 기사에게 힘을 쓴 너의 무지를 원망하도록. 빨리 데리고 꺼져라!!”


게로프의 졸개들에게 소리 지르자 넋을 놓고 보고 있던 두 사내는 정신없이 게로프에게 다가가 상처를 막고 부축하며 게로프를 데리고 갔다.

그 모습을 지긋이 웃으며 바라보던 코린은 고개를 돌려 구경하던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츄나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다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소나아가씨와 바란의 입장이 생각났다.

실수했다는 자각이 들자 어색하게 다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 시후에는 괜찮은 치료사가 없었던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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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2(재업) 19.04.02 303 5 38쪽
45 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1(재업) 19.04.02 448 6 42쪽
44 4부 쿨론 요새-27 (로가-3) +3 19.03.27 668 23 12쪽
43 4부 쿨론 요새-26 (로가-2) +2 19.03.26 560 20 15쪽
42 4부 쿨론요새-25 (로가-1) 19.03.25 547 18 11쪽
41 4부 쿨론 요새-24 (지하-3) 19.03.24 534 18 12쪽
40 4부 쿨론 요새-23 (지하-2) 19.03.23 549 16 11쪽
39 4부 쿨론 요새-22 (지하-1) 19.03.22 572 18 11쪽
38 4부 쿨론 요새-21 19.03.21 577 20 15쪽
37 4부 쿨론 요새-20 (샤벨 타이거-2) 19.03.20 559 19 12쪽
36 4부 쿨론 요새-19 (샤벨 타이거-1) 19.03.19 559 18 9쪽
35 4부 쿨론 요새-18 19.03.18 583 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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