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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19.01.01 12:57
최근연재일 :
2020.01.2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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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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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5(재업)

DUMMY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던 두 사람, 아버지와 스승 크리탈린 라 소레스가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두 분은 죽마고우였고, 뜻을 함께하는 맹우였다. 어린 시절부터 두 분이 꿈꾸던 세상은 에피제임의 속국이 되기 전의 아사롬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과거 이웃나라인 에피제임은 아사롬을 정복한 후 귀족들에게는 회유책을, 일반 국민들에게는 강경책을 사용하여 아사롬을 분열시켰다. 에피제임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귀족들은 과거 그들이 갖고 있었던 특권들을 대부분 그대로 누릴 수 있었기에 50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들에 동화되었다.


반면, 일반 국민들에게는 무거운 세금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특히 수인족들은 에피제임에서 그렇게 하듯 모두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전 국민의 40%이상이 수인족이었던 아사롬에서 국민의 반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간족인 국민들은 그나마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 팔려나가는 신세를 면했다는 것에 안심해야 했고, 수인족들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수인족을 잡는데 일조하면 거액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높은 세금과 노역으로 힘들어하는 인간족 국민들은 그들을 잡아서라도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로인해 그들은 또 수인과 인간족으로 분열되었다.


아사롬을 철저하게 분열시키는, 잔악하지만 효과적인 지배방식이었다.

아사롬은 철저하게 분열했다. 귀족과 평민, 노예들로.

소수의 뜻있는 이들이 복국운동을 전개했지만 그마저도 에피제임과 아사롬의 귀족 세력들에 의해 와해되었다. 아마 무크란 제국의 크라이슈마 대제가 에피제임을 정복하지 않았다면 아사롬은 독립하기 위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독립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독립한 후 다시 5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사롬의 귀족들은 아직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하게 에피제임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사롬은 독립했지만 아사롬의 국민들은 독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소나의 아버지 프시바크 라 도우즈와 크리탈린 라 소레스는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했다.

아직 10대였던 두 사람은 현재의 아사롬 귀족들에게 환멸을 느꼈고, 그것을 바꾸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굳게 맹세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강한 무력과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리온을 계승하고 있는 아사롬의 여섯 공작가의 후계자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작위를 계승하고 뜻을 모아 활동을 하면 아사롬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어렸던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바라듯 에피제임과의 관계를 끊고 국민들의 세율을 낮추며, 수인족들의 노예화를 금지시키는 일은 수많은 상류층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기하기를 강요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휘하에 있는 가신들, 귀족들조차 그 뜻을 공감시키기가 어려웠다. 상식적이고 의로워 보이던 사람들조차 지금 가진 것을 포기하는 일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수없이 타협하고 뜻을 꺾어야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사이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레스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든 자신의 세대에서 이상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미 부패한 귀족세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착화될 것이고 점점 더 돌이키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 반해, 도우즈는 희생을 줄이고 싶어 했다. 많은 사람들을 책임진 공작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사람들을 희생시켜서까지 급격히 나라를 변화시키는 것에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이 결국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은 예정된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점점 다른 귀족 세력들과 왕족들로부터 반감을 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만 갔다. 그리고 서로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도 잦아졌다.


아직 어렸던 소나는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마음 졸여했었다. 어린 마음에 세상을 바꾸는 일 따위 포기해버리고 두 분이 그냥 사이좋게 지내시길 바라기도 했었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고, 수인족이 노예로 사는 모습은 안타까웠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귀족으로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그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조금 두려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10살 때 쯤 소나는 바란을 처음 만나게 됐다.


건국 기념일 왕실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많은 귀족들이 화려한 행렬을 뽐내며 왕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6공작가의 마차들이 지나갔다.

다른 공작들이 많은 기사들과 수많은 수인족 노예들을 앞세워 화려한 행렬을 만든 것과 달리 아버지인 도우즈는 그저 4명의 기사에 마차 한 대로 단촐하게 그들의 뒤를 쫒아가고 있었다. 소레스는 한 술 더 떠 마차를 가져오는 것도 귀찮다며 동행하는 이 하나 없이 도우즈의 마차에 같이 동승한 채였다.


행렬의 주변엔 소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이 그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그런 침묵이 소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소레스는 기본적으로 무척 유쾌한 사람이었다. 소나가 더 어렸을 때는 괴물 분장을 하고 나타나 놀래키기도 하고 여행을 다닐 때는 평민 복장으로 일반 술집에 들어가 노래와 춤으로 그 안에 있던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아버지인 도우즈와 언쟁을 벌인 뒤에도 소나의 앞에서는 항상 재미있는 우스개 소리로 소나를 웃게 만들고는 했었다.

그는 책임감 있는 귀족인 동시에 최강의 검사이기도 했고, 호기심 많은 여행가였으며 술과 사람,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소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왔었다.


하지만 그날은 별 얘기 없이 주변을 구경하고 그저 앉아 있는 중이었다. 소나는 그런 분위기가 현재 아버지와 소레스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 낯설고 슬펐다. 어떻게든 두 분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기본적으로 소나는 애교를 부리는 것에도, 말을 하는 것에도 재주가 없는 소녀였다. 그저 예쁘기만 했지 외모 빼고는 쓸모없는 여자애일 뿐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갑자기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소나의 마차 뒤를 따라오던 행렬이 멈춰 있었다.


행렬의 앞쪽에서 걸어오던 깃발을 든 여자 수인이 쓰러진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깃발이 바닥에 넘어져 행렬 전체가 멈춰 버렸다. 아름답게 생긴 여자 수인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귀족들은 얼마나 많은 노예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자랑하고는 했다. 더 강한 수인족 무사나 더 아름다운 수인족 여자들.

1년에 한번 있는 건국 기념일 행사는 그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한 달 넘게 행렬을 위해 준비를 하고는 했다. 깃발을 들 노예들을 고르고 색을 맞춘 예쁜 옷들을 입히고, 기사들과 말의 갑옷을 더 멋지게 치장하고, 행진을 연습하고.


소레스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소나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었다.


‘봐라. 소나야. 저 놈들은 곡식 항아리의 곡식을 팔아 항아리를 치장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병신들이다.’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수인족 노예를 잡아들이고 세금을 걷어 국민들을 힘들게 하는 행태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때쯤의 소레스는 귀족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없어져야 아사롬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작 중에선 프시바크 공작가가 가장 끝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뒤에 쫒아오고 있는 가문은 키리히 후작가였다.

키리히 라 살란 후작은 탐욕스럽고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문을 여섯 공작가와 대등하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하고 싶었고, 그 욕망을 부와 사치를 자랑하는 것을 통해 이루려고 했다.


소레스의 말에 따르면 사춘기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미숙아가 과분한 지위를 갖은 덕분에 민폐만 끼치고 있는 셈인데, 덕분에 소레스와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한번은 미리온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거라는 키리히 후작의 도발에 코웃음을 친 소레스가 공개석상에서 마갑을 입은 키리히 후작을 맨몸으로 상대해 처참하게 패배시켰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을 텐데 대결 이후 소레스는 그에게 무사도 아닌 자가 마갑을 입는 것이, 귀족의 자격도 없는 자가 후작을 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며 조롱했었다.

그 이후로 키리히 후작은 어떻게든 소레스에게 복수하고 싶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소레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소레스와 관계가 좋은 고위 귀족이란 거의 없었으니 딱히 그에게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소나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쪽을 보고 있을 때 소레스도 살짝 뒤를 보더니만 마차를 세우고는 밖으로 내렸다.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소레스 공작이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에 있던 국민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저 중에선 소레스와 실제 술잔을 부딪혔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웅성웅성하며 소레스님, 크리탈린 공작 어쩌고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뒤따라 내린 프시바크 공작 도우즈와 소나를 보고는 함성소리가 더 커졌다.


그때 소나는 뒤쪽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키리히 후작의 얼굴이 매우 안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옆에 있던 기사에게 뭐라고 얘기했고, 그 기사는 마뜩찮은 얼굴로 행렬 앞 쪽으로 말을 타고 와서는 그 여자 수인 앞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치링!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나온 은빛의 검날이 하늘로 향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허억 놀라는 소리를 냈다.

소나 역시 상상도 못했던 기사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저 병신자식이.”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린 소레스가 앞으로 뛰어나가려 몸을 움츠렸다.


그때, 행렬의 중간쯤에서 누군가 뛰쳐나와 순식간에 기사의 말에 몸통박치기를 했다.

말이 크게 휘청거리며 히힝 비명을 질렀다. 기사도 균형을 잃어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사이 뛰어나왔던 사람이 쓰러진 여자 수인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어려보이는 남자 수인이었다.


“뭐하는 짓이냐!!!!”


기사가 짜증나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애초에 여자가 들기에는 무거운 깃발이었습니다!!! 며칠간의 계속된 행진 연습으로 모두들 지쳐있구요. 지쳐 쓰러졌단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이 천한 수인놈이!!!”


기사가 화난 얼굴로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 수인족 소년은 그럼에도 당당하게 팔을 들어올려 수인족 소녀의 앞을 가리며 기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때 그 기사의 앞에 어느새 소레스가 나타났다. 순간 이동을 한 듯 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살짝 고개를 비틀고는 그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좀 다른가보군.”


기사는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크, 크리탈린 공작님.”


구경꾼들 사이에서 안도의 탄식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역시 소레스님이라는 말들도 여기저기 들리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의 뒤로 키리히 후작이 마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무척 분노한 얼굴이었다.


“크리탈린 공작!!! 이게 무슨 짓인가?!!!”


소레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얘기 그대로 들려주지. 이게 무슨 짓이지?”


누가 봐도 재수 없을 표정과 말투에 원래 붉게 상기돼있던 키리히 후작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내, 내 노예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지 않나. 왜 거기에 참견하는 것인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지키기 위해 내 몸을 내 맘대로 사용할 권리를 행사하는 중이다. 뭐가 잘못됐나?”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신의 이번 만행을 이번 왕성 회의에 회부하겠다!!!”


피식 웃으며 소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게나. 근데 그 전에.”


소레스의 눈이 살기를 담아 그를 쏘아보았다.


“감히 공작 앞에서 검을 뽑아 내려치려 하고 있는 저 기사를 처리해도 되겠지?”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고 검을 뽑은 채 들고 있던 기사를 힐끗 바라봤다.


“뭐, 뭐라고?”

“아, 물론 난 명예를 아는 남자이니 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할까 하는데.”


난데없이 사형 통보를 받은 듯 기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런.”


소레스는 현 아사롬의 비공식 최강의 검사였다.

비공식인 이유는 귀찮다며 무투대회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를 아사롬 최강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소레스와의 생사결은 일반기사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기사를 아끼는 명예로운 주군인 키리히 후작이 대신 그 책임을 받는 것도 괜찮고. 어때? 그렇게 하겠나?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소레스가 잔인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훑었다.

키리히 후작도 그의 기사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소레스와 생사결을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그.”


어쩌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고 있는 키리히 후작에게 어느새 소레스의 뒤에서 다가온 프시바크 공작 도우즈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키리히 후작, 크리탈린 공작의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체 장난이 심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찮은 노예에 관한 일로 두 귀족이 결투를 벌이다니 온 국민이 웃을 일이지요.”


그 말에 키리히 후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소레스의 절친으로 알려진 프시바크 공작이 그의 편을 들어주다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눈물마저 핑 도는 것 같았다.


“단지 걱정스러운 것은 경사스러운 건국절, 그것도 왕궁에 들어가는 길에 별 것 아닌 일로 피를 보게 되면 많은 국민들 앞에서 후작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아마 크리탈린 공작도 그래서 기사를 막은 것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도우즈는 의식적으로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쓰윽 둘러봤다.

키리히 후작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평상시 같으면 국민들이 지켜보건 말건 상관도 안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떻게 하던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역시 생각이 깊으십니다. 프시바크 공작.”


고마운 눈으로 도우즈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소레스를 힐끔 쳐다보고는 옆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빨리 노예들을 일으켜 세우고 행진을 다시 시작해라!!!”


그리고는 서둘러 도망치듯 마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레스는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가며 도우즈에게 말했다.


“비위도 좋지. 벌레들의 체면을 세워주다니. 고생했네.”


도우즈도 그를 보며 대답했다.


“벌레에겐 벌레에게 적당한 언어가 있으니까. 그보단 아까 진심으로 칼을 들 생각이었지? 무모했네.”


소레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럴지도. 하지만 아까 그를 죽여야 했다는 생각은 여전하네. 자네가 원망스럽군.”


도우즈가 답답하단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공작가와 후작가의 내전이라도 벌일 참인가? 자네가 적이 너무 많다는 건 잘 알지 않나. 자칫하면 적들을 연합시켜 줄 수도 있다는 걸 모르겠나?”


소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득? 있었지. 적어도 아까의 그 수인족 소년, 소녀들은 살릴 수 있었겠지. 자네야말로 오늘이 지나고 나서도 저 쓰레기가 그들을 가만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우즈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두 사람의 수인족 노예 때문에 그런 대가를 치를 수는 없네.”


그 말에 소레스가 마차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나, 아까 그 소년의 얼굴을 잘 봐 두거라. 여태껏 네가 봐온 수많은 사람 중 가장 고결한 사람이다. 많은 것들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가진 것 조금을 포기하지 못해 이 나라는 아직도 이 모양이지. 근데 저 소년은 남을 위해 자신이 가진 유일하고 소중한 것, 생명을 버리려고 하는구나. 고위 귀족 중 저런 사람이 5명만 있었어도 이 나라에는 충분히 희망이 있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거기까지 말한 소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우즈를 잠시 바라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감는 아버지 도우즈의 얼굴 뒤로 소나는 갈색 귀를 가진 수인족 소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굳게 다문 입술과 올곧은 눈빛을 가진 그 소년을 보며 소나는 작은 체구의 저 소년이 어쩐지 아버지 도우즈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아닌, 더 어린 시절에 봤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것이 소나가 본 바란의 첫 모습이었다.



그 후 소나는 소레스를 통해서 그 소년이 투기장에 가게 되었으며 사람들 앞에서 수인족 성인들, 그리고 마수들과 싸워야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아찔한 얘기였다.

얼굴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너무 안타까웠다.


“한번 보러 가보겠니?”


소레스의 제안에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소레스는 그날 이후 그 소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본 것인지 그 소년의 이름이 바란이며, 질풍왕 카에르와 함께 마룡과 싸운 모래바람 족이란 것,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와 동갑인 10살이란 것까지도 말해 주었다.


“키리히 벌레가 아예 투기장에 팔아버린 것이었다면 그냥 내가 사올 수 있었을 텐데, 소유권은 넘기지 않은 채 투기장에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소레스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었다.

그렇게 보게 된 바란의 첫 시합은 처참했다.

거대한 체구의 수인족 남성을 상대로 끝없이 달려들다가 계속 얻어맞고는 10번쯤 넘어진 끝에 기절해 버렸다.


소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끔찍한 눈으로 쳐다보다 기절을 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하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았던 것이다.

다행히 하급 투기장의, 관객도 몇 없는 시합이어서 몸으로만 싸우는 경기였기에 망정이지 무기를 사용하는 중급이나 상급 투기장의 경기였다면 이미 10번은 죽었을 것 같았다.

그의 투지는 놀라웠지만 전혀 싸움을 해본 경험이 없는 듯했다. 같은 10살이라도 소레스에게 검을 배우고 있는 소나가 보기엔 경악스러울 만큼 약했다.

그런 그를 보고는 소레스는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가 물었다.


“저게 나쁘지 않다고요? 저런 실력으로는 이번에 안 죽었더라도 다음 시합이면 죽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소레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구나. 내가 나쁘지 않다고 한건 자질이다. 수인족이라는 걸 감안해도 10살치곤 힘도 센 것 같고 몸도 빠르구나. 무엇보다도 싸움 경험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저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투지라니. 나도 저렇게는 못했을 것 같은걸. 훗날 훌륭한 전사가 되겠어.”


그 말을 듣고서야 소나는 납득했다.


“그건 그러네요. 하지만...이대로는 그 훗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소레스도 그 말에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살 수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그 키리히 벌레놈 나한텐 절대 안 팔겠지?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더 괴롭히기나 하겠지. 정말 아까운 놈인데...”


그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저 실력을 갖고도 기사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었다니 말이지.”


그 말에 소나도 작게 아!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기절해서 실려 가는 그의 모습을 다시 봤다.

내가 그였다면,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때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후로도 소레스는 바란의 시합이 있을 때마다 소나를 데리고 가 구경하고는 했다.

바란은 그 이후로도 여전히 처참하게 얻어맞았고, 쓰러져 패배했지만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게 뭔지는 그때의 소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합을 보러 가서 마음을 졸이며 무사하길 기도하는 것은 언제부턴가 스승인 소레스와 함께하는 당연한 일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소나가 13살이 됐을 때 소레스는 처형당했다.

반역을 시도했다는 죄목이었고, 소나의 아버지인 도우즈가 그것을 사전에 알아내 막아냈다고 했다.

모든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됐고 일주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간 안에 마무리됐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도우즈는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9년의 계약을 법으로 지정했다. 모든 수인족들이 노예로 9년을 생활한 후에는 정식 국민으로 인정해주는 법률.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후로 소나는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도우즈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 스승과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던 것이다. 다시 웃을 수 있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로도 소나는 혼자 망토로 얼굴을 가린 채 바란의 시합을 보러갔다.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바란 혼자만이 올곧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모자란 힘 때문에 늘 패배하지만 그래도 비굴해지지 않는 그를 보며 그녀는 스승인 소레스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소하라 최고의 미녀라는 평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소레스의 제자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소레스의 흔적.


소레스처럼 사람들과 친해지고 인망을 얻는 것은 그녀 성격에는 무리였지만 그처럼 강해지기 위해 밤낮없이 검을 휘둘렀고, 책을 읽었고, 남들 앞에선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지만 춤과 노래, 악기를 배웠다.


바란에게 변화가 생긴 건 15살 때였다.

늘 얻어맞기만 했던 바란이 처음으로 상대를 두들겨 팼던 것이다.

수인족이기 때문인지 체격은 이미 성인에 가까워졌지만 늘 지기만 하는 그에게 돈을 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이긴 날 하급 투기장에는 역대 최고의 배당이 나왔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기도 했다.


소나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엄청나게 압도적인 시합이었다. 그때까지 얻어맞았던 일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바란은 살짝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상대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고, 그 사이의 허점으로 주먹과 발을 톡 톡 쳐서 상대를 때리더니만 5분쯤 지난 후에 번개 같은 일격으로 상대를 기절시켰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후로 5연승을 거둔 후 바란은 중급 투기장으로 옮겨갔고 그 이후로도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날 투기장의 가장 뛰어난 격투 노예의 자격으로 소하라에서 열린 왕실 무투 대회에 나갔고 우승했다. 그리곤 자유의 몸이 되었다.


소나는 바로 그에게 달려가 호위무사를 제의했다.

하지만 마갑도 입지 않은 채 마갑을 입은 상대들을 모두 패배시킨 믿을 수 없는 실력의 수인 무사를 노리는 귀족들은 엄청나게 많았고 소나는 곧 기대를 접어야 했다. 아버지인 도우즈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자신이 보장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바란은 그녀를 택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금전적인 것 대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같이 해달라고 요구했다. 노예인 모래바람 족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그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 후로 3년간 두 사람은 함께 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바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란이 소레스의 제자라니...


“제가 첫 시합 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군요. 아가씨도 그 시합을 보셨겠죠?”


소나는 옅게 웃음 지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래, 봤어.”

“정말 원없이 얻어맞아봤지요. 사실 그러고 싶었습니다.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가슴이 불에 타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냥 그렇게 맞다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눈을 떠보니 투기장 지하의 방이더군요. 방이라기 보단 창살로 가로막혀 있는 감옥이었지만. 대충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채 거기에 던져놨더군요.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그냥 누워만 있었어요. 옆에 훈련용 검과 나무 허수아비, 샌드백 같은 것들이 눈에 보였는데, 문득 죽고 싶더군요. 죽고 싶었는데,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죠. 모래바람 족의 전사는 적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지언정 자신에게서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 말이 떠올라 죽을 수도 없었어요. 거기서 죽으면 내가 아닌 모래바람 족이 패배하는 게 될까봐. 내 죽음으로 내 가족, 동족들의 명예까지 손상시킬까봐.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간수, 아니 조교들의 안내를 받고는 저를 찾아왔어요. 애꾸눈에 뺨에 칼자국이 있는 인상 더러운 남자였죠. 그 사람은 조교를 돌려보내고는 제 앞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만 했는데, 그 사람이 제게 말했더군요. 자기는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거드름을 피면서 말하는데 정말 재수가 없었죠. 그러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뭐든지 한 가지 원하는 걸 이루게 해준다면 뭘 하고 싶으냐고. 자신이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 쯤 해서 소나는 그가 누군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소레스는 종종 그런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는 평민들이 가는 술집을 드나들고는 했다. 변장을 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 굳이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아 소나가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냥 변장이 취미생활이라고 대답했었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니까 남자들은 변장이라도 해봐야 공평한 거 아니냐며. 그리고 실실 웃으며 너한테도 곧 가르쳐 주겠다고도 얘기했었다. 내 제자는 내 모든 걸 이어받아야 한다면서.


소나는 그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운 스승의 음흉한 미소와 그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그래서 당신을 때리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있던 소나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는지 바란도 희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예. 그땐 정말 너무 재수 없어 보여서 모든 걸 잊고 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리고...그 사람의 말을 믿지도 않았었고.”

“하긴, 스승님이 다른 사람을 비꼬거나 도발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옆에 있는 사람까지 짜증날 정도로 재수 없긴 했지. 능글능글해가지고는.”

“그러니까요. 제가 그렇게 말하니 좀 당황하시더군요. 그러더니 태도를 가다듬고는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정말로 큰 힘을 갖은 사람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그때의 바란은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도 진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그를 보고 앉아 물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었다.

자기 주변의 아무도 자신이 가진 것들을 타인에게 나눠주려 하지 않는다고.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 할 때쯤 바란을 봤고, 그래서 그게 너무 고마웠다고. 그 고마움을 보답하고 싶다고.


진지한 눈빛의 그는 한없이 자상하고도 강인해 보였다. 어딘가 그늘진, 힘겨운 무게를 짊어진 강한 전사. 어린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던 기억 속의 아버지를 닮은...

그것이 바란의 눈에 보이는 그의 인상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보다 나빠질 것은 없어 보였으니. 그래서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을 나가도 어차피 나는 노예일 텐데. 그럼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할까? 이 사람이 그것까지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상념이 지나가는 동안 그 사람은 자상한 눈빛으로 말없이 기다려줬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에게 말했었다.


‘수인족들이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그는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다음엔 깊이 생각했고, 그 다음엔 씁쓸해 했다.

그리곤 대답했다.


‘미안하구나.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가진 힘이 그것까지 이루어줄 수는 없어. 그것 말고 너 개인에 대한 부탁을 해줄 순 없을까?’


그렇게 말하는 그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고 또 슬퍼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바란은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말하는 것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그럼 제가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는 잠시 말없이 바란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내 모든 걸 걸고 네가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그것이 바란과 소레스의 첫 만남이었다.


“스승님은 저의 능력을 키워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거기서 빼내 주려 하셨지만 곧 생각을 바꾸셨죠.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것이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그리고는 여러 가지 책들을 가져다주시고 사흘에 한번 씩 오셔서 무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실 때마다 숙제를 내주고는 그것들을 확인하며 지도하는 방식이었죠. 그때 밤에 하라며 마나 연공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누군가에게 들키면 자신의 이름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협박하셨죠. 이름도 안 가르쳐줘놓고는.”


두 사람은 소레스를 생각하며 같이 웃음 지었다.

돌아오지 않는 땅, 안바이람 부근의 땅 속 작은 굴 안에서 전설의 마수 베이모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소나는 근 몇 년 중 지금이 가장 편안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스승과 아버지를 잃은 후 느끼는 첫 편안함일지도 몰랐다.


“근데 왜 그렇게 매번 맞고 졌던 거야? 금방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 텐데?”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스승님의 충고이긴 했지만 저도 동의했었죠. 일단 제게 필요한건 당장의 승리보다는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습니다. 너무 빨리 이겨서 무기를 사용하는 중급이나 상급 투기장으로 가게 된다면 위험성이 너무 크니까요. 스승님은 하급 투기장에서 상대를 관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아직 육체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지금이 오히려 상대의 동정도 얻을 수 있어서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떤 상대든 쉽게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됐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때까지는 계속 패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죠. 적의 동작을 읽고 예측하는 것을 계속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맞아주라고 하셨어요. 맷집을 키우는 것에도 좋지만 상대의 힘을 감당할 만큼 힘을 흘리는 연습을 해보라고. 그래서 사실 계속 맞기는 했지만 맞는 방향으로 힘을 흘리는 연습을 했더니 한 1년쯤 지났을 때부터는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죠. 충격을 완전히 흘리는 법, 반만 흘리는 법. 그렇게 5년간 상대를 관찰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상대를 관찰하는 것은 제 움직임을 돌아보는 데도 큰 도움이 되더군요. 가장 좋은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 연구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체격이 충분히 성장하고 실력이 좋아질 때까지는 계속 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저에 대한 소유권이 계속 키리히 후작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투기장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 키리히 후작이 어떤 식으로든 제게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죠. 키리히 후작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무능한 격투 노예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스승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실제로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키리히 후작은 제 소유권을 투기장에 넘겨버렸었죠.”


소나는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매번 얻어맞는 바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이유도. 그리고 순식간에 최하에서 최고의 격투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럼 오러는 언제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바란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마 15살쯤이었을 겁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나서 첫 승을 거뒀으니.”


소나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10살에 연공법을 배웠는데 15살에 오러를 발현했다고?”


바란은 씨익 웃었다.


“스승님이 기초를 잘 다져주셔서 그랬겠죠. 오실 때마다 몸에 좋은 것도 많이 가져오셨거든요.”

“그게 말이되? 그래봐야 배운 건 3년이 전부였을 테고 몸에 좋은 걸 먹는다고 오러를 발현한다면 나나 다른 귀족 아이들은 10살 전에 모두 오러를 사용했을걸.”


소나는 남들이 뭐라고 하던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10대에 오러를 발현한 건 나름 자부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연공법을 배운지 5년 만에 오러를 발현하다니. 이런 천재는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지금 보니 바란은 정말 스승님과 비슷한 점이 있구나.”


재수 없는 점이...라는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바란은 씨익 웃더니 다시 말했다.


“사실은 제 훈련 방식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습니다. 한 2년이 지난 후부터는 힘의 방향과 세기를 읽고 관찰하고 맞아주는 것도 지겨워서 안보고 상대의 동작을 느끼는 연습을 했었거든요. 들리는 소리, 공기의 촉각, 냄새 같은 걸로 상대의 동작을 읽는 연습을요.”


소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해?”

“어차피 마나도 눈에 안 보이는 걸 느끼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공법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처음엔 잘 안됐는데 그것도 1년쯤 계속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모든 감각으로 상대를 느끼고 읽는 것. 그게 되기 시작하면서 마나 또한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소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수련 방법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면 바란은 지금 오러 수련의 신기원을 이루어 낸 것인지도 몰랐다.

스승도 없이 혼자서 그 혹독한 환경에서 그런 것들을 이루어 내다니. 어쩌면 스승이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기에 이런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바란이 항상 남들이 느끼지 못한 것들을 미리 알아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내게도 그게 가능할까?”


소나 또한 최고를 추구하는 검사. 그런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 보고 싶었다.

바란은 잠시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가능은 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주변 환경과 상황이 중요할 겁니다. 제 경우엔 정말 그것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투기장에 나가 싸우는 시간 외에는 제가 하고 싶은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밥도 꼬박꼬박 갖다 줬구요. 더군다나 저는 고통에 익숙해져야 하는 환경이었기에 시도할 수 있었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나에게 오는 타격을 보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고, 또 그렇게 맞는 타격은 준비된 상태로 맞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거든요. 그걸 견딜 수 있다면야. 예, 누구에게나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소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방법을 자신이 시도할 수 있을지. 시도한다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맞게 접목시켜야 할지.

이곳을 벗어난 이후가 되겠지만 어쩌면 근 1, 2년간 정체됐던 자신의 실력을 한 단계 이상 향상시킬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때, 바란이 소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아가씨께 질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뭘?”

“스승님에 대한 것들을요.”


바란의 눈이 아련한 눈빛으로 물들었다.


“저는 사실 스승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3년간 사나흘에 한번 씩 보긴 했지만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짧아 개인적인 일들은 거의 듣지 못했었죠. 그 시간이 그렇게 짧을 줄은 그땐 미처 몰랐으니까요.”


소나의 눈빛도 아련하게 변했다.


“그렇구나. 스승님의 개인적인 일은 거의 모르는 거야?”

“잠깐 잠깐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행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들. 아사롬의 귀족들에 관한 얘기. 그리고...무엇보다 아가씨의 얘기를 많이 하셨죠. 세상에 단 둘 밖에 없는 제자들이니 서로 꼭 챙겨주라고.”


그리고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실제로 본다면 이런 얘기 안 해도 챙겨주고 싶어 안달이 날거라고도 하셨었죠.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클 테니 직접 만나게 된다면 보기 전에 꼭 진정제를 먹어야 할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소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소레스의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바란에게 자신의 부탁을 해주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내가 아는 스승님은...”


소나는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소레스에 관해 기억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바란에게 얘기해줬다. 푸근한 미소로 옛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는 소나를 보며 바란 또한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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