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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19.01.0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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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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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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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2부 (외전) 갈색 베이모스 10(재업)

DUMMY

사실 그녀를 처음본건 격투장에서 지낸지 2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스승님은 항상 당신의 제자는 소하라 최고의 미녀가 될 거라며 자랑하곤 했었다.

원래 과장이 많은 분이라 건성으로 대답하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사실 그녀가 소하라 최고의 미녀이건 아니건 내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성의없는 모습에 뿔이 나셨는지 내가 다음 격투시합을 할 때 잠시 로브를 내려줄테니 꼭 관중석 쪽을 보고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귀찮았지만 지시를 안 따랐다간 며칠을 삐져계실지도 몰랐고, 나름 다른 곳에 주의를 집중해도 맞는 충격을 분산시킬 자신이 있었기에 스승님이 앉아계신 관중석 쪽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스승님이 장난을 치듯 그녀의 로브를 머리 뒤로 넘겨 벗겼다. 그리고 그 뒤로 스르륵 내려가며 드러난 로브 안의 얼굴에 바란은 한순간 멍해지게 되었다.


눈부신 금발머리에 복숭아같이 도톰하면서도 가녀린 얼굴선, 그리고 아름다우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눈매 안의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온 듯 한 소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하며 다시 로브를 올리며 스승님께 뭐라고 말했다.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눈을 가득 채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대의 펀치를 맞고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매번 시합에선 얻어맞고 지고 있었지만 실제 정타를 맞고 쓰러진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스승님은 다시 찾아온 자리에서 폭소를 터뜨리며 두고두고 그 사실을 놀려댔다.

나는 스승님께 최고의 미녀라는 건 인정하지만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언제나 내 시합의 관중석에 앉아있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중급 상급 격투장으로 올라간 후에도.

나 또한 항상 그곳을 지켜봤다. 로브를 입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언제든 알아볼 수 있었고 그날 봤던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모래바람 족을, 수인족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나의 목표와 더불어 당시의 나를 지탱해주던 든든한 힘이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호위무사를 제안했을 때. 그리고 함께 모래바람족을 구하자고 말했을 때.

우나 여신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시간들에.


동족들을 구하러 다닌 3년간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부족한 돈이나 힘든 마수 사냥, 극악한 확률의 마정석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복한 지옥이었다.


수없이 되뇌었다. 그녀는 공작가의 무남독녀이고 나는 수인족이라고. 그것도 일생을 동족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 모래바람족의 전사.

그녀를 보는 모든 시간, 그녀의 미소에 넋을 잃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스스로를 설득했다. 살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고. 그래, 원하는 모든 것을 갖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내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되뇌며 내 마음을 숨기고 꺾었다. 그게 나와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믿으며. 그랬는데...


“대체 왜!!!!”


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바란이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해 평정을 잃은 그때 바란이 타고 달리는 말에게 번쩍하고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정신이 나가있던 바란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말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앞으로 튕겨나가며 황무지를 뒹굴었다.


바란은 그제야 날아온 것이 오러 블레이드였다는 걸 깨닫고는 정신을 다잡았다. 황급히 전방을 바라보니 검푸른 망토를 두른 사내가 장검을 어깨에 두르고 실실 웃고 있었다.


“뭐야. 너 바란 맞지? 엄청난 실력자라더니만 왜 이리 정신을 놓고 다녀?”


바란은 빠르게 그를 훑어 봤다.

진청색의 장발 머리에 눈동자가 잘 안보일 정도의 실눈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모래바람 속에서도 먼지가 잘 묻어나지 않는 검푸른 광택의 망토나 한눈에도 엄청난 명품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검. 게다가 오러 블레이드라니. 아직까지 자신과 소나 이외에는 한 번도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실력자였다. 아마도 귀족가의 기사, 오러를 사용한다면 높은 가문의 후계자일지도 몰랐다. 바란은 먼저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했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실실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굳어지며 작은 실눈이 솟구쳐 올라갔다.


“천한 수인놈이 내게 질문을 해?”


그리고는 검을 내리쳤다. 번쩍하며 찰나의 순간 다시 오러블레이드가 날아들었다. 바란은 재빨리 몸을 숙여 오러블레이드를 피해냈다. 미리 올 진로를 알고 몸을 비껴낸 듯 한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청년의 눈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오호, 오러를 피해? 너 제법이구나? 좋아. 그 정도 실력이면 무례할 만 하지. 어디 계속 놀아볼까?”


그리고는 다시 오러블레이드를 날린 후 직접 몸을 날려 바란에게 돌진해왔다.

오러를 각성한 검사를 소드마스터라고 부르며 오러를 사용할 때 그들의 몸놀림은 마갑을 입은 일반 무사와도 별 차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초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경지에 따라 오러의 크기와 질,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차이가 났는데 소나조차도 1분 정도 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오러를 이 검사는 별 어려움 없이 몇 분 이상 유지하며 바란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바란은 섬전처럼 날아드는 공격을 정신없이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오러를 씌운 검을 정면으로 막을 수 없어 피할 수 없는 공격은 대도로 살짝 비껴내는 모습은 무척 아슬아슬해 보였다. 상대방도 진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그나마 상대할 수 있었다.


바란은 망설이고 있었다.

저 정도의 상대에 대항하려면 바란도 오러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바란이 오러를 쓴다는 것을 누구도 알아선 안 되기에 일단 쓴다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

오러를 쓰는 것을 보여주고서라도 죽여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는 바란을 알고 찾아왔다. 그렇다면 혼자가 아닌 집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속한 곳은 어디이며 왜 바란을 공격하는지. 그걸 모르는 채로 죽이게 되면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검술만으로 그를 제압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바란은 힘든 와중에도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에게 물었다.


“누구신데 왜 저를 공격하십니까!?”


바란의 물음에 그의 눈빛은 광기를 띈 듯 요요히 빛났다.


“말까지 할 여유가 있다고?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그리고는 더 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화할 생각 따위는 없는 듯했다.

바란은 그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힘들지만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그를 제압해 보기로 했다.


상대는 아직 마갑을 작동시키지 않은 상태. 아마도 바란을 얕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니, 그 방심한 상태가 기회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마 오러를 유지하는 시간이 끝나기 전 마갑을 작동시킬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그 전에 제압해야 한다고 바란은 생각했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고 비껴내며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던 바란의 발이 모래에 살짝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다.

바란은 짧은 신음을 내며 표정을 구겼다.

그러자 남자는 킥 웃으며 신나는 표정으로 바란에게 검을 섬전처럼 베어 내렸다.

바란은 미끄러지는 몸을 더 빠르게 낮춰 몸을 회전시키더니 어느새 상대의 사각으로 접근해 대도를 휘둘렀다.

회전하는 몸이 돌개바람처럼 보일 정도의, 찰나에 일어난 그림 같은 반격이었다. 격투장에서 가끔 쓰던 바란의 함정기술이었다.

바란의 대도가 만든 도광사이로 그 남자의 피가 튀었다.


‘얕았다.’


그 짧은 순간 남자도 역시 몸을 살짝 돌려 팔이 잘리는 것을 피해낸 것이었다.

바란은 뒷목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이전에 만난 적 없던 훌륭한 실력자였다.


바란은 상대가 마갑을 가동할지 모른다는 조급함을 느끼며 돌진해 들어갔다. 저 실력에 마갑까지 사용한다면 정말 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몸을 훌쩍 날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 봤다.

그의 입술이 분노로 푸들거렸다. 그리고는 광기어린 눈으로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이내 큰 소리를 내질렀다.


“내게 상처를, 감히, 죽여버리겠어. 으아악!!! 하누라 시르카밀!!!”


그 말을 들은 바란이 눈을 치켜뜨며 신음했다.


“무슨!! 설마!!!”


하누라 시르카밀.

직접 사용되는 걸 들어본 적은 처음이지만 소하라 사람이라면,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린 아이일 때부터 수없이 들어봤을 말이었다.

고대어로 ‘신이여 용을 참하소서.’ 라는 의미가 있는, 미리온의 시동어였다.


미리온, 고대의 악룡, ‘헤와이 카 예아’를 물리치기 위해 신께서 내렸다는 전설이 깃든 마갑.

보석안을 각성한 고대 용사의 후손, 즉 고위 귀족가의 직계들만이 오러를 사용하는 경지에 달한 이후에야 착용할 수 있으며, 착용한 후에는 신에 가까운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인류 최강의 병기.


이 미리온의 힘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직 악룡의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악룡과의 전설의 싸움 이후 미리온을 사용하던 영웅들은 각 국가를 세우는 주축이 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며 지배충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미리온의 기능을 흉내 낸 마갑이 마도국 수르파를 중심으로 개발되고 계속적으로 성능향상을 시도해 왔지만 여태껏 만들어진 최고의 마갑도 아직 미리온 성능의 0.5배 정도 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미리온이 지금 바란의 눈앞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눈부신 하얀빛이 남자를 중심으로 뻗어 나왔다. 바란이 일순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빛이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남자의 몸에는 진한 청색의 갑옷이 둘러져있었다.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흑청색의 무늬가 새겨진 진한 청색의 플레이트 메일. 그 흉갑에는 용의 얼굴이 크게 새겨져 있었고 그 눈 부분에선 백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청색의 미리온, 코모티 공작가?”


바란의 기억이 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게 했다.

아사롬의 제1공작가인 코모티 공작가의 차남 코모티 라 키샤스의 이름은 바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몇 십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는 얘기를 들으며 이미 10여 년 전에 바란이 우승했던 소하라 무투대회에서 우승했었던 천재검사.

스승인 소레스도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며 언급한 적이 있었다.


‘코모티 공작가가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용의 뿔 장식이 달린 오픈 헬름 형태의 투구 아래로 광기에 찬 남자의 얼굴이 입을 열었다.


“네 놈의 팔 하나, 다리 하나, 팔 하나, 다리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귀와 코를 잘라낸 후 아버님께 데리고 가주마. 죽이지만 않는다면 크게 탓하시진 않겠지.”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움직임을 전혀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순간 왼쪽 어깨에서 팔이 미끄러져 내려가며 피를 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윽.”

“더러운 수인놈이 미리온에 팔이 잘리는 걸 느낄 수 있게 되다니. 영광스럽겠구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뒤쪽이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을 지혈할 새도 없이 바란은 뒤로 대도를 든 오른팔을 돌리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그는 5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검을 어깨에 메고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바란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을 갖게 된 이후로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어찌 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 이번엔 다리로 가볼까.”


실실 웃으며 말한 그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반응은커녕 느끼기도 힘든 찰나의 공간이동.

바란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오른쪽 다리가 피를 뿌리며 허벅지부터 끊어져 땅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바란은 잘린 어깨와 허벅지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꿋꿋이 서서 몸을 돌려 대도를 그의 앞으로 내미는 모습은 처절하면서도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검을 어깨위에 올리고 서있던 그는 바란이 신음소리도 흘리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몸을 돌려세우자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넘어지지도 않다니 대단한데? 보통 이 쯤 되면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아나? 내 마음이 너그럽게 변해 팔 하나, 다리 하나는 남겨줄지? 크크크크.”


그러나 바란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눈을 꼭 감고 그에게 대도를 내밀며 서있었다. 실눈의 남자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벌레에 불과한 수인족이 전사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 어디 언제까지 그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보마.”


그리고는 다시 몸을 날렸다.


그 다음 순간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악!!!!”


두 사람의 몸이 한데 겹쳐 뒹굴고 있었다. 바란의 입에 물려있던 남자의 코가 뜯겨져 나가고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바란은 손의 반이 잘려나가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남자의 눈을 쑤셨다.


“으아아아아악!!!!”


남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그리고는 눈이 찔려 주변을 보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몸에 붙어있던 바란의 무게가 없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꽂혀있는 손가락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아악, 내 눈, 내 눈!!!! 이 개자식이!!!”


남자가 몸을 날리던 찰나의 순간, 바란은 그 순간에 정확하게 맞춰 대도를 던졌고 상대가 그것을 쳐내는 사이 손으로 상대의 검날을 잡으며 몸을 적에게 밀착시키며 코를 물었던 것이었다.


다리를 잘릴 때, 눈을 감은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약간이라도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상대가 오른쪽 팔을 노릴 것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었던 모험수였다. 그리고 상대가 고통에 익숙지 않아 보인다는 점을 노린 것이기도 했다.


남자 키샤스는 분노와 고통,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공포에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오러블레이드를 날렸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어떤 방향에서도 바란이 맞는 소리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약 1분간을 미리온의 힘으로 그렇게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며 주변을 뒤집어 놨다.

그사이 뜯겨져 나간 코는 미리온의 자기회복마법에 의해 재생된 상태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꽂혀있는 눈은 회복되지 않았다.

키샤스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부위를 만져봤다. 끈적한 액체가 묻어있는 잘린 팔이 자신의 얼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으으”


키샤스는 신음소리를 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붙어있는 팔을 잡아 망설이다가 힘껏 뽑아냈다.


“으아아아악!!!!!으아아, 아아악.”


손이 눈에서 뽑혀 나오는 고통으로 키샤스는 검도 놓친 채 바닥을 뒹굴었다. 손가락과 함께 눈알도 빠져나온 듯했다.

곧 미리온의 자체회복마법으로 눈이 재생되는 느낌이 들며 통증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키샤스는 덜덜 떨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이 재생되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으으아으으.”


어려서부터 통증을 지독히 싫어했고, 타고난 재능으로 통증을 느낄 기회도 별로 없었던 키샤스에게 이것은 난생처음 겪는 영혼이 뽑혀나갈 듯 한 고통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다 30분 이상이 지나서야 키샤스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떠오른 분노를 느끼며 고개를 들어 바란의 시체를 찾았다.

시체라도 토막내 버리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에 심장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로 여기저기 움푹 패어 폐허가 돼버린 황무지 그 어디에도 바란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바란!!! 이 개자시익!!!!!!!”


황무지에 키샤스의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처음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이름을 불러준, 그러나 대상을 잃은 공허한 포효였다.







11월 37일 성 휴마그의 날, 아침이 밝았다.

성자 휴마그는 그 옛날 악룡의 지배 속에서 먼 동쪽 눈 덮인 산으로 홀로 올라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그 대가로 혼돈과 질서의 여신 화야에게 미리온을 받아냈다고 전해지는 영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년의 여행 끝에 화야 여신에게 미리온을 받고는 영웅들에게 그것을 건네주고 웃으며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고 한다.


그의 고결한 희생정신을 기려 모든 국가들은 그가 사라진 11월 37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기념해 왔다. 특히 자신을 희생한 그 행동을 기념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가족들의 핏물을 섞은 스프를 만들어 아침식사를 했고, 아끼던 물건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줬으며 저녁때에는 키우던 가축을 한 마리씩 잡아 축제를 벌이곤 했다.


모든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몇 안 되는 기념일이었기에 매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날이었지만 올해 아사롬의 소하라에서는 평소보다 더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흥분으로 가득 차 보였고 다른 지방에서 온 듯 한 여행자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바로 오늘이 아사롬의 황태자인 아사롬 라 시라임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비로는 아사롬 국민들에게 여신에 가까운 인기를 얻고 있는 프시바크 라 소나.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는 최고의 미인이며, 왕실 무투대회에서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4강에 오른 적까지 있는 뛰어난 전사인 그녀는 현 아사롬의 공주인 아사롬 라 아리아 공주보다도 인기 있는 명실 공히 국가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평민들과 수인족들에게도 가장 인기가 많은 프시바크 공작의 외동딸이기까지 했으니 그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온 나라가 기쁨에 들떠있는 그 시각, 아사롬 하얀 날개궁의 화려한 대기실에서 소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치장을 받고 있었다.

치장을 해주는 시녀들의 탄성이 온 방을 가득 채웠지만 소나의 귀에선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소리가 지나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치장을 끝낸 그녀의 방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의 결혼식을 축복해줬다. 그런 인사들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녀는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화려한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미스릴로 세공한 은색의 고리에 붉은 보석을 9개 밖아 넣은 팔찌는 보석을 세공해 본 사람들이라면 감탄을 금치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들도 그 팔찌의 진면목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마법 팔찌였다. 그것도, 마나 구속 마법이 새겨진.


황태자인 시라임 왕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황태자는 이것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목에 찼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보석안도 각성하지 못했고,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해, 늘 불안에 떨었을 그로서는...


팔찌를 찼을 때 소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던 마나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건 마치 팔다리를 줄로 꽁꽁 묶어놓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결혼식이 끝나면 아마도 평생을, 처음부터 그런 감각들이 없었던 것처럼 살게 되겠지.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제껏 온 힘을 다해 이루어 놓은 것들이 이렇듯 무의미하게 버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게 너무 허무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아직 하지도 않은 결혼이, 앞으로의 삶이 너무 막막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유로웠던, 그리고 행복했던 지난 3년간의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모래바람 가득한 시후의 황무지와, 쉼 없이 말을 달리던 여정들과, 마음껏 검을 휘두르며 마수를 사냥하던 그 날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

그때, 조금만 더 솔직할걸 그랬다고 그녀는 뒤늦게 후회했다.

조금만 더 상냥하게 웃음 짓고,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기대어 볼 것을. 그랬다면 지금쯤 조금 더 후련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음속으로 쉼 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소나를 보며 그런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늘 그랬듯 무표정했으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소나는 고개를 들었다. 코린이었다. 소나는 자기도 모르게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코린, 왔구나.”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정말 몰랐었다.

미소 짓는 소나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순간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코린 또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과는 다른 이유로.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아가씨, 계속 이렇게 슬픈 눈빛을 하고 지내고 계셨던 겁니까?”


코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말에, 그리고 그 눈빛에 소나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자신의 눈빛을 알아봐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쁘고 또 슬펐다.

그녀는 다시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는 좀 더 처연한 미소였다.


“괜찮아. 그리고 고마워.”


코린이 어깨를 들썩 거렸다.


“아가씨, 이런 마음으로 지내실바엔 차라리...”


하지만 코린도 그 다음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 말의 무게가 갖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나는 그런 코린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풀려났을까?”


소나의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코린은 대답했다.


“예, 제가 시후 지방령에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풀려났다고 합니다.”


소나는 옅은 미소를 띈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구나. 다행이야.”


창 밖 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또 시렸다.





결혼식은 본궁인 황금 수선화궁에서 거행되었다. 고위 귀족들과 신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성대하고 엄숙한 결혼식이었다.


소나는 그냥 멍하다고 생각했다. 신관들의 축복도, 부부의 연을 맺는 맹세의 시간도, 식이 끝난 후에 황태자가 한 짧은 입맞춤도. 그냥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식이 끝나고 황금 수선화궁의 테라스에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국민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우와와아!!!!!!!


시라임 황태자는 능숙한 미소를 지으며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소나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소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고 그것이 소나를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몇 만 명은 될 법한 사람들 사이로 소나는 어째서인지 청색의 먼지 덮여 더러워진 로브가 눈에 띄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게 푹 눌러쓴 로브. 하지만 소나는 그 안에 있을 갈색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바위같이 단단한 얼굴에 깊고 자상한 눈까지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갑자기 목소리를 내자 시라임 황태자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소나는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별이 밤하늘에 환히 빛나듯 그렇게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오른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상대의 손을 잡는 듯한 손짓을 하고는 왼쪽 가슴에 갖다 대고는 다시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대의 발걸음이 우나의 발걸음을 따라 걷기를. 부디 부디 행복하길.


그 날 보인 소나 황태자비의 미소는 아사롬의 국민들에게 ‘황금 수선화에 내린 햇살‘이라고 불리며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타예아 413년 11월 37일, 성 휴마그의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가의말

갈색 베이모스를 뒤로 빼는 작업이 완료됐네요.

그럼 저는 다시 공모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초반 엄청 고전중입니다.

이계표류기 초반이랑 비슷한데 공모전에서 이렇게 되니 자꾸 마음을 비우게 되네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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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6부 상실 6 NEW +4 8시간 전 65 7 11쪽
85 6부 상실 5 +2 19.09.19 144 10 18쪽
84 6부 상실 4 +4 19.09.17 164 12 13쪽
83 6부 상실 3 +2 19.09.15 177 12 17쪽
82 6부 상실 2 +4 19.09.12 180 10 13쪽
81 6부 상실 1 +8 19.09.10 213 12 17쪽
80 5부 카 네아 25, 26 그리고 5부 에필로그. +3 19.08.04 367 11 35쪽
79 5부 카 네아 24 +1 19.08.01 378 13 17쪽
78 5부 카 네아 23 +6 19.07.30 338 13 14쪽
77 5부 카 네아 22 +3 19.07.28 393 11 14쪽
76 5부 카 네아 21 +1 19.07.25 405 13 16쪽
75 5부 카 네아 20 +4 19.07.23 387 14 17쪽
74 5부 카 네아 19 +4 19.07.21 396 11 14쪽
73 5부 카 네아 18 +2 19.07.18 421 13 18쪽
72 5부 카 네아 17 +5 19.07.16 450 11 16쪽
71 5부 카 네아 16 +3 19.07.14 427 14 12쪽
70 5부 카 네아 15 +4 19.07.11 471 14 14쪽
69 5부 카 네아 14 +2 19.07.09 466 11 13쪽
68 5부 카 네아 13 +1 19.07.06 499 10 13쪽
67 5부 카 네아 12-2 (외전: 그와 그녀의 평범한 하루) 19.07.04 446 6 20쪽
66 5부 카 네아 12 +1 19.07.04 423 13 18쪽
65 5부 카 네아 11 +2 19.07.02 441 11 11쪽
64 5부 카 네아 10 19.06.30 483 11 14쪽
63 5부 카 네아 9 (내용 추가) +3 19.06.27 530 13 18쪽
62 5부 카 네아 8 +1 19.06.25 544 13 17쪽
61 5부 카 네아 7 +1 19.06.23 560 16 14쪽
60 5부 카 네아 6 +2 19.06.20 594 14 13쪽
59 5부 카 네아 5 +2 19.06.18 591 18 12쪽
58 5부 카 네아 4 19.06.16 632 1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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