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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이계 표류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겨울반디
작품등록일 :
2019.01.01 12:57
최근연재일 :
2019.12.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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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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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5부 카 네아 2

DUMMY

두렵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마음을 가득 채운 불안감이 심장을 옥죄여온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이렇게 뭔가를 두려워한 적이 있었나?

베이모스? 치아투? 오거?

아니야. 그 때도 지금만큼 몸이 덜덜 떨리진 않았어.

정말이지 심장이 조각조각 부서질 것만 같다.


침상 옆을 지나가던 수우나가 말했다.


“지누크, 왜 그렇게 덜덜 떨고 있어? 몸이라도 아픈 거야?”


나는 고개를 들어 수우나를 바라봤다.

스스로 느껴지는 내 눈의 느낌이 매우 퀭하다.


“수우나, 미오와는 잘 돼가?”


내 말에 잠시 당황하던 수우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뭐, 요새는 내가 말하는 것도 대부분 잘 들어줘. 너희 덕분이지 뭐.”


그렇게 말하는 수우나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난다. 부러운 놈.

내가 저 놈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미오를 짝사랑하던 수우나는 한 달 전,

나와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오에게 고백했었다.

사실 도움보단 강권이었지만.

물론, 미오가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한참 후였다.


한 달 쯤 전에 있었던 성 휴마그의 날에 맞춰.

나는 솜씨를 발휘해 깜짝 촛불 이벤트를 마련해줬다.

우리 조 내무실로 미오를 불러

촛불로 만든 길과 촛불을 든 친구들이 축복해 주는 속에서

수우나는 미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촛불 이벤트가 늘 그렇듯.

의외로 소녀감성의 미오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었다.

그리고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말로 수우나의 마음을 반쯤 허락했었지.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친구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내게도 우리 세계의 선진 문화를 전파한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이세계에서 촛불 이벤트라니. 크크크.


수우나는 그런 미오의 허락에 어린애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간 수우나가 정말 많은 노력과 마음고생을 했었거든.

지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는 미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지식을 배우기도 하고 오바이트를 해가며 고블린을 해부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전에 미오가 갖고 있던 수우나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그녀의 마음은 전혀 넘어올 기색이 없었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다 못해 이 곳 최대의 기념일인 성 휴마그의 날에 사건을 일으킨 거지.

성 휴마그의 날은 바로 그 날이다.

바로 1년 전에 아사롬의 황태자가 결혼했던 그 날.

이 곳 사람들에게 뭔가 낭만적이고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바로 그런 날이었던 거지.


그 땐 펑펑 우는 수우나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게 될 줄이야.


“근데 지누크. 아침 먹으러 안 가? 그리고 잠 안 잤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응, 안가. 그리고 잠은 안 잤어.”


정확히는 못 잤지. 한 잠도.

오늘 마이야를 만나러 갈 생각에.

정확히는 마이야를 만나러 갔는데 그녀가 나를 외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녀와 약속한 1년이 바로 오늘이다.

시간 참 빠르지.

1년간 내가 살아있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게 마음을 줄 수 있다고 말했던 그녀와의 약속.

그 약속을 떠올리며 버텨온 지난 1년이었는데...


으윽, 무서워.

이제껏 가졌던 마음이 그냥 나만의 것이면 어쩌지?

막상 갔는데 그녀가 어이없게 나를 바라보면 어떡해?

우리 약속이란 게 사실 하룻밤 가벼운 관계에 오간 잡담일 수도 있잖아?

아아악, 미치겠네.


젠장. 쪽팔리다. 강진욱.

너 이 것 밖에 안 되는 남자냐?

.............

흐흑, 그런 가봐.

생각해보니 지구 포함 연애해본지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이쯤이면 마법을 써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

여자의 마음 따위 알 리 없지.


내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있을 때.

메라두와 치아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누크, 아직 안 갔...응? 뭐하는 거냐?”

“음? 와하하하하! 나의 나타라여! 그게 무슨 꼴인가?! 겁먹은 고블린 같군! 와하하하하!”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나를 보고는 치아투가 비웃었다.

저 자식, 응징해 줄까부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것 중 고블린이라니.

머리에다 발경을 확!......


흑, 아니야. 난 겁먹은 게 맞는 걸. 난 고블린처럼 한심해. 흐흑.


평소와 달리 반박도 못하고 처량 맞게 쭈그러진 나를 보며 그들이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심각하군.”

“흠, 한 방 맞으면 나아지지 않겠나?”

“....너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둘을 바라보는데도 끼어들 수가 없다. 그저 멍할 뿐.

내 이런 상태를 보고 한숨을 쉰 메라두가 말했다.


“휴우, 그래. 지누크. 왜 이러는 건데?”

“......무서워.”

“.....뭐가?”


그러게, 정확히 뭐가 무서운 거지, 나는?

무서운 것들이 엄청 많긴 한데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 의문이 엉망진창 꼬여있던 실타래를 조금 풀어 속에 있던 말을 뱉게 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봐.”


내 대답에 메라두가 침음성을 내며 잠시 말을 아꼈다.


사실 나와 마이야의 약속을 둘에게 얘기한 건 얼마 전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메라두는 우리 둘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 눈치 빠르고 배려심도 많은 우리 메라두.

그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도 정확히 그렇다 아니다 말할 순 없지만...적어도 그녀가 널 만난 이후로 손님을 받지 않았던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만약 그녀의 마음이 너와 같았다면 지금 이 순간도 널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말한 메라두는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를 난 알 수 있었다.


그래, 맞다.

만약 그녀의 마음이 나와 같다면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어쩌면 나처럼 불안함에 떨며.


나의 두려움이 그녀에 대한 사랑보다 큰가?

그럴 리가.

하루하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쿨론 요새에서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 있다면 그녀에 대한 마음인걸.


두려움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눈이 어딜 바라봐야 하는 지는 명확해졌다.


“고맙다, 메라두.”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가자.

가서 알아보자.

내 1년간의 기다림이 헛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막 문을 나서려는 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커텐 사이로 로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슬픈 눈빛으로.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문 밖으로 나갔다.

내 뒤를 쫓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미안, 로가.


문 밖으로 나가선 뛰기 시작했다.

계단을 우당탕 뛰어 내려가

성벽 밖으로 나가 마을 사이를 전력 질주했다.

주변의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한 단어만 계속 되뇌었다.


‘마이야’라는 그녀의 이름만...


정신을 차려보니 ‘헤샨’의 문 앞에 서 있었다.

1년 간 금지된 구역인 것처럼 지켜만 봤었던.

차마 다가가지 못했던 파란 지붕의 4층 건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봤다.

실제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손에 닿는 문고리의 선명한 감촉.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아직 낮이어서 그런지 헤샨의 문 안은 조용했다.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과 테이블들.

사람 한 명 없는 조용한 실내.


“흠, 흠.”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원래 낮엔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가?

낮에 와본 적이 없어 이게 자연스러운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저기 아무도 안 계...”


소리를 내 누군가 부르려 할 때,

안쪽의 홀에서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내가 아는 얼굴!

검은 머리와 고양이 귀의 색기 넘치는 아름다운 토로.

다라였다.

치아투의 그녀이자 헤샨의 실질적인 2인자라던.


“아, 다라 양. 안녕하세요. 저는...지누크...라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던 나는 그녀의 눈빛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녀.


저기? 왜 그러시죠?

뭐지? 나를 못 알아보나?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나?


“저기, 왜 그렇게...”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려 할 때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왜 이제 오는 거예요?!”

“네, 네?”

“아니, 해 뜨기 전 새벽에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양심 없어요?!”

“네?”

“아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1년을 기다리게 해놓고 또 기다리게 해? 이 언니 진짜 내가 이건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 다시 홀로 들어가 버린다.

뭐야, 저렇게 말하고 그냥 가면 어떡해?


“아, 저기 마이야는....”

“올라가 봐욧!!”

“아, 네.”


대체 왜 저렇게 화가 잔뜩 난 거지?

그나저나 올라가라고? 어디로?

혹시...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기억을 더듬어 계단을 올라갔다.

4층의 끝 방.

그녀와 함께 있었던 그 방으로.


올라가며 다라가 했던 말을 떠올려봤다.

해 뜨기 전 새벽에 왔어야 했다고?

1년을 기다리게 했다고?

그렇다면.

그 말대로라면...


그리고 마침내 도착해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1년 전 그날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그림처럼 앉아있는 그녀를.

신비한 하얀 머리와 하얀 옷이.

꿈결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셨어요?”


그녀를 보고 나서야 나는 깨닫게 됐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내 마음 속에 그녀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눈, 그녀의 머리, 그녀의 몸.

내 눈 앞에 실제로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이.

마음이 벅차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마주보던 눈을 살짝 피하며 그녀가 말했다.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어서 음식은 준비하지 못했어요. 대신 마실 것들을 가져다 놨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작은 상에 놓인 그릇에 손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손의 떨림.


나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목이라도 먼저 축이시고, 어머!”

챙!

그릇을 들던 손이 미끄러져 액체가 상에 흘렀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이런 실수를. 죄송해요. 원래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걸 닦아야...”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가자 이제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왔다.

내 손이 닿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없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그저 나오는 대로.


“너무 늦었죠? 미안해요.”


내 말에 그녀가 우뚝 멈췄다.

여전히 숙여진 고개.


“보고 싶었어요. 근데 막상 오늘이 되니 도저히 올 수가 없었어요. 그 약속이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을 까봐. 이 마음이 우리가 아닌 나만의 것일 까봐.”


그래, 너무 두려웠다.

당신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몸은 이제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웠고.

또 안아주고 싶도록 사랑스러웠다.

나는 내 의문의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부로, 그리고 마음으로 선명하게 와 닿았으니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나 진짜 바보죠? 미안해요.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다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잔잔한 미소 따윈 짓고 있지 않았다.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10대 소녀처럼.

큰 눈망울 가득 그렁거리는 눈물과 원망스런 눈빛으로.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기다림, 그리움, 원망, 그리고...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더 큰 감정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을.


나는 그 감정이 모두 그녀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말을.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마이야.”


그녀는 마침내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고

그녀는 주먹 쥔 손으로 내 가슴을 몇 번 힘없이 두드렸다.

소리도 없이 흐느끼는 그녀를

나는 더 꼭 안아주었다.

다시는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처럼.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서로의 마음이 이미 같은 곳에

다른 말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



로가는 시선을 돌리고 문을 나서는 진욱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나간 후에도.

하염없이 그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면 다시 문을 열고 그가 돌아올 것처럼.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로가...”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미가나가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걸 로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마이야라는 사실 또한 미오를 통해 알게 됐다.

둘 사이의 1년의 약속이 있다는 것도.


“로가, 그는...아마 그때 떨어진 사람이 네가 아니었더라도 성벽을 뛰어내려 구하러 갔을 거야.”


미가나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로가도 알고 있었다.

모두들 그 일 때문에 로가가 진욱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처음 그가 눈에 들어온 건.

그 때가 아니었다.

사실은 그것보다 한참 전이었다.


처음 모두가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다카람과 맞서는 모습을 봤을 땐

그저 신기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었다.

저러다가 곧 크게 다치거나 굴복하게 될 거라고.


그러다 성벽에서의 사건으로 다루가와 타랍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땐 그를 동정했다.


그는 어쩐지 예전의 그녀 자신과 비슷했다.

세상 모두에게 공격받는 힘없는 한 인간.

작고 약하고 외롭고,

그래서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금방이라도 세상 앞에 쓰러질 것만 같아 보이는.


하지만 곧 알게 됐다.

그는 그녀와는 다르다는 걸.

그가 숙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루가에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모습을 봤을 때.

로가는 뭔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자신은 도망 다니기만 했던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맞서

힘없는 개인이 당당히 세상을 굴복시켜낸 그 모습은

오거 앞에서 맞설 때보다도 더 크고 위대해 보였다.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건.


하지만.

그 마음은 그저 금방 지나가는 한순간의 것이라고.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질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었다.


그러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게 됐다.

그 돼지 같은 총관과 관계를 맺어야 했던 더러운 날.


성벽 밑, 지켜줄 아무런 동료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루크 떼를 보며

죽음을 예감했던 그 순간.


그가 운명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그녀를 구하고

그녀를 안은 채 수많은 마수 떼를 떨쳐내고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


그녀는 드디어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젠 어찌 되도 상관없다고.

자신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버렸다.


작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계속 그렇게 그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1년의 약속이란 것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역시 헛된 기대였다.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또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은 또다시 마이야였다.

선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며

그래서 미워하는 것조차 힘든 그녀.


로가는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




수색 대장 다카람은 오늘도 언제나처럼 헤샨을 갔다 오는 중이었다.


옆에서 그의 눈치를 보던 푸른 강족 부로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장님, 마이야는 너무 심합니다. 이렇게 대장님이 정성을 기울이시는데...”


그러자 다른 수색대원들도 그의 말에 불만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솔직히 그녀가 뭐가 대단하다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거지. 대장님이 마음만 먹으시면 어떤 여자든 대장님을 거부하지 못할 텐데...”


다카람이 스윽 그들을 훑어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다카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 더 이상 여기에 대해 말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8년 전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절대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대화는커녕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수많은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런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이제는 사랑인지 집착인지 다카람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요즘은 그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녀와 함께 이곳에 왔기에 이제 두 사람 모두 9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것도 함께가 되겠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게 언제가 됐건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에 남는 것은 결국 자신이 될 테니까.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고.

그 때가 되면 그녀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이겠지.


다카람은 충분히 그 때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손님도 안 받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손님을 안 받은 이유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뭐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건 다른 누구도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건데.


그래서 여전히 그녀를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임에도 더 이상 기분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해야 하는 습관처럼 ‘헤샨’에 갔다 돌아올 뿐이었다.

그 때, 그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성벽 문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뛰어나온 한 사람.

다카람은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지누크로군요.”

“검은 헬하운드?”

“검은 헬하운드는 무슨. 그냥 기분 나쁜 검은 머리 인간일 뿐이지.”

“하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라고. 요즘은 조장 급들도 한 수 접어준다던데?”

“그래. 게다가 저자 덕분에 요새 방어에 사상자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

“자, 그만 떠들고 가자. 저 인간이 뭐가 됐든 우리가 상관할 바 없지.”


유일하게 다카람의 안색을 살피던 부로스가 다른 이들을 자제시켰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다카람도 표정을 관리했다.


처음 볼 때부터 짜증나게 하더니 ‘헤샨’에선 마이야에게 선택받지 않나.

다카람에게 있어서 그는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기분 나쁜 인간이었다.

실제 죽이려고 시도도 했었다. 실패했지만.


쿨론 요새에 8년을 있는 동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은 그 말고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도 죽이지 못했던 건 저 인간족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요즘엔 죽일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다카람 자신만큼이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새 1년 정도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죽이고 싶긴 했다.

다만 첫 날 이후로 마이야를 만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요새 방어에 실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그냥 참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신경을 안 쓰고 있는 중.


그런 그가 무서운 속도로 뛰어오더니 그를 그냥 지나쳐 마을로 뛰어갔다.

자신을 알아본 것 같지도 않았다.


“뭐야? 저건.”

“우리를 못 알아본 건가?”

“뭐가 급한가 본데?”


무시당한 기분에 다카람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금 속에서 쑥 솟아오르는 살의.

뭔가 저지르고 싶은 기분.

그 어두운 감정이 다카람을 잠식하려 할 때.

그는 마이야를 떠올렸다.

그의 어둠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유일한 여인.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그만의 여신.


다카람은 고개를 저으며 살의를 가라앉혔다.

한 번 실수로 벌써 몇 년 째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됐는데

또다시 실수할 수는 없지.


그러자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런 자신의 마음을 신기하게 지켜보던 다카람은 다시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마이야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누크가 간 방향을 더 돌아보지 않고 성벽으로 걸어갔다.

몇 발자국 걸었을 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근데 저 인간족은 어디를 가는 거지?

잡화점 이외의 마을은 잘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알기로 지누크는 1년 동안 남들 다 가는 ‘헤샨’은커녕 마을 자체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죽일 기회를 잡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고.

그런 그가 왜 저쪽으로?


혹시나 하는 불길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을 때.

다카람은 목격했다.

‘헤샨’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설마...


“나는 헤산에 다시 들렀다 올테니 너희는 먼저 들어가라.”

“네? 대장님 저희도...”

“내 말을 따르지 않을 텐가?”

“아, 죄송합니다.”

일행들을 떨궈내고 다카람은 몸을 돌려 헤샨으로 가기 시작했다.


설마...


저 자는 ‘헤샨’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었다.

아니, 단 한 번 갔었지.

그리고 그 때 마이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런 그가 ‘헤샨’에 들어간다고?

왜?


설마...


헤샨의 문 앞에까지 걸어온 다카람은 이제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마이야는 자신의 얼굴을 보길 거부했는데?

안에서 그 인간족을 발견하면 그냥 끌고 나오면 되나?

아니면 바로 죽여 버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 다카람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고 들어본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목소리.

마이야의 목소리였다.

다카람은 고개를 휙 쳐들고 위를 바라봤다.

3층과 4층의 모든 창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가운데

4층 단 하나의 방에만 커튼이 치워져 있었다.


저 방은?


다카람은 마이야가 4층의 끝 방을 애용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바로 뒷걸음질로 건물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목격하고야 말았다.

커튼이 열린 창문 바로 앞에서.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녀가 그 증오스런 인간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다카람의 부릅뜬 눈이 실핏줄이 터진 듯 순식간에 빨갛게 충혈됐다.

꽉 쥔 주먹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꼭 같은 검붉은 색의 피가.

순식간에 마음을 채워가는 살의. 분노와 증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로 열정적으로 얽혀 있던 그 둘이 창가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다카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진짜인지 아니면 다카람 자신만 듣고 있는 환청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성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입을 꼭 다물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마수와 같아 보였다.


작가의말

분량조절 실패...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83 연두초록
    작성일
    19.09.25 11:16
    No. 1

    다카람은
    살려고 부하들을 미끼로 쓴다던가
    충실한 부하로 만들려고 일부로 떨어뜨려 놨다가 구해주는등 뒤에서 협잡질을 하는게 아닐까....

    찬성: 4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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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7부 세상 속으로 2 +6 19.11.12 755 3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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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6부 상실 19 +9 19.10.17 1,137 4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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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6부 상실 17 +15 19.10.13 1,398 57 14쪽
96 6부 상실 16 +13 19.10.10 1,345 44 16쪽
95 6부 상실 15 +7 19.10.08 1,376 5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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