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프롤로그
[깨어나세요, 용사여!]
그 목소리는 분명 필연적인 부름이었다. 망각의 바다를 떠돌던 한 영혼이 어디선가 스며들어온 빛에 이끌려 공허에서 벗어나 빠르게 떠올랐다.
최영대는 정신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세요.]
돌침대에서 일어난 영대는 몸을 짓누르는 피로 때문에 선뜻 발을 내려놓지 못했다. 잘 자다 억지로 깬 듯한 느낌이었다. 강렬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그리고 몹시 흥분됐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이해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이세계 전이’였다. 자길 부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올 것이 왔다는 감각이 양 손바닥을 저리게 했다.
돌로 된 작은 신전 같은 장소였다. 앞에 열려있는 문이 빤히 보였다. 밖은 눈부셨다.
끙 소리를 내며 땅을 딛고 선 영대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사방이 온통 푸른 풀밭이었다. 풋내가 코끝에 감돌았다. 날씨는 비할 바 없이 화창했다. 돌아보니 나왔던 곳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아깐 없었던 사람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새파란 옷을 두르고 챙 넓은 고깔모자로 고전적인 마법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젊은 여자였다. 기억은 안 났지만 왠지 낯설지 않았다.
“절 부른 분이세요?”
“네. 행운의 여신이에요. 반가워요.”
“최영대라고 합니다. 우리 처음 보는 거 맞죠?”
“맞아요. 소환 후유증 때문에 피곤할 거예요.”
“소환이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더 피곤해졌다. 행운의 여신이 소매 속에서 뭘 꺼내주었다. 조그만 유리병이었다.
“건강보조음료에요.”
입을 대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맛도 그랬다. 다 마시자 가슴이 확 뚫리며 피로가 가셨다. 원래 이런 음료가 아닌데, 라고 최영대는 생각했다.
“여기서도 비X500 팔아요?”
“아뇨. 당신에게 익숙한 물건으로 준비했어요. 그래야 마시기 편할 테니까요.”
“아~.”
최영대는 입술에 묻은 액체를 깨끗하게 핥았다. 시고 달았다.
“피차 피곤한 상황이군요. 미안해요. 멋대로 소환해서요. 여긴 타에라드에요.”
“원래 고등학생 소환하는 게 대세에요? 일본만 그런 거 아니에요?”
“일본만 그런 건 아니죠.”
행운의 여신은 최영대의 손에서 다 마신 병을 가져가 소매에 도로 넣었다.
“퀘스트 안 주세요? 마왕 토벌 같은 거요.”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며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그게 아니면 뭔데요?”
“영대는 여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예요. 죽어도 초기화되지 않아요. 판타지가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게임은 확실히 아니에요. 중세 유럽도 아니고요.”
“근데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가요?”
“나중에 당신이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요.”
최영대는 이전 삶을 떠올렸다. 평범한, 아니 그보다는 비중이 적은 삶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걸로 만족하긴 힘들었다. 여기선 달라질 수 있었다.
“일단 해볼게요. 뭐 주실 거예요? 특수능력 주실 거죠?”
뻔뻔한 반응에도 여신은 불쾌함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최영대의 머릿속에 타임스톱이 각인되었다. 하루에 1초씩 충전되는 능력이었다. 무한대로 누적 가능했다.
“개사기까진 아닌 것 같네요.”
“실망하지 말아요. 나도 한계가 있거든요.”
“저만 쓸 수 있는 거죠?”
“그래요. 세계 곳곳에 선물을 숨겨둘 테니까 찾아보세요. 이제 보내줄게요.”
“우리 또 만날 수 있어요?”
“글쎄요. 사람 많이 다니는 길을 따라가세요.”
“네! 또 봐요, 여신님!”
행운의 여신은 옅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최영대를 타에라드로 보낸 여신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은 채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그녀의 세계도 불 꺼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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