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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c61
작품등록일 :
2019.01.0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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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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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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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DUMMY

마틴의 병사들과 힘을 합쳐 굿맨에게 맞서 싸웠던 때가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영대는 리미엘의 포옹을 조심스럽게 물리치고선 밖으로 나갔다. 발굴현장은 참담한 분위기였다. 다 자기 잘못 같았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아도 소용없었다.


“용사 나리가 앞장서서 똥 밟은 표정을 하고 계시다니 꼴불견이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요.”

“아까 뒈진 분들 덕분이지. 다들 뒈지셨으니 앞으로 이럴 일 없을 거고.”


리프레인은 영대의 양 볼을 잡고 옆으로 잡아당겨 억지로 웃는 얼굴로 만들었다.


“뭔데요?!”

“멍청한 놈. 네가 그래서 애송이인 거다. 정신 차리고 표정 풀어라. 여기 사람들은 너만 믿고 있단 말이다. 싫으면 용사 때려치우고 집에 가라.”

“······.”


리프레인이 자기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대는 얼굴을 손으로 비빈 다음 심호흡을 했다.


“악역은 나다. 그리고 네가 날 통제하는 시늉만 해주면 문제없다.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잘 했지 않나? 날 데리고 다니는 건 항상 네 몫이었지.”

“몰랐다고 하면 뭐라 그럴 거죠?”

“기가 막히는군. 행운의 여신이 사람을 잘 고른 건가.”

“됐으니까 하던 거 하러 가세요.”

“기꺼이.”


리프레인은 남들한테 다 보이도록 상체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후 임무로 돌아갔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리미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대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에도 분쇄자의 위협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틴이 멋대로 토벌대를 조직하여 분쇄자를 공격했다가 혼쭐이 났다. 분쇄자에겐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토벌대는 가까스로 후퇴했지만 분쇄자의 관심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지모가 초원을 무대로 골랐던 까닭은 돌이었다. 분쇄자가 땅바닥에 널린 돌을 던져 핵융합발전기를 파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원은 그럴 만큼 큰 돌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좌우간 마틴의 토벌대가 일을 망쳐놓은 것이었다. 분쇄자는 슬슬 속도를 높여가다 자세를 바꿔 뛰었다. 추격은 초원지대 밖으로 이어졌다. 머지않아 병사 하나가 붙잡혀 소멸됐다. 두 번째, 세 번째 병사가 잡혔다. 토벌대의 저항이 시작됐다.


“피곤해지겠군요.”

“망할 자식들이······.”


간단하게 토벌대를 전멸시킨 분쇄자는 핵융합발전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병사들의 갑옷과 무기를 꾹꾹 뭉쳐 집어던졌다. 그 공격은 로소프가 힘겹게 받아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날아온 돌덩이가 핵융합발전기에 명중했다. 안전장치가 작동해 폭발은 면했으나 발전기를 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분쇄자가 직접 몸을 날렸다. 피하려다 붙잡힌 로소프의 다리를 지모가 즉시 잘라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다. 분쇄자는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계속 무거운 물건을 집어던졌다. 빠르고 정확했다.


“단단히 틀어졌네. 어쩌지?”

“결국은 이렇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영대 군을 도와주십시오. 여긴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


분쇄자의 공격은 영혼들에게 집중되었기에 눈에 보이는 피해는 크지 않았다. 공포에 떨던 노예들은 분쇄자가 자기들을 무시하는 듯하자 제법 용기가 생겼는지 구경하러 따라다니기도 했다. 지모는 그들을 말리러 다녔다.


“신의 사자야! 신이 우릴 구하려고 보내셨어!”

“아닙니다. 집에 가십시오.”

“신의 사자가 아니면 누군데요? 당신은 어떻게 알아요?”

“저건 구시대 전쟁병기입니다. 당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닙니다. 강한 순서대로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위험하니 집에 가십시오.”

“그, 그러면 저게 영혼들을 다 죽인 다음에 멈춰줘요!”

“노력해보겠습니다.”


괜히 언쟁해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기에 지모는 긍정적으로 답변해주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동안 분쇄자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영혼을 찾아내어 붙잡아 구기거나 찢어 죽였다. 조종하는 선인이 있었던 옛날이라면 일부러 시간차를 두고 공격해서 공포가 퍼지도록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가까스로 소문을 접한 영혼들은 허둥지둥 성역으로 몸을 피했다. 노예를 부려 호의호식하던 영혼들보다 외딴 곳에서 평화롭게 살던 영혼들이 오히려 많이 당했다.


에버글로우의 대피 권고를 무시했다가 분쇄자의 소식을 접한 성역은 난리가 났다. 제아무리 강력한 괴물이라도 성역의 마법엔 거스르지 못하리라 믿는 사람들은 남았고, 아닌 사람들은 피했다. 남는 쪽이 훨씬 많았다. 성역이 얼마나 오랫동안 성역으로 불려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성역으로 들어온 분쇄자와 대화를 시도한 영혼이 잡혀 죽자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모는 그 와중에 성역의 골목골목을 파악해 최단 도주경로를 짜고 사람들을 안내해주려 애썼다. 그의 낯선 외모를 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다행히 없었다. 문제는 말을 듣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너도나도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남을 밀거나 잡아당겨 혼란이 더욱 가속됐다. 음식 판매대가 엎어져 불이 났고, 바닥에 계란이 쏟아져 수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져 넘어졌다가 분쇄자에게 잡혀 죽었다. 얄궂게도 분쇄자는 바닥의 상태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저건 도대체 뭐야? 너 알아? 알고 있으니까 우릴 도망치게 해주는 거지?!”

“고대 전쟁병기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항상 얘기했잖아, 엄청난 게 있을 거라고!”


그 남자는 일행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분쇄자는 소리에 반응하진 않았다.


“막을 방법이 있나요? 대포가 있는데, 그걸로 쏘면 어떨까요?”

“저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파괴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 아니야?? 그럼 뭔데?”

“다른 차원의 공간을 사람 형태로 잡아놓은 겁니다.”

“허······.”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서둘러 뛰어갔다. 지모는 다른 곳에서 막 사람들을 덮치려는 분쇄자의 등짝에 점화시킨 연료전지를 던져 일시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마지막 연료전지였다.


여왕은 왜 더 일찍 알리지 않았느냐고 지모를 다그쳤다. 지모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는 성역보다 에버글로우를 더 우선했다. 만약 빨리 말했다면 여왕은 성역을 구원하러 직접 나섰을 터였다. 그러면 변수가 너무 많아졌다.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잠적해버린 마틴이 특히 신경 쓰였다. 여왕의 죽음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지모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지만, 여왕은 다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줘. 지금 말하면 들을 거야. 나도 갈게.”

“추천하지 않습니다.”

“지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모는 지모들을 전부 모았다. 수백 기의 지모들이 성역 사람들을 이끌었다. 몇몇은 분쇄자를 유인했다. 여왕은 빗자루를 타고 직접 날아와 대피용 구름을 만들었다. 수천 명이 탈 수 있을 만큼 큰 구름이었다.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따랐다.


군중 사이에 마틴의 첩자들이 숨어있었다. 지모는 그들을 보았지만, 여왕에게 암기가 날아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독침이 여왕의 몸에 박혔다. 여왕은 고통을 참고 침착하게 구름을 띄웠다. 암기가 또 날아왔다.


그란델의 사도들이 여왕을 둘러쌌다. 몇 명은 암기를 막아냈고 몇 명은 마틴의 첩자들과 교전을 시작했다. 여왕은 독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분쇄자가 밑에서 바위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지모들이 미사일을 쏘아 요격했다. 바위는 지천에 널려 있는 반면 미사일은 많지 않았다. 구름을 뚫고 올라온 바위에 사람들이 맞아 떨어졌다. 여왕이 독기에 지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마법이 풀리며 그녀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지모에겐 더 이상 분쇄자의 파괴행각을 지연시킬 방법이 없었다. 태양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같은 시각. 영대는 여왕이 연락을 받지 않자 초조해졌다. 지네같이 생겼고 덩치는 송아지만한 괴물들이 태양석 생선설비를 노리고 쳐들어왔다. 발굴된 설비를 한자리에 모아두길 기다렸다가 시작한 영악한 공격이었다. 괴물들은 칼로 자르고 철퇴로 박살내도 남은 부분이 꿈틀거리며 계속 움직였다. 두껍고 유연한 갑각은 불에 강했다.


“백애 이 겁쟁이 새끼야! 숨어있지 말고 당장 기어 나와!!”


벌써 수십 명의 시민이 전투에 휘말려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마틴의 병사들은 버티는가 싶더니 전부 달아났다. 분노한 해유리가 막강한 마법으로 괴물들을 폭발시켜 죽였지만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온 사방에서 계속 몰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설비를 포기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며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 정지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영대는 제라드의 능력을 빌려 필사적으로 후방을 지켰다. 리미엘이 영력을 공급해주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보니 어느새 괴물들이 사라졌다. 해유리도 없었다. 그녀는 물러가는 괴물들을 따라갔다고 리프레인이 말해주었다.


“해유리 데려와야 돼요!”

“말을 안 들을 텐데.”

“그럼 같이 가주기라도 해야죠! 저랑 가요.”


가넷은 병사 몇을 데리고 혹시라도 건질 만한 생산설비가 남아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제라드는 시민들과 함께 에버글로우로 이동했다.


용사 일행과 리프레인은 사라진 해유리를 추적했다. 리미엘의 마법 덕분에 방향은 확실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도착한 곳은 다 무너져가는 버려진 유적이었다. 괴물 무리에 포위된 해유리가 백애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기세가 드높아 위험해보이진 않았다.


“쓰-읍. 손님이 또 왔나.”

“너희 도움 필요 없어. 가.”

“데려가려고 왔다고요. 맘대로 사라지지 마세요!”

“누구한테 명령이야. 잠깐 닥치고 있어. 저놈이랑 얘기 안 끝났어.”

“쓰-읍.”


백애는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침을 흡입하느라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너, 아예 미쳤구나? 분쇄자 하날 잠재우려고 모든 걸 걸었는데, 이제 와서 다 망쳐? 너는 곱게 죽지도 못할 줄 알아. 쓰레기 새끼.”

“허. 분쇄자가 누구 책임이더라? 쓰-읍. 전 책임자 해유리. 씁, 아, 물론 조민이 비명횡사할 줄은 모르셨겠지. 쓰-읍. 넌 언제나 오만했어. 우리 민족을 너무 믿었고. 바보같이.”

“왜 분쇄자를 깨웠지?”

“널 빼앗긴 데다, 쓰-읍. 더 오래 살 자신도 없고. 쓰-읍. 지쳤다. 혼자 조용히 죽으려니 너무 분해서. 쓰-읍. 잡것들이 우리 땅에 발을 붙이고 있잖아.”

“네가 못 가질 바에 아무도 못 가지게 하겠다? 자기가 평생 패배자로 살아온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닥쳐!!! 네년은, 씁, 그딴 식으로 언제나 남을 가르치려 든다. 꼴 보기 싫어. 그 잘난 머리, 이제 숙일 때가 됐다. 쓰-읍. 분쇄자를 막아도, 내 박마 군단은 막지 못해. 이것들은, 쓰-읍. 이 땅을 죽이기 위해, 씁, 특별히 만든 생물병기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단 말이다! 네년만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해유리, 너는 우리 민족 최대의 실책이다.”

“아무도 날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못해. 특히 네놈은 절대 허락하지 않아.”


백애의 턱을 따라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품속에서 주먹 크기 쇠구슬을 꺼냈다.


“그러시겠지. 어디 마지막까지 몸부림쳐봐라.”


구슬이 터졌다. 백애는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졌다. 흐릿한 형체가 그 자리에 잠깐 생겨났지만 곧 밝은 빛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직후 박마라 불린 것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완전한 죽음이라고? 감히 나한테 목숨을 구걸하진 못할망정······.”


영대는 분노로 몸을 벌벌 떠는 해유리를 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통제를 잃은 박마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마주치는 동식물들을 전부 먹어치웠다. 해유리는 박마를 퇴치할 방법을 찾겠다며 센트럴로 가는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좆같네.’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영대는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희망을 찾아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로 이때를 위해 행운의 여신이 자기를 소환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직 안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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