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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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벌
작품등록일 :
2019.01.0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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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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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행(3)

DUMMY

​입가를 피로 물들인 블랙 팽이 아빌라드를 주시했다. 보통내기는 그 살의로 가득찬 눈을 보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겠지만, 노련한 사냥꾼은 담담하게 사냥감을 노려봤다.


이름에 걸맞게 늑대와 닮은 걸음걸이. 하지만 오른쪽 뒷발을 미세하게 절고 있다. 그쪽에 부상을 당했다는 뜻.


그리고 경계를 하고 있으면서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블랙 팽은 단일개체로도 위협적인 마물이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울음으로 소통하는 집단생활을 본능적으로 익히고 있다는 점. 하지만 눈앞의 블랙 팽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주변에 불러들일 동족이 없다는 의미다.’


블랙 팽은 숙련된 성전사도 혼자 상대하긴 버거운 마물이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은 부상당하고 고립된 한 마리. 평소에 비하면 손쉬운 사냥감이다. 활시위를 당겨둔 아빌라드가 재빠르게 화살을 쐈다.


블랙 팽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하며 아빌라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뒷다리가 부상당한 상태에서 나올 움직임이 아니다.


생존본능에 의해 고통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일반적인 생물과 다르게, 오로지 인간에 대한 적의를 본능으로 가진 마물들은 고통에 둔감하다. 그렇기에 가능한 움직임.


하지만 아빌라드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며 연거푸 활을 쏴 블랙 팽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놈은 계속 아빌라드를 노리고 움직였지만, 그가 쏘는 화살이 계속 그 경로를 방해했다. 그렇게 화살을 몇 번 피하던 블랙 팽이 생각을 바꿨는지 단번에 크게 도약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윤기 없는 검은 털에 감춰진 새하얀 이빨이 그 모습을 드러내 아빌라드의 몸을 물어뜯으려 든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은 이미 활을 내려놓고 허리춤에 찼던 버클러와 메이스를 뽑아 기다리고 있었다.


퍽!


목덜미를 향해 뻗어오던 주둥이를 버클러로 후려치자 블랙 팽이 깨갱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어지러운 듯 머리를 격렬하게 털어낸 블랙 팽은 아빌라드의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탐색전으로 이어지나 했더니, 이번엔 아빌라드 쪽에서 먼저 공격했다. 그는 버클러를 앞세워 돌격하며 틈을 내주지 않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직!


검이었다면 그 질긴 가죽 때문에 효과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겠지만, 메이스라면 얘기가 다르다. 내부에도 충격을 전달하는 둔기 특유의 파괴력 덕분에 마물과 싸우는 게 업인 성전사들 역시 둔기를 즐겨 쓰곤 했으니까.


평범한 늑대였다면 진작에 머리가 깨질만한 공격이었으나, 블랙 팽은 자신이 보통 짐승이 아니라는 걸 과시하듯이 메이스에 얻어맞고도 이빨을 내밀며 아빌라드에게 덤벼들었다.


다시 입을 들이미는 것을 버클러로 막아냈으나 블랙 팽이 쉽사리 물러서지 않자 아빌라드는 그대로 버티면서 놈의 옆구리를 반복하여 메이스로 두들겼다.


여러 번 맞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블랙 팽이 움츠러들자, 아빌라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얼굴을 메이스로 쳐버렸다.


우득!


어떤 고통이든 감내할 것 같이 덤벼들던 놈의 몸이 축 늘어진다. 턱의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덜렁거렸지만, 아빌라드는 쓰러진 블랙 팽의 머리가 완전히 깨지도록 메이스로 내리치고서야 버클러를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놈이군.”


차마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뭉개진 블랙 팽이 여전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빌라드가 질색한다. 이미 죽은 마물의 마지막 몸부림이란 걸 알기에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아빌라드 씨!”


다급한 캐트시의 목소리. 그녀는 별안간 나타난 또 다른 블랙 팽에 맞서 아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빌라드가 다급하게 그쪽으로 뛰어갔다.


“물러나!”


캐트시는 블랙 팽을 에페로 위협하며 거리를 벌리고 아빌라드가 그 사이로 파고들어 놈을 막아섰다.


“계속 주변을 살피고 다른 놈들이 없는지 확인해. 다른 녀석들이 여럿 있으면 골치가 아파질 테니까.”


앞서 죽은 블랙 팽의 행동을 보고 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인 모양이었다. 놈이 주변에 다른 동족이 있는 걸 몰랐다거나 일부러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온갖 마물의 정보에 대해 꿰고 있는 아빌라드가 보기엔 후자는 말이 안됐다. 적을 기만할 정도의 지성을 지닌 마물 따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으니까.


우선은 눈앞의 마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아빌라드는 잡생각을 지우고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새로 나타난 블랙팽은 그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땅을 걷어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아까 상대했던 놈처럼 발을 다친 상태가 아니어서 그런지 좀 더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빌라드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 흐르듯이 발을 뻗어 옆으로 비켜선 그는 블랙 팽의 옆구리에 그대로 메이스를 내질렀다. 공중에서 균형을 잃은 블랙 팽이 바닥을 굴렀고 아빌라드는 다시 캐트시와 마을 아이들 앞에 서서 버클러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은 블랙 팽이 다시 사나운 기세로 아빌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아빌라드 씨.”


“왜 그러지.”


“지금 두 마리가 또 나타났어요.”


예상을 계속 벗어난다. 새로 나타난 두 마리의 블랙 팽. 다 해서 세 마리의 마물이 포위를 한 것이다. 아이들은 냉정하게 말해서 짐덩어리일 뿐이고, 캐트시를 싸움에 가담시키면 그 아이들이 위험해질 게 뻔했다.


하지만 이 다급한 상황보다 더 문제인 것은.


‘마물이 생각할 만한 전술이 아니다.’


지금 블랙 팽 무리가 보여주는 움직임이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 다르다는 것.


지성이 낮은 마물들에겐 전략이나 전술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블랙 팽 무리는 전술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무리가 있는 것을 숨기고, 계속 기척을 감추다가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적을 포위한다? 아빌라드는 이 상황에 대해 굉장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아빌라드의 메이스와 버클러에 환한 빛이 서렸다. 무술의 달인이라는 증거, 오러였다.


철을 짚단 베듯이 절단할 수 있게 만들고, 맞은 대상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릴 파괴력을 가진 힘이지만 그가 마물을 상대할 때 이 힘을 쓰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효율이 나쁘다.


성직자들의 신성력과 달리 오러는 마물의 가죽과 갑각 앞에선 그 위력이 반감이 돼버리기에, 괜한 힘만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괜히 마경의 전투를 성전사들이 맡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포위된 상황.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기에 아빌라드는 거침없이 힘을 드러내며 눈앞의 블랙 팽을 향해 도약했다.


퍼억!


오러를 끌어올리며 신체능력도 향상됐기에 그의 움직임은 전보다 월등히 빨라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블랙 팽의 앞으로 다가온 아빌라드가 메이스를 휘둘러 맞히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블랙 팽이 땅을 굴렀다.


자세를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접근한 그가 메이스로 목을 내려쳤지만, 블랙 팽이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쳇.”


인간이었다면 처음의 일격으로 즉사했겠지만, 역시 상성이 좋지 않다. 정신을 차린 블랙 팽이 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버클러로 놈을 밀어내고 메이스로 등을 찍어버렸다.


움찔하는 블랙팽의 목덜미를 내려치고 머리를 후려치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두어 번 더 메이스를 휘둘러 머리통을 완전히 으스러뜨리고 나서야 아빌라드가 캐트시를 불렀다.


“이쪽으로 넘어와!”


블랙 팽 두 마리에게서 아이들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던 캐트시가 그의 부름에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에페를 앞세워 경계하는 통에 블랙 팽 두 마리는 그녀의 앞을 서성이며 기회를 노리고만 있었다.


캐트시와 아이들을 자신의 등 뒤로 물린 아빌라드가 버클러를 단단히 쥐고서 궁리했다.


상대는 두 마리. 단순히 한 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골치가 아프다.


여기서 다른 놈이 더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도망치는 게 상책인 상황이지만, 발이 느린 아이들을 데리고서는 도망치기가 힘들다. 게다가 마을엔 아직 주민들이 많이 남아있는 상황.


“제기랄, 곤란하게 됐군.”


“이제 어떡하죠?”


“우선 저 둘을 먼저 해치워야지. 그 뒤엔 다른 무리가 더 나타나지 않길 바랄 수밖에.”


“아, 더 나타나지는 않을 거예요.”


황당하리만치 확신에 찬 캐트시의 발언. 평범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마물과 소통할 수 있는 이루프가 그런 말을 하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확실한 건가?”


“네!”


그녀가 확언한 대로 다른 마물이 있든 없든, 일단 눈앞의 블랙 팽 두 마리를 죽이는 것이 먼저다. 아빌라드는 활을 꺼내들어 오른쪽에 있는 녀석을 겨냥했다. 그가 체내에서 이끌어낸 오러가 화살에 서린다. 더 큰 살상력을 위해 맞춤제작한 활의 시위를 놓자 빛나는 화살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블랙 팽에게 날아갔다.


아까 쏘던 화살과는 속도도 파괴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 블랙 팽이 본능적으로 화살의 궤적을 벗어나려 했지만,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리 하나를 꿰뚫린 것으로 그쳤을 뿐.


그와 동시에 표적이 되지 않았던 블랙 팽이 땅을 박차 아빌라드에게 접근한다. 다리를 맞은 녀석 역시 느릿하지만 위협적인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는 아이들과 캐트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버클러에 의지해 앞으로 나가 맞섰다. 다시 꺼내든 메이스가 반짝였다.


콰득!​


앞서 달려든 블랙 팽의 입이 버클러와 충돌한다. 아빌라드는 버클러에 모든 체중을 실어 그 돌진을 힘으로 밀쳐냈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놈을 메이스로 내리찍으려 할 때, 뒤이어 달려든 블랙 팽이 그것을 저지했다. 다리를 꿰뚫려 무척이나 격앙된 블랙 팽은 사나운 기세로 아빌라드의 빈틈을 노렸지만, 부상을 입은 만큼 느려져 있어서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다.


블랙 팽이 접근해오는 궤도에 맞춰 종방향으로 메이스를 휘두르자 놈이 보기 좋게 머리를 얻어맞고 뒤로 튕겨져 나갔지만, 또다시 다른 녀석이 툴툴 털고 일어나 아빌라드의 행동에 제약을 건다.


이래서 두 마물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한쪽에게 부상을 입혀도 고통을 견디고 덤벼드는 탓에 다른 한 쪽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을 수가 없으니까. 아빌라드는 혀를 차며 다시 방어를 시작했다.


역시 집단전투로 유명한 마물답게, 두 블랙 팽이 합공을 해오니 아빌라드로서도 굉장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공격해오는 경로도 다 다르며, 한 놈을 공격하려 들면 다른 놈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다. 독립된 두 개체가 아니라, 마치 강한 한 놈을 상대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나마 근접전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활로 부상을 입혀놓은 것이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고통을 느끼든 말든 어쨌든 부상은 똑같은 부상이다. 다리를 다친 블랙 팽은 다른 쪽의 공격에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거기에서 비롯된 빈틈을 이용해 아빌라드는 둘의 맹공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곤란하다.’


마물과 직접 맞서 싸우는 일은 신성력을 휘두르는 성직자가 아니면 힘든 일. 게다가 거침없이 오러를 쓰며 싸워왔기 때문에 아빌라드로서는 질질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수차례 받아친 두 마물의 연계. 잠깐의 공방을 통해 그 빈틈을 완벽히 파악한 아빌라드의 메이스가 바람을 가르고 마물의 눈에 적중했다.


몸이 멀쩡해 공격을 주도하던 녀석이 눈을 공격당하고 주춤하자 그 뒤에서 꿰뚫린 다리로 어설프게 공격해오던 놈이 무방비해진다.


그리고 사냥꾼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크게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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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logue. 약초꾼과 사냥꾼 +5 19.01.02 390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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