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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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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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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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6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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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련(1)

DUMMY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기로 했고, 용의 발톱을 제련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아빌라드는 칼리고에서 당분간 머무르며 기다리기로 했다. 교단은 마을에서 데려온 가웨나를 거두어줄 수 있다고 했으나 아빌라드가 한사코 사양하는 탓에 여전히 같이 다니고 있었다.


교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둘이 허기가 졌을 거라고 생각한 아빌라드는 식당부터 가기로 했다. 캐트시는 항상 그랬듯이 차려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가웨나는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주 적은 양 밖에 먹지 않았다.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거니?”


가웨나가 입맛이 없어보이자 아빌라드는 괜히 걱정이 되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은 다 마무리 되었지만 이 어린 아이가 그것을 모두 흘려보냈을 리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렴. 그렇게 적게 먹으니 걱정이 되는구나.”


“네.”


아빌라드의 말을 듣고 가웨나가 다시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먹기 싫다는 것으로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그릇을 비우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캐트시에게 가웨나의 몫을 내밀었다. 아무리 먹성이 좋은 캐트시라고 해도 그 정도 양은 조금 버거웠는지 다 먹고선 연거푸 트림을 해대는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아빌라드는 용의 발톱을 제련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수소문하여 대장장이 락스퍼가 있는 대장간을 찾아갔다. 과연 소문대로 락스퍼는 북대륙에 사는 종족 치체니어였다.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네 개의 팔이었다.


“당신이 대장장이 락스퍼 맞소?”


“눈은 뒀다 어디에다 씁니까? 거기 간판에 쓰여 있잖소.”


락스퍼는 고개 하나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대장간 앞에 걸려 있는 간판에는 그의 이름이 멀쩡히 새겨져 있었다. 예의상 물어본 말에 이런 반응은 예상외였지만 아빌라드는 크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용의 발톱을 제련할 생각인데,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지. 그런데 지불할 돈은 있는 거요? 옷차림을 봐선 지불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아빌라드가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후줄근한 복장이긴 했다. 마물사냥 의뢰로 돈은 벌었어도, 정작 꾸미는 일엔 별 생각이 없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돈은 걱정하지 마시오. 제련만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까.”


용의 발톱을 꺼내 보여주자 락스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걸로 만들면 되는 거요?”


“화살.”


“용도는?”


“마물을 잡는데 쓸 거요.”


“아, 마물사냥꾼이셨구만.”


락스퍼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용의 발톱을 받아들었다. 재료를 잠깐 둘러보고 그는 견적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하루 내로 완성해드리지. 30발을 제작할 거고, 보수는 금화 6개. 선수금으로 반은 먼저 받겠소.”


가격이 조금 높은 감이 있었지만 상대는 명성 높은 치체니어 대장장이. 아빌라드는 군말 없이 금화 3개를 지불하고 대장간을 나섰다. 대장간을 나서자 캐트시가 가웨나를 데리고 시장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이 도시에서 다른 용무가 없었던 아빌라드는 그녀들과 함께 좀 더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다.



&



교단 측에서 남는 방을 내주기로 한 덕분에 따로 숙소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도 아빌라드에게 중요한 것은 길버트 대사제가 가웨나가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상태를 봐주기로 한 것이다. 며칠 전 만났던 사제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결론을 지었지만, 대사제라면 뭔가 답을 내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아빌라드 공,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도움이 되진 못할 것 같군요.”


하지만 대사제 역시 이 증상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아빌라드는 크게 실망했지만 길버트 또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답변에 수긍했다. 그는 대사제가 준 차를 마시고 깊게 잠들어 있는 가웨나의 얼굴을 근심 깊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 아이와는 아는 사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단에 맡기셔도 좋을 텐데요. 가족이나 친척처럼 극진하게 보살피진 못해도, 교단 역시 이렇게 연고 없는 아이들을 거둘 여력은 있습니다.”


길버트의 말에는 약간의 의심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아이를 굳이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은 아빌라드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아이의 얼굴이 모르는 얼굴이었다면 아빌라드 역시 당연히 미련 없이 아이를 떠나보냈을 것이다.


“아이를 맡기지 않는 건, 이 아이가 제 딸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따님이라면, 분명 5년 전...”


“죽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길버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황당한 이야기인 건 그에게도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해 보이는군요. 혹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쌍둥이가 있었던 겁니까?”


“아내가 출산할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쌍둥이가 없는 건 확실합니다.”


설령 쌍둥이라고 해도 말이 안됐다. 밀리아는 5년 전에 죽었고, 가웨나는 정확히 5년 전의 밀리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리아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을 테지만, 가웨나의 외모는 생전의 밀리아와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참으로 기이하군요. 이 늙은이가 살펴본 바로는 변신마법이나 변장도 아닌 게 확실한데 말입니다.”


“아이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영문을 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상태니까...”


“그렇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실 생각이라면 저는 말리고 싶군요. 아이의 가족이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앞으로 맡으실 일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연약한 아이가 함께 할 만 한 일은 아니죠.”


아빌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아이를 구출하긴 했어도 계속 그 아이를 데리고 다녀도 괜찮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센티누스를 쫓는 일에 휘말려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는 것에 부담감이 느껴지신다면 언제든지 교단에 맡기셔도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아이들을 거두어 보호하는 일도 교단의 임무이기도 하니까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생각이 변한다면 제가 얘기해드리죠.”


그렇게 대사제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별 소득 없이 밤이 깊어갔고, 아빌라드는 곤히 잠들어있는 가웨나를 등에 업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배웅하는 대사제를 뒤로하고 침실까지 반쯤 걸었을까, 아빌라드는 등에 업은 가웨나가 움직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웨나? 깨어난 거니?”


“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방까지 거의 다 왔단다. 금방 데려다 줄 테니 좀 더 눈을 붙이렴.”


“아저씨.”


“응?”


“아저씨는 저와 모르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아저씨의 딸과 닮아서 그런 건가요?”


가웨나가 잠긴 목소리로 갑자기 정곡을 찔러왔다. 아무래도 가웨나가 잠든 줄 알고 나눴던 대화를 일부 엿들었던 모양이다.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아빌라드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넌 내 죽은 딸과 똑같이 생겼어.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이 말이야. 널 보면 내 딸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저도 아저씨가 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분명 자신의 딸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은 아빌라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대놓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가웨나의 부모가 대륙 어딘가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딸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우선은 네 기억을 찾는 일이 먼저 같구나.”


“...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없니?”


“네.”


“걱정 마렴. 반드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침실이 가까워졌다. 아빌라드는 업고 있던 가웨나를 내려주었다.


“잘 자렴.”


가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고, 그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분 좋게 자고 있을 캐트시의 고로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웨나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아빌라드는 침실로 갈까 했지만, 기분이 싱숭생숭해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할 겸 안뜰을 걷고 있을 때,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게 많은가봐, 안 그래?]


마치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빌라드는 소름이 끼쳤다.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지만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깔깔깔! 어딜 둘러보는 거야? 거기엔 너 말곤 아무도 없다고.]


정체모를 목소리에 위기감을 느낀 아빌라드가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뻗자 목소리가 다시 깔깔 웃어댔다.


[그걸로 날 베려고? 재밌는 생각이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준 아빌라드가 서둘러 이 목소리의 정체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오우, 머리 굴리는 게 상당히 빠르네. 전음마법을 쓰는 마법사, 아직 장난치는 게 재밌을 어린 성직자, 이상한 능력을 가진 마물, 가능성은 낮지만 유령. 그런데 이걸 어쩌나. 모두 아닌데?]


목소리는 아빌라드의 생각을 모두 읽기라도 한 듯이 그의 가설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이봐, 난 널 해칠 생각 따위 조금도 없어. 그냥 얘기나 조금 하자는 거지.]


아빌라드는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묘하게 이 목소리의 주인이 위험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아빌라드가 당황한 사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있는 곳이 그리 먼 것도 아니야. 산책하는 샘 치라고. 자, 길을 알려줄게.]


속삭임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아빌라드는 어느 길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목소리의 주인이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대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자고 있는 성직자들을 깨워 이 해괴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의 느낌이 가리키는 방향은 교단 내부로 향하고 있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불러낸 것이라면 성직자들이 지키고 있을 곳에서 불러낼 리는 없다고 판단한 아빌라드는 느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느낌대로 걷다보니 점점 교단의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다. 길을 가는 중에 굳게 잠겨있는 문이 여럿 있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의 짓인지 아빌라드가 다가갈 때마다 활짝 열렸다가 그가 지나면 다시 도로 닫히는 일이 반복 됐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지나고, 어느새 교단 심층부까지 내려왔다. 심층부는 미궁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빌라드는 그저 느낌을 따라 걷는 것으로 그 길을 손쉽게 통과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빌라드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문이 이 길의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문 앞에 서기 무섭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시 기뻐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 잘 왔구나. 네가 서있는 문 너머에 내가 있단다. 준비는 됐니?]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긴, 괜한 질문이었지? 들어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은 문 너머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문처럼 스스로 열리지 않았기에 아빌라드는 직접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방 안에는 누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빌라드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방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방에는 검 한 자루만이 바닥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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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logue. 약초꾼과 사냥꾼 +5 19.01.02 390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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