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평선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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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없어
작품등록일 :
2019.01.0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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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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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0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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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힘드십니까?

DUMMY

<우르르 콰쾅!>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는 날, 어느 한 빌딩 꼭대기 층의 법률사무소 회의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긴 원형 탁자 중앙에 앉아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정글’을 관리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된 감독관이었다.

하지만 회의 내내 무표정이던 그는 주먹을 쥐고 탁자를 여러 번 내리찍었다.


<쾅, 쾅, 쾅!>


“장난쳐요? 10명이 몰려가서 발전기실 물 빼는 것도 못 해요?”

“그.. 저희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만...”

“열심히 한 게 저 모양이면, 난 도대체 뭘 바라야 할까?”

“죄송합니다.”


이에 양쪽으로 고개를 연신 조아리는 사람들은 분위기상 그 남자와 똑같이 양복을 입어야 하건마는, 그들의 옷은 흙탕물이 군데군데 묻은 허름하고 찢어진 작업복과 잠바였다. 심지어 대학 과 잠바를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도 보였다.


“피해 상황 말해보세요.”

“LED 등이 모두 꺼졌습니다. 식물 상태로 보아, 정부에서 씨앗을 더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기실이 물에 잠겼습니다. 그 때문에 발전기가 폭발했습니다. 김 씨와 그 외 4명이···. 폭발에 휘말려 죽었습니다.”

“시신은 5호에 실어서 정부로 보내.”

“예, 알겠습니다.”

“돌아올 땐 누굴 데려와야 할까?”

“예?”


계속 대답을 하던 한 작업복의 남자가 말을 멈추자, 회의장은 적막에 빠졌다. 양복의 감독관은 말을 멈춘 그를 계속 응시하면서 되물었다.


“제발, 내가 생각 좀 하라 하지 않았나? 발전기가 고장났으니, 기술지원팀 찾아서 기술자 데려와야 될 거 아냐? 시스템을 매 순간순간 생각을 하란 말이야, 좀.”


‘그건 네가 알지, 내가 우째 아냐.’


“데려오겠습니다.”

“그리고, 스크래퍼 팀. 너네들이 나가서 스크래퍼 작업하면서, 빈둥빈둥 놀지만 않았으면 발전기실 물도 다 빼놨어. 내가 분명 5시까지 오라 했는데, 5시 반에 왔지? 그리고 발전기실 터졌지? 이건 누구 탓이야?”


‘시벌, 도로가 물바다가 됐는데 늦는 건 당연한 거지.’

‘30분 넘겨서 터질 거면 원래 터질 거 아니었나.’


말도 안 되는 책임 떠넘기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온 스크래퍼 팀은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한숨은 지랄. 지금까지 5개가 터졌어. 내일부터 식물에 최소 일조량도 못 주니깐 다 죽겠네. 성산 빌딩에서 파종한 씨감자 뽑아서 가져와 보라 해요.”


회의실에 한 사람이 무전을 치더니, 창문을 열어 손전등을 깜박깜박 거렸다. 잠시 후, 갑자기 창문에 매달린 집라인을 타고 비바람과 함께 보따리가 떨어져 나왔다.

보따리를 펼치니, 아까 무전으로 요구했던 씨감자가 보였다.


“봐. 썩었네. 싹도 못 폈어. 이 머리 빈 것들 먹여 살리기 진짜 힘들다. 프로젝트 털렸으니깐, 지금부터 스크래퍼 팀은 24시간 비상 근무체계 시행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야.”


“네? 이미 주변 자원들은 다 씨가 말랐습니다. 더는 뭔가 나올 건더기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더 넓게 흩어지라고 중화제 줄 거야. 3일만 버텨. 그러면 정부에서 긴급 지원 온다. 이때 생기는 빚은 다 너네들 앞으로 달릴 테니깐 알아두고.”


그는 빈정거리는 폐회사와 함께 작업반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그 감독관을 멱살 잡고 개패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그 남자 뒤로 2명의 정부 소속 군인이 레이저 라이플을 든 채 그를 지키고 있었기에 어떻게 대들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스크래퍼 팀의 팀장 한장익 씨는 터덜터덜 복도를 지나 비좁디 좁은 개인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자신과 평생 함께한 50대 중반의 아내가 쿨쿨 자고 있었다. 아들은 미국에서 살아 있다며 생존신고를 하고 연락이 끊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아들 얼굴도 못 본 채 쓰러질 판국이었다.


그때, 자신이 들어왔던 문이 열리고, 부하 직원이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갈 속삭였다.


“그 사람들도 같이 데려 가달라고 했어.”

“지금까지 총 몇 명이지?”

“9팀으로 21명이야. 어린애는 4명이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배분받을 중화제 양을 계산해보니, ‘캐슬 더 퍼펙트’ 아파트 단지까지는 능숙하게 도달할 거리이었으니까 말이다.


퓨엘리움 가스가 이곳까지 쳐들어오기 전, 그는 동료 직원들과 봐 놓았던 사무실과 빌딩들을 개조시켰고, 오직 아는 지인들끼리만 모여 발전기와 텃밭을 가꿔 살아남기로 했었다.

그러나 정부가 이곳을 강제로 진압하고, 감독관이 온 뒤로는 모든 게 망가졌다. 얼굴 모르는 피난민들이 들어오면서 풍족한 자원들은 삽시간으로 부족해졌으며, 빡빡한 발전계획은 지하 발전기를 덮친 홍수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그가 이해가 안 됐던 것은, 한 번도 홍수로 난리 난 적이 없던 지역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 이곳을 덮쳤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무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저 악마같은 감독관이 중화제를 나눠줬기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니.

그는 합류한 난민들을 모아 밤중에 ‘캐슬 더 퍼펙트’로 향했다.


---


전자 등록을 마친 ‘콘크리트 정글’ 피난민들은 정지협 시장 앞으로 다가와 감사를 표시했다.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기 시장님은 정말 착하시네요.”

“착하긴요. 서로 살려고 이러는 건데요. 일단 편히 쉬시고, 확장 공사 때 좀 도와주세요. 아, 그리고 밖에서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올라오기 쉬웠던가요?”

“에어록 울타리였죠? 가스 막는 덴 좋은데, 사람 막는 데는 별로예요. 울타리에 사다리를 긴 걸로 개조해서 바로 타고 올라왔죠.”


아무래도 울타리를 보강할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마친 뒤, 시장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삼아, 넌 어떻게 생각해? 스크래퍼 팀장이 말하기론 오피스 구역에 홍수가 났다는 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진 않았는데.”


[하지만 요근래 꾸준히 비가 내렸습니다. 재난이 시작됐을 때 피난민들이 도시 길바닥에 생활하면서 생활쓰레기를 하수구로 버려왔습니다. 현재 인천, 서울 전 지역의 하수구가 각종 쓰레기로 꽉 막혀있습니다.]


“그래서 불투수층인 아스팔트가 빗물을 모아 홍수가 난 거였구만. 우연히 저지대로 흐르던 강물이 오피스 지역을 지나친 거고. 우리 도시를 덮치면 큰일일 텐데. 우리 도시 쪽 하수구가 역류할 수도 있어.”


[드론을 보내 침수지를 조사해오겠습니다.]


“에휴, 뭐만 하려 하면 일이 터지냐.”


---


다음 날, 선우 그룹의 지원 물자가 도착했다. 비행선이 도착해 여러 물자를 싣고 내리자, 작업에 필요한 자재는 모두 구비를 마친 셈이었다.


“찍어! 크흠. 지금부터 ‘캐슬 더 퍼펙트’ 도시의 제 1 식물공장 건설을 시작하겠습니다!”

“형, 나 도와주러 빨리 가야 해. 에휴, 뭐 하는 거람.”


안전모를 낀 지협은 남쪽 에어록 울타리에서 ‘제 1 식물공장 착공식’ 피켓을 들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영수는 드론으로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지만 시장이 참가한 착공식에는 지협 외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어허, 시장들은 다 이런 거 한다고! 동영상 저장해서 메일로..”


철없이 노는 시장 이외에는 모두가 열심히 첫 건설에 힘을 쏟고 있었다.


스크래퍼 팀은 노란 방호복에 등 뒤로는 사람 몸뚱이만한 살포기를 메고 건설지에 중화제를 뿌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퓨엘리움 가스 내에서의 작업은 그들이 능숙했기에 맡긴 작업이었다.


선우 그룹 작업반은 정해진 구역을 따라 에어록 울타리를 짓고 있었으며, 주민들은 모두 나와 건물에 있는 잡동사니, 기계 등을 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가 대부분이 먹자골목이어서 그런지, 가스레인지, 냉장고, 냄비, 그릇 같은 조리용 도구가 대부분이었다.


몇 시간 후, 하늘이 어두워지고 밤이 되자 드론들이 날라다니면서 작업 종료를 알리는 종을 울리고 있었다. 운반을 마치고 돌아온 도시민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자주 갔던 음식점의 간판을 보며 옛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에구, 여기 주꾸미 집이 정말 맛있었는데.”

“그러게 말여. 난 치킨에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


---


다음 날 아침, 시장실로 출근한 나는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나연이 하품을 하며 들어왔고, 영수, 은정이 자리에 앉았다. 나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늘상 하는 아침 회의를... 하아아암. 시작한다.”

“형은 한 것도 없으면서 하품을.”

“나연한테 전염 된거야.”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은정이의 공장 건축 진행도 발표를 마무리로 회의를 끝내려는 찰나, 나연이가 손을 들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뭐 다른 안건 없으면 다들 각자 알아서..”

“나 있어. 말할 거 있어.”

“나연, 너가?”

“응. 뭐 안 되나?”

“잠만 자다 갈 줄 알았.. 아 때리지 말고! 그래 말해봐.”


나연은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 일어서다 말고 다시 앉았다.


“어제 일 도와주면서 느낀 건데. 우린 뭐 음식점 없나? 술집이라든지.”

“에헤이, 또 먹는 타령을.”

“그게 아냐. 사람들이 어제 상가들 철거하면서 치킨 먹고 싶다, 술 마시고 싶다, 막 노래를 부르더라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

“그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우리 도시 상태창 보면 효과 중에 심리학 있지 않았나? 뭐, 스트레스 변화 같은 거 없었어?”


[데브일 님. 도시의 스트레스는 항상 최고조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부분의 하늘이 초록색 독가스로 뒤덮인 지금 상황을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전 욕구를 해소하기 전 까진 스트레스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아차. 나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비행선을 타고 다니는 나와는 달리 도시민들은 초록색 하늘을 보면서 항상 공포에 떨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정신적인 부담감을 줄여줘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그래, 나연이 안건을 채택하자.”

“오, 나연 누나 웬일로 멋진 주제를...”

“난, 내 생각을 말했을 뿐. 후후후.”


나는 도시민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은정이에게 물어봤다.


“스트레스 해소? 간단해! 쉬게 해줘.”

“안 돼. 우리는 한국 노동법을 준수하는 근무시간을 유지하고 있다고. 이런 아포칼립스에서 스트레스 안 받고 살게 하려면 프랑스보다 더 쉬어야 할 거야.”


은정은 내 말이 재밌는지 웃으면서 설명했다.


“푸흡. 농담이고, 사실 도시민들은 여가 시간 내에선 아주 잘 휴식하고 있어. 책들도 나눠 읽고, 누구는 축구공 가져와서 사람들이랑 모여서 놀고 있더라고. 사람들은 이처럼 다양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 내에서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직 부족한가봐.”

“소비 욕구라 하면···,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소모! 문화, 신앙, 스포츠 활동 등이 서비스이겠고, 술, 담배, 치킨 같은 게 재화겠네.”

“그렇지.”

“오케이, 결정했어. 시장을 열자. 도시민들의 소비 수요를 해소해야지.”


영수는 뜬금없이 나온 시장이라는 단어에 잠시 혼동이 왔다.


“시장? 마켓 말하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선우 그룹에 연락해서, 공급 가능한 기호품, 식료품, 카탈로그 좀 보여달라 해줘.”


[도시 상태창 갱신. ‘소비 욕구’가 발현되었습니다.]


「- 소비 욕구 : 불충족 (도시민들이 일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도시 업무의 효율이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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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4] 1부 외전 및 후기 +3 19.02.20 110 3 3쪽
34 [33] 캐슬, 성 (2) - 1부 완결 +4 19.02.20 76 3 15쪽
33 [32] 캐슬, 성 (1) +1 19.02.20 78 3 11쪽
32 [31]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1 19.02.19 74 4 12쪽
31 [30] 다가오는 위협 +2 19.02.18 84 3 12쪽
30 [29] 격리 (2) +4 19.02.15 94 3 10쪽
29 [28] 격리 (1) +2 19.02.15 96 2 12쪽
28 [27] 무법지대 (4) +2 19.02.13 215 5 11쪽
27 [26] 무법지대 (3) +2 19.02.12 106 4 9쪽
26 [25] 무법지대 (2) +2 19.02.11 118 5 10쪽
25 [24] 무법지대 (1) +1 19.02.08 121 4 12쪽
24 [23] 밖은 엉망이었다 +1 19.02.07 128 5 12쪽
» [22] 힘드십니까? +1 19.02.06 141 5 12쪽
22 [21] 도시의 손님들 +1 19.02.04 146 4 9쪽
21 [20] 자연의 보고, 아크 (3) +1 19.02.02 140 3 10쪽
20 [19] 자연의 보고, 아크 (2) +1 19.02.01 138 3 10쪽
19 [18] 자연의 보고, 아크 (1) 19.01.31 172 2 11쪽
18 [17] 한계 직전의 음욕 19.01.29 173 4 12쪽
17 [16] 그들의 교만 밑에서 19.01.27 144 3 11쪽
16 [15] 위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1 19.01.25 162 3 10쪽
15 [14] 나태 장치 19.01.24 174 4 10쪽
14 [13] 터져버린 식탐 (3) 19.01.23 198 3 10쪽
13 [12] 터져버린 식탐 (2) 19.01.22 169 3 12쪽
12 [11] 터져버린 식탐 (1) 19.01.21 167 4 12쪽
11 [10] 첫 비행선이 주는 무게 +1 19.01.19 212 5 11쪽
10 [9] 탐욕의 집단, 쉘터러 (2) 19.01.18 187 6 13쪽
9 [8] 탐욕의 집단, 쉘터러 (1) 19.01.17 215 6 10쪽
8 [7] 영장이라고요? +2 19.01.16 212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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