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르보가스트의 꼭두각시 황제였던 유게니우스를 잡아다 사형에 처했다. 서로마 원로원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서로마의 황제로 인정했다. 선대 황제의 자손들이 죽어서 급하게 공석인 동로마 황제로 임명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서 로마제국을 모두 이어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역시 무리한 원정으로 병을 얻어서 몸이 몹시 쇠약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이제 18살이었고, 둘째 호노리우스는 10살이었다.
스틸리코는 황제의 건강이 몹시 염려되었다. 어린 아들들이 황제의 업무를 수행하기는 아직 무리였다. 분명히 루피누스와 같은 간신들이 제국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알라리크가 왔습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이 고향으로 출발하기 전에 알라리크에게 자신을 보고 가라고 전했다. 로마군 입대를 거절 받은 알라리크가 로마군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은 게 아닌지 살펴둘 생각이었다. 가이나스의 말로는 입대 거절을 통보받고도 담담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애초부터 그다지 로마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알라리크가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스틸리코는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느꼈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끓어오르는 차가운 분노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로마인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하는 것이다. 그를 로마군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판단이 옳을 지도 몰랐다.
“로마군 입대를 못하게 되어서 유감이네.”
알라리크는 남의 일처럼 예의바른 말투로 물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황제께서는 자네가 로마군의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계시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라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뭘 할 생각인가?”
“고향에서 농사나 지어야지요.”
스틸리코는 알라리크가 마음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 대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군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뭘 말인가?”
“황제의 두 아들이 너무 어려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황제가 되면 제국이 잘 유지가 되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반란이 일어나겠죠.”
황제가 아픈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황제가 죽은 후에 반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는지 떠보는 알라리크의 말은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스틸리코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에 좀 더 존경심을 가져주면 좋겠네.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황제께서 자네의 입대를 거절하신 거야.”
알라리크는 차갑게 말했다.
“저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로마군이 받아주면 입대하고 아니면 못하는 거죠.”
그리고 스틸리코의 생각을 읽어내려는 듯이 표정을 예리하게 관찰하며 말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되잖습니까.”
마치 그에게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어조였다.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해서 로마를 분열시키려는 것인가. 그런 시도라면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로마와 황제를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황제는 신과 시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네. 반란이나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어.”
스틸리코가 보기에 로마제국의 가치는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로움 그 이상이었다. 황제와 원로원과 민중이 조화를 이루면서 민의를 반영해서 제국을 이끌어가는 모습이야말로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질서한 야만족들이 갖지 못한 이상적인 가치체계였다. 그는 알라리크가 그것을 깨닫고 로마에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로마에 가보지 못하고 시골 변두리에만 살아온 그가 그런 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로마군에 들어오고 싶으면 로마제국의 가치에 대해서 좀 더 깨닫고 오기 바라네. 자네가 로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책 속의 지식 뿐이야. 제대로 알려면 아직 멀었어.”
알라리크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로마제국은 그에게는 썩어빠지고 비열한 거대한 악의 집합체였다. 야만족의 피로 자신의 체제를 지키고 노동력을 착취해서 로마 귀족을 살찌우는 뿌리부터 잘못된 모순 덩어리였다.
스틸리코는 황제를 배신할 마음이 없어보였다. 유능한 황제 대신 무능한 황제가 즉위한다면 서고트족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로마제국과의 결전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스틸리코는 그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상대였다.
서고트족은 그들에게 허용된 거주지로 돌아갔다. 출정 기간에 비해서 많은 급료를 받았지만, 친구와 친척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부쩍 말이 없어진 알라리크에게 아타울프가 다가왔다.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알라리크는 터벅터벅 걷는 말 위에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깨달은 게 있어.”
“뭔데요?”
“로마의 체제로 들어가서 로마를 지배하려 했던 프랑크족 아르보가스트는 결국 실패했어. 로마인들은 제국을 야만족에게 넘겨주느니, 아무도 갖지 못하게 부숴버리는 길을 택할 거야.”
아르보가스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충동적으로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나름 계산을 하고 치밀하게 꾸민 것이었다.
그는 프랑크족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때부터 로마에 살면서 제국의 권력의 핵심에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원로원 의원들과도 교류하며 지지를 얻었다. 로마의 전통 신을 보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이교도를 규합하여 기독교와 비기독교 로마인을 분열시키는 등 정치적으로 뛰어난 전략을 구사했다.
로마의 핵심 지배층으로 파고들어서 황제까지 로마인으로 세우고 차근차근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결국 로마인들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야만족의 지배를 받을 수는 없다는 로마인들의 자존심은 로마군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로마인은 결코 야만족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을 거야.”
아타울프는 자신의 말 양쪽에 매달린 주머니에 두둑하게 들어있는 금화와 곡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능력있는 자는 로마군에 편입해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잖습니까? 프라비타나 가이나스도 계속 승진하고 있구요.”
이번 전투에서 가이나스는 서고트족의 참전을 협상하고 가장 먼저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넌 공으로 또 한 계급 승진했다. 이제는 스틸리코의 최측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서고트족 중에서 유능한 자들만 로마군으로 뽑아가고, 서고트족 대다수는 저들에게 그저 소모품이야.”
알라리크는 로마에 뽑혀가는 뛰어난 소수가 아니라 평범한 다수의 서고트족을 위한 길을 고민했다.
“야만족들이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면 좋아. 어떻게든 그들이 로마인과 야만족의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런데, 로마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차별을 고착화시키려고 해. 그래서 뛰어난 야만족 개인에게는 어느 정도 지위를 부여해도, 야만족 집단에게 권력을 나눠주지는 않아.”
아르보가스트가 자신의 야심을 죽이고 로마인 사이에서 황제의 신하로 남아있었다면, 로마인도 그를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절대권력의 의지를 드러내고 프랑크족 세력을 규합하는 순간, 로마인들이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서고트족이 로마인과 동등하게 살기 위해서는 로마에 협력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는 거야.”
“그럼 로마를 적대해야 합니까?”
“협력하거나 적대하는 것 말고, 제3의 길이 필요해.”
“제3의 길이요? 그게 뭡니까?”
알라리크는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로마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서고트족의 국가를 세우는 거야.”
“서고트족 국가요?”
아타울프는 눈썹을 모으고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로마에 협력한다고 해서 평화적으로 로마제국을 야만족에게 개방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게 아니었다. 야만족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 열등한 족속이었다.
그렇다고 로마를 배척하고 교류를 하지 않는 것도 서고트족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로마의 앞선 문화와 물건도 받아들여야 했고 용병계약 등 로마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결국 서고트족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아예 로마제국과 별개로 서고트족 권력 국가를 따로 세워야 동등한 위치에서 협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서고트족이 국가를 세우면 지금처럼 작전권을 갖지 못해서 돌격용 방패로 소모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비싼 세금과 이자율에 허덕이는 일도 없겠지.”
아타울프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와닿지 않고 생소했다. 지금과 무엇이 달라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고트족은 부족별로 나눠져서 살았고, 단 한 번도 나라를 세워본 적이 없었다.
“나라를 세우려면 뭘 해야 합니까? 돈이 있어야 하나요?”
알라리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땅이 있어야 해. 모두가 서고트족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땅이.”
“땅은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있잖습니까?”
“아무도 그 땅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아. 로마제국의 영토라고 생각하지.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진짜 우리 땅이 되는 거야.”
로마제국의 영토를 빼앗아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은 것은 페르시아제국과 같은 강력한 나라 뿐이었다. 그런데 훈 족에게 쫓겨와서 로마 영내 한구석에 빌붙어 살고 있는 서고트족이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을까.
아타울프는 알라리크의 원대한 계획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마을로 돌아온 알라리크는 발티 가문의 전사자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가족을 조문했다. 서고트족은 뜻하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에 비통해했다.
출전한 젊은이 두 명중에 한 명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로마군은 이겼지만, 서고트족으로서는 지금까지 겪은 최악의 전투였다.
알라리크는 도저히 유리크의 집 앞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리크에 이어서 유리크의 형까지 죽었으니, 그들의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실지 생각만 해도 피가 차갑게 굳는 느낌이었다.
유리크의 부모를 대면하는 것은 화살이 빗발치는 프리기두스 강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알라리크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리크의 어머니는 관 앞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뿐이었다.
그가 먹먹해지는 마음에 머리를 숙이고 서 있자, 유리크의 어린 막내 동생이 그에게 와서 말없이 안겼다. 그가 이 집안의 유일하게 남은 자식이었다.
흐느끼는 그의 가느다란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알라리크는 또 다시 로마군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로마군을 무찌르고 서고트족의 국가를 세워야만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 막내도 언제 로마군의 화살받이로 끌려가서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지 않겠어.’
알라리크는 그의 어깨를 잡고 다짐했다. 절대로 더 이상은 로마를 위해서 서고트족의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리크의 아버지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라리크에게 말했다.
“고맙네. 아들의 시신을 구하려다가 같이 물에 떠내려갈 뻔 했다면서.”
알라리크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그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애초부터 서고트족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도록 말렸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늙은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힘없이 알라리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얼굴도 상처투성이였다. 로마군과의 전투, 다른 야만족과의 전투, 수많은 전투에서 사선을 넘나든 그는 자식들과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알라리크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서고트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겁니다. 남은 가족을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는 손끝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결심으로 심장이 뛰며 가슴이 파도치듯이 울렁거렸다.
장례식을 마친 그는 어떻게 하면 로마에게서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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