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이제 남은 것은 동로마군단이었다. 그들이 황제의 편에 서도록 할 새로운 인망이 있는 군사령관을 선정해야 했다.
동로마군단을 맡길 총사령관에 누구를 임명해야할지 아우렐리아누스는 고심을 거듭했다.
군 고위장교들을 임명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가이나스의 지휘와 신임을 받던 장교들이었다. 그들을 믿고 군단을 내 줄 수는 없었다. 군 장교들을 잘 모르는 그가 총사령관을 맡길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다.
스틸리코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자신을 찾아왔던 동로마 장교에게 총사령관을 맡길 적임자도 일러주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스틸리코가 지명한 사람을 총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제가 적임자를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해보시오. 누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게 좋겠소?”
아우렐리아누스의 물음에 동로마 장교가 대답했다.
“프라비타를 임명하십시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프라비타? 그는 가이나스와 같은 서고트족이잖소?”
동로마 장교는 프라비타를 총사령관에 임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프라비타는 서고트족이면서 수십 년 간 한결같이 로마에 충성을 바쳐왔습니다. 동로마군에는 야만족 병사들도 많은데 그들이 가이나스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야만족인 프라비타를 앞세우면 야만족 병사들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게 잡을 수 있습니다.”
약싹빠른 아우렐리우스는 단번에 납득했다.
“그렇겠군요. 프라비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합시다.”
프라비타는 에리울프를 살해한 이후로 오리엔트에 좌천되어서 있었다. 서고트족으로부터도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로마로부터도 잊혀진 채 이제는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라비타는 여전히 불평 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며 로마군에 복무했다.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이끌고 돌아다닐 때도, 트리비길트가 동고트족을 이끌고 돌아다닐 때도 흔들리지 않고 로마를 지켰다.
황제는 그를 불러서 동로마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지금까지 굳건히 로마를 수호한 그대의 충심을 믿소. 반역자 가이나스를 토벌하시오.”
프라비타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다짐했다.
“로마제국과 황제폐하께서 제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로마의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
프라비타는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군인으로 복무한 노련한 장수였기 때문에, 동로마 장교들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 장교들은 경험이 많고 성심껏 동로마를 지켜온 그를 가이나스를 대신할 사령관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게르만 전선과 서로마에서부터 가이나스를 따라온 오래된 충성스러운 야만족 출신 장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가이나스를 따르기 위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군단을 이탈해서 가이나스에게 달려갔다.
별장에서 느지막이 일어나서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있는 가이나스에게 수도에 있던 하인이 말을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야만족이 몰살당했습니다.”
한가롭게 식후 차를 마시던 그는 한숨을 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야만족이 몰살돼? 몇 명이나?”
거리에서 사소한 다툼이 크게 번져서 백 명 가까이 죽었나보다 짐작했다. 먼 길을 달려온 하인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7천명이 다 죽었습니다. 트리비길트도요.”
“7천명?”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 했다. 7천명이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동고트족 부대가 전멸한 것이었다. 전투도 아닌데 도심에서 이렇게 많은 숫자가 죽었다는 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학살극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를 따르던 야만족 군대가 모두 사라졌다.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그의 힘의 근원이었던 부대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뭔가?”
하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로원에서 주인님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뭐? 누가 감히?”
가이나스는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대체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겁먹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며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원로원 의원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아무도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었다.
“그게 누구야?”
가이나스의 다그침에 하인이 울상을 했다.
“만장일치였다고 합니다.”
가이나스는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로마에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와 원로원이 하나가 되어서 그를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하고 있었다. 그를 지켜주던 동고트족은 사라졌고, 동로마군단은 이제 다른 군사령관이 지휘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할 수가 있을까. 루피누스와 에우트로피우스가 몰락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그였지만,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런 거였군.”
가이나스는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비굴하게 기다시피 하며 우는 얼굴로 사정하던 원로원 의원들이 사실은 그의 등에 칼을 꽂을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칼을 들고 소리치는 야만족보다 웃는 얼굴을 한 로마인들이 더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그를 따르는 군단의 장교와 부대원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서 별장으로 달려왔다.
“황제가 군사령관을 경질했습니다.”
가이나스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군사령관은 누가 되었지?”
황제가 임명한 군사령관이 인망이 없는 형편없는 자라면, 그를 따르지 않고 가이나스를 따를 장교나 군단이 있을지도 몰랐다.
“프라비타입니다.”
“하!”
가이나스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데도 변방에서 도태되어 있던 프라비타였다. 그것도 같은 서고트족이었다. 가이나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야만족이면서도 우직하게 로마에 충성을 바친 보답을 받는 것인가.’
분명히 그런 심리전을 노리고 그를 사령관에 임명했을 것이다. 야만족으로 야만족을 제압하는 방식은 로마가 늘상 써왔던 전술이었다.
“프라비타가 추격해올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케르소네스에 있는 별장을 바친 것도 그를 케르소네스 반도에 가두가 위한 작전의 일부가 분명했다. 가늘고 긴 케르소네스 반도에서는 길목만 막으면 탈출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미 길목을 막았겠지.”
프라비타 군은 그의 예상대로 갈리폴리에서 길목을 막았다. 그러나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가이나스 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좁고 긴 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간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좁은 곳은 폭이 1km 밖에 안 되고, 이전에도 트리비길트와 싸우기 위해서 해협을 건넌 적이 있었기에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때는 로마 해군이 지원하는 배를 타고 건넜다. 이제는 그런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반역자로 선포된 그는 배에 탈 수도 배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는 땟목을 만들어서 해협을 건너려고 했다. 다행히 케르소네스에는 배를 만들 목재들이 많이 있었다.
가이나스와 그의 부대는 나무를 베어서 땟목을 만들었다. 일부 군단만 그를 따랐기에 공병과 기술자가 부족해서 대충 얼기설기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식량도 떨어졌다. 주변을 약탈해도 좁은 반도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풀뿌리를 뽑아먹으며 연명했다.
땟목을 완성한 가이나스 군은 해협을 건너갔다. 좁은 해협의 거센 물살로 땟목이 기우뚱거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이나스의 군단은 해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를 몰 줄 몰랐다.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프라비타가 이끄는 해군이 파도를 헤치며 갤리선을 이끌고 나타났다. 노가 50개 달린 커다란 갤리선과 땟목은 부딪쳐보나마나였다. 갤리선이 다가가기만 해도 땟목은 물살에 뒤집어졌다. 프라비타군은 가이나스 군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가이나스 군은 맞서서 응사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해협 건너편에는 이미 동로마군이 해안가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나스는 건너편에 상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방향을 틀어.”
가이나스는 항로를 북쪽으로 변경했다. 포위망만 벗어나면 되니 아무 땅이든 상륙만 하면 되었다. 그는 프라비타 선단의 포위망을 뚫고 트라키아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의 즉각적인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의 부하들은 해군이 아니어서 배 위에서 신호를 주고받을 줄을 몰랐다. 가이나스는 방향을 틀어서 탈출했지만, 나머지 부하들은 방향을 바꾸라는 그의 신호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바다 위해서 헤매다가 물에 빠지거나 해안에 상륙해서 포로가 되었다.
가이나스는 마르마라 해의 북쪽으로 배를 몰고 가다가 로마군이 없는 트라키아 해안에 상륙했다.
대부분의 병사를 잃은 그는 이제 싸울 병력도 없었다. 무기도 먹을 것도 없었다.
로마제국의 영토를 탈출해서 야만족의 땅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빨리 로마제국을 벗어날 길은 트라키아의 북쪽으로 가서 모에시아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를 따라줘서 고맙다. 이제는 너희들을 데려갈 수 없으니 각자 잘 살기 바란다. 일리리쿰으로 가면 아마도 알라리크가 너희들을 받아줄 것이다.”
자신의 곁을 지켜 온 부하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대부분 십년 가까이 그와 함께 한 야만족 병사들이었다. 자신의 자만심 때문에 함께 싸워 온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가자.”
가이나스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얼른 뒤돌아섰다. 끝까지 그를 따르겠다는 기병들만을 데리고 프라비타의 추격을 피해서 북쪽으로 달려갔다.
대부분의 병사들을 떠나보낸 가이나스는 로마 영지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 곳에도 그가 갈 곳은 없었다.
“어디로 갈까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가이나스에게 그의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도 일리리쿰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가이나스는 일리리쿰으로 가도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반역자가 된 그로 인해서 로마에 적응해서 잘 살고 있는 서고트족까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폭동을 일으키는 야만족에게 이전에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이러니까 로마인들이 야만족을 싫어하지. 왜 자꾸 로마에 반기를 들어서 로마에서 잘 살고 있는 야만족에게까지 피해를 주냐고. 야만족의 이미지만 나빠지잖아.’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뒤바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스키타이로 간다.”
그 곳에는 게르만족을 쫒아낸 공포의 훈족이 살고 있었다.
“훈족과 싸워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겠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훈 족을 피해서 남하했던 서고트족을 생각하면, 그가 소수의 기병만으로 훈 족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독교인인 그에게 자살은 죄악이었다.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만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프라비타는 배에서 내려서 트라키아로 간 가이나스를 추격했다, 소수의 기병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는 그를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가이나스는 도나우강을 넘어갔고, 그 곳은 야만족의 영역이었다. 로마영토와 달리 그 곳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가 어디로 도망쳤을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도나우강 건너편으로 로마군을 이끌고 들어갔다가 훈족에게 몰살당할 위험도 있었다.
결국 프라비타는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굳이 자신의 전과를 위해서 병사들을 죽음의 길로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가이나스는 영토 밖으로 쫒아냈고 가이나스군은 궤멸되었고 로마의 위협은 제거했으니 자신의 책임은 다했다고 여겼다.
‘가이나스, 어리석은 놈.’
프라비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처럼 변방의 한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지내도, 결국은 로마제국이 그의 충성심을 알아봐주고 발탁해서 사령관을 맡겼다. 하물며 최고의 자리에 있는 가이나스는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될텐데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동고트족과 야합했다.
야만족들은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고 로마제국이 주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가이나스도 그런 야만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프라비타는 가이나스가 사라진 훈족의 땅을 바라보다 씁쓸하게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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