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
밀라노로 돌아온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향후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서고트족 족장들을 소집했다. 황제를 잡는 것이 어렵게 된 현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황제를 사로잡아서 우리의 땅을 얻으려는 최초의 목표 달성은 어렵게 되었소. 이제 방법은 두 가지요. 밀라노로 오는 로마군과 싸워서 그들을 무찌르고 우리의 땅을 얻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으로 퇴각해서 최대한 버티며 협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소. 여러분들의 의견을 말씀해 보시오.”
몇몇 젊은 장교들은 로마군과 대등한 전력이니 싸우자고 나섰다.
“싸웁시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도 있고 그동안 훈련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족장들은 이전에 스틸리코와 싸워서 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후퇴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우리는 이미 황제를 위협해서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이정도의 전과라면 적을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스틸리코와 싸워서 땅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스틸리코 때문에 지난번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퇴각하고 장기전으로 가며 협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알라리크도 동의했다. 적진 한가운데인 이탈리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진 스틸리코와 정면으로 싸운다면 이긴다 해도 병력 손실이 클 것이다. 그래가지고는 전투 이후에 후속적인 전략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로마군을 이기는 명예보다는 땅을 얻는 목적을 달성하는 게 중요했다. 동로마에서 했던 것처럼 약탈하고 다니며 시간을 끌다가 협상을 통해서 땅을 얻어내는 전략을 쓰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여러분의 뜻은 잘 알겠소. 우리가 이탈리아를 공격하고 황제를 포위한 것은 다른 이민족은 해내지 못한 일이오. 나는 언젠가는 기필코 서고트족의 왕국을 세울 것이오. 그 뜻에는 변함이 없소.”
그때 아말리 가문의 싱게리크가 일어나서 비웃는 투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리리쿰을 떠나서 이룬 게 뭡니까? 몇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얻은 거라고는 고작해야 몇 개의 금화밖에 없습니다. 좋아진 게 뭐가 있습니까? 스틸리코를 이길 수도 없으면서, 스틸리코와 싸우기만 하면 지면서, 그가 라에티아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이탈리아로 서고트족을 끌고 온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알라리크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며, 족장들을 분열시키려는 싱게리크의 말에 분위기는 삽시간에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일리리쿰으로 돌아갑시다.”
알라리크는 찬물을 끼얹는 그의 비판에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이어받아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잘 말했소. 적을 단번에 꺾어버리지도 못하면서 왜 우리는 이런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가고 있는지 각자 생각해봤으면 좋겠소.”
그는 족장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며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30년 전 우리 조상들은 도나우 강을 넘어서 로마제국으로 들어왔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고 목숨을 잃은 분들도 있소. 그 이후로 우리는 로마제국 안에서 우리의 힘을 기르고, 로마군과 싸우고, 그리스의 도시들을 거쳐 일리리쿰까지 왔소. 그 곳에서 로마의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까지 왔소. 그리고 마침내 황제를 포위하고 거의 죽일 뻔 했소.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조상의 영혼이 천국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기 때문이오.”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의 삶과 서고트족의 여정을 떠올리며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서고트족은 지난 300년 동안에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불과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겪었다. 30년간 이만큼 발전했다면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상들이 쓰기 시작한 서고트족의 역사를 우리가 이어받아서 쓰고 있는 것이오. 나는 이 땅에 서고트족의 왕국을 세울 것이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황제를 잡지 못하고 퇴각해야 하는 서고트족은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라리크의 집념이 가득한 선언을 듣자, 그들의 가슴에 다시금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옳소. 우리가 30년간 이만큼 해낸 것도 대단한 거요.”
“내가 어릴 적에는 숲에서 벌거숭이로 뛰어놀았는데 이탈리아에 와서 부유한 황제를 도망치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소?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소.”
족장들은 너도나도 일어서서 알라리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알라리크는 결연하게 주먹을 앞으로 들어 올려 꽉 쥐었다.
“나는 이탈리아를 기어이 내 온 몸으로 갖고야 말 것이오. 이탈리아를 내 발밑에 정복하거나, 아니면 싸우다 죽어서 이탈리아 땅 아래에 묻히거나. 둘 중 하나요.”
알라리크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서고트족은 박수를 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알라리크 만세!”
“서고트족 만세!”
싱게리크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서고트족의 환호에 묻혀버렸다.
알라리크는 말을 하면 끝까지 책임지고 해내려는 집요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서고트족은 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 초심을 잃지 않고 목표를 머리에 새기며 마음을 추슬렀다.
알라리크는 밀라노의 포위를 풀고 서고트족 전체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의 결전을 위해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4년간 알라리크가 서고트족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서, 그들의 구성, 전투기술, 무기, 방어구 등의 요소는 로마군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딸린 아녀자를 빼고 병사들의 수만 따져도 로마군보다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하면 로마군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게다가 똑같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면, 로마군의 회복속도보다 야만족의 회복속도가 훨씬 빨랐다. 로마군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원로원을 설득해서 세금을 쥐어짜내고 반발을 무마하며 징병을 해야 하는데, 야만족은 알라리크의 말 한마디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지금은 로마군 한 명 한 명의 숫자가 매우 귀중했다. 로마인들 중에는 입대하려는 사람도 없고, 세금재원도 부족해서, 병사를 한 명 잃어버리면 언제 보충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스틸리코는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적을 무찌르기를 원했다.
“어디서 전투를 해야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겠습니까?”
가우덴티우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지도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유리하다고 할 만한 곳이 없었다. 서고트족이 가는 경로에는 그들을 가로막는 강도 매복할 협곡도 없었다. 평원과 쭉 뻗은 가도뿐이었다. 산은 많이 있었지만, 산은 로마군보다는 서고트족에게 우세한 지형이었다. 서고트족은 남쪽에 타나로강을 끼고 이동해서 물도 충분히 공급이 가능했고, 로마군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면 강에서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스틸리코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유리한 장소를 가질 수 없다면, 유리한 시간을 가져가야지.”
가우덴티우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야습을 하실 겁니까?”
야습을 해도 서고트족이 보초를 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그리고 야습으로는 타격은 주어도 적을 궤멸시키기는 어려웠다.
스틸리코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지도상의 몇 군데에 로마군을 배치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이곳에 목책을 설치하고 해자를 파서 서고트족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
무슨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가우덴티우스는 스틸리코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지도를 쳐다보았다. 항상 곁에서 지켜보면 스틸리코의 명령은 작전이 완수되고 나서야 그 의미가 이해되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스틸리코는 여전히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가우덴티우스에게 명령서를 써서 주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로마군에게 즉시 이탈리아로 오도록 소환한다.”
“예?”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로마군을 이탈리아로 소환하면 속주를 야만족의 공격에 무방비로 남겨놓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라인강 방어병력을 뺄 수는 없으니 그 방법뿐이었다.
작전을 확실하게 시행하려면 더 많은 병사가 필요했다. 속주보다는 이탈리아 방어가 우선이었다.
로마의 지도층과 부유한 귀족들이 사는 이탈리아의 야만족을 격퇴하지 못하면 제국의 기능이 마비되는 참사가 일어날 것이었다.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속주는 당장 공격해오는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격받아도 나중에 다시 군대를 파견해서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속주의 병사를 빼오는 것은 밑에 있는 벽돌을 빼서 위에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주로부터 올라오는 세금으로 제국의 군대가 유지되는데, 속주의 치안이 불안해지면 속주세가 이탈리아로 잘 전달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제국의 군대가 약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가우덴티우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렸지만,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스틸리코는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몇 년 째 세금 수입이 계속 줄어들어서 있는 병사도 해고해야 할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로마제국이 영토 전역에 대한 방위를 해낼 수 없었다. 국방과 세금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스틸리코는 소환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천천히 그들의 뒤를 쫒았다. 한 달 이상 걸려서 서고트족은 알프스 산맥에 다가갔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도착했지만, 스틸리코는 양치기 개가 멀리서 몸을 낮춰 포복하고 양을 따라가며 모는 것처럼 가까이 가지 않으며 지켜보았다.
“적을 따라잡았는데 어째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으십니까?”
가우덴티우스의 물음에 스틸리코는 신중하게 말했다.
“아직 유리한 시간이 되지 않았어. 기다려.”
알라리크는 자신들이 포위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찰병을 통해 계속해서 좋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북쪽의 알프스에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군단이 내려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수레를 버리고 달려서 알프스 산속으로 숨어 들어갈 차비를 하고 있었는데, 산 속에 로마군이 있다면 그것도 어려워지는 셈이다.
동쪽은 스틸리코의 군대를 뚫고 지나가야 하니 불가능했다.
남쪽에는 스틸리코가 배치해놓은 이탈리아 수비군이 있었다. 뚫고 나아간다 해도 이탈리아 반도에 갇히게 되는 셈이었다. 지난번에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갇혔던 것처럼 포위될 것이다.
그나마 열려있는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만, 알라리크는 그것도 스틸리코의 계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스틸리코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서쪽을 막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히스파니아 속주군을 동원하던지, 이탈리아의 군대를 배로 실어 날라서 서쪽의 항구에 내려놓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로 몰아가려고 그들에게 서쪽 길을 열어둔 것일까.
어째서 스틸리코가 뜸을 들이고 공격을 하지 않고 쫒아오고만 있는지 의문이었다.
서쪽으로 더 가면 알프스산맥과 마주쳤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싸우는 것은 지난번 플로이 전투와 마찬가지 상황이다.
알라리크는 지난번 플로이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타나로 강을 끼고 이동했다. 물만 확보가 된다면 산으로 둘러싸여있다는 것이 딱히 나쁘지 않았다.
“스틸리코로부터 협상 요청이 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틸리코가 협상을 제안할 때는 불리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승전을 확신할 때였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온 지원군의 배치가 끝났고 싸울 준비가 완료되어서, 언제든 로마군이 이길 수 있다고 믿을 때 하는 마지막 최후통첩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2차례의 패전으로 뼈저리게 겪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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