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약공개
알라리크는 서로마에 자신이 쓴 공식 제안서를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를 정벌할 테니 갈리아로 출정 명령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착실하게 국경을 방어하며 살았으니 서로마 황제와 원로원이 그를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원로원 의원중에는 이전에 그에게 농장과 영지를 약탈당했던 의원들도 있었다.
알라리크가 호노리우스의 신하로 일리리쿰 사령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했다. 그들을 위해서 국경을 지켜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신들을 위협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원한이었다.
알라리크의 서신은 분명히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것이었지만, 원로원은 그것을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으로 받아들였다. 편지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읽기보다, 돈을 주지 않으면 이탈리아로 쳐들어오겠다는 뜻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원로원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알라리크의 제안을 반대했다. 야만족이 갈리아에서 무슨 짓을 하던, 반역자 콘스탄티누스가 히스파니아와 다른 속주를 손에 넣던,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알라리크가 감히 돈을 요구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어떻게 감히 야만족이 로마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저들이 약탈해간 걸 도로 내놓으라고 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요?”
의원들은 하나같이 용병료를 달라는 그의 말에 펄쩍 뛰었다. 예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콘스탄티누스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면서 특별 세금을 걷어놓은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돈을 야만족에게, 특히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도 멀쩡히 로마제국을 활보하고 다니는 알라리크에게 주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를 정벌하도록 명을 내려달라니, 야만족 주제에 로마인의 내전에 간섭하겠다는 겁니까?”
원로원에게는 반란을 일으킨 로마인 콘스탄티누스보다, 그들을 위해 싸우겠다는 야만족 알라리크가 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스틸리코는 원로원의 정서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콘스탄티누스의 제거가 속주세를 걷어 군대를 유지해야 하는 스틸리코에게는 절실했지만, 황실과 원로원에게는 그다지 긴급한 목표가 아니었다. 황실과 원로원은 국경을 지키는 야만족 알라리크보다 그들의 속주를 갉아먹고 다니는 로마인인 콘스탄티누스를 더 신뢰했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만에 하나 콘스탄티누스가 세력이 커져서 이탈리아에 쳐들어오면, 호노리우스 대신 그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면 그만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호노리우스를 없애고 황제가 된다 한들, 슬퍼할 사람은 호노리우스 자신과 스틸리코, 셀레나 단 3명뿐이었다.
그러니 로마인의 눈에는 알라리크가 별로 제거할 필요도 없는 콘스탄티누스 핑계를 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착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로마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라니, 그 말인즉슨, 땅을 주지 않으면 약탈하고 다니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겁니다.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습니까?”
원로원은 분개해서 알라리크를 성토했다. 편지에서 말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져 헐뜯었다.
여론이 안 좋게 흘러가자, 스틸리코는 직접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원로원에 출석했다. 그가 연설을 위해서 앞으로 나가자 의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야만족의 무례한 요구를 어떻게 응징할지, 어떤 속 시원한 말로 야만족을 무찔러 줄 것인지 상상했다. 그런데 스틸리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알라리크는 로마를 지키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청구한 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공을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요구가 악의적인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옹호했다. 알라리크의 의도를 설명하며, 원로원이 과장되게 해석한 편지의 의미를 바로잡았다.
“알라리크는 대가없이 동로마로 출정을 다녀왔고, 이번에는 황제를 위해서 반역자를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를 칭하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협박해서 빼앗아간 자입니다. 아군과 적군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원로원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개 야만인이 로마제국에게 돈과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청한 것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알라리크가 안하무인이었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황제를 겁박한 적이 있는 알라리크는 충분히 로마에 그런 요구를 하고도 남을 자였다.
그러나, 제국의 일인자인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의 요청을 들어주자고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알라리크의 제안을 거부하고 앞장서 싸워줄 것으로 믿었던 스틸리코가 그의 제안을 수락하자고 말한 것이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아니, 그러면 총사령관께서는 알라리크의 무례한 요구를 들어주자는 말씀입니까? 야만족으로 하여금 로마군을 공격하도록 돈을 주라는 말입니까?”
의원들은 일제히 입을 벌리고 스틸리코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쳐다보았다. 스틸리코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알라리크에게 콘스탄티누스를 공격하도록 격려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금 4천리브라는 콘스탄티누스때문에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받지 못하고 있는 속주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틸리코는 서로마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갈리아에는 수십만 명의 야만족과 반란군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무정부상태이고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외에 갈리아의 콘스탄티누스와 야만족을 몰아낼 대안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스틸리코의 말에 원로원 의원들은 할 말을 잃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스틸리코에게는 현실이 중요했지만, 의원들에게는 명분과 자존심이 중요했다.
“갈리아가 왜 이 지경으로 무방비상태가 된 겁니까? 갈리아의 힘으로는 콘스탄티누스 반란군을 막을 수 없습니까?”
의원들은 돈을 내기 싫어서 병력모집을 반대했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병력을 철수시켰다고 비판했다. 스틸리코는 그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주어야 했다.
이전에도 스틸리코는 토지의 1/3을 야만족병사에게 주고 그들을 정착시키는 법안을 추진한 바 있었다. 그때 원로원은 조상들이 피를 흘리며 얻은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고 극렬히 반대했다. 실상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내놓기 싫어서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세금을 증세하자는 법안도 돈을 내놓기 싫어서 부결시켰다.
그들이 통과시킨 것은 갈리아에서 알아서 병력을 모집하라는 법안 뿐이었다.
“재작년에 갈리아를 보호해주지 말고 갈리아에서 알아서 병사를 모집하도록 하자고 의결했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방어선을 갈리아 남부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래서 갈리아 북부 군사거점 인근의 땅을 야만족에게 1/3씩 불하해서 지키도록 하려 했는데, 그 법안이 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리아에는 야만족을 막을 병력도 콘스탄티누스의 세력을 근절할 병력도 없습니다.”
의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스틸리코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방어력이 없는 갈리아에게 알아서 병사를 모집해서 방어하라고 내팽개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야만족에게 땅을 주고 수비를 맡기자는 법안을 부결시킨 것도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은 비난의 화살을 다시 알라리크에게 돌렸다.
“알라리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소? 그는 지난날 셀 수도 없이 로마제국을 공격했소. 돈만 떼이고 마는 게 아니오?”
다른 원로원 의원도 말했다.
“돈만 떼이면 다행이지. 돈을 주면 그 돈으로 무장을 해서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와 손을 잡고 이탈리아를 공격하는 것 아니오?”
스틸리코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라리크는 스스로를 호노리우스의 신하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에게 복종하고 황제의 명령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그자의 속을 어떻게 압니까? 저번에 동로마 속주를 통제하라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령도 제대로 실행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겉으로는 서로마의 명령을 듣는 척 하면서 뒤로는 동로마와 내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로마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면서 이익을 취해왔습니다. 과거 행적을 보아, 이번에도 돈만 받아 챙기고 콘스탄티누스의 편에 서면 어쩔 겁니까?”
알라리크가 동로마 원정을 나간 것은 스틸리코와의 비밀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의원들은 알라리크가 동로마 속주를 영유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출정해서 싸우지도 않고 생색만 내고 돌아왔다고 비난했다. 스틸리코는 자신이 모든 작전명령을 내렸고 그의 뜻대로 알라리크가 전진하고 멈추었기에 신뢰했지만, 의원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퇴각한 것도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령을 따른 겁니다. 호노리우스 황제와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형제인데, 싸우는 것을 보다 못한 그들의 누이인 셀레나가 가족의 정을 앞세워서 화친을 주선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서 황제께서 내린 조치였습니다. 후퇴한 것은 그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알라리크의 행동을 두둔하는 스틸리코에게 원로원 의원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라리크의 의도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의 마음을 안다고 자신하는 겁니까? 그가 반란군이나 야만족에게 붙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거듭되는 의원들의 불신에 스틸리코는 마침내 알라리크와의 비밀 협약을 공개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알라리크가 아무리 공손하게 말을 하고, 아무리 로마에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해도 원로원은 그를 경멸하고 증오했다. 원로원에게 그를 신뢰하게 만들려면 그간 음지에서 했던 노력을 모두 밝히는 방법뿐이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그는 비밀리에 서로마제국에 협력해왔습니다. 동로마제국에 협력하지 않고,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충성하기로 저와 비밀협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 몇 년간의 그의 행적은 제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스틸리코의 말에 의원들은 다들 뒷통수를 세게 맞은 듯이 할 말을 잃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알라리크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구요? 스틸리코 당신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렇습니다. 그가 협약을 준수했다는 증거로, 그는 4년간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야만족들과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습니다.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동고트 족이 쳐들어 와서 로마가 어려운 상황일 때에도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반달 족을 공격한 것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 것도, 또 거기에서 퇴각한 것도 모두 저와 협의 하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동안 그를 통제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의원들의 귀에는 스틸리코가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믿었던 스틸리코가 자신들을 속이고 로마제국을 공격해왔던 야만인과 비밀협약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지 못했다.
스틸리코는 의원들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말은 알라리크에 대한 의심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스틸리코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 비밀협약이 있었다는 것은 알라리크가 그들의 편이라는 확신을 준 것이 아니라, 스틸리코가 저들의 편일 수 있겠다는 의심을 주었다.
회의가 파하고 의원들이 자리를 뜨면서 중얼거린 말은 알라리크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스틸리코가 그럴 수가.”
그들은 충격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야만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스틸리코가 야만족과 몇 년이나 몰래 협력했고 야만족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말하다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느낌이었다.
알라리크가 그동안 로마를 위해서 한 일을 밝히기 위해서 비밀협약을 공개했지만, 의원들은 그 내용보다는 스틸리코가 자신들을 속여왔다는 사실에만 매몰되었다.
삼삼오오 흩어져서 의원들의 집에 저녁 만찬을 먹으러 모인 그들은 한숨을 쉬며 성토했다.
“어떻게 스틸리코 사령관이 이렇게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로마를 공격한 야만족과 내통할 수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스틸리코도 반달족 아닙니까. 그러니 저들의 입장에 서는 거겠죠.”
야만족에 대한 혐오는 늘 있어왔지만, 그들이 따르던 일인자 스틸리코가 야만족의 핏줄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그들의 머리에 떠올랐다.
람파디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틸리코에 대한 자신의 추측을 퍼뜨렸다.
“그러게 제가 뭐했습니까. 스틸리코가 딴마음을 먹고 있다고 예전부터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야만족와 손잡고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갈리아를 서고트족에게 넘겨주고 그들로 하여금 에우케리우스를 갈리아와 일리리쿰의 황제로 추대하게 할 테니 두고 보십시오.”
전에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알라리크와 비밀협약을 맺었다고 실토했다. 스틸리코가 야만족과 손을 잡고 로마제국을 분열시켜서 황제 지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밝혀진 셈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람파디우스 말대로 그가 야만족와 내통한 것이 사실이었소.”
원로원 의원들은 침통한 얼굴로 그들앞에 차려진 진귀한 만찬의 음식이 식어가도록 손을 대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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