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로마 포위
혼란스러운 로마의 상황은 다행히도 원로원의 지지를 받는 요비우스가 협상권을 갖는 것으로 정리되는 듯 했다. 알라리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그와 협상을 재개했다.
요비우스는 알라리크가 일리리쿰 사령관일 때부터 긴 시간 알고 지냈다. 알라리크가 볼모로 데리고 있던 이아손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알라리크가 일리리쿰 군사령관으로 일대를 공정하게 다스렸던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서고트족 가운데서도 불편 없이 잘 지냈기에 서고트족이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믿었다.
알라리크도 서고트족이 관계된 재판에서 요비우스가 야만족에게도 공평하게 판결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인 중에서 드물게 마음을 터놓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서 공감대를 넓히고 의견 차이를 좁혔다. 신뢰를 바탕으로 조약의 세부안을 만들어갔다.
알라리크는 4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직위, 땅, 돈, 요새였다.
서로마 총사령관 직위를 요구한 것은 그의 위치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땅은 서고트족과 야만족이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곳으로 달마티아, 노리쿰, 베네치아 속주를 달라고 했다. 동서로마의 경계이면서 북쪽과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땅이었다. 달마티아는 곡창지대이며 그가 지내던 일리리쿰의 일부였다. 노리쿰은 북쪽으로 야만족의 고향인 게르마니아와 연결되었고, 베네치아는 남쪽으로 지중해와 연결되었다.
국경 방비를 위해 매년 곡물과 현금을 보조해달라고 했다.
도나우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의 성채와 요새도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했다.
로마의 체제 안에서 땅을 확보하고 독립적인 속주로서 존재하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다 들어주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총사령관 직위야 언제든 해임하면 그만이었다. 돈도 안주면 그만이었다. 땅과 요새만이 점령하고 지키는 자가 임자였다.
요비우스도 이정도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달마티아와 노리쿰, 베네치아를 합쳐도 예전에 알라리크가 관할하던 일리리쿰보다 축소된 면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의 피를 전혀 흘리지 않고 20만명의 야만족을 물러나게 만들면서, 덤으로 국경을 방비할 야만족 부대까지 얻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로마에 칼을 들이대지만 않는다면 국경지방의 성채와 요새를 관리하는 것도 로마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제공할 곡물과 현금의 양도 매년 협상으로 정하면 되었다.
알라리크는 협상안을 정리하며 옮겨 적는 요비우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스틸리코가 황제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소?”
요비우스는 스틸리코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서고트족의 볼모로 보내달라고 하는 스틸리코의 요청에 선뜻 응해준 것이었다.
스틸리코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로마인들이 1년 째 잠을 설치며 두려움에 떠는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직접 협상을 해보니 그동안 스틸리코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맡아서 해왔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는 쓰던 펜을 멈추고 씁쓸하게 말했다.
“스틸리코는 충분히 자질이 있는 사람이지만, 유능한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과거의 로마입니다. 이제 황제는 신의 뜻에 따라 핏줄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황제의 세습이 강화되면서 수준이 미달된 자가 황제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호노리우스 황제를 보면 차라리 황제가 없는 고대 로마의 체제가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요비우스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로마에는 집정관도 있고 원로원도 있고 총독도 있고 장군도 있고 제국을 위해서 일할 훌륭한 시민들이 많습니다.”
알라리크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 뛰어난 사람들이 다 어디 숨은 거요? 내 눈에는 보이지 않고 간신만 보이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요비우스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펜을 놓고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쌌다.
“스틸리코가 살아있을 때 더 많이 도와줄 걸 하는 후회는 됩니다.”
원로원에서 그에 대한 거짓 소문이 퍼지고 비난이 난무할 때, 나서서 적극적으로 편들어주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양심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가십거리로 헛소문을 옮기고 비난에 동조했던 의원들도 뒤늦게 후회했다.
알라리크는 한숨을 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스틸리코가 떠난 후에 혼란은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디서부터 그 혼란을 정리해야할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긴 전쟁을 끝내고 싶은데 끝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황제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잖소? 예를 들어 원로원의 지지를 받는 당신이 황제가 된다면 어떨 것 같소?”
요비우스가 호노리우스 대신 황제가 될 뜻이 있다면 자신이 무력으로 밀어줄 생각도 있었다. 지금처럼 야만족을 혐오하고 절대 상종할 수 없다는 황제보다는, 합리적이고 야만족을 차별하지 않는 황제가 즉위한다면 서고트족에게도 좋고 알라리크도 훨씬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요비우스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중책을 감당할 인물이 못됩니다.”
요비우스는 황궁에 알라리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비공식 편지로도 승인을 요청했다.
“합의안을 승인해주면 서고트족은 이탈리아에서 물러가겠다고 합니다. 알라리크는 로마의 체계를 부정하거나 독립국가를 세울 생각이 없으며, 로마의 아미쿠스로 남아있겠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서고트족이 지금 점유한 토스카나에 머물며 국가를 세우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다. 로마제국의 중심부 이탈리아 본토에 다른 나라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로마제국의 권위는 흔들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로마제국과 서고트족이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알라리크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는 로마를 정복하기보다는 인정하고 국경지방으로 물러가서 로마와 한 걸음 떨어져 공존하는 길을 선택했다.
요비우스는 알라리크와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협상 반대파인 올림피우스의 부하 장군 2명과 환관2명을 처리했기 때문에 황제가 협상을 승인할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올림피우스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새 다른 환관이 차지하고 들어와서 겁 많고 정신이 허약한 황제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환관들은 요비우스가 협상을 주도하며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자 그를 견제하려 했다. 요비우스가 협상을 타결하도록 맡겨놓으면 안 된다고 황제에게 간언했다.
“웬만하면 이쯤해서 합의하고 빨리 이탈리아에서 내보내지?”
황제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서고트족을 멀리 쫒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환관들은 요비우스가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고 힘이 세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모함으로 요비우스를 끌어내렸다.
“야만족에게 굴복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협상을 너무 쉽게 승인해주면 요비우스가 적의 편에서 협상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요비우스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황제폐하를 무시하지 않게 폐하의 권위를 보이셔야 합니다.”
“요비우스는 알라리크와 오래전에 일리리쿰에서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서고트족에게 넘어가서 저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
환관들의 모략에 황제의 의심병이 다시 시작되었다. 요비우스가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군대와 영토를 빼앗아서 알라리크에게 주려는 것인지 의심했다.
환관들은 황제에게 협상을 거부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종용했다. 황제는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요비우스에게 강경한 태도로 나가도록 지시하는 편지를 썼다.
[서고트족은 천박한 야만족이며 로마의 주적이다.
그런 저들에게 로마의 명예를 팔아넘기는 짓은 절대로 용납 못한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군대와 영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협상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저 사악한 알라리크 놈과 그의 일족에게는 아무런 직위도 주지 마라.]
땅은 줄 수 없고, 알라리크를 공직에서 배제시키라는, 실질적으로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편지를 받아든 환관은 자신의 심복인 전령에게 편지를 주었다.
“협상중인 요비우스에게 가서, 알라리크에게 편지를 전달해라.”
“예?”
전령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요비우스에게 가서 알라리크에게 전달하라니, 말을 잘못 한 것이려니 싶었다. 환관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요비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알라리크와 협상중일 때 들어가서 알라리크에게 전달하란 말이다. 실수인 척 하고.”
전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요비우스는 당연히 황제가 승인해줄 거라 믿고, 알라리크와 세부 실행방안을 작성 중이었다. 그들은 책상에 마주앉아서 자료를 하나하나 검토하며, 서고트족이 관리할 요새와 그에 따른 보상으로 적절한 금액 등을 도출했다.
“잠깐 쉬었다 할까요.”
며칠 째 밤늦게까지 계속된 회의에 지친 요비우스는 잠시 휴식을 취하러 자리를 떴다. 황제의 전령은 요비우스가 나가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없이 황제의 편지를 알라리크에게 전달하고 사라졌다.
알라리크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즉시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은 그는 호노리우스가 절대로 서고트족을 아미쿠스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황제에게 그와 서고트족은 일순위로 제거해야 하는 주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은 의미 없었다.
아타울프도 편지를 읽어보고 혀를 찼다.
“이 자식들, 이거 못 쓰겠구먼.”
자리로 돌아온 요비우스는 분위기가 싸해졌음을 느꼈다. 황제의 편지를 읽어본 그는 화난 알라리크보다 더 얼굴이 빨개졌다. 실수로 전달된 거라면 망신스러운 일이었고, 일부러 전달된 거라면 처참한 일이었다. 아직도 황제와 환관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황궁에는 황제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황제께 가서 협상안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요비우스는 진땀을 흘리며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을 달래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알라리크는 요비우스의 진심은 믿었지만, 황제는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밤새 협상안을 만들어도 황제가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황제의 조련에 그가 놀아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말로 할 때가 아닌 것 같소. 나중에 얘기합시다.”
알라리크는 요비우스에게 말하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이런 엉망진창인 로마황실을 그동안 스틸리코가 어떻게 참고 설득해왔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를 따르는 20만 명의 야만족이 로마 영토를 함부로 약탈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처벌하며 질서를 잡는 것도 쉬는 일이 아니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흔들면서 참고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았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를 약 올리는 것처럼 협상을 할 것 같이 굴다가 막판에 취소해버렸다. 이제는 입이 아니라 칼로 대화를 해야 할 때였다.
요비우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새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협상안이 얼마나 로마에 이득이 되는 것인지 설명하러 온 요비우스에게 협상을 승인해주기는커녕, 알라리크와 내통한 게 아닌지 의심하며 그를 심문했다.
“저딴 놈들과 협상은 무슨 협상! 요비우스, 그대도 야만족편으로 넘어간 게 아니오? 저들 편을 들고 있잖소!”
“협상이란 게 원래 서로 양보하는 부분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입니다.”
“양보?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소. 저들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말하시오. 앞으로 절대로 저들과 화친하자는 말을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이오.”
“예?”
요비우스는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배짱을 부리는지 한숨을 쉬었다.
황제는 그에게 자신이 머리에 손을 얹고 맹세하라고 눈을 부릅뜨고 강요했다.
“서고트족과 싸우고 알라리크를 죽이겠다고 내게 맹세하란 말이오! 당장!”
요비우스는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노련한 협상가인 그는 굽혀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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