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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아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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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그린
작품등록일 :
2019.02.01 11:41
최근연재일 :
2019.04.14 12:14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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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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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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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한강대교(1)

DUMMY

“뒤쪽으로 좀 돌려 줄래요?”


강의실 맨 앞줄. 모자를 눌러쓴 백강우의 눈 앞에 몇 장의 종이가 불쑥 놓인다. 그는 두 장을 따로 뺀 후, 팔만 쭉 뻗어 나머지를 뒷자리로 전달했다.


“강의계획서가 조금 바뀌었어요. 원래는 제 수업이 아닌데,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맡게 됐거든요. 그렇다고 정정하는 학생들은 없겠죠?”


교수가 미소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서야 강의계획서를 유심히 보기 시작하는 학생들. 몇몇이 조금 웅성거리긴 했지만 대다수는 별 반응이 없었다.


수업 내용이나 교재는 똑같았고, 평가 방법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니까. 사실 기존의 강의계획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도 몇 없었다.


그러나 백강우만은 진심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힘껏 인상을 구겼다.


'아... 발표...'


기존에 없던 ‘발표’ 항목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도 조별 발표.


발표가 있는 수업은 백강우의 수강신청 기피 1순위였다. 필수 과목도 강의계획서를 비교한 후 되도록 발표가 없는 교수님의 강의를 택한 후 그에 맞춰 나머지 수업들을 조정했다.


전부 피할 순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남들 앞에 서야하는 순간을 피해 왔다.


[강의계획서 바뀜. 발표 있음.]


백강우가 교수의 눈을 피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유일한 번호였다.


[헐 뭐임. 기다리려ㅣ 다 옴]


다급함이 묻어나는 답장. 강우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지하철에서 내리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어느새 학생들은 끼리끼리 조를 정하고 있었다. 한 조에 6~7명 정도. 교수는 자유롭게 조를 짠 후 칠판에 나와 조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몇몇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이름을 적고 자리로 돌아갔다.


대개는 대표로 나온 한 사람이 몇 명의 이름을 한꺼번에 적었다. 혼자 수업을 듣게 된 학생들은 머릿수가 모자란 조에 다가가 함께해도 되냐 묻기도 했고, 남은 사람들끼리 조를 만들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아, 어쩌지.'


백강우는 최대한 고개를 들지 않고 강의실 뒷문을 쳐다보았다.


“아직 조 못 정한 사람?”


교수가 물었다. 백강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손을 든 사람은 총 세명. 한 조를 이루기에는 적은 숫자였다.


“마음에 드는 조 아무데나 이름 쓰세요.”


세 사람이 칠판으로 다가갔다. 혼자라도 기죽지 않는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망설이 없이 자기 이름을 쓰고 돌아가는 남학생, 조금은 머뭇대다가 정말로 마음에 드는 이름들 옆에 제 이름을 적고 돌아서는 여학생.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앞은 보일까 싶을 정도로 푹 눌러 쓴 캡모자, 삐져나온 옆머리와 잔뜩 움츠린 어깨. 절대로 정면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듯 뚝 떨군 시선. 그래서 더 눈이 가는, 백강우였다.


자신이 있는 자리와 제일 가깝고 또 낮은 곳에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조를 선택해 아무렇게나 두 사람의 이름을 적고 돌아서는 강우. 그 순간,


“흐읍.”


누군가의 짤막한 숨소리와 함께 잠시 강의실이 적막에 휩싸였다. 진심으로 놀라서 내뱉은 딸꾹질 비슷한 비명.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여기기에 급하게 삼켜버린 그 짧은 비명이 백강우의 심장에 화살처럼 꽂혔다.


이름을 적고 돌아서는 순간 모자로 채 가리지 못한 얼굴을 본 것이다. 얼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흉물스러운 흉터를.


십 수년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이 순간이 싫었다.


무엇보다 이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세상 모두가 주목하는 외톨이가 된 기분. 나 자신조차도 내 편이 아닌, 진짜 외톨이.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이런 시선을 견디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침착하자.'


그는 경악에 가까운 시선들을 애써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았다.


묘한 술렁거림을 눈치챈 교수가 뒤늦게 백강우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짧게 얼굴을 스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오리엔테이션을 마무리했다.


이후 같은 조가 된 이들과 연락처를 주고받느라 대다수는 백강우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같은 조가 된 이들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명의 남학생과 세 명의 여학생. 그에게 아무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백강우 역시 먼저 그들에게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네가 말 걸어봐.”


백강우의 흉터를 본 순간 본인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던 여학생이었다.


“싫어. 무섭단 말이야.”


그리고 그녀의 친구. 거부감 섞인 속삭임이 백강우의 뒤통수를 건드렸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오느라 신경을 쓴 까닭인지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뭐야, 수업 끝났어?”


그때 누군가 강우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아무렇지 척 일어서려다가 안도의 미소를 띠는 백강우.


목소리만 들어도 안심이 되는 그의 유일한 친구, 강이지였다.


그녀는 지퍼가 제대로 닫히지 않은 숄더백을 책상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뛰었는지 잠시 숨을 고르는 그녀.


“넌 이제 오냐.”


백강우가 낮지만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괜히 뛰었네. 어쩔 거야? 정정하자면 하고.”


“듣고 싶었던 수업이긴 한데.”


“그럼 들을까? 나 있는데 어때.”


강이지가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그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6조 어디 계세요? 제가 좀 늦게 와서요.”


칠판에 적힌 자신 이름을 발견한 이지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닌데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야. 쫌.”


백강우가 이지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이내 그들에게서 몇 발짝쯤 물러나 있던 이들이 다가왔다. 무서워 말도 걸지 못하겠다던 그녀들도 함께였다. 예쁘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여자애가 얼굴을 화상으로 반쯤 가린 남자애와 스스럼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가 난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러워졌을 지도.



***


“늦으면 안 되는데.”


마지막 수업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이지는 헐레벌떡 그의 손을 이끌고 버스에 탑승했다.


"야, 어디 가는데 그래."


강우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연신 시간을 확인하는 그녀.


그들이 탄 버스가 막 한강대교에 진입했다. 이지는 고개를 숙여 앞 유리창 너머로 도로 상황을 살폈다. 서울 도심을 달리는 버스가 늘 그렇듯 시원하게 달릴 수 없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답답해하는 그녀가 강우는 의아했다.


“엄매야아.”


그들의 앞 자리에 앉으려고 다가오던 중년 남자가 묘한 탄식을 내뱉었다. 남자의 시선이 강우의 흉터에 박혀 있었다. 가까이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남자를 돌아 봤고, 강우는 모자챙을 두 손으로 푹 눌렀다.


흐아아아아암.


남자를 똑바로 쳐다 보며 일부러 과장되게 하품을 하는 이지. 저기요, 실례거든요?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끝까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이지는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그녀는 방학 내내 단기알바를 하루에 두 건씩 뛰었다. 낮에는 구청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했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포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제 하루 종일 잤다곤 하지만 그간 쌓인 피곤이 쉬이 가시지는 않았을 터.


"피곤한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강우가 살짝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지를 쳐다보았다.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다르게 돈 문제에 있어서만은 철저하다 못해 짠순이 기질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포장 알바까지 하는 건 의외였다.


한밤중에 서울 외곽에 모여 어딘가로 이동한 후 밤을 새워 일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구청 도서관으로 출근.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생활을 그녀는 두 달간 반복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나름 잘 사는 집 딸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할 정도로 집안이 기울어지기라도 한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야, 강이지! 너 진짜 말 안해줄 거야? 나도 좀 알고 가자.”


강우가 마침내 좀 전보단 큰 소리로 외쳤다. 오직 강이지 한 명만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였다. 이지가 씩 웃었다.


“돈 쓰러 간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그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백강우. 우리 친구지?”


“오글거리게 왜 그래.”


“너 나한테 돈 좀 빌려라.”


“너 필요한 돈이 대체 얼마길.. 어?”


‘빌려줘’가 아니라 빌리라고?


“흉터. 치료는 받아볼 수 있는 거잖아.”


얘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백강우는 황당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없앨 순 없더라도, 가서 상담받아보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


강우는 이지가 이상한 죄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 동네 놀이터에서 인사 몇 번 했다는 이유로 중학생이 되어 강우와 다시 만났을 때 활짝 웃으며 인사를 아는 척을 했었다. 자신에게 흉측한 흉터가 생겼음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던 유일한 친구. 충분히 고마웠다.


그런데 이지는 강우가 왕따를 당할 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내 미안해했다.


그래도 이런 행동까지 할 줄이야.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철없는 부잣집 딸 같아.”


“야, 어느 부잣집 딸이 야간 알바 해서 모은 돈을 주냐? 부모님한테 달라 했겠지.”


피식, 웃음이 나는 강우. 그러자 살짝 긴장했던 이지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버스는 한강대교 끝을 향해 느리게 달려가고 있었다.


강우는 눈으로 하차벨을 찾았다. 일단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예약해 놓은 병원에 갈 마음이 없었고, 돈을 받을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벨을 향해 팔을 뻗으려던 찰나. 버스의 승객들이 일순 비명을 내질렀다. 버스가 왼쪽으로 기운 것이다.


몸의 중심을 잃은 승객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당황한 기사는 버스를 멈추지 못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이지가 강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강대교를 채 벗어나지 못한 버스. 그 순간 버스가 기울어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그러나 아주 짧은 찰나의 굉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둔탁한 부딪힘, 사방으로 튕기는 핏방울, 허공으로 붕 뜨는 이지의 몸, 그리고 답답하리만큼 새하얀 빛. 강우는 정신을 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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