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생 기억과의 조우
인명 지명 등은 모두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실제 현실과 다르오니 참고바랍니다.
신성제국력 1583년 4월 21일
제국정보부 정보부장실.
미센후작은 조사보고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얀트남작이 최선을 다해 조사한 종합보고서이다.
내용 중에서 흡족한 사항이 있어선지 굳어졌던 표정이 풀리며 한층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세자가 완전히 의식을 차렸다고?”
“그렇습니다. 어제 의식을 차렸고, 이제는 몸의 회복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정말 다행스런 일이군. 헌데 여기 보니까 가해 진 독이 헬라핀?”
“예. 시중에서 구하기 힘들지만 귀족가의 여성들이 자살용으로 소장하는 헬라핀이랍니다.”
“허, 하지만 이거 극독이 아닌가. 정말이지 왕세자께서 운이 좋으셨군.”
“사실 아우노스신관께서도 주신의 축복이 없었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에 고개를 끄덕인 미센후작은 또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려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나머지 내용을 다 읽은 미센후작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슈란공녀는 뭐라 하던가?”
“공녀께서도 순순히 자기가 지시내린 일이라고 하면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럼 독수를 가한 이유는?”
“예상했지만 공녀께서는 자신이 적국의 왕세자비가 되었다가 폐하의 한 마디 결정으로 왕세자가 제거되어버리면 자기 자신은 어떤 신세가 될 것 같으냐며 오히려 반문하더군요.”
그러자 미센후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허면 다얀공작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예. 다얀공작께서는 손수 잘 타이르겠으니 숙부님이 폐하께 잘 말씀드려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허, 그 양반도 참. 제대로 알려줬으면 이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만 곤란하게 됐어.”
이에 얀트남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숙부님! 저번에도 궁금했지만 왜 폐하께서 왕세자의 배필로 공녀님을 정했는지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미센후작은 잠시 주저하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실 왕세자의 볼모기간이 1년 후이면 끝나버려. 더구나 왕세자의 능력은 보통이 아니지. 해서 고이 돌려보내는 것과 제거해버리는 것에 대해 폐하께서는 수없이 고심하셨지.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왕세자를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네. 그러고는 후보자를 물색했지.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황녀는 오직 세보라황녀님 혼자이고 게다가 아직 16살이네. 그러다가 제2황후 까뜨린느님의 조카인 슈란공녀가 선택된 것이지.”
“아, 그러고 보면 다얀공작께서 공녀께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지 않은 것 같군요.”
“맞아!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다얀공작이 원망스럽네. 사실 그분이 폐하의 의중을 잘 얘기했으면 이 사단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야.”
* * *
신성제국력 1583년 4월 22일
의식을 회복한 후로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알카디안은 아우노스로부터 아타나스교에 대한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아타나스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늘아침에는 경건한 분위기속에서 입교식을 가졌다.
이어 점심을 먹고는 보리스백작과 함께 산보에 나섰다.
햇빛은 따사로웠고 공기는 상쾌했다. 기분마저 너무 좋았다. 그러다보니 어느 덧 뒤쪽 숲을 다섯 바퀴나 돌았다.
조금 무리를 했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부축하려는 보리스백작의 손길을 거부하고는 쉬려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울까 생각하다가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로 가서 앉았다. 여전히 따뜻한 햇볕이 좋아서이다.
그런데 순간 절로 멍하게 두 눈동자가 풀렸다. 동시에 시야도 흐릿해졌다. 더불어 무언가 이질적이고 생소한 광경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알카다안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의아해했다.
“이게 뭐지?”
시야는 온전히 잡혀왔지만 여전히 뇌리에 떠오르는 광경은 점차 선명해지기까지 했다.
혹시나 하며 떨쳐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광경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즉시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보았다.
그제야 선명해지던 광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허벅지에서 생생한 아픔만을 느꼈다.
“이게 뭐야?”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현실을 강하게 의식하면 떠오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의식하지 않으면 저절로 떠올랐다.
“이거 확인해 봐?”
결심한 알카디안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뇌리로 침범해오는 이질적인 광경들을 떠올려보았다.
잠깐사이에 뇌리에서 떠오르는 것은 서너 광경이 아니라 무수한 광경들이었다.
그것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어 본 것처럼 생생했다.
알카디안은 떠올리는 것을 중단하고 두 눈을 뜨고는 천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해서.......?”
놀랍게도 이 이질적이고 생소한 광경들은 전생 삶의 기억편린들이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심장이 두근거리며 당황되었다.
알카디안은 몸을 일으켜 탁자로 다가갔다.
컵에 물을 따르고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자 독에 의한 상처는 아물어있었지만 급히 마신 물은 속을 시원하게 하면서도 은은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덕분에 당황과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러기에 컵을 내려놓은 알카디안의 두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 하여 다시 안락의자로 돌아와 앉고는 전생 삶의 기억편린들을 더듬어 올라갔다.
전생에서 이름은 문도생. 남송의 충신 문천상의 장자였다. 먼저 태어나 자라온 과정이 남송의 국운과 맞물리면서 펼쳐졌다.
이어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웠던 일, 전염병으로 죽을 위기에서 무당장문인의 도움으로 벗어난 일, 문천상의 명령으로 무당파에 들어가 도사가 된 일, 매일매일 경전을 읽었고 피와 땀을 흘리며 무공을 닦던 일, 그러다 장문인의 딸인 곽수란과의 혼인생활, 드디어 오른 화경의 경지, 소식을 듣고 몽골포로가 된 문천상을 구출하려다 강적들과 싸우던 일, 마지막으로 끝내 목숨을 잃은 과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현실로 되돌아온 알카디안은 안락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보냈다.
뒤뜰 숲 전체가 푸르른 녹음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모든 만물들이 생동감 넘쳐 보였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괴상한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꿈속에서 겪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제 있었던 사실일까? 더욱이 이 가슴속으로 전달되는 문천상이라는 사람과의 부자의 정은? 사랑하는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알카디안의 두 눈이 아련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또다시 전생의 기억들은 강물처럼 흘렀다. 더구나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들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이것들은 무엇인가? 어린 내가 부왕으로부터 검을 하사받고 왕국의 미래를 결심하던 각오는? 내게 눈물을 보이며 당부하는 모후의 모습은?’
확실히 겪었다고 믿는 기억이 불쑥 내밀자 알카디안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상념이 계속되었다.
‘정말로 이 기억들이 전생에서 겪었던 것일까? 아니 전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왜 내게 일어났지? 더구나 전생에서 익혔던 괴상한 무공은 뭐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알카디안의 공허한 시선이 그저 바람에 따라 흘러 다니는 구름으로 향했다.
멈추려 해도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구름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지가 있으면 그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뒷짐을 진 그의 손이 단단히 쥐어졌고 각오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후우, 어쨌거나 주신의 은혜로 살아났다. 해서 우선 이 괴상한 무공을 시험해 보자. 만일 이 괴상한 무공이 실현되면 나의 전생은 사실일 것이고, 이 기억들은 내가 꿈꾸던 것들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곧 추억의 빛처럼 명멸해가던 알카디안의 파란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의 빛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추천은 작가를 기쁘게 합니다^^
- 작가의말
감상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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