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행성의 지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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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02.1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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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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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02

DUMMY

그들이 타고 온 빛줄기를 따라 노블로 처음 왔을 때도, 그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여러분의 가치를 증명해주세요."


가치를 증명하라니.

그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를 보며 그들은 우리의 가치 정도에 따라 노블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의 크기가 달라질 거라 말했다.


"부디 이해해주세요. 노블도 모든 지구인을 똑같이 지원해주기에는 한계가 있답니다."


미안한 듯 웃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오히려 감탄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운석 충돌로 인해 지구와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근데 평등하지 않다고는 하나 타행성에서 생활할 수 있는 지원도 해주겠다고 하니 그들이 정말 천사로 보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너도나도 가치 증명이라는 걸 받았다.


가치 증명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었다. 멸망하는 고향으로부터 급하게 도망쳐온 지구인에게 남은 거라곤 몸뿐이었기에, 자신이 가진 전문적 지식이나 신체적인 장점, 특기를 어필하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아이나 건강하지 못한 노인은 자연스레 낮은 점수를 받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남이 우리 가치를 매긴다니 썩 좋은 기분은 안 드네."


가족 중 마지막으로 가치 증명을 받으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던 학벌 좋은 누나는 가치 증명에서 높은 세 자리 수의 점수를 받았다. 나도 검도 하나로 대학까지 합격했을 정도로 체력 하나는 좋았기에 누나보다는 낮았지만 그래도 세 자리 수의 점수를 받았다.


"우리도 가축한테 등급을 매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도 똑같은 거지 뭐."


나는 누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못내 아쉬워 괜히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하현. 너 괜히 누나보다 점수 낮게 나와서 그러는 거지?"

"아니거든?"


역시 우리 누나다. 눈치 한번 엄청 빠르다. 유치한 건 여전하다는 둥, 아직 애라는 둥 놀러대는 누나를 대충 밀쳐내고 있으니,


"허허. 상현아 그만해라. 그러다 하현이 울라."

"저 이제 그런 걸로 안 울어요!"


가치 증명이 끝났는지 아버지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물론 아버지의 말에도 누나의 놀림은 끝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다시금 웃는 아버지의 손에는 한 자리의 수가 적힌 종이가 들려있었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애써 떠오르는 기억을 지우며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커다란 덩치의 괴수를 바라봤다. 들어온 입구와는 다른 벽 너머에서 나타난 녀석이었다. 괴수의 모습은 매우 기괴했다. 얼굴의 한쪽은 뒤틀려있었고, 그 때문인지 날카로운 이빨 몇 개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있었다. 팔과 다리의 위치도 어딘가 이상했다.


[다른 아이들의 설명이 끝나서 폐기할 생각이었는데, 그대를 위해 급하게 다시 붙여봤답니다. 그래도 나름 괜찮지 않나요?]


목소리의 주인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노블들의 악질적인 취미 중 하나인 생체실험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생체실험의 재료로 지적 생명체를 주로 사용했다. 괴로워하는 다른 행성의 지적 생명체를 보며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느꼈고, 그에 흥분했다.


"그르르르···"


괴수는 나를 바라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짐승의 소리를 내는 이 녀석도 본래는 우리와 같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걸 생각해본들 무슨 소용인가. 저들과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살기 위해 동료였을지도 모를 저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았는지 괴수가 거대한 팔을 휘둘러왔다. 나는 괴수의 팔의 반대편으로 몸을 굴리며 무기로 쓸만한 걸 찾기 위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지구인은 노블처럼 마법을 쓸 수 없었기에 마치 중세 시대처럼 칼과 활을 들고 그들과 싸웠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라면 작은 막대기 하나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방 안에 있는 건 살점과 피뿐이었다.


곤란한데.


다행히 달라진 몸을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으나 정작 무기가 없었다. 얼마 동안 괴수의 공격을 피하고만 있었을까, 이 몸의 체력은 그리 좋지는 못한지 내 몸에는 생채기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상당히 지루했던 모양인지 목소리의 주인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답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뻗어오는 괴수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13번째 아이여. 어째서 피하기만 하는 거죠? 그대의 몸이 재빠른 건 충분히 알았으니 어서 그대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말이야 쉽지. 내가 너희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기 없이 어떻게 죽이라는 걸까.


잠깐.

마법이라고?


그러고 보니 밖의 아이들도 무기라고 할만한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 이런 거대한 괴수를 저 아이들이 어떻게 죽였을까.


노블의 아이···!


목소리의 주인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노블은 마법을 쓸 수 있다. 번식능력이 없는 노블이었지만 우리가 정말 그들의 아이라면 마법을 쓸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이런 괴수를 어떻게 죽였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최대한 괴수와의 거리를 벌렸다. 노블에게 있어 마나를 느끼는 건 마치 숨쉬는 것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당장이라도 괴수가 달려들 것 같았지만 나는 마나의 흐름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노블의 아이라는 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금방 내 몸 속을 흐르는 마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괴수가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마나를 끌어내 괴수를 향해 펼쳤다. 내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돌진해오는 괴수를 집어삼켰다.


[그건···!]


환한 빛 너머로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내 마법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마나를 정통으로 받았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의 부상은 입었을 것이다. 환했던 빛이 누그러들며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그르륵···?"


부상을 입었어야 할 괴수는 이상하게도 멀쩡했다. 대신 눈이 부신지 나를 보며 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근데 정말 눈이 부셨다.


다시 한번 당황스러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13번째 아이여···. 참으로 멋진··· 발광 마법이군요···.]


붉은 방 중앙에서 내 몸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려 형광 노란색이었다.










노테와 아르바는 방금 전 이 방을 찾아왔던 남자아이가 들어간 방을 바라봤다. 그들은 저 안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오빠···"


아르바는 불안한 듯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노테를 불렀다. 노테는 그런 아르바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들은 저 안에서 이미 많은 가족을 잃었다. 그 많던 형제들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도 그렇게 될지 몰랐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따라 들어가지 그랬냐?"


목소리에 돌아보니 우리와 함께 살아나온 은발의 여자아이가 어느새 붉은 방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무심한 듯 말했다.


"어차피 안 보낼 것도 아니었잖아."


그랬다.

그렇다고 그를 저 방으로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설명 같은 건 듣기 싫다며 결국 붉은 방에 들어가지 않았던 몇몇 형제들은, 정작 그들이 살아돌아왔을 땐 이미 이 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터였다.


"벌써부터 괜히 정 주지 마. 저기서 못 나오면···그냥 처음부터 우리 가족이 아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발의 여자아이는 붉은 방 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노테도 그녀를 따라 다시, 이미 벽이 되어버린 방 쪽을 바라봤다. 그들을 쳐다보던 파란색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는 아르바를 걱정해 아르바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노테는 그가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길 들어간 17명의 아이들 중 살아 돌아온 건 오직 그들 3명뿐이었다.










발광이라니···!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형광 노랑으로 빛나는 내 몸을 쳐다봤다. 내가 봐도 내 몸은 눈이 부셨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괴수 쪽을 바라봤다.


그래, 너도 눈부시겠지.


괴수는 여전히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뿜어낸 빛은 정말 빛나는 것 외엔 아무런 기능도 없는 듯했다. 이 빛을 정면으로 받아낸 괴수는 눈을 찌푸리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눈이 부셔서지, 대미지를 받아서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오히려 아까보다 더 튼튼해 보였다.


[하아···. 너무 기대를 한 걸까.]


믿었던 노블의 마법이 그냥 형광등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데, 실망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쓸만한 건 겨우 3명이었으니까요.]


이런 마법을 쓴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분명 방 여기저기에 있는 살점들의 주인들이 그랬겠지. 노블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대할지는 뻔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이제 그대는 필요 없답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 그 아이와 재밌게 놀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름 친절하게 안내해준 것과는 다르게 정말 칼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블을 욕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겠는데."


내 몸의 빛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는지 괴수가 찌푸렸던 눈을 다시 크게 뜨곤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기. 적어도 무기로 쓸만한 것만 있었어도···. 괴수의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매우 날카로워서 물리는 순간 바로 세상 하직할 것 같았다.


응?

저거 괜찮지 않나?


괴수의 뒤틀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몇 개의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빨이 마치 잘 갈아진 칼처럼 보였다. 잘만 하면 무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스스로의 대단한 발광 마법에 놀라 어느새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노블의 말은 따르기 싫었지만, 조금 더 저 괴수와 놀아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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