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행성의 지구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연구실
작품등록일 :
2019.02.11 09:58
최근연재일 :
2019.02.27 21:00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2,317
추천수 :
143
글자수 :
59,686

작성
19.02.15 12:37
조회
758
추천
8
글자
12쪽

증명. 03

DUMMY

우선 이빨을 부러트려야겠지.


내 힘으론 부술 수 없으니 주변을 이용해야 했다. 이 방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튼튼했는지, 이런 괴수가 돌아다녔을 텐데도 바닥과 벽은 긁힌 자국 몇 개를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나는 공격해오는 괴수로부터 최대한 벽 가까이로 피했다. 점점 내 뒤로 벽이 가까워지자 괴수는 내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여겼는지 아까처럼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지금이다···!


나는 돌진해오는 괴수의 다리 사이로 몸을 던졌다. 공격하려는 대상이 사라졌음에도 괴수는 빠른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 콰직!


벽에 부딪히며 괴수의 이빨 몇 개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괴수는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바로 다시 나를 공격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괴수의 아래에 떨어진 날카로운 이빨을 주웠다. 생각보다 이빨은 무거웠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잠시 주춤하는 괴수의 목에, 있는 힘껏 이빨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아!"


자신의 이빨에 목이 뚫리자 괴수가 괴로워하며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아직이다!


힘이 부족했는지 이빨은 괴수의 동맥을 단번에 찢지 못했다. 조금 더 힘을 주려는 순간 괴수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으윽···!"


괴수의 날카로운 손톱이 강하게 허리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허리가 뜯어지는 고통에도 나는 더 강하게 괴수의 목으로 이빨을 박아 넣었다. 허리를 쥔 괴수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거칠게 흔들리던 몸이 서서히 멈췄다.


괴수가 쓰러졌다. 괴수가 바닥에 쓰러지는 충격에 괴수의 목에 매달려있던 나도 바닥으로 튕겨나갔다.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거의 뜯겨나간 허리가 보였다. 피가 울컥거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이미 내장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젠장.


원래의 몸이었다면 한방에 괴수의 목을 뚫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몸은 이전과는 달랐다.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없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괴수를 죽였다고는 해도 그저 빛나기만 하는 마법을 가진 나를 노블이 살려줄리 없었다. 한번 맞이해봤던 죽음은 그렇게 두렵진 않았다. 그저 나를 쳐다보던 세 아이들이 떠올랐다.


나는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바라본 손은 떨리고 있었다. 원래의 몸과는 다르게 생채기 하나 없는 멀끔한 손에 괴수의 피가 묻어있었다.


"어···?"


정말 멀끔했다. 분명 아까 괴수와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몇몇의 생채기가 생겼는데도, 이상하게 지금은 손 어디에도 생채기는 보이지 않았다. 손뿐만 아니라 팔에도 상처가 없었다.


설마.


나는 몸 안의 마나를 펼쳤다. 다시 한번 형광색의 빛이 내 몸을 감쌌다. 신기하게도 아픔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허리 쪽을 쳐다보니 뜯겨나갔던 허리의 상처가 점점 낫고 있는 게 보였다.


"아하하···."


그래서 괴수가 오히려 아까보다 튼튼해 보였던 건가.


웃기게도 난 세상에서 가장 튀는 치료사가 된 모양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들어왔던 입구 쪽 벽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나가니 나를 보곤 급하게 달려오는 아르바가 보였다.


다가온 아르바의 노란색 눈이 눈물로 젖어갔다. 아르바를 따라 내 앞으로 온 노테도 굳어진 얼굴로 내 허리 쪽을 바라봤다. 허리는 이미 다 나은 상태였지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내가 입고 있던 하얀 옷은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앗,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다친 게 맞긴 한데,"


다급히 설명을 하려는데 아르바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서러운 듯 우는 아르바를 달래면서 더 굳어진 얼굴로 내 허리 쪽에서 눈을 떼지 않는 노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미 다 나았다고?"


어느샌가 다가온 은발의 여자아이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젠 괜찮아요."


왠지 모르게 은발의 여자아이에게 존댓말로 답하며 겨우 울음을 멈춘 아르바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아르바는 여전히 젖은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많이 아팠죠?"


아르바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해요···."


노테도 미안한 듯 나를 쳐다봤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니···. 저 안이 어떤지 먼저 경험했을 텐데도 아이들은 나를 혼자 보낸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건 그냥 한 말이야. 일일이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며 은발의 여자아이는 노테의 옆구리를 한 대 치곤 이어 아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


그리곤 나를 불렀다.


"살아 돌아온 거 축하한다."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제부터 이들이 내 가족이었다. 계속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마치 이런 우리가 우습다는 듯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13번째 아이여. 엄마는 그대가 잘 해낼 거라 믿었답니다.]


웃기고 있네. 필요 없다고 단번에 끊어낼 땐 언제고 엄마라니. 부끄럽지도 않나.


[무려 치료 마법이라니. 엄마는 그대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하긴 그대로 버리긴 아까웠겠지. 노블이 쓰는 마법의 속성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었기에 후에 다른 속성의 마법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치료 마법은 다른 마법 중에서도 특히나 귀한 마법 중 하나였다.


[그대가 가치를 증명하는 동안, 그대와 어울릴만한 이름을 지어왔답니다. 이제부터 그대의 이름은 루나예요.]


분명 갑작스러운 치료 마법에 놀라 부랴부랴 지은 이름일게 뻔했다. 루나라. 노블이 지어준 이름이라 그런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애초에 나에겐 아버지가 지어준 '이하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똥 씹은 표정이 된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목소리가 이어 말했다.


[루나도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에요. 분명 많이 피곤하겠죠. 쉴 방을 준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목소리는 다시 사라졌다.


"하아···."


괜히 한숨이 나왔다. 살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저 노블의 손안에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떻게 한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은발의 여자아이가 내 등을 강하게 한 대 때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쉴 수 있을 땐 쉬어."


그렇게 말하곤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적당한 곳에 풀썩 앉았다. 그런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쳐다보니 아르바가 웃으며 내 손을 끌고 있었다.


"오빠도 같이 가서 앉아요."


그런 아르바를 따라 은발의 여자아이 옆에 앉으니, 노테도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모두가 앉자 은발의 여자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지. 내 이름은 라비타야. 너 13번째라고 했지? 난 7번째니까 누나라고 불러."


누나···.


'이하현 뭐 해!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달려!!'


누나라는 단어에 괜스레 상현 누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뭐야. 누나라고 부르기 싫어?"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라비타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뇨. 그렇게 부를게요, 누나."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앞으론 이 소녀가 내 누나였다. 나보다 어린 누나였다. 내 대답을 들은 라비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노테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테는 15번째 아이야. 순서로 보면 너랑 가장 가깝네."


라비타가 자신에 대해 대신 말하자 노테가 살짝 웃었다.


"루나 형이라고 부를게요. 편하게 말하세요."


웃으니 더 잘생겼네. 근데 웃은 거 맞지?


다시금 무표정해진 노테의 얼굴을 보며 긴가민가해하고 있는데, 아르바가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저···저는 아르바에요. 엄마가 23번째라고···."

"아르바."


라비타가 아르바의 말을 빠르게 끊었다.


"아···. 그···아주머니가, 23번째라고 하셨어요···."


아르바는 실수했다는 듯 목소리의 주인에 대한 호칭을 급히 바꿨다. 그리곤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돌려 라비타를 쳐다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게 엄마일 리 없잖아."


하긴.


정말 우리가 그들의 아이라고 해도 그런 건 엄마라고 할 수 없었다. 아르바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호칭은 쓰지 않는 게 나았다. 노테가 시무룩해진 아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외에도 라비타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이 방에 모인 아이들은 총 21명. 그러나 방에 들어간 건 노테와 라비타, 아르바를 포함한 17명이었다. 4명의 아이는 방 밖에 남았지만.


안 보이는 걸 보니 이미 폐기했겠군.


붉은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했지만, 대충 예상도 갔는데다 아이들에게 물어보기엔 괜히 안 좋은 기억만 떠올리게 할 것 같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더 있었을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목소리와 동시에 벽 하나가 열렸다.


[노테와 루나는 왼쪽, 아르바와 라비타는 오른쪽으로 가면 된답니다. 오늘은 수고했으니 이만 쉬고, 엄마와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해요.]


앞으로의 일은 내일 이야기하기로 하고, 목소리의 말대로 나는 노테와 함께 왼쪽 복도로 갔다. 뒤돌아보니 아르바가 한쪽 손을 라비타와 잡은 채로 웃으며, 반대편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방을 향하는 동안 노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것 같았다. 노테와 함께 걸으며 속으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내일 다 같이 이야기하기로 했지만 아르바와 함께 이야기해도 괜찮은 걸까···. 라비타와 노테도 어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의외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비타와 노테, 나. 이렇게 셋이서만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고민하는 나를 노테가 힐끔 바라봤지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고 있던 통에 알아채지 못했다. 어느새 도착한 방은 물건이라곤 침대 2개뿐인, 다른 방과 똑같이 새하얀 방이었다.


한 침대 위에는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하얀 옷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괴수와 싸운다고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으라는 것 같았다. 노테에게는 먼저 쉬라고 말해두고, 욕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간단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노테는 자지 않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안 잤어? 피곤할 텐데 먼저 자지."

"루나 형은···."


노테는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나는 말을 고르는 듯한 노테를 잠시 기다렸다.


"···형은 안 무서워요?"


노테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왜 침착하다고 생각했을까. 침착할리 없었다. 라비타도, 노테도, 그저 침착한 척을 한 거였다. 저런 어린아이들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죽을뻔하기까지 했는데, 설사 이곳에 있는 게 다 큰 성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두려웠을거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노테."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노테를 향해 멋쩍은 듯 웃었다.


"미안한데, 오늘만 나랑 같이 자주라. 혼자 자기엔 내가 좀···무서워서."


내 말에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이 살짝 웃었다. 침대는 둘이서 자기에도 불편함이 없는 크기였다. 분명 라비타와 아르바도 함께 잤을 거란 생각을 하며 어느새 먼저 잠든 노테를 따라 나도 눈을 감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타행성의 지구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관련 공지입니다. +1 19.10.09 45 0 -
11 탈출. 05 19.02.27 368 5 14쪽
10 탈출. 04 19.02.26 418 5 12쪽
9 탈출. 03 +1 19.02.25 380 5 13쪽
8 탈출. 02 19.02.22 410 5 10쪽
7 탈출. 01 19.02.21 543 4 16쪽
6 증명. 05 +2 19.02.19 560 6 16쪽
5 증명. 04 +2 19.02.18 663 7 13쪽
» 증명. 03 19.02.15 759 8 12쪽
3 증명. 02 19.02.13 929 9 11쪽
2 증명. 01 19.02.12 1,122 6 11쪽
1 프롤로그 +1 19.02.11 1,509 9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