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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작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일반소설

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12 21:15
최근연재일 :
2019.10.09 16:57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23,478
추천수 :
511
글자수 :
494,197

작성
19.05.14 18:00
조회
184
추천
6
글자
23쪽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2>

DUMMY

* * *



박옥자가 운전하는 벌통 트럭은 갑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런데 달달거리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거북이걸음이었다. 하긴 트럭이 좀 낡은 게 아니었고, 고개 또한 가파르기 그지없었다. 다시 말해 원체 낡아 빠진 트럭인데다 고개도 험준했고, 게다가 도로 사정까지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니다 보니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렇게 달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벌통 트럭은 갑산 고개를 다 넘고 양강도 운흥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한여름 해는 이미 중천에 다다르고 있었고, 트럭 안 계기판의 시계도 벌써 오전 11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박옥자가 벌통 트럭을 몰고 동네 뒷산을 떠나온 지 벌써 5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어머나, 이를 어째. 시간이 벌써······."


박옥자는 현재 시각을 확인한 순간 아차 싶었다. 그 험하디험한 갑산 고개를 넘다 보니 시간 개념을 깜빡한 것인데, 더 늦기 전에 어디 쉴 만한 곳을 서둘러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박옥자는 쉴 수 있을 만한 곳을 물색하기 위해 큰 대로에서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어차피 벌통을 가득 실은 트럭이라 산길로 접어들어도 이상스레 보일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좁은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마땅한 장소를 발견하곤 박옥자는 벌통 트럭을 멈춰 세웠다.


"형재야, 넌 저만큼 한번 가 보고 오너라."


"예, 어머니."


형재에게 저만치 다녀오라고 하고선 박옥자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주변은 울창한 수풀로 무성히 뒤덮여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인적도 드물게 느껴지는 그런 산길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아무 산길이나 막 들어왔는데 다행히 목적에 딱 맞는 곳 같았다.


"어머니, 저 멀리까지 다녀왔는데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도 별로 없어요."


"그래? 그럼 형재야, 짐칸의 옆문 좀 열거라."


저 멀리까지 금세 다녀온 형재가 아무도 없음을 알리자 박옥자는 형재에게 트럭 짐칸의 옆문을 열게 하고 자신은 벌통과 함께 실려진 큰 나무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 판자를 톡톡 두드리며 입구를 열겠다는 통보를 상자 안으로 전달했다.


"저기··· 입구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통보를 마친 후 박옥자가 입구를 막고 있던 나무 판자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러자 정 상사가 먼저 고개를 쏙 내밀고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곧바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뒤를 이어 이 원사도 상자 밖으로 나왔다.


이 원사와 정 상사는 상자에서 나오자마자 주위를 세밀히 한번 둘러본 뒤 그다음부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 팔과 다리도 돌리고 심지어 허리까지 숙였다 폈다를 반복해 댔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무려 5시간 동안을 꼼짝달삭 못하고 있었으니 그 답답함이 오죽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고, 그나마 온몸의 뼈마디가 그대로 안 굳어지고 제 기능이 발휘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평소 진중하기 그지없는 이 원사까지 저럴 정도면 아마도 뼈마디가 굳어지기 일보 직전쯤 되었던 게 틀림없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형님, 어제도 6시간이나 갇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스트레칭을 통해 굳어졌던 몸이 웬만큼 풀이자 정 상사가 입을 빼죽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는 공간이 좀 넓었고, 오늘은 좀 좁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냐."


이 원사 또한 불편함을 인정한다는 듯 정 상사의 말을 순순히 받았다.


"그래서 그런 건가··· 어쨌든 저 여왕벌 여사님께서 지금이라도 이렇게 꺼내 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형님이나 저나 하마터면 삼수갑산 제대로 넘을 뻔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여왕벌 여사님?"


"삼수갑산요?"


정 상사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에 이 원사와 박옥자가 거의 동시에 되물음으로 대꾸를 했다.


"예? 예, 형님··· 저분을 제가 여왕벌 여사님이라고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보다 저 여왕벌 여사님, 제가 삼수갑산이라고 한 것은··· 그러니까 그게······."


두 사람으로부터 한꺼번에 반문을 받자 정 상사는 어리벙벙한 상태가 되어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중간에 그만 말문이 꼬이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형재가 불쑥 나서더니 지극히 논리적인 말 몇 마디로 가르마를 시원하게 타 주었다.


"저, 선생님. 선생님께서 여왕벌 여사님이란 말씀을 먼저 하셨고 삼수갑산은 나중에 말씀하셨으니, 그 순서대로 여왕벌 여사님이란 말부터 먼저 설명해 주시고 그다음에 삼수갑산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야말로 명확하고 깔끔한 교통정리였다.


"어? 아, 그러면 되겠네. 먼저 여왕벌 여사님이란 영지 씨 누님께서 양봉하시는 분인데 마땅히 부를 만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엉겁결에 그렇게 부른 것이고, 그리고 삼수갑산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뭐, 그런 말이었는데······."


정 상사의 어정쩡한 대답에 박옥자가 다시 또 되물었다.


"어머, 삼수갑산에 대해 아시고 계셨어요?"


삼수갑산에 대한 박옥자의 계속된 물음에 정 상사는 일순 혼란함과 난처함에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옥자가 정확히 뭘 물어보는 것인지 당최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인데, 바로 그때 정 상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 원사가 슬쩍 끼어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저기, 이 동생이 말한 삼수갑산은 함경남도 삼수군과 갑산군의 산세가 워낙 험해 넘어다니기가 죽을 만큼 힘들다는 뜻으로 말한 겁니다. 그렇지, 정 상사?"


역시 위기에 빠진 정 상사를 구원해 줄 사람은 이 원사밖에 없었다.


"예? 예··· 예, 맞습니다."


정 상사가 구세주를 만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아, 남조선 사람들 중에도 삼수갑산이라는 말의 유래까지 아시는 분들이 계셨군요. 맞아요, 아까 넘어온 고개가 바로 갑산 고개였어요. 지금은 함경남도가 아니고 양강도로 바뀌었지만요. 어쨌든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까 그 갑산 고개만 아니었으면 진작 쉬게 해 드렸을 텐데··· 죄송해요, 이제야 쉬게 해 드려서··· 그런데 어쩜 그리 유식하세요?"


박옥자는 이 원사와 정 상사에게 미안함이 담긴 몇 마디를 건네며 정 상사를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박옥자의 시선을 받은 정 상사는 여전히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하고 난처한 처지가 되었는데, 하지만 그럴수록 더 당당해지고 씩씩해지는 사람이 바로 정 상사였다.


"허엄, 새벽에는 경황이 없어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정진원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형님 되시는 분이고··· 어찌 되었든 이렇게 뵙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과 지도 편달을 부탁······."


정 상사가 짐짓 의젓하고 엄숙한 태도를 보이며 위엄 있는 어조로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지도 편달 운운하며 삼천포로 엇나가려 하자 그 즉시 이 원사가 눈총을 주어 말끝을 자르게 했다.


"예? 예··· 정 선생님께서는 유식하면서도 예의까지 바르신 분이군요. 반가워요, 저는 영지 누나예요. 그리고 여기는 제 아들이고요. 형재야, 여기 선생님들께 인사부터 드리거라."


"안녕하세요, 최형재라고 합니다. 궁금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대로 뭐든 다 알려 드릴게요."


벌통 트럭에서 내려 잠깐 동안 인사를 나눈 뒤 박옥자가 트럭의 운전석으로 가더니 보퉁이 하나를 들고 나와 평편한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잠시 후 펼쳐진 보자기 위에는 조와 수수가 섞인 주먹밥 대여섯 덩이와 삶은 옥수수 네댓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박옥자가 그렇게 주먹밥과 옥수수를 꺼내 놓자 형재는 곧바로 트럭의 조수석으로 가더니 물통을 들고 나왔다.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니 한두 번 같이 다닌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원사는 그 모든 행동들을 지켜본 뒤 바닥에 놓여진 음식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자기에 주먹밥과 옥수수를 가지런하게 싸 온 것만 봐도 박옥자는 박영지의 누나가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먹밥에 담긴 정성스런 맵시 또한 그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 한몫을 톡톡히 더하고 있었다.


"많이 시장하셨을 텐데 우선 이것부터 좀 드세요. 생활 풍습이 서로 달라서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형재야, 넌 선생님들께 물 좀 따라 드리거라."


"예, 어머니."


겸소하고 예의 바른 말로 음식을 권하는 박옥자와 박옥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을 하며 물을 따르는 형재를 이 원사와 정 상사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박옥자와 형재, 두 사람 모두 언행에 조심성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조심하려고 하는 그런 어색한 꾸밈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소의 겸손함과 예의 바른 언행이 몸에 배어 마치 습관이 된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는데, 실상 자질구레하게 여러 모습을 볼 필요가 없었다. 이런 모습 하나만 봐도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박옥자와 형재는 괜찮은 사람들이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 원사가 먼저 주먹밥 한 덩이를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보는 순간 고작 주먹밥일 뿐인데도 정성이 얼마나 담겼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는데,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데다 통깨까지 솔솔 뿌려 놓아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들었다.


이 원사가 곧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정 상사도 이 원사를 따라 주먹밥 한 덩이를 집어 들고 슬쩍 살펴보더니 이내 한입 베어 물었다. 우리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고 맛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딱 맞았다. 이 원사와 정 상사가 한입 먹어 본 주먹밥의 맛은 주먹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미상불 최고의 일미였다. 물론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 한창 배가 고팠던 만큼 당연히 만식당육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식당육도 어느 정도껏이지 지금 먹고 있는 주먹밥처럼 이렇게 뛰어난 맛이 깃들어 있는 음식 앞에선 한낱 언어도단밖에 될 수 없었다.


이 원사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순식간에 주먹밥 한 덩이를 마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무척이나 시장했던 차에 주먹밥의 맛까지 일품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이 원사가 이 정도였으니 정 상사는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언급하자면 정 상사는 흡입하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정 상사의 모습을 박옥자와 형재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걱, 이거··· 여왕벌 여사님께서··· 우걱, 직접 만드신 겁니까?"


"예? 예······."


"와, 우걱··· 대단한 솜씨입니다. 형님, 우걱··· 그렇죠? 그렇지, 우걱··· 않습니까?"


이 원사와 정 상사, 그리고 박옥자와 형재의 첫 만남은 정 상사의 주연과 이 원사의 조연으로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저기··· 대장 선생님, 동생 말로는 오늘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라고 하던데요. 최종 목적지가 운흥인가요, 아니면 백암인가요?"


박옥자가 이 원사를 향해 대장 선생님이라 부르며 목적지에 대해 묻자 이 원사가 답변을 한 후 말미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를 더 건넸다.


"예, 한시가 급한 만큼 최대한 가는 데까지 가면 좋은데··· 저, 그런데 방금 대장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 이 선생님을 '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동생이 그러던데 여기 공화국에선 '이'라고 안 하고 '리'라고 해서 자꾸 '리 선생님'으로 불러질 것 같아서··· 그럼 그것도 실례잖아요. 그리고 딱 보기에도 대장같이 보여서 앞으로 대장 선생님이라고 그렇게 부르려고요."


북한은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어 첫머리에 '니은'이나 '리을'이 와도 '이응'으로 안 쓰고 그대로 '니은'이나 '리을'로 쓰고 그대로 발음했다.


박옥자의 말이 끝나자 정 상사가 바로 뚱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를 내던졌다.


"저, 저는요?"


딱 봐도 불만 가득한 말투였는데, 뻔하디뻔했다. 박옥자가 자신은 언급하지 않고 이 원사만 언급하자 그에 대한 불만 표시, 즉 반발성의 항의로 한마디를 내뱉은 것이다.


"정 선생님요?"


"예··· 저 말입니다."


"정 선생님은 보시다시피 정확히 정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 그대로 정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죠. 그런데 왜요?"


"아, 아닙니다. 쩝······."


이 원사도 이 순간 혼란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살짝 당황하기까지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박영지의 누나는 고운 얼굴에 자그마한 여인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 위험한 일을 하기엔 일단 선입견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였다. 더구나 이미 박영지로부터 자신의 누나가 겁이 많아 설득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던 터라 자신들과 대면하게 되면 가장 먼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예상과 달리 막상 대면을 한 후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니 두려워하거나 불쾌해 하는 기색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침착한 언행에 당찬 모습까지 엿보였다.


"이 선생님, 저희가 편하게 대장 선생님이라고 그렇게 불러도 되죠?"


"예, 그게 편하실 것 같으면··· 형재 군도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겠나?"


박옥자의 거듭된 요청에 이 원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선히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의향을 형재에게도 물었다. 그러자 형재 대신 정 상사가 먼저 나섰다.


"형님, 말이 나온 김에 형재 군도 당분간 이름은 숨겨 두고 '일벌 꼬마'라고 부르시죠?"


"일벌 꼬마?"


다소 엉뚱한 정 상사의 제안에 이 원사가 반문을 건네며 형재를 바라보았다.


"예, 일벌 꼬마요. 사실 일의 성격상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도 뭐한 데다, 여왕벌 여사님 아들이니 차라리 그렇게 연관시켜서··· 형재 군은 어떤가, 내 생각이?"


"예? 저는 아무렇게 불러도 상관없으니 선생님들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아, 그리고 저도 '이 선생님'이란 발음이 잘 안 되니 그냥 편하게 대장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처음 대면한 자리였기에 서로 서먹서먹하고 데면데면해야 하는 게 당연했고, 그게 첫 만남의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네 사람은 너무도 빠른 시기에 융화되고 있어 신기하다 못해 이상할 정도였다. 물론 그 모든 게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정 상사 덕분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원사는 박옥자 앞으로 다가간 뒤 박영지가 구해 준 북한 지도를 펴 보이며 자신들이 제일 먼저 거쳐 가야 할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한곳을 가리켰다. 이 원사가 가리킨 곳은 양강도의 백암군이었다.


박옥자는 이 원사가 가리킨 지도의 장소를 확인한 뒤 잠시 뭔가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한마디를 꺼냈다.


"저기, 대장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여사님, 제가 먼저 부탁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시각 이후부터는 저희들에게 궁금하신 게 있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하십시요."


박옥자가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을 꺼내자 이 원사가 그런 불편함을 없애 주기 위해 부탁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선수를 쳤다. 그런데 그에 대한 반응은 미처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하, 나 원 이거야 그렇게 실컷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서야··· 형님, 여사님이 뭡니까 여사님이? 형님께서도 편하게 그냥 여왕벌 여사님이라고 부르십시요."


이 원사의 말에 정 상사가 중간에 불쑥 끼어들어 뚱한 표정으로 핀잔을 건넸다. 마치 퉁을 놓듯 비아냥거리는 게 무슨 노림수가 있는 언사처럼 냄새가 폴폴 풍겼는데, 사실 또한 그랬다. 어제 박영지가 운전하는 5톤 화물 탑차를 타고 오며 이 원사에게 당했던 걸 꽁하니 간직하고 있다 지금 그대로 써먹고 있는 거였다. 말 그대로 하루 연장된 뒤끝 작렬이었다.


"끄응······."


"대장 선생님, 정 선생님 말마따나 그렇게 하세요. 대장 선생님께서 뭐든 편하게 생각하셔야 모든 일을 잘 이끌어 가실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저를 대하는 것도 편하게 하세요."


박옥자가 건넨 한마디엔 상대방을 존중하는 속 깊은 배려가 은연하게 담겨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여사님 호칭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저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아, 예··· 먼저 제 심정부터 말씀드릴게요. 사실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새벽 동네 뒷산에 나가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두 분을 뵌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떨리고 걱정되는 게 마치 안개가 걷히듯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거예요. 진짜 거짓말처럼 그렇게요. 그래서 제가 대장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으면 하는 게 있어요. 다른 게 아니고··· 두 분은 여기 공화국 사람들이 아니라서 지리적인 것부터 시작해 아마 모든 것들이 낯설 거예요. 그러니 그런 부분에서는 저하고도 상의를 해 주셨으면 해서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이니 어쩌겠어요. 저희도 두 손 두 발 다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박옥자는 이외에도 이번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기 전까지 자신이 어떤 심경이었는지 그동안의 속사정가지 모두 다 꺼내 놓았다. 먼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 박영지로부터 탈북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놀라 뒤로 까무러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의 성화도 거세지고, 게다가 자신의 아들인 형재까지 은근히 부추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옥자는 그렇게 그간의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기왕에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떻게든 성공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역시 박영지의 누나가 틀림없었다.


"고맙습니다, 여사님. 영지 씨와 피를 나눈 남매지간이 아니랄까봐 어찌 그리 남매가 똑같습니까?"


"예? 제 동생하고 저요? 에구,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제 동생하고 비교 자체도 안 돼요."


심지어 겸손함까지 박영지와 똑같았다.


이 원사는 천군만마 못지않은 큰 힘을 얻은 기분이었다. 잠깐의 대화에 불과했지만 박옥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기분 좋은 흥분이 일 만큼 긍정적이고 의미심장했기 때문인데, 게다가 체구는 비록 왜소하고 가녀렸지만 박옥자의 언행과 모습만큼은 그 어떤 대단한 사람보다 광명정대하고 당차게 보여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 그저 신비롭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원사가 느낀 그 기분을 정 상사도 지금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런 것까지 심심상인이 되진 않을 텐데 이 또한 실로 신비하고 신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야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가는 이치를 따져 보면 그다지 신비하거나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여사님, 저희들이 왜 백암군을 거쳐 가야 하냐면······."


이 원사는 지도를 펼쳐 놓은 채 양강도 백암군을 왜 거쳐 가야 하는지 한 점 숨김없이 모두 박옥자에게 설명을 해 줬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작전 계획에 대한 브리핑으로 어지간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게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컸는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호 간의 믿음과 신뢰가 그만큼 돈독해졌다는 걸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여하튼 이 원사가 박옥자에게 설명해 준 작전 계획의 주 무대는 바로 이곳 양강도였다. 그런 만큼 모든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는 이곳 양강도를 벗어날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빈이를 구출한 후 최종 탈출 시에는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양강도를 벗어나야지만 그전까지는 불가부득 양강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사실 양강도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은 이 원사에겐 다소 생소한 지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원사가 초, 중,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지금의 양강도는 함경남도였다. 그리고 이 원사와 정 상사가 어제 평안북도 다음으로 거쳐 온 자강도도 예전엔 평안북도였다.


북한의 행정구역 지명들이 언제 이렇게 바뀐 건지 알 순 없지만, 양강도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과 압록강을 양쪽으로 품고 있어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게 아닌가 하고 이 원사는 전혀 근거 없는 막연한 추측을 한번 해 보았다.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 건 한국에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을 양수리라는 지명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인데, 만일 양강도가 그런 식으로 지어진 지명이 맞다면 압록강을 끼고 있는 자강도 또한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다. 예로부터 한반도의 강 중에 제일로 치는 두만강보다 압록강을 조금 낮게 평가하는 만큼 만일 자식에 비유했다면 그런 지명을 얼마든지 지을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전혀 근거 없는 이 원사의 막연한 추측이었다.


어찌 되었든 잠시 후 간단한 요기와 함께 잠깐의 휴식을 취한 이 원사와 정 상사는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형재가 곧바로 그 나무 상자의 입구를 나무 판자로 막아 줬다. 그런데 다시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막 출발할 찰나 박옥자가 돌연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그 나무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오늘 중으로 백암군에 도착하겟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박옥자의 그런 느닷없는 행동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난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뜬금없는 언행을 보인 당사자는 그 어떤 결의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마치 엄청난 임무를 부여 받은 것마냥 결연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는데, 한마디로 잠시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었다. 요컨대 잠시 전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원사로부터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난 후부터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진 박옥자였다.


아무튼 그로부터 잠시 후 벌통을 실은 트럭은 또다시 달달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로가 있는 쪽을 향해 서서히 산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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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보천 국경수비대3> 19.10.01 126 5 19쪽
66 <보천 국경수비대2> 19.09.30 128 4 17쪽
65 <보천 국경수비대1> 19.09.27 169 5 16쪽
64 <못된 짓의 대가3> 19.09.27 129 6 18쪽
63 <못된 짓의 대가2> +1 19.05.17 193 7 18쪽
62 <못된 짓의 대가1> 19.05.16 178 7 16쪽
61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3> 19.05.15 156 6 13쪽
»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2> 19.05.14 185 6 23쪽
59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1> 19.05.13 152 6 18쪽
58 <북한 잠입3> 19.05.10 157 6 15쪽
57 <북한 잠입2> 19.05.09 188 6 10쪽
56 <북한 잠입1> 19.05.08 170 6 20쪽
55 <변경되는 작전 계획4> 19.05.07 161 5 11쪽
54 <변경되는 작전 계획3> 19.05.06 164 6 15쪽
53 <변경되는 작전 계획2> 19.05.03 158 5 19쪽
52 <변경되는 작전 계획1> 19.05.02 171 7 13쪽
51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5> 19.05.02 182 6 4쪽
50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4> 19.05.01 178 7 15쪽
49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3> 19.04.30 180 7 16쪽
48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2> 19.04.29 180 6 8쪽
47 <북한 공작원들의 파견 지부1> 19.04.25 195 6 15쪽
46 <응징7> 19.04.24 215 6 8쪽
45 <응징6> 19.04.23 191 7 17쪽
44 <응징5> 19.04.22 195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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