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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12 21:15
최근연재일 :
2019.10.0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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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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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이 원사와 정 상사1>

DUMMY

이 원사는 중국에서 3일을 머물고 4일째 되는 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해 부대에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전역 지원서부터 제출했다. 이 원사가 그렇게 느닷없이 전역 지원서를 제출하자 여단장 김홍구 준장부터 한규천 상사 등 거의 모든 부대원들이 나서 극구 만류를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원사의 결심이 워낙 확고부동했기에 부대원들의 진정 어린 만류는 설득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허무히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사는 32년 군 생활의 종지부가 될 전역 지원서를 제출한 후 신속한 후속 처리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섰다. 전역과 관련된 서류를 손수 작성하고 제출하는 등 전역 업무 전반에 대해 직접 절차를 밟고 다녔다. 그 결과 군인공제회와 관련된 업무는 어제부로 마무리가 되었고, 이제는 육군본부 중앙경리단과 관련된 업무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제는 계룡대만 들리면 다 마무리되는 건가? 32년이라는 그 기나긴 세월도 별것 아니군······.'


이 원사는 아침 느지감치 경남 창녕을 출발해 오전 늦은 시간인 점심나절쯤 계룡대에 도착을 했다. 도착 즉시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을 방문해 퇴직금 일부만 연금 형식으로 전환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일시불 수령 신청을 하는 등 중앙경리단에서의 마지막 업무도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의 업무를 마지막으로 전역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이 원사는 곧바로 자신의 SUV 차량을 운전해 충남 보령으로 향했다.


계룡대가 있는 계룡시에서 보령시까지의 거리는 사실상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연결된 도로가 없어 이리저리 우회하다 보니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국 한낮이 한참이나 지난 오후 중간쯤 성주터널을 빠져나온 이 원사는 보령 시내 쪽이 아닌 대천 해수욕장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운전하는 걸로 봐서 아마 초행길인 것 같았다.


'얼추 다 온 것 같은데······.'


대천 해수욕장 방면으로 한참 달리던 이 원사는 해수욕장 바로 코앞에서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또다시 좌회전을 했다. 그렇게 좌회전을 한 뒤 방파제를 끼고 조금 더 달리자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네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들렸다. 그 안내 음성을 끝으로 이 원사는 주변 주차장에 주차시킨 뒤 차에서 내렸다.


차량에서 내리는 순간 비릿함이 섞인 바닷가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겨져 왔다. 이 원사는 그 즉시 이맛살을 좁히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바닷가 특유의 비릿한 이 내음이 이 원사에겐 결코 정겹지 않았기 때문인데, 물론 부지중에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원사는 아주 오래전 유년 시절에 입양되었던 적이 있었다. 입양된 곳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장항이라는 작은 읍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입양된 지 불과 반년 만에 다시 파양이 되었다. 그때 입양되었던 장항이라는 곳도 이곳처럼 바닷가라 그 당시 매일같이 맡았던 냄새가 바로 다름 아닌 지금 풍겨 오는 이 냄새였다.


벌써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말 그대로 세월여류였는데, 사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원사는 언제 어디서든 이 비릿한 바다 내음을 맡을 때마다 희미한 기억밖에 남지 않은 그때의 유년 시절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었다.


'하지만······.'


흔히들 옛 기억은 곧 추억이기에 소중하다가 말하지만 이 원사의 옛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기에 절대 추억이 될 수 없었다.


* * *


이 원사는 유년 시절부터 부모 형제와 헤어져야 했다. 그런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집안 형편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의 소년 시절에도 가난했던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철갑을 두른 남산 위에 저 소나무처럼 불변함 그 자체였고, 매일 아침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과 쌍벽을 이룰 만큼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변함없이 가난은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가는 데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음에도 쌀 한 톨 보리 한 톨 없는 가난살이는 여구히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지긋지긋한 가난만큼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쨌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 이 원사는 숱한 곡절을 겪으며 중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집안 형편에 가난이라는 지긋지긋한 껌 딱지가 붙어 있다 보니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못 꿀 언감생심이었고, 이 원사 또한 집안 형편이 어떻다는 걸 잘 알기에 고등학교 진학은 그저 화중지병으로 여기고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체념을 했지만 절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방황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 절망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귀가 번쩍 뜨일 만한 희소식 하나가 이 원사에게 전해졌다.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꿈 같은 소식이었는데, 그 소식을 접한 순간 이 원사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 이 원사 입장에선 고등학교 진학보다 더 우선하고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여곡절과 천신만고 끝에 이 원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했다고 하는 그 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입학과 동시에 제복과 군복을 착용해야 했고, 개인 화기로 지급되는 M16A1 소총을 들어야 했다.


* * *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몇 년 후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릴 만큼 달변가인데다 일본어까지 능통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일본으로 보내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을 받아 오게 했다. 그러나 김종필 씨와 사절단은 그 사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절단은 일본으로 날아가자마자 일본 관료들이 따라 주는 술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넙죽넙죽 받아 마셨고, 그렇게 받아 마신 사케 몇 잔이 결국 쥐약이 되는 통에 막상 일본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협상 테이블에선 맥도 한번 제대로 못 추고 질질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사실 매사에 자신들의 잇속만 밝히며 약삭빠르게 구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게다가 약아 빠진 걸로 치자면 온 지구상의 여우를 모조리 잡아 와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나라 또한 일본이었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협상해도 녹록치 않을 텐데, 사절단은 협상 전부터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근사한 접대에 휘둘림을 당했으니 그 결과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협상장에선 마치 처삼촌 뫼에 벌초라도 나온 사람들마냥 협상에 헤실바실 건성건성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들에게서 국가의 막중한 사명을 띠고 파견된 사절단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사절단의 미련하고 멍청한 짓거리는 차치하고라도 협상 내용에 35년에 대한 배상만 요구한 것 자체부터가 대단히 잘못된 엉터리 계산이었고, 잘못 꿰어진 첫 단추였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1910년 한일 병합 이후부터 광복이 된 1945년까지의 기간만 계산해서 일제 식민 통치 기간이 35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흔히 '일제 강점기'라는 말로 표현해 가며 보통적으로 사용하는데, 물론 껍데기만 남은 형식상의 국권을 빼앗긴 걸로 따져 계산하면 그 계산법이 맞긴 맞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 조약을 내세운 형식상의 국권 피탈이었을 뿐, 실제의 국권은 한참 오래전인 진작에 빼앗긴 상태였다. 그런 만큼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아 깔아 뭉갠 기간은 35년이 결코 아니었다. 사실상 50년이 넘는 세월이었고,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은 사실 차고 넘쳤다.


한일 병합 15년 전인 1895년, 일본 자객 140여 명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참담하게 시해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천인공노할 사건을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의 구중 궁궐 안에서 벌일 정도였으니 조선의 국토에서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행해졌을 일본인들의 만행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물론 그 비극적인 을미사변을 뒷받침해 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과 갑오경장 때에도 일본이 깊게 관여하며 조선 반도에서 함부로덤부로 날뛰었던 사실도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 내막인즉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원인이 되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의 톈진 조약을 빌미로 우리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 결국 우리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전쟁까지 일으켰다. 그 후에도 물러나지 않고 조선에 그대로 눌러앉아 내정 간섭까지 해 대며 온갖 깽판을 다 쳤는데, 심지어 친일파 김홍집과 그의 일당들을 꼬드겨 조선의 정치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라며 조선을 통째로 들어서 자신들에게 바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정변의 배후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게 바로 일본이었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상대로 난장패가 되어 난장판을 한번 쳐 보라며 조선 반도 전체에 경장이라는 미명으로 두껍고 질긴 멍석을 깔아 주었으니 사실상 1895년 그때부터 이미 일본의 강제 점령은 시작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 만큼 일본의 조선 강제 점령은 35년이 아닌 50년이 넘는 세월로 재조명되어야 했다. 비단 굵직굵직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지난 역사의 흔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세월이 50년이 넘는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외친 '대한 독립 만세'라는 한마디가 일본의 강제 점령 기간이 잘못 계산되었다는 걸 확인해 주는 명백한 증거였는데, 그때가 1909년으로 한일 병합이 있었던 1910년보다 1년 전이었다. 즉 1910년 한일 병합 이전부터 애국 열사들이 독립이라는 말을 운운했다는 사실인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는 불언가지였다.


여하튼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반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일제 만행에 시달려야 했는데, 단언컨대 그 비참함과 애통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불가형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배상 협상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끝이 나고 말았으니, 만일 우리 선조들이 그 협상 결과를 알았다면 아마 지하에서 벌떡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기가 차고 기가 막힌 결과였다.


사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절단은 일본에 도착한 당일부터 일본 관료들이 슬그머니 내민 달콤한 꿀 같은 접대에 푹 빠져 지냈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헤벌쭉대며 지내다 막상 협상이 시작되자 사절단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대로 말 한마디도 못해 보고 일본 정부에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전후사연이 이랬으니 협상 결과 또한 이미 예견된 대로 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배상 협상은 쥐꼬리 만한 달러 뭉치와 최신식 학교 하나를 세워 준다는 얼토당토않은 조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빚 좋은 개살구보다 못한 졸렬하기 짝이 없는 협상이었는데, 하기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나 위정자들은 지난 날 과거사의 반성보다는 오히려 추악하고 부끄러운 자신들의 과거를 더 내세우며 온갖 망언들을 쏟아 낼 정도니 설령 우리 사절단이 제대로 협상에 임했다 하더라도 아마 우이독경의 난항을 겪다 결국엔 이란격석의 결과로 끝났을 게 뻔하디뻔했다.


어찌 되었든 허망하고 허탈하기 그지없는 그 협상이 크게 잘못되었던 만큼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부 무리들에게 의해 자꾸만 그런 사실들이 감춰지고 있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런 부끄러운 현실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이기도 했다.


아무튼 졸렬하기 짝이 없는 협상일망정 배상 내용의 하나인 최신식 학교가 1970년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에 세워지게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학교를 외형적으로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기치를 내걸고 공업고등학교로 개교시켰는데,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학생군사교육단을 학교 내에 창설시킨 후 RNTC (Reserve noncom training corps) 후보생들을 교육 훈련시키는 부사관 학교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17살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 어린 나이였다. 특히 신체는 한참 성장할 한창나이였다. 그렇게 어린 몸에 제대로 맞지도 않는 군복을 입혀 놓고 1년차 후보생들에게는 하사 계급장의 V부분에 흰색으로 칠해진 예비 계급장을, 2년차 후보생들에겐 파란색을, 그리고 3년차 후보생들에게는 일명 단풍 하사라는 붉은색의 예비 계급장을 붙여 주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사실상 실질적인 개념이나 목적으로 볼 때 고등학교라기보다는 부사관 학교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학교였다. 단적인 예로 학교생활 3년 동안 전교생 전체가 군대의 내무생활과 똑같은 단체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 대상엔 누구를 막론하고 단 한 명의 예외자도 있을 수 없었다.


이 원사 또한 그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RNTC 후보생이 되어 3년 간의 RNTC 전 과정을 수료하고 약관의 나이 20살이 되자마자 육군 하사로 임용이 되었다. 그리고 22살에 중사 진급을 했고, 28살에 상사 진급을 했다. 현 계급인 원사는 36살에 진급했는데, 매번 진급 때마다 단 한 번도 누락된 적 없이 진급 주기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진급이었다. 그런 만큼 이 원사의 그동안 군 생활이 어떠했을지는 진급 과정과 주기만 살펴봐도 간접적이나마 웬만큼은 엿볼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 * *


그런 이 원사에게도 자신의 군 생활 일부에 약간은 억울해 하며 조금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는 사연 하나가 있었다. 사연의 단초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이 원사의 주특기였는데, 이 원사가 처음 하사로 임용되면서 부여 받은 주특기는 병기 병과 주특기로 전쟁에 필요한 장비들을 보급하고 정비하는 한마디로 비전투 주특기였다. 이 원사가 억울해 하고 불만스럽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그 비전투 주특기와 관련이 있었다.


이 원사는 하사 임용과 동시에 병기 병과 주특기를 부여 받고 제 3* 사단인 육군 제 612* 부대로 자대 배치되어 정비근무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원사가 사단 사격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는 사실과 태권도 2단증을 보유한 유단자라는 사실, 단지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 특공 여단에 덜컥 차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의 군사적 특징은 요즘처럼 핵무기나 탄도미사일이 아닌 비정규전 중심의 특수전 성격을 띨 것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그 중심엔 북한 특수 부대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무려 1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기에 그들을 감당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특히 다른 무엇보다 그들을 맞상대할 우리 군의 특수 부대원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결국 그 대안으로 1980년대 초부터 육군의 각 군단 예하에 특공 여단들이 창설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둘러 창설된 특공 여단은 부대원들을 충원시켜야 했는데 약간의 문제가 생겨 난관에 봉착했다. 사병들은 논산 훈련소나 각 사단의 신병교육대에서 자대 배치시키면 티오(Table of organization)를 무난하게 채울 수 있었지만 부사관들은 달랐다. 육군 부사관 학교를 통해 충원시키기엔 부합되는 자격이나 조건들이 다소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티오 충원에 애로 사항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부사관 학교 출신의 하사들은 수료와 동시에 임용이 되었기에 군 경력들이 전무했고, 중사 진급 예정자들의 초급반과 상사 진급 예정자들의 중급반 교육생들은 이미 자신들의 원부대가 전국 각지에 따로 정해져 있었기에 육군본부 임의적으로 무작정 전출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시대상이 부사관들의 전역 붐이 일고 있었던 때라 육군본부 임의대로 전출 명령을 내렸다간 자칫 부사관들의 전역 러시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문제로 충원이 가로막히다 보니 창설된 특공 여단에서는 별수 없이 인근에 있는 타 부대의 부사관들 중에서 일부 인원을 차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원사가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부사관이나 마구잡이식의 차출은 절대 아니었다. 나름대로 망라한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검증된 부사관들만 차출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 당시 육군 편제의 변화에 휩쓸려 이 원사가 특공 여단으로 차출되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원사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편제 당시 어영부영하다 곁가지로 휘말린 어리바리한 희생양은 결단코 아니었다.


물론 이 원사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특공 여단으로 차출된 것은 그 당시 줄을 잘못 서서 희생된 거라고 단단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정작 이 원사 자신이 낭중지추였기 때문에 차출되었다는 것을 주변의 다른 동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당사자인 이 원사 본인만 여태껏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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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사와 정 상사1> 19.03.13 419 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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