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도쿄올림픽의 흑막(3)

3.
“정 팀장. 지금 막 경기를 시작했는데, 선발 투수를 교체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니오? 지석이가 어리다고 과보호하는 건 좋지 않소.”
올림픽 야구대표팀 선발 작업을 진행하면서 천상진은 민준과 상당한 친분을 쌓았다. 말을 트는 관계가 됐고, 민준과 지석의 관계도 알게 됐다.
천상진은 선발투수 지석이 심판의 황당한 판정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을 알고 있지만, 대형 투수가 되기 위해서 이런 상황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민준의 투수교체 건의를 성급한 과잉보호로 본 것.
“감독님. 지금 심판의 행동은 애매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편들기가 아닙니다. 작정하고 우리 대표팀을 저격하려는 겁니다. 지석이가 굳건한 맨탈을 가졌지만,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이대로 두면 두고두고 큰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2020년 현재 KBO 소속 심판은 모두 45명, 이 중 44명이 선수 출신이다.
민준은 빅스타즈 경기에서 상당수 심판이 때로는 잘못된 판정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겉으로 담담하지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심판의 정신 스탯이 출렁거렸다. 당황스러움과 양심이 영향을 미친 것.
그러나 오늘 연거푸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주심 하워드 태프트의 정신 스탯은 큰 변화가 없다.
이것은 하워드 태프트가 의도적으로 엉터리 판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감독님. 저도 투수교체에 동감합니다. 저런 정신 나간 심판에게 경험 적은 지석이가 버틸 수 없습니다.”
투수코치 김진철도 민준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 비록 그가 상태창을 볼 수 없으나, 악의를 가진 심판이 어린 투수를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민준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한 것.
“흠······. 김 코치가 그렇게 말하니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겠소. 그러면 누구를 투입하면 좋을 것 같소?”
“대원이가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진철은 빅스타즈의 돌아온 에이스 김대원을 교체 투수로 지목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15년 차 베테랑이라면, 심판 농간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 터벅! 터벅!
투수 교체를 결정한 천상진은 덕아웃을 벗어나 홈플레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아! 천상진 감독! 주심을 향해 걸어갑니다!]
[주심에게 항의하는 것 같습니다.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신인 투수를 감독이 지원해줘야 합니다.]
민준이 천상진에게 투수교체를 건의하는 동안, 선발투수 지석은 네덜란드 두 번째 타자에게 3볼 0스트라이크로 또다시 몰리고 있었다.
연속 7개 공이 볼 판정을 받았고, 1번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지만, 차이점은 편파 판정을 당한 것이 1개고 나머지 2개가 진짜 볼이라는 것.
준수한 제구력을 가진 지석이 심판의 농간에 휘말려 컨트롤 난조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석이 고전하는 모습을 알아본 해설자 김남기는 감독 천상진이 적절한 타이밍에 항의하러 나온 것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천상진은 단순히 항의만 하러 나온 것이 아니다.
“이보쇼! 당신 심판 맞아! 멀쩡한 스트라이크를 전부 볼로 만들면! 투수가 무슨 공을 던지라는 거요! 입이 있으면 말해봐! 어서!”
천상진은 주심 하워드 태프트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한국말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한국말 자체는 욕설이나 비속어가 담겨 있지 않지만, 목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고 말투는 사나웠다.
“Speak English!”
느닷없는 고함에 당황한 하워드 태프트가 손을 휘저으며 영어로 말하라고 요구했으나, 천상진은 짐짓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한국말로 계속해서 고함쳤다.
- 타다닥!
천상진의 고함이 이어지자 경기 진행요원과 통역사, 그리고 안전요원이 달려왔고, 홈플레이트 인근은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나이스! 천상진!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줄 알았더니 한 성질 하는구나!>
<바로 이거야! 엉터리 판정을 하는 심판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거야!>
<하하하! 심판 저거 쫄보구만! 사내놈이 여자 뒤로 숨냐?>
하워드 태프트의 엉터리 판정은 중계방송을 통해 고스란히 한국에 전달됐다. 다수의 야구팬들이 느린 화면으로 반복 재생되는 잘못된 판정을 보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감정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할 시점에 한국 대표팀 감독 천상진이 나서서 하워드 태프트에게 고함을 질러대자 대리만족을 느끼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팬 중 일부는 약간의 억지를 넣어 심판을 비방하기도 했다.
하워드 태프트가 천상진의 고함을 피해 사람들 뒤로 몸을 숨겼고, 사람들 속에 여자 2명이 포함돼 있었다.
일부 한국팬들이 그것을 빌미 삼아 심판을 겁쟁이로 몰아갔다.
하워드 태프트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지만, 일본이 제공한 돈을 받고 한국에 위해를 가한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하겠다.
*****
14년 차 베테랑 심판 하워드 태프트는 자신이 황당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돈.
일본은 올림픽 야구 심판 전원에게 일률적으로 10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했다. 그리고 한국전에 주심을 담당하는 하워드 태프트에게 거액의 성공 보수를 미끼로 던졌다.
한국을 패배하게 만들면 300만 달러 지급. 설령 실패해도 100만 달러 지급.
은퇴를 준비하고 있던 하워드 태프트는 일본 제시한 거금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워드 태프트는 고함치는 천상진을 퇴장시키지 못했다. 한국팀 감독을 퇴장시키고 그 뒤 IOC(올림픽위원회)에서 조사가 나오면, 자신이 일본으로부터 받아먹은 뇌물과 뒷거래의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 뒤에 몸을 숨기고, 천상진이 제풀에 포기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천상진은 계속해서 고함치며 하워드 태프트가 노출한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천상진을 진정시킨 것은 귀빈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IOC 관계자였다.
“느린 화면으로 공이 지나간 궤적을 보세요. 백번 봐도 같은 결론이 나올 겁니다! 4개 전부 스트라이크입니다!”
“IOC 경기기술위원회에서 정밀 분석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우리를 믿고 경기를 진행 해주시기 바랍니다.“
천상진은 고함을 멈추고 IOC 관계자에게 왜 자신이 항의하는지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IOC 관계자 역시, 과도하게 편파적인 하워드 태프트의 연속 볼 판정을 미심쩍게 생각하기에, IOC 차원의 조사를 약속했다.
이로써 약 15분간 진행된 천상진의 활극(?)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순식간에 정리되고 경기가 속개된다.
“투수 교체!”
[대한민국 대표팀 선발 투수 강지석 선수를 내리고 김대원 투수를 투입합니다! 위원님 공을 고작 7개만 던진 강지석 선수를 너무 빨리 교체하는 것 아닌가요?]
[이유 있는 교체라고 생각합니다. 주심의 어이없는 판정으로 강지석 선수가 큰 정신적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5분간 경기가 중단돼 컨디션 유지도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김대원 투수는 몸풀기가 제대로 된 듯 합니다.]
오늘 지석의 포심 패스트볼은 155lm/h의 속도를 나타내고 공 끝도 날카롭다.
K방송 캐스터 채승민은 뛰어난 구위를 보이는 지석을 조기에 강판한 것에 의문을 품고, 해설의원 김남기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감독 천상진을 비판하라는 뉘앙스를 담아.
김남기는 채승민의 의도와 다르게, 지석을 교체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거론하며 천상진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알렸다.
그는 마운드에 오른 김대원의 몸 상태를 보고, 천상진이 김대원에게 준비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항의를 길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김대원 투수가 3볼 0스트라이크에서 얀더 부가츠 선수를 상대해야 합니다. 어떤 공을 던져야 할까요?]
[정직한 승부는 어렵다고 봅니다. 김대원 선수가 올 시즌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사실이지만, 얀더 부가츠 선수는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도 출전한 강타자입니다.]
네덜란드가 6개국만 출전할 수 있는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메이저리거가 존재한다.
미국과 근접한 카리브 해에 위치한 네덜란드 자치령 아루바, 퀴라소, 신트라르틴 출신 야구 유망주들이 대거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대표팀에 다수의 메이저리거가 포함된 것.
오늘 경기하는 네덜란드 대표 24인 중 20명이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대원이 상대하는 얀더 부가츠 역시 메이저리거로, MLB 통상 타율 0.289를 기록하며 유격수 실버슬러거를 수상한 경력이 있는 강타자다.
실버슬러거는 포지션별로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보인 선수에게 주는 상.
김대원은 3볼 0스트라이크라는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 강타자와 대결해야 한다.
[김대원! 초구를 던집니다!]
- 슈욱!
-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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