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북한도 우리나라 땅이다.
사내는 그 모습에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른팔 팔꿈치에서부터 온몸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엉뚱한 소리만 튀어나왔다.
“뭐, 흐허억!”
시운은 사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의 팔꿈치를 뒤로 당겨 사내를 두 걸음 물러서게 했다.
시운의 왼손은 여전히 그 사내의 오른쪽 팔꿈치를 붙잡고 있는 상태다.
시운의 몸에 여러 강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슬쩍 잡아당긴 것 같은데, 사내의 몸은 가볍게 들려서 옮겨지듯 뒤로 밀려났다.
그 공간으로 시운의 눈에는 잔뜩 겁을 먹은 채 환자 앞을 가로 막고 선 시운 또래의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 왼쪽 옆으로는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는 여고생이 보였다.
시운은 그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고는 잠시 움찔했다.
그러다 아까 전화통화를 통해 ‘아저씨’라는 말이 나왔었던 것을 기억했다.
시운은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하게 생겼네.’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아저씨 왔다. 몸은 괜찮아? 어머니 신가 보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크라시 투자회사 사장 최시운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 연락처를 준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받고 깜짝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진작 달려왔을 텐데.”
“아, 네. 안녕하세요. 근데 어떻게 저희 애를 아세요?”
“예전에 제가 길에서 낭패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이 아이가 저를 도와줬습니다. 그때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혹시 도울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했었거든요.”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얘가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했었네요?”
“하. 하. 하. 그, 랬나요?”
그렇게 시운으로서는 국어책 읽듯 어색하게 말을 받아넘겼다.
다행스럽게도 상황이 어색해서인지, 어머니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가 주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운이 어머니에게 따로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시운의 팔에 팔꿈치를 붙잡힌 사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시운이 싱긋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같이 얘기할 거니까요. 그럼 잠시 밖으로 나가시겠습니까? 이 사람도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아, 네. 그러시다면...”
놀란 상태에서 절박한 표정으로 사채업자를 막던 어머니의 모습과 달리 침상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그저 멀뚱거리고 있다.
그 표정이나 모습이 이 상황과 너무도 맞지 않아 시운이 슬쩍 눈치를 주었다.
귓속말 마법으로 ‘누님 좀 놀란 표정을 지으세요.’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는 오히려 불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흔든 시운이 사채업자의 팔을 잡은 채 밖으로 들어 날랐다.
문 앞에는 여전히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시운에게 팔이 잡힌 채 들려 나오던 사채업자는 그 모습에 버럭 소리를 지르려했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모깃소리만큼 작았다.
그래서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시운은 몸이 활성화된 상태여서 들을 수 있었다.
시운은 그들을 양쪽 발로 한 번씩 툭툭 차며 복도의 끝쪽으로 밀고 갔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바닥이 매끈하기도 했지만, 호리호리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커다란 덩치의 젊은 남자 둘을 한쪽 발로 툭 차면 거의 1미터 정도씩 밀려나는 모습에 놀라는 것이다.
시운은 주위 사람들이 놀라며 뭐라 떠들어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만 고민했다.
할 수 없이 시운은 테라니우스에게 귓속말 마법을 보냈다.
‘형님,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후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별것 없어. 일단 차용증부터 받고 그동안 받았던 돈이 얼마인지 확인해. 그러고 나서 이놈들 정신을 개조하든지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자네는 그저 차용증이나 받아서 그 아이 어머니에게 건네줘.’
‘네, 형님.’
시운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 사납던 사채업자가 갑자기 얌전해진 것도 놀라워서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그저 시운의 말을 따르고만 있었다.
바닥을 뒹구는 두 거한을 발로 차며 병원 복도 구석으로 미는 시운이 여전히 왼손으로 사채업자의 팔꿈치를 잡고 걷고 있다.
그런 시운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여자아이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그런 시운의 뒷모습을 보며 더욱 놀라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저 호리호리하고 인상도 험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무섭던 사채업자를 한 손으로 제압하고, 그뿐만 아니라 바닥을 구르는 거한 둘을 저렇게 쉽게 발로 밀치고 나아가다니.
이제는 다른 면으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딸이 비록 엇나간 행동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 저런 놀라운 사람을 알고 있는 걸까?
사채업자의 행패에 놀랐던 심장이 이제는 새로운 상황에 놀랐다.
그렇게 여러 생각이 교차한 가운데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는 사람 왕래가 적었다.
병실 앞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이런 놀라운 상황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시운이 사채업자의 팔을 놔 주며 말했다.
사채업자는 어느새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가고 있다.
“일단 차용증부터 꺼내 봐.”
시운은 평소에 젊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앞뒤 가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목소리도 그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등 뒤에 서 있는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시운의 눈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시운의 말에 다 죽어가는 얼굴이 된 사채업자는 그래도 위세를 부려보겠다는 건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왜! 빚이라도 대신 갚아 주려고 그러나? 왜 남의 차용증을 보자는 거야!”
“...”
시운은 그저 지그시 사채업자의 눈동자를 노려봐 주었다.
그 눈빛에 지금까지 꼼짝 못 하고 잡혀 있었던 상황이 떠오른 사채업자가 절로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눈을 아래로 깔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 뒤진다.
잠시 후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운에게 건네려 했다.
시운은 그 종이들이 모두 차용증들인 듯해서 그 종이 뭉치를 모두 빼앗았다.
“다른 것들도 일단 내가 보관하고 있지. 일단 이건 여기서 처리하자, 이렇게.”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차용증을 찢어버렸다.
찢은 차용증을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먼저 들어가 있으시라 말을 건넸다.
울상이 된 어머니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시운에 대한 걱정이 그 눈빛에서 드러났다.
시운은 다시 한 번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켜드리고 병실로 돌아가게 했다.
그 어머니는 몇 번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병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시운이 이번에는 아직도 이쪽을 힐끗거리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시운이 귓속말로 테라니우스에게 말했다.
‘형님, 일단 이놈들을 자기네 사무실로 가 있으라고 말할게요. 형님이 따라가셔서 이놈들의 기억을 조사해 주실래요?’
‘그러세.’
테라니우스의 대답을 듣고 시운이 사채업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 일단 명함이나 줘봐. 여기 볼일 마치고 너희 사무실로 바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마저 얘기하자. 돈도 줘야 할 테니까.”
“... 여, 기 있습니다.”
더듬거리듯 억지로라도 존댓말을 쓰긴 하는 사채업자다.
시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쭈뼛이 건네는 명함만 챙겼다.
그리고 더욱 싸늘해진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지금 즉시 이놈들 챙겨서 사무실로 돌아가라. 다른 곳으로 새면 내 돈 못 받을 줄 알아라. 얼른 가.”
그제야 사채업자는 긴장이 풀어지는지, 아니면 시운에게 당한 것을 부하들에게 풀려는 건지.
아직도 바닥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사내 둘에게 발길질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셋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시운이 다시 그 병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관심을 끊고 각자의 갈길로 흩어졌다.
병실에 들어온 시운은 조금은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여자아이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도 찢어진 차용증을 들여다보는 그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진작에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이 아이를 키우시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이런 큰 신세를 져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불편해하는 그 어머니에게 더욱 푸근해진 눈웃음을 보이며 시운이 대답했다.
“앞으로 이 아이의 병원비와 가정에서 필요한 생활비까지 우리 회사가 부담하겠습니다. 일단 병실부터 1인실로 옮기도록 하죠. 보아하니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해도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유. 아니에요. 지금 병원비도 감당하기 힘든데, 1인실은 너무 비싸서...”
두 손을 내젓는 어머니에게 시운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몰랐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렇게 알게 되었는데 어찌 그냥 물러가겠습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제 말대로 따라 주세요. 우리 회사에서 부담하면, 세금 감면도 되고 해서 하는 거니까요.”
“에휴... 그러시다면...”
그렇게 시운은 다시 한 번 여자아이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후 간호사실로 나갔다.
시운이 나가자, 그 어머니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넌 저분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매일 밖에서 놀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아, 혹시 너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야?”
“...”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애가 타서 여자아이를 채근하는데, 여자아이는 그저 시큰둥한 표정에서 변화가 없다.
아직 이 몸에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얻게 된 어머니라는 어린 여자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실 밖으로 나온 시운은 우선 간호사실로 다가갔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김선화인 걸 봐 두었기에, 김선화 환우의 이름을 대고 1인실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보증금이라든가 그동안 밀린 병원비 얘기가 있어서 시운은 바로 대답했다.
“내가 지금 원무과로 가서 지난 병원비와 앞으로의 병원비에 쓸 돈을 미리 내놓을 테니, 우선 1인실 수배부터 해 주세요. 잠시 원무과에 다녀올게요.”
간호사의 안내로 원무과에 가서 그동안 밀린 병원비와 1인실 사용 보증금, 거기에 앞으로 치료를 위한 치료비 선납분까지 일시금으로 지급했다.
관계를 묻기도 했는데, 시운은 그저 단순히 ‘친척’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볼 일을 마치고 다시 병실로 돌아오니, 간호사가 이미 말을 전하고 갔는지, 선화 어머니가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다.
시운은 여자아이 짐이고, 그 어머니의 짐도 있는 듯해서 그냥 병실 문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와서 선화를 앉히고 나왔다.
그 뒤를 선화 어머니가 짐을 챙겨 들고 따라 나왔다.
시운은 그 어머니에게 얼른 다가가서 가진 짐 중에 무거워 보이는 짐을 챙겨 들었다.
그렇게 1인실로 옮기고, 시운이 선화 어머니에게 명함도 건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 주세요. 전혀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앞으로 선화가 공부하겠다면 공부도 시켜주고, 우리 회사에 취직하겠다면 취직도 시켜 줄 거니까 그런 점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그렇게까지나...”
선화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시운은 아까 병실을 나서면서 듣게 되었던 선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안심시켜 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선화하고 어떤 이상한 관계도 없었어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머. 죄, 송해요. 저는 아이가 혹시나...”
“하하하. 저도 선화만 한 딸을 키우는데, 그 마음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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