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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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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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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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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8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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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면술사 (1)

DUMMY

늦은 밤, 한적한 주택가.


한 여자가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올림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꽂은 검은색 비녀가 가로등 불빛에 유독 밝게 빛났다.


살인, 폭행 등 흉흉한 뉴스가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흉흉한 세상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듯 앳된 외모의 젊은 여자가 홀로 걷기에 야밤의 골목길은 너무나 어두웠다. 여태까지 이 골목길에서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여자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는 불상사를 피하려면 당당하게 걸어야 한다던 믿기 힘든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거나.


당당함을 넘어선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누구든 이 모습을 봤다던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리라. 어딘가에 있을 카메라를 찾기 위해 말이다.


여자의 발걸음은 종일 집에서 책을 읽다가 선선한 날씨에 산책을 나온 선비를 떠올리게 했다. 영락없이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풍류를 즐기는 선비였다. 삭막한 건물뿐인 골목에 없던 꽃도 갑자기 생겨날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그러나 그 여유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여자는 어느새 10미터 너머에 서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다음 걸음은 평범한 사람의 보폭과 다르지 않았다.


“불법주차······. 쯧쯧.”


여자는 골목길 가장자리에 주차된 차를 쳐다보고는 혀를 찼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가려진 차 내부를 정확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걸었을 때였다. 다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여자의 모습이 길 위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여자는 10미터 너머에 나타났고, 다시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반복이었다. 주차된 차가 나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멈췄고, 차를 지나치는 순간 다시 땅을 박찼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선비와 같은 여유는 잃지 않았다.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여자가 도착한 곳은 으슥한 곳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이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서자 아르바이트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딱 맞춰 오셨네요.”


“네, 옷 갈아입고 올게요.”


여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장 탈의실로 들어간 뒤 명찰이 달린 조끼를 입고 나왔다.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구선비.


“선비 씨! 그럼 전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이미 조끼를 벗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던 혜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의점을 떠났다.


“아, 수고하셨소.”


선비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혜민의 등을 향해 나지막이 인사를 건넸다. 가녀린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말투였다.


구선비, 21세. 근무를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이 된 신입 아르바이트 직원이자 선비문의 장문인.


신비문은 현대에도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문파다. 선비문의 선비는 널리 알려진 대로 학식 있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이를 말한다.


5년 전, 전대 장문인이 죽은 뒤로 신비문의 구성원은 그녀 혼자가 되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100명에 육박했던 규모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물론 당시에도 존재감이 미미했던 군소문파에 불과했으나 무림은 적자생존. 선비문은 현존하는 최고의 문파가 되었다. 강대했던 다른 문파들은 모두 폐문했으니.


선비문은 무(武)를 연마하는 문파이면서도 문(文)을 강조한 문파였다. 그들은 몸을 단련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언제나 도포와 갓을 썼다. 부득이하게 비무를 벌여야 할 때에도 복장은 변하지 않았다.


선비문의 행태에 조선 무림인들은 은연중 그들을 괄시하고는 했는데, 결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사건 때문이었다. 평소 안하무인이던 거대문파의 장로가 늘 단정하게 갓 끈을 동여매고 다니는 선비문의 장로에게 도를 넘어선 모욕을 준 사건이었다.


훗날 현장에 있던 무림인들은 그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선비문의 장로가 갓 끈을 풀어헤친 순간 상대의 팔이 흙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순간에도 장로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분노도 읽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것이 선비문이 무림에 힘을 보인 유일한 사건이었다. 선비문은 그 이름에 걸맞게 결코 나서는 법이 없었고, 그저 스스로를 수련할 뿐이었다.


그런 선비문의 32대 장문인이 된 구선비가 세상으로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사연은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여느 직원들이 그러하듯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문파에 남아 있던 돈은 31대 장문인의 장례를 치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갔다. 돈과 예. 선비에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언제나 후자일 것이다. 인간의 도리와 전대 장문인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사용한 돈은 1년 생활비에 버금갔으나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의자에 앉아 자리를 지키던 선비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근무교대를 하고 20분이 지났을 때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육중한 발소리와 불규칙한 호흡. 뒤섞인 술과 음식들이 풍겨내는 역한 냄새.


선비는 곧 다가올 일을 예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손님의 정체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취객이었다.


“으흑. 어흐. 크으.”


거나하게 술에 취한 취객의 입에서 역한 냄새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선비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였다. 뇌가 보내는 경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은 머리가 아닌 술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결코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


그러나 지금은 근무시간이다. 결코 싫은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는지 선비의 표정에 동요는 없었다.


취객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웠다. 덩치는 선비에 비해 머리와 어깨가 하나씩 더 있었다. 거대한 덩치 때문인지 움직임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날에는 취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진열대를 쓰러뜨리고 말 것이다.


선비도 그것을 인지하고 취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뿐이다. 편의점 안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섣불리 무공을 쓸 수도 없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취객의 주변을 서성이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취객의 심리는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괜한 화를 불러온다.


“으음?”


선비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취객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선비는 이미 몸을 돌려 담배를 정리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절대 취객과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눈을 마주보는 행위를 그들은 모욕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에 지배당한 그들은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던 야성이 되살아난 상태다. 모욕은 참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상대라면 반드시.


진열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취객은 결국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껌 하나를 던지듯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선비는 침착하게 계산대 위에 널브러진 껌을 집어 바코드를 찍었다.


“500원입니다.”


취객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와 천 원짜리 지폐를 사이에서 고민했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카드결제가 낫다. 직원은 거스름돈을 세지 않아서 좋고, 손님은 귀찮은 동전이 생기지 않아서 좋다.


그러나 취객의 선택은 지폐였다. 지폐를 받은 선비는 거스름돈 500원을 그에게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취객은 이미 껌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껌을 뜯는 일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집중했다.


고민하던 선비는 신중한 손길로 계산대 위에 500원짜리 동전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잘못된 선택이었나? 생각이 들어 동전을 다시 회수하려던 순간이었다.


편의점 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들이닥쳤다. 늦은 밤이지만 그리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선비의 인사에 여학생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삼각김밥과 도시락들이 진열된 곳으로 움직였다. 늦은 저녁 혹은 야식일 것이다.


잠시 선비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린 사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취객은 이미 껌을 씹어야 한다는 과제를 달성했고, 이제는 거스름돈을 집으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바짝 깎은 손톱 탓에 계산대 위의 동전을 한 번에 집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취객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선비가 재빨리 동전을 대신 집으려 했으나 취객의 인내심이란 마른 소면보다 쉽게 끊어졌다.


“이 새끼가!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취객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불과 5초 남짓 한눈을 팔았을 뿐이거늘 취객의 감정은 그 어떤 냄비보다 빠르게 달아올랐다.


선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굽실거리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성미에도 맞지 않다. 맞서 싸우는 것은 더욱 일을 크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자연재해 혹은 불가항력의 사고나 마찬가지다.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알바 주제에 손님 깔보는 거야, 뭐야!”


취객이 인신공격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선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동요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취객의 등 뒤로 놀란 여학생들의 얼굴이 보였고, 바깥에서는 취객의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취객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남자는 지겹다는 얼굴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더니 취객의 팔을 붙잡았다.


“아,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하니까 어서 데려가주세요.”


선비는 이것으로 상황이 일단락 마무리되었나 싶었다. 그러나 일행의 만류에 고분고분해진다면 취객이 아니다.


“아니, 이 새끼가 날 무시하잖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계산대 위의 동전을 줍지 못해 화가 난 겁니다. 불과 5초 만에 화가 났죠.”


선비는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려 했으나 사실 확인을 바라는 일행의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취객의 일행은 쉽게 납득했다. 그리고 취객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어휴, 가자니까. 빨리.”


“너 이 새끼, 내가 내일 다시 온다! 내일 와서 너 죽여 버릴 거야! 너 딱 기다려, 죽일 거니까!”


일행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취객은 선비를 쳐다보며 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생전 처음 듣는 살해협박에 선비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에게 살해당할 리 만무했으나 나중에 일이 커지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선비에게 바깥세상은 아직 낯설기만 했다.


취객이 떠나자 편의점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선비에게 다가왔다.


“언니, 괜찮아요?”


“잘 참았어요. 저런 사람 상대할 필요 없어요.”


“진짜 못됐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흔들렸던 선비의 평정심은 여학생들의 위로의 말에 제자리를 찾았다. 마음씨 고운 여학생들은 순식간에 삼각김밥을 먹어치우고 편의점을 떠났다. 그리고 이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저 왔어요. 왜 참았어요? 저런 사람 봐줄 필요 없어요.”


아르바이트 중인 선비를 찾아온 남자의 이름은 문인수. 선비가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연을 맺은 남자였다.


“분사난(忿思難)이라 하였소. 화가 날 때는 그것으로 생겨날 어려움을 생각하라는 뜻이오. 여기까진 어인 일로 오셨소.”


선비의 말투가 변했다. 선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감시카메라를 경계하게 된 원인제공자이기도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남자의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여전히 그 말투는 익숙해지지 않네요. 왜 왔겠어요? 저랑 계약했잖아요. 영상 찍는 거 도와주기로. 선비가 한 입으로 두 말하진 않겠죠?”


“그렇소. 선비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소.”


“다음 주에 저랑 같이 갈 곳이 있어요. 준비는 제가 다 해놨거든요? 몸만 오시면 돼요.”


“무슨 영상인지 물어도 되겠소?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으리다.”


“음······ 선비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십선비 아니라 구선비잖아요?”


“맞소. 구가요.”


“그러니까요.”


“내가 구가인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오?”


선비가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모습이 인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요즘 유행하는 은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니까······ 열 명의 선비가 아니라 아홉 명의 선비니까 조금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선비의 도리를 지키는 데에 수는 상관없소.”


“네······. 아무렴요.”


선비의 진지한 대답에 인수는 더 이상의 설명을 포기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약점을 잡아서 조금 비겁하게 계약을 했다지만······ 무리한 일은 시키고 싶지 않거든요.”


“의로운 일이라······.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일이라면 기꺼이 힘을 써드리리다. 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라 하였소.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함이니 솔직히 말해주리다. 단연코 현세에 내 적수는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선비의 당당한 말에도 인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인수가 선비의 능력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올해 23세인 인수는 군복무를 마친 뒤 6개월째 비브라TV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다. 생방송을 주로 하며 방송 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편집해서 동영상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생방송 시청자 수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아 일명 하꼬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날도 인수는 평소처럼 새벽 내내 게임방송을 하다가 조금 울적한 마음으로 편의점에 가고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 새벽의 찬 공기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이었다.


인수가 편의점에 가는 동안 카메라를 꺼내 녹화를 시작한 것은 재미있는 영상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UFO 혹은 귀신을 포착하거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 사건을 찍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6개월 동안 인수가 방송을 하면서 번 수입은 불과 5만원. 이미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돈이 되는 영상이 필요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이른 아침부터 조깅을 하던 선비였다. 인수는 본능적으로 선비를 찍었다. 사고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여자라서, 예쁜 여자라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인수는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들을 정리하다가 선비의 영상을 돌려보았다. 비녀를 꽂고 조깅을 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 프레임 단위로 천천히 재생을 한 순간 선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영상 속 선비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담배를 입에 물고 걸어가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몇 프레임 뒤 선비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처음에는 영상이 깨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레임 넘기자 선비는 어느새 아저씨가 입에 문 담배를 향해 손바닥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조깅을 했고, 중년의 남자는 갑자기 산산이 분해된 담배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인수는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매일 하던 방송도 쉬었다. 그토록 원했던 영상이었다. 편집을 잘해서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면 떼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인수는 영상을 들고 선비와 협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무작정 업로드를 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초상권 문제도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영상 속 여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선비를 만나 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카메라는 이미 선비의 손에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영상은 미리 백업을 해둔 상태였기에 협상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협상의 내용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선비는 생각보다 쉽게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 구선비는 문인수의 방송에 1년 동안 출연할 것을 약속한다. 단, 생방송이 아닌 편집된 영상에 한하며 절대 얼굴이 드러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해당 영상으로 발생한 수입의 분배는 구인비와 문인수 각각 절반으로 한다.


- 만약 이를 어길 시에 남은 계약일수와 무관하게 계약은 파기되며, 계약을 어긴 자는 영상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 계약이 만료될 경우, 문제의 영상은 파기하며 계약 중 촬영한 영상들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원할 시 파기한다.


사회경험이 적은 인수로서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적은 계약서였다. 허술하더라도 불공평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살해될까 두려웠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협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선비는 돈이 필요했고, 인수도 돈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들이 함께 일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역시 불안하네요.”


인수의 시선은 선비의 몸을 향했다. 가녀린 몸은 건장한 성인 한 명도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지 움직임이 빠를 뿐 힘은 평범한 여성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지 불안했다.


“무엇이 불안하단 말이오?”


“움직임이 잽싸다는 건 충분히 알겠어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되게 연약해 보여서요. 자칫 잘못해서 힘 센 사람한테 붙잡히기라도 하면 온몸의 뼈가 부러질 것 같아요.”


“내가기공을 주로 연마했기에 일반인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소.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힘으로도 날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내가기공은 이미 본인의 수족과도 같으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오. 이곳은 카메라가 있어 보여줄 수 없으나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는 일도 어렵지 않으니 걱정은 고이 접어두어도 좋소.”


“그렇게 장담하면 믿어야겠죠······?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저희가 처음 만났던 곳에서 만나기로 해요.”


“알겠소. 멀리 나가지는 않을 테니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남녀를 불문하고 흉흉한 세상이니.”


“선비님도······ 아니, 아니에요. 가볼게요.”


인수는 목례를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몸 조심히 근무하라는 인사가 불필요한 오지랖처럼 느껴져 뒷말을 삼켰다.


편의점에서 점점 멀어지던 인수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옷매무새를 살폈다. 단추는 그대로였고, 소매도 잘려나가지 않았다. 카메라도 제자리에 있었다.


선비를 만난 뒤로 좀처럼 읽지 않았던 무협소설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단추를 떼어 간다거나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날로 소매를 자른다거나 하는 질 낮은 장난을 할 리 없었다. 그녀는 선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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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3. 마담 (2) 19.03.13 44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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