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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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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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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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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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08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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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0)

DUMMY

몇 개의 건물을 뛰어넘었을까. 폐건물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선비는 발을 멈췄다. 몸이 무거웠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두루마기가 어깨를 바닥으로 잡아당겼다.


선비는 작은 실핀의 형태로 머리카락 사이에 남아 있는 흑비녀에 다시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흑립과 두루마기는 주위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평상시의 차림으로 돌아간 선비는 옥상 출입구의 처마 아래에서 인수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인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뛰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인수는 얼마 뒤에 도착했다. 어기적거리며 처마 밑으로 걸어온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선비를 쫓아가려 무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바람을 이기지 못해 전부 뒤로 향했고, 좀처럼 다물지 못하는 입에서는 빗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흘렀다.


선비는 인수의 팔을 붙잡고 내공을 흘려보냈다. 선비심공의 기운은 물기를 몰아내고 차갑게 식은 몸을 빠르게 데웠다. 그리고 인수의 기운을 꾀어내어 소주천을 유도했다.


선비의 도움으로 금세 기운을 차렸지만 여전히 인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선비도 마찬가지였다. 선뜻 입을 열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계속됐다.


정적은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아침이 되었어도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빗줄기도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선비님.”


긴 침묵을 깬 것은 인수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선비를 불렀다.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오?”


선비는 대답 대신 물었다. 필사적인 외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손목을 긋던 여인들의 모습이 눈을 뜨고 있어도 아른거렸다.


인수는 대답을 망설였다. 무엇을 묻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 또한 조금 전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렌즈에 담긴 여인들의 모습은 그 어떤 호러 영화보다 섬뜩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겪지 않으면 몰랐을 일이었어요. 그 남자가 해왔던 일은 분명 범죄잖아요. 단지······ 그런 식으로 저항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힘에 걸맞은 일을 하라고 하였소.”


“헛소리에요. 오히려 훨씬 힘에 부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위에 누가 있는지 밝혀내려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알아내는 수밖에 없어요. 정말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전 크든 작든 범죄는 범죄라고 생각해요. 피해가 크지 않다고 방치하면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를 테고, 피해자는 늘어나겠죠? 법을 지키는 선량한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세상은 싫어요.”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행이 부족한 탓일까.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지만 유독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자비를 베푸니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목숨까지 걸고 저항했다. 그것을 무시하기에는 지은 죄에 비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했었다.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만한 힘이 있었기에.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짊어지기에는 무게도, 형태도, 크기도 제각기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손목을 긋는다고 쉽게 죽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알고 있소.”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


“생각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라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소.”


선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물기 가득한 차가운 공기에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인수도 덩달아 숨을 들이켰다. 들썩거리는 어깨에 카메라가 흔들렸다. 그 무게에 어깨가 뻐근했다. 이번 촬영에서도 쓸 수 있는 영상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매만졌다. 영상을 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세상의 이면을 알아가는 두려움이 더 컸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세상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일까요? 어떻게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봤어요? 자기 손으로 상처를 내는데 움찔거리지도 않았다니까요.”


“서고에서 읽은 기억이 있소. 중원의 뒷세계를 지배하던 세력의 간부들이 바다 건너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는 이야기를 말이오.”


“음, 되게 약해 보였는데요.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 같았어요.”


“기록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소. 시정잡배, 기생, 좀도둑과 같은 자들이 대다수라고 말이오. 그렇기에 문주조차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할 만큼 거대한 세력을 지녔음에도 가장 약한 힘을 가졌다고 하오.”


“지금으로 말하면 거대한 조직폭력배 같은 거네요? 그렇게 들으니 좀 무서운데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확신하고 있진 않소. 다만······ 기록에서 그들을 표현할 때 마치 승냥이 같다고 했소. 힘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자가 많아 죽은 무사의 품이나 무덤을 뒤지곤 했다오. 그래서 그들 중 무공을 아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쪽짜리 잡다한 무공들을 익힌 자들이 허다했소.”


“무공을 사용했었나요? 아, 그 날이 발사되는 칼?”


“그것 또한 어딘가에서 얻었을 것이오. 선조에게 물려받았거나.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점은 그 자가 이혼술을 구사한다는 것이오.”


“이혼술이라면······. 그게 뭐죠?”


“혼을 이동하는 사이한 술법 중 하나라오. 일전에 만났던 최면술사가 최면술과 이혼술을 결합한 술법을 사용했다고 말했소. 그 자가 어떤 경로로 이혼술을 습득하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검계와 무관하지 않음은 확실하오.”


“그러고 보니······.”


인수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리철과 그의 쌍둥이는 단 한 번도 함께 깨어 있던 적이 없었다. 한 명이 깨어나면 한 명은 기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장 난 관절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진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순간 떠오른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럼 둘 중 한 명은 이미 죽었다는 말이잖아요?”


“쓰러져 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 여인들에게 달려가기 직전 품에 안고 있던 기리철의 맥박과 기운이 빠르게 사그라졌소. 아주 희미하지만 맥박은 남아 있었으니 적어도 시체는 아닐 것이오. 죽었다기보다······.”


“식물인간에 가깝겠네요.”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점이 다를 것이오. 빈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이미 껍데기에 불과한 몸이니.”


“이혼술이라는 건 대단하네요. 그런 일이 가능하다니······. 몸을 옮기면서 영원히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모르겠소.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쉬운 일이라면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이 많지 않겠소?”


“그렇긴 하겠네요. 쌍둥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려요. 유전적으로 유사해야 한다거나······.”


“그럴지도 모르오. 어찌됐든 까다로운 술법이오. 살생을 할 생각은 없으나 목숨이 적어도 두 개는 된다는 말이니.”


“검계라는 조직도 너무 커 보였는데 이쪽은 더 큰 조직 같은데요? ······우리 괜찮겠죠?”


“앞으로 몸을 조금 더 사려야 할 것이오.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중원무림에서 힘이 약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곳에나 그들의 눈과 귀가 있기 때문이었소. 말하자면 정보를 파는 상인 노릇을 겸했다는 말이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지녔다고 했죠?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워지는데요? 지금 시대에 그런 정보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어후······. 거기다가 소속감도 엄청 강한 것 같던데 무섭네요, 정말.”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 아닌 주변 무리에 대한 소속감이오. 점조직의 형태라 그저 바로 위와 아래에 누가 잇는지 알 뿐이라 하오. 게다가 방금 만난 여인들은 조직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 있을 것이오. 그들에게 조직에 대한 소속감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 아니겠소?”


“그럼 그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겠는데요?”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오.”


선비의 표정이 또 한 번 심각해졌다. 위급했던 지난 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여전히 코끝에 피비린내가 맴돌고, 옥상 바닥에 고인 빗물이 붉게 보일 만큼 생생했다.


무고하다 말할 수 없는 자들. 그러나 리철의 마지막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의의 사도. 도덕적 우월감. 그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할 권리는 없었다.


“어렵구려. 괜한 짓을 벌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오.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소.”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이죠?”


“지금은 힘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사회잖소. 범죄자를 잡기 위해 죄를 짓는 것이 바람직한지 모르겠소.”


“솔직히 말하면 그건 전혀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독립이나 혁명 같은 중대한 사건에 힘쓴 사람들이 법을 지켜가며 행동했다면 그런 위대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음, 사실 요즘 사람들은 법이 절대적인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죽하면 법을 잘 알아야 합법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말이 있겠어요? 합법적인 범죄라니. 이상하죠?”


“합법적인 범죄라. 모순적이오.”


“법도 결국 사람이 만든 거잖아요. 뉴스 보면 계속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하고 그래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합법적인 범죄가 있으면, 불법적인 방범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소.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소.”


“많은 영웅들과 위인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꿨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그 사람들도 선비님과 같은 고민을 했을 거예요, 분명히.”


선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사 속 위인들을 떠올렸다. 먼 과거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불과 수십 년 전의 위인들. 독립을 위해 힘썼던 위인들은 암살도 서슴없이 행하지 않았던가. 다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스스로 짐을 짊어지기로 한 것이리라.


“그대는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선비님이 절 좋게 생각하니까 그런 걸 수도 있고요.”


“그런 것 같기도 하오.”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참, 그나저나 중국에서 넘어온 조직은 이름이 뭐에요? 설마 삼합회는 아니겠죠?”


“하오문이오.”


“하오문······.”


인수가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이 나라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조 원에 달하는 비리에 나라가 떠들썩할 때에도,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긴장으로 가득했던 때에도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는 했건만.


일본과 중국에서 넘어온 범죄자들이 어느 정도로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좁은 땅덩이에 이토록 많은 범죄자를 품고도 겉으로 보기에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선비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건만 벌써 출근시간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비가 그치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선비의 모습에 인수도 떠날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것이 일종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일까. 허공을 밟는 선비와 인수의 발걸음은 무거운 표정과 달리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특히 인수의 움직임은 지난밤에 비해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발아래의 도로에는 하나둘 차들이 늘어났고, 인도는 우산으로 뒤덮였다. 피로 얼룩진 시간이 거짓말 같았다. 격리된 세계의 일인 것처럼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어제와 같은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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