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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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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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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1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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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담 (1)

DUMMY

모든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다. 각막에 새겨진 것처럼 영원히 생생할 것만 같았던 여인들의 모습도 그러했다. 버려진 공사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시간에 의해 서서히 기억의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날 이후로 반려동물 화장차가 버려진 공사장을 드나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범죄를 막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리철. 작은 마을 단위의 생계가 그 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시체를 소각할 것이다.


선비는 더 이상 그를 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매주 사람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건만 세상은 조용했다.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신원불명의 시체. 여인의 말마따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자들이리라. 여인들의 목숨을 대가로 도박을 하면서까지 쫓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보름이 흐른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옥상을 뛰어넘으며 귀가를 하던 인수는 골목을 서성거리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인수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서둘러 한량보를 펼치며 옥상의 난간에 몸을 숨겼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담. 잊고 있던 붉은 기억이 한순간 되살아났다. 인수는 반사적으로 코밑을 매만졌다. 기억과 함께 비릿했던 냄새도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길 바랐고,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했던 것은 그들이었으니. 그러나 마담의 등장이 우연일 리 없었다. 마담의 시선과 발걸음에는 분명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인수는 난간에 몸을 숨긴 채 마담을 살폈다. 혼자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선비는 그들이 하오문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미끼일지도 모를 일이다. 위험의 싹을 자르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주변에 수많은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이다.


인수의 수준으로는 기척만으로 매복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마담은 세 시간 동안이나 골목을 서성거린 뒤에야 발길을 돌렸다. 영업 때문일 것이다. 검푸르던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웠다.


인수는 마담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겼다. 한 번 자라난 의심을 거두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인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장 선비문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묘자진(猫子陣)을 밟는 인수의 발이 더없이 다급했다. 이윽고 진을 벗어나 선비문의 풍경이 펼쳐지자 인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은 연무장에는 선비가 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고에서 보내는 평소와 달랐기에 인수는 의문을 품으며 다가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선비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나와 있어요?”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기에 걱정이 되어 나왔소. 자정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갈 작정이었소. 별일 없이 돌아와 다행이오. 다른 볼 일이 있었나 보오.”


“아, 그게······.”


“그대에게도 사생활이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좋소. 그저 평소와 달라 걱정했을 뿐이오.”


“그게 아니라······. 골목에 마담이 기다리고 있어서 떠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좀 시간이 걸렸어요. 아무 일 없이 지나가서 다음에 또 나타나면 그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마담? 며칠 전에 만났던 그 여인 말이오?”


“맞아요.”


선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인수가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구석으로 밀려나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길지 않은 선비의 인생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선비심공을 익힌 후로는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던 악몽까지 꾸었다.


“매복은 없었소?”


“없었어요. 아니, 모르겠어요. 전혀 못 느꼈거든요. 확실하지 않아서 마담이 떠나고 나서도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었어요.”


“정말 잘하였소.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결코 혼자 오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오.”


“오늘은 운 좋게 걸리지 않았는데 내일도 오면 어쩌죠?”


“당분간 일을 쉬는 편이 낫지 않겠소? 그들이 선비문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몸을 사립시다.”


“쉽게 포기할 성격들은 아닌 것 같던데······. 집에 식재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야겠어요. 며칠이 걸릴지 모르잖아요.”


“길어야 일주일 아니겠소? 단 두 사람이오. 그토록 집요하게 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럴까요? 흐음.”


인수는 방석집 여인들의 눈빛을 떠올리며 본채로 향했다.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냉장고 안을 확인하는 인수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연무장에 앉아 선비심공의 수련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비와 인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마담은 생각 이상으로 끈질겼다. 인수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벌써 선비가 예상했던 일주일을 훌쩍 넘겨 2주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이 짙은 푸른색을 띠자 선비는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묘자진을 지나자 폐허나 다름없는 입구가 나타났다. 선비는 곧장 한량보를 펼치며 그림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


마담의 기척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혼자였다. 늘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이면 골목을 서성거렸고, 밤 10시가 넘으면 발길을 돌렸다. 오늘도 다르지 않으리라.


선비는 마담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다 발을 우뚝 멈췄다. 제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마담의 눈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가더니 흑접선을 펼쳤다. 주입된 내공은 칠흑의 안개로 변하며 선비를 감쌌다. 그리고 빽빽한 안개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안개가 걷히자 그 자리에는 흑립과 두루마기 차림의 선비가 있었다. 흑립으로 얼굴을 가린 선비는 마담의 앞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마담은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선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의 인기척에 집중했다. 매복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담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서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이오?”


“이 주변에서 산다고 들었어요. 참 만나기 어렵네요.”


“그대들의 삶에 내가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아니오? 왜 날 만나려 하였소?”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이라 했소?”


선비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부탁을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정의감에 똘똘 뭉친 사람 같았어요. 실제로도 그렇겠죠? 이유가 어찌됐든 나쁜 짓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성격이잖아요. 고지식해서 결국 아무것도 못했고요. 그래서 제 부탁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단이라고는 하나 범죄조직에 속해 있지 않소? 그런 자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으니 헛수고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시오.”


“조직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이에요.”


마담의 말에 선비는 침묵했다. 흑립 너머로 가만히 마담의 눈을 쳐다보며 진실을 밝혀내려 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태연함 속에 가려진 작디작은 불안감. 그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왜 나가려고 하시오? 목숨을 걸고 조직을 지키려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뭘 위해서 거짓말을 하겠어요?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 하지 않았겠어요?”


선비의 시선이 마담의 손목을 향했다. 긴 소매에 가려져 상처는 보이지 않았으나 손을 쥐지도 펴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짐작케 했다.


“아직도 그날 일이 눈에 선하오. 내 도움이 필요하다 했소?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내게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소?”


“증명······.”


마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생각이 깊어지며 시선도 흐려졌다. 마담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선비를 또 한 번 당황시켰다. 손목을 걷더니 상처를 감싼 붕대를 풀어헤쳤다. 손에는 어느새 꺼내든 작은 칼이 쥐어져 있었다.


“무슨 짓이오!”


선비는 순식간에 마담에게서 칼을 빼앗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다시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손목에는 보기 흉할 정도의 딱지가 앉아 있었다. 선비의 시선이 손목의 상처를 피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마음을 증명할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몸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니오?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소.”


“이걸로 증명이 됐나요?”


“왜 나가려는지 말해주시오.”


“평범한 삶을 원한다는 대답은 너무 진부할까요? 이쪽 세계가 좋아서 남아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왜 나가려고 하냐고요? 지쳤어요. 조직에 속해 있는 것 자체가. 두 눈으로 봤잖아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고 싶어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려주겠소?”


마담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질문을 바꿔보겠소. 하오문 소속이오?”


“······맞아요. 잘 알고 있네요.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요. 보통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검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검계? 들어본 적 없어요. 알다시피 말단이에요. 조직에 속해야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 들어갔었죠. 벌써 오래된 일이지만 직장처럼 오래됐다고 직급이 올라가는 조직은 아니에요.”


“하오문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본거지라든지 배후라든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부탁을 들어주면 되겠네요.”


“역시 알고 있었소?”


“아니에요. 부탁을 들어주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는 말이에요. 하오문은 입문은 쉽고 간단하지만 탈문은 힘들고 어려워요. 들어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들어갔으니까요. 대신 나가려면 심사를 거쳐야 해요. 표식을 남기면 어느 날 답장이 온다고 들었어요. 간부와 만나서 심사를 받게 될 거예요.”


“심사에 따라오라는 말이오?”


“까다로울 거예요. 어떤 요구를 할지 몰라요. 감당할 수 없는 돈을 요구할 수도 있고, 불가능한 과제를 내줄 수도 있어요. 어쩌면 탈문을 거절할 수도 있겠네요.”


“그 말인즉슨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해달라는 뜻이겠구려.”


“그럴 작정으로 정보를 캐고 다니는 거 아니었나요?”


선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범죄조직과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가능성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탈문의 표식을 남기면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어요.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몰라요. 하루? 이틀? 일주일? 어쩌면 한 시간 뒤에 찾아올지도 모르죠.”


“옆에 붙어서 지켜달라는 말처럼 들리오.”


“그 정도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정의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서 부탁했어요. 그리고 우리를 들쑤실 만큼 정보가 궁한 상태라고 짐작했죠.”


“알겠소. 부탁을 받아들이리다.”


“그럼 오늘 밤에 당장······.”


“아니, 2주 뒤에 했으면 하오. 준비가 필요하오.”


“알았어요. 그럼 정확히 2주 뒤 이 시간에 표식을 남길게요.”


“더 알아야 할 것은 없소?”


“없어요. 그저 놓치지 않고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요. 탈문을 시도했다가 좋게 끝났다는 얘기는 못 들었거든요. 완전히 종적을 감춘 사람도 부지기수에요.”


“위험한 일이라는 걸 잘 알겠소. 그럼 2주 뒤에 봅시다.”


선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옥상의 어두운 그늘 아래에 서서 골목을 떠나는 마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실마리가 저절로 굴러들어왔건만 흑립에 가려진 선비의 표정은 심란하기만 했다.


잠시 뒤, 돌아온 선비를 본 인수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오래 걸린다 싶더니······.”


“마담과 대화를 나눴소.”


“네? 설마 매복을······.”


“아니었소. 부탁이 있다고 하더이다.”


“부탁이요?”


“조직을 떠나고 싶은데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소. 탈문 과정이 꽤나 까다로운 모양이오.”


“그러면······.”


“도와주기로 약속하였소. 2주 뒤 이 시간 이후로 마담 주변을 맴돌 것이오. 그래서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이 있소. 그대도 함께 말이오.”


“해야 할 일이요? 무슨 일이죠? 일도 쉬어야 하나요?”


“하오문의 간부를 만나기 위한 준비라오. 자세한 건 내일 알려주겠소. 일은 역시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소. 2주는 짧은 시간이니.”


“하오문의 간부라니······. 알았어요.”


인수의 표정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간부급을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들의 위에 서 있는 간부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을지.


별채로 돌아가는 인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막연했던 선비의 여정이 이제 본궤도에 올랐음을 알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정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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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4. 크리에이터 (5) 19.04.15 15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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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 크리에이터 (3) 19.04.10 1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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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3. 마담 (8) 19.03.27 35 0 14쪽
28 3. 마담 (7) 19.03.25 3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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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마담 (5) 19.03.20 42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40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40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39 0 18쪽
» 3. 마담 (1) 19.03.11 54 0 13쪽
21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0) 19.03.08 48 0 12쪽
20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9) 19.03.06 3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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