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최근연재일 :
2019.05.08 07:33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4,475
추천수 :
6
글자수 :
335,341

작성
19.03.13 06:37
조회
75
추천
0
글자
18쪽

3. 마담 (2)

DUMMY

다음 날 이른 아침. 선비는 비급을 손에 쥐고 연무장에 나왔다. 연무장에는 잠을 설친 인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운기를 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인수는 기운을 단전으로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선비의 손으로 향했다. 선비의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인수의 가슴이 요동쳤다.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설마······.”


“새로운 무공을 배울 것이오. 무림인의 시대가 저물었기에 지금의 경지로도 상대할 자가 없다고 여겼건만 자만이었던 것 같소. 이번에 마주할 자는 간부의 자리에 있는 자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비고에 있던 비급이에요?”


“이건 장문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비급이라오. 선비문의 정신과 맞지 않기에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되었소.”


“금서라니. 그런 걸 막 꺼내와도 돼요?”


“선비문의 특성상 실용성과 무관한 무공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대부분 전승이 끊겨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금서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밖에······.”


“그래도 금서가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기혈이 뒤틀린다거나 악인이 된다거나.”


“그런 사이한 무공이 있다면 이미 불태웠을 것이오. 존재 자체로 위험하지 않소. 이 무공은······ 그러니까 선비정신과 맞지 않아 금서로 지정되었소. 검계가 이토록 세상에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것을 영원히 금서로 남겨두었을 것이오.”


“도대체 그 무공이 뭐길래······.”


선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쥔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비급의 표지에는 수려한 필체로 무공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금서에 담긴 무공은 양상군자라 하오.”


“양상군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무슨 뜻이었죠?”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이오. 도둑 말이오.”


“아, 맞아. 그 뜻이었어요. 도둑. 대들보가 뭔지 몰라서 매번 잊어버리게 돼요.”


인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선비는 본채의 지붕을 가리켰다.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대들보를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지붕 아래를 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지지대가 있다오. 그것을 대들보라 하오.”


“아······! 처음 알았어요. 대들보 위의 군자라. 그림이 그려지네요. 확실히 남의 집 대들보 위에 앉아 있으면 도둑이죠.”


“그렇소. 글자 그대로 도둑이 되는 무공이오. 이 또한 유독 괴짜가 많은 선비문의 선조 중 한 분이 만들었다고 알려졌소. 오로지 발소리와 숨소리 등 인간이 내는 모든 인기척을 죽이는 데에 목적을 둔 무공이라오. 극성에 이르면 자신의 그림자까지 없앨 수 있고, 타인의 등 뒤에 밀착한 채 미행을 해도 알 수가 없다고 하오.”


“말만 들어서는 굉장한 무공 같은데요? 양상군자라는 이름 때문에 금서로 지정한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었을까요?”


“이름 때문이 아니었소. 본래 의적이 되어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 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무공이었으니 선비문 내에서는 그리 환영 받지 못했소. 의도야 어찌됐든 도적질을 하겠다는 말이었으니 말이오. 게다가 효과에 비해 익히기 어렵지 않아 악의를 품은 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사회에 큰 혼란이 올 것이라 여겨 금서가 된 것이오.”


“으음. 듣고 보니 저도 선비문과는 맞지 않는 무공이라고 생각해요.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수단이 나쁘면 공감하기 어렵죠. 그런데 그런 무공을 제가 배워도 될까요?”


“수개월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았소? 그대는 믿을 만한 심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소.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인수는 얼굴을 붉히며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끔씩 선비가 던지는 칭찬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살면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리려면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늘 느끼는 건데 선비님은 절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선비문의 장문인이자 스승으로서 유일한 제자를 향해 보내는 기대와 애정이라 생각하시오. 그래도 부담스럽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더욱 수행하고 노력하면 될 것 아니겠소?”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해요. 선비님 말이 맞아요. 믿음에 부응해야죠.”


“그럼 주어진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수행을 시작하겠소. 우선 구결을 알려줄 테니 잘 기억하시오.”


인수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선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제야 선비의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 있음을 발견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기대와 흥분, 하오문의 간부를 만난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눈치 채지 못했다.


선비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함께하지 않았던가. 생강시를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지의 적에 대한 긴장과 불안감은 다르지 않으리라. 어쩌면 직접 상대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더욱 무겁게 다가올지도 몰랐다.


인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나 든든한 모습에 선비가 느낄 중압감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곤 하지만 역시 중압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함을 모르지 않았다.


양상군자의 구결을 인수에게 불러주며 선비도 구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녀에게도 새로운 무공이었으니 함께 배워야 했다. 빨리 습득해 인수를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양상군자의 구결을 새겨 넣고 체득하는 데에만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은 선비가 당연하게도 먼저 구결을 몸에 익혔고, 이후 인수를 도왔다.


양상군자의 기본자세는 선비와 인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까치발을 세운 채 어깨를 한껏 추켜올린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놈의 그것이었다.


“아, 선비님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도둑놈인데요.”


“······괴짜라 하지 않았소. 일부러 그랬을 것이오. 오죽하면 이름부터 그리 지었겠소.”


“행여나 들키면 큰일 나겠어요. 바로 신고 당하겠는데요.”


인수와 선비는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새로운 무공을 수행하는 과정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반복하여 숙달하는 것뿐.


양상군자를 익히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름과 달리 섬세함을 요구했다. 까치발을 세울 때. 발을 들어 올릴 때. 발이 땅에 닿을 때. 순간순간마다 정확한 기운의 흐름을 요구했다. 자칫 기운의 흐름이 빠르거나 느릴 때면 부작용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인기척을 뿜어냈다.


선비도 까다로운 내공 제어에 애를 먹었다. 인수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경지의 무인처럼 보이겠으나 사실상 옛 무림의 기준에서는 갓 일류의 경지에 돌입한 수준에 불과했다.


온갖 영약을 섭취해 예전에 비해 배로 늘어난 내공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졌던 선비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자만이었는지 깨달았다. 익히기 어렵지 않다는 기록도 당시의 기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움직임에 따른 내공의 흐름을 몸으로 익히는 데에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숙달하는 데에 다시 이틀을 써야 했다. 그리고 진도가 더딘 인수를 가르치는 데에 다시 이틀이 걸렸고, 그렇게 순식간에 일주일이 흘렀다.


선비와 인수의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내려앉았다. 운기로도 씻을 수 없는 피로였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수련에 매진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강행군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정해진 움직임이 아닌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양상군자를 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숙달하는 것뿐이었다.


양상군자 응용수련 1일차. 두 사람은 차례로 연무장을 돌거나 본채와 별채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움직이며 양상군자를 운용했다.


“선비님, 지금 별채 뒤에 있는 거 맞죠? 느껴졌어요.”


“그렇소. 그대 차례요.”


그들은 기척이 느껴진 순간을 서로에게 알려주었고 당시 기운의 흐름을 떠올리며 문제점을 파악했다. 같은 실수가 반복될 때에는 서로의 내공의 흐름을 점검해주기도 했다.


양상군자 응용수련 2일차. 수련의 내용은 같았다. 대신 영역을 넓혔다. 본채와 별채의 벽을 지나는 것뿐만 아니라 대들보 위로 뛰어올라 지나가야 했다.


양상군자는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을 박차는 순간 조금만 힘이 과해도 기척을 들키고 말았다. 문제는 인수였다. 인수의 경지로는 단시간 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손을 밟고 올라가 보겠소? 내공을 제어하는 것에만 집중하시오.”


“선비님 손을요? 음, 알겠어요.”


인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실수로 일을 그르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인수가 선비의 손을 밟는 순간 선비는 힘을 주어 인수를 위로 올려 보냈다. 힘을 줄 필요가 없었기에 인수는 한결 편하게 내공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익숙해질 때까지 합을 맞춘 뒤에야 수련은 계속됐다.


양상군자 응용수련 3일차. 수련은 본격적으로 심화과정에 돌입했다. 활동영역을 첫날보다 줄였고, 장소를 실내로 옮겼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실내는 보다 섬세한 움직임을 요구했다.


한 명이 눈을 감으면 다른 한 명이 기척을 숨긴 채 다가가 눈을 감은 상대의 등을 만지는 수련이었다. 등을 만지는 것에 성공하거나 기척을 들키면 역할을 바꿨다.


“인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만약 들키지 않고 등을 만지는 데 성공하면 비고의 물건 중 원하는 것을 세 가지 가져다주겠소.”


“헛······!”


“비고에는 선조들이 수집한 귀중한 보물들이 아주 많소. 성공하면 목록을 가져다줄 터이니 무엇이든 골라도 좋소.”


깜짝 놀랄 제안에 인수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번졌다. 그러나 이내 평소의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비고의 보물들 대신 다른 걸 받을 수 있을까요?”


“달리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오.”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내공심법도 배웠고, 보법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최소한 선비님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몸을 지킬 수 있는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지금까지 배운 보법들만으로도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만.”


“도망치는 것 말고요. 제 역할이 기록을 남기는 거라고 했었죠? 늘 걱정이 돼요. 촬영을 하다가 기습적으로 다가온 적에게 붙잡혀서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요. 도움이 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선비는 가만히 인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비심공의 정순한 내공을 완전히 받아들인 그의 눈은 이제 호수처럼 맑았다.


전통적으로 선비문의 제자는 악의에 물들지 않도록 정신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청백심공을 선비심공에 앞서 수년간 수련해왔다. 인수는 그런 과정을 생략했음에도 악의 없는 깨끗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선비가 인수에게 다른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걱정 때문이었다. 타인보다 과한 힘을 가졌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겪지 않아도 과거의 기록과 역사가 말해주지 않던가.


선비의 고민이 길어졌다. 짧은 고민으로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인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또한 오랫동안 망설이다 내뱉은 말이었기에 선비의 마음을 이해했다.


선비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에는 해소되지 않은 고민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인수는 선비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 같소.”


“알았어요. 괜찮아요. 그냥 해본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고민을 해보겠소.”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요. 지금은 훈련에 집중하도록 할까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알았소. 먼저 시작하시겠소?”


인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비는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인수는 벽 앞으로 이동했다. 까치발을 들자 단전의 내공이 구결을 따라 흘렀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실내훈련은 이틀 동안 진행됐다. 첫째 날에는 인수도, 선비도 상대의 등을 만지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좁은 실내인데다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기척을 완벽히 죽이고 가까이 접근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째 실내훈련에서 선비는 손쉽게 인수의 등을 만지는 데에 성공했다. 그에 비해 인수는 좀처럼 선비의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했다. 시도하는 족족 기척을 내며 들키고 말았다.


인수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인수의 실패를 지켜보는 선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고민이 깊었다. 어제의 제안이 오히려 역효과였을까. 남은 시간은 불과 3일. 실질적으로는 이틀뿐이었다.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는 동행하기 어려울지 몰랐다.


양상군자 응용수련 5일차. 선비와 인수는 하늘이 아직 어둑한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에 나왔다. 운기를 위해 바닥에 앉는 선비의 얼굴에는 지난밤 동안의 깊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운기를 끝낸 선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실내훈련은 더 이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오늘은 대결을 할 것이오.”


“대결······이요?”


인수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무엇을 대결하든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선비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술래잡기를 할 것이오. 그대가 달아나면 5분 뒤에 내가 움직이겠소. 가만히 숨어도 좋고, 계속 이동해도 좋소. 만약 기척을 들킨다고 하더라도 다시 기척을 숨기며 달아나 내가 찾지 못한다면 괜찮소. 물론 나 또한 기척을 숨긴 채 찾아다닐 테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쉽지 않은 수련이겠어요.”


“제한시간은 한 시간이오. 그대가 한 시간 내에 잡히면 운기를 하고 다시 시작하겠소. 술래는 바뀌지 않소.”


선비의 표정과 말투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인수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래잡기를 준비하려 몸을 푸는 인수의 얼굴에 긴장이 번졌다. 스트레칭을 하며 손발을 풀고 구결을 되뇌었다. 그리고 대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수련을 시작하기 직전, 선비가 인수를 불렀다.


“그대가 이번 술래잡기에서 끝까지 도망에 성공한다면 군자검법을 전수해주겠소.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오. 5분 뒤에 출발하겠소.”


“아······! 아, 알겠어요!”


인수는 당황스러워하며 서둘러 선비에게 멀어졌다. 본채 뒤에 도착한 그는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토록 원했던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인수의 머릿속에 군자검법을 펼치는 자신의 모습이 재생됐다. 선비의 등을 노리는 적. 그 순간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흔들리는 검. 그 끝에서 피어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생각만으로도 벅차올랐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아야 했다. 지금도 착실히 시간을 흘러만 갔다.


한 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가만히 서서 양상군자를 펼치기만 해도 버거울 것이 틀림없었다. 내공의 안배가 필요했다. 찰나의 낭비가 몇 번인가 쌓이다 보면 선비에게 잡히기도 전에 제풀에 지쳐 기척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순식간에 5분이 흘렀고, 인수는 양상군자를 운용하며 선비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연무장을 벗어난 순간 선비 또한 양상군자를 펼쳤기에 선비의 모든 기척은 금세 사라졌다.


며칠 동안 겪었던 부자연스러운 정적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졌기에 인수는 침착하게 눈으로 선비의 움직임을 쫓았다. 지붕으로 몸을 날리는 선비의 모습을 포착하자마자 인수는 처마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선비가 있던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허를 찌르려는 나름의 계략이었다.


인수의 계략은 먹혀들었다. 선비는 인수와 멀어졌다. 인수는 선비의 행적을 눈으로 쫓으며 자리를 지켰다. 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괜한 움직임을 줄였다.


본채와 별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요리조리 선비를 피하던 인수는 한순간 시야의 사각으로 사라진 선비를 놓쳤다. 그 뒤로 감에 의지해야 했던 인수는 얼마 가지 못해 잡히고 말았다. 술래잡기를 시작한 지 막 30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그 이후로 인수는 여러 계략을 써가며 선비를 따돌리려 시도했다. 일부러 기척을 낸 뒤 다른 곳으로 빠르게 움직이기도 했고, 양상군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척을 줄여주는 한량보를 이용해 빠르게 선비의 주변을 벗어나기도 했다.


몇몇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불과 5분을 남겨두고 선비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내공이 조금 더 여유 있었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인수는 아쉬운 마음에 선비를 쳐다보았으나 선비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운기에 들어갔다.


술래잡기는 자정이 되도록 계속됐다. 인수는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로 다음 날을 기약해야 했다. 자리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도 선비를 따돌릴 방법을 고민했다.


양상군자 응용수련의 마지막 날. 인수는 선비보다 일찍 연무장에 나와 운기에 들어갔다. 몇 번의 소주천을 마치고 눈을 뜨는 그의 얼굴이 상기됐다. 훈련의 성과일까. 혈도를 따라 흐르는 기운의 흐름이 눈에 띄게 유연했다. 한정된 내공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다보니 내공을 다루는 전반적인 능력이 짧은 시간에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인수는 선비의 혜안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어제보다 나은 가능성을 느꼈다. 어쩌면 오늘이라면, 이라는 기대가 가슴을 두드렸다.


“오늘은 다를 거예요, 선비님.”


“기대하겠소.”


선비는 인수의 선전포고가 싫지 않은지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리고 인수에게 등을 돌리며 눈을 감는 것으로 수련의 시작을 알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7 4. 크리에이터 (15) 19.05.08 46 0 15쪽
46 4. 크리에이터 (14) 19.05.06 65 0 15쪽
45 4. 크리에이터 (13) 19.05.03 44 0 14쪽
44 4. 크리에이터 (12) 19.05.01 51 0 17쪽
43 4. 크리에이터 (11) 19.04.29 44 0 15쪽
42 4. 크리에이터 (10) 19.04.26 54 0 14쪽
41 4. 크리에이터 (9) 19.04.24 44 0 15쪽
40 4. 크리에이터 (8) 19.04.22 51 0 14쪽
39 4. 크리에이터 (7) 19.04.19 55 0 18쪽
38 4. 크리에이터 (6) 19.04.17 55 0 15쪽
37 4. 크리에이터 (5) 19.04.15 48 0 18쪽
36 4. 크리에이터 (4) 19.04.12 65 0 14쪽
35 4. 크리에이터 (3) 19.04.10 46 0 16쪽
34 4. 크리에이터 (2) 19.04.08 60 0 17쪽
33 4. 크리에이터 (1) 19.04.05 55 0 13쪽
32 3. 마담 (11) 19.04.03 66 0 21쪽
31 3. 마담 (10) 19.04.01 87 0 15쪽
30 3. 마담 (9) 19.03.29 62 0 18쪽
29 3. 마담 (8) 19.03.27 72 0 14쪽
28 3. 마담 (7) 19.03.25 88 0 14쪽
27 3. 마담 (6) 19.03.22 81 0 12쪽
26 3. 마담 (5) 19.03.20 69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82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70 0 13쪽
» 3. 마담 (2) 19.03.13 76 0 18쪽
22 3. 마담 (1) 19.03.11 163 0 13쪽
21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0) 19.03.08 88 0 12쪽
20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9) 19.03.06 67 0 10쪽
19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8) 19.03.04 84 0 16쪽
18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7) 19.03.01 77 0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