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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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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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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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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2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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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담 (6)

DUMMY

선비는 신중히 노인의 힘을 가늠하려 했다. 태양혈만으로는 상대의 능력을 확신할 수 없음을 이미 몇 번이나 겪지 않았던가. 나이로 장로의 자리를 꿰찬 것은 아니리라.


노인은 세상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듯 앉아 있었다. 그에 반해 선비는 정적이 길어질수록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려 선비심공의 기운을 끌어올려야 했다.


사람보다 큰 석재의자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은 노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근거 없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하오문의 장로라는 감투.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 비밀스러운 근거지. 어둑한 조명과 거대한 석재의자. 일말의 긴장감이나 조바심도 없는 당당한 태도. 노인은 존재만으로도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흑접선을 손에 쥔 선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인의 발산하는 위압감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호승심.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마음이었다.


“장문인에게 한 가지 묻고 싶군요. 저 여주인을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하오문과 전면전을 할 작정이었습니까?”


정적을 깨는 노인의 질문이었다. 선비는 힘주어 쥐었던 손을 느슨히 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그와 함께 고개를 내밀었던 호승심도 다시 모습을 감췄다.


“아니오. 다만 대화로 풀어갈 수 있다는 기대도 없었으니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 않을 작정이었소.”


“하오문을 적으로 돌리면 세상살이가 굉장히 피곤해질 텐데 괜찮겠습니까?”


선비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인수가 마음에 걸렸다. 정보력 하나로 살아남은 하오문이다. 그저 조직 내에 흩어진 정보를 취합하는 것만으로도 인수의 존재를 알아내리라.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까?”


“······선비는 한 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소. 마담의 탈문을 돕겠다고 약속한 이상 지킬 것이오.”


“기어코 하오문과 척을 지겠다 이 말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면.”


“흐음. 다른 방법이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선비문에서 위약금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위약금에 상응하는 어떤 것?”


선비는 비고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고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무기였다. 이들이 선조들이 남긴 유산에 누군가의 피를 묻힐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12억은 천문학적인 액수요.”


“개인에게는 그렇겠지만 조직에게는 아니지요. 선비문에도 유산들이 많을 겁니다. 가령 비급이라던가?”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접선을 쥔 선비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단전의 기운도 혈도를 타고 뛰쳐나갈 기세로 꿈틀거렸다. 두루마기마저도 이에 동조하듯 나풀거렸다.


갑작스레 험악해진 기운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아, 오해하지 마시지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비급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쯤 잘 알고 있습니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선비문의 곳간은 그리 풍족하지 않소.”


“알다마다요. 선비문의 이름이 괜히 선비문이겠습니까. 오랜 전통을 가졌으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혹시나 해서. 세월이 지나면 가치가 올라가는 것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장문인은 지금 떼를 쓰고 있어요. 나는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장문인은 지금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이 말입니다.”


노인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침착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이에 선비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노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라면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던가.


들썩이던 단전의 기운을 갈무리하고 선비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생각에 잠긴 채 선비는 무심코 주변을 살폈다. 흑립에 가려진 선비의 눈이 노인의 거처를 천천히 담아냈다.


긴박했던 흑풍회와의 격전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집의 자재는 방벽을 둘러싼 대나무 정원에서 공수한 모양이었다.


곳곳에 매달린 호롱불은 이곳의 유일한 조명이었다. 동이 틀 무렵 마담이 납치를 당했으니 하늘이 환할 터인데 어디에서도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좀처럼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답답한 공간이었다. 아무리 밑바닥의 질서를 관장하는 하오문이라지만 장로급이나 되는 노인의 거처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의아함을 품은 채 주변을 살피던 선비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노인의 석재의자였다. 등받이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의자 주변을 둥글게 감싼 돌벽은 놀랍게도 수납장이었다. 그 안에는 빈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빈 술병들을 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선비의 뇌리를 스쳤다. 선비문 지하에 있는 양조장, 백학당(白鶴堂)이 그것이었다. 선비는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전대 장문인이 하늘로 떠난 뒤로는 완전히 잊혀 방치된 상태였다.


“술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오.”


“음? 아아, 이거 말입니까? 유일한 낙입니다. 선비들은 풍류를 즐겼다던데, 어떻습니까?”


“술은 즐기지 않소. 다만 역대 장문인들은 술을 많이 좋아했으니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말은 사실이라 생각하오. 오죽하면 양조장이 따로 있겠소.”


“호오. 양조장이 있단 말입니까?”


노인이 반색하며 물었다. 다소 격양된 목소리였다. 술에 대한 꾸밈없는 관심이 느껴졌다. 위압감마저 느껴졌던 장로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노인만이 남아 있었다.


“백학당의 술을 마시고 나면 현대의 그 어떤 술로도 만족할 수 없다고 언젠가 전대 장문인이 말씀하셨소.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양조기술이 개선되어 왔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오.”


“천 년······!”


노인은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천 년의 세월이 담긴 술을 상상하는지 눈의 초점마저 흐려졌다.


선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노인을 지켜보았다. 충분히 상념을 즐기길 기다렸다. 노인의 얼굴에 서서히 열망이 깃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원한다면 술을 좀 가져다줄 수도 있소.”


“호오······!”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한 번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내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지요. ······허. 좋은 시도였습니다, 장문인. 하지만 술 한 병의 가치가 아무리 높다한들 위약금의 액수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겁니다.”


“원하는 만큼 주겠소.”


“원하는 만큼이라······. 아무리 그래도, 흐음.”


노인은 이전과 같은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숨길 수 없는 내적갈등이 얼굴에 드러났다. 노인에게 술은 단순한 관심사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모양이었다.


“이러면 어떻소? 며칠 뒤에 술을 가져올 테니 맛을 보고 결정하는 건?”


“며칠 뒤?”


“지금은 양조장에 남아 있는 술이 없을 것이오. 술이 가진 본래의 맛을 끌어내려면 숙성이 필요하고 들었소만 귀공이라면 그것을 감안하여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소.”


선비의 말을 듣고 노인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주당에게 이보다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선비의 의도를 알면서도 노인은 주책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진열장을 쳐다보았다. 대다수가 빈 술병이었다. 그중에는 언제 마셨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까마득히 오래된 술병도 많았다. 한동안 그것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선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오. 더 길어질 수도 있소만 최대한 서둘러 보겠소.”


“일주일 이상이라······.”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마담의 처분을 조금 늦출 뿐 아니오? 마담이 하오문의 눈과 귀를 속이고 평생을 도망 다닐 수도 없을 터. 귀공이 우려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오만.”


노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마담을 향했다. 긴 시간 동안 중압감에 시달리며 제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기에 마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늘 가면처럼 쓰고 있던 침착한 표정도 유지하지 못했다.


반평생을 향락가에서 지내온 여인에게 자력으로 하오문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당사자이건만 이 대화에서 마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 정의의 사도처럼 선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탈문은 영원히 뜬구름 같은 이야기에 불과했으리라.


“열흘. 열흘 주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열흘 뒤에 마담과 함께 다시 찾아오겠소.”


선비는 마담을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장로의 눈치를 보던 마담도 종종걸음으로 선비를 뒤따랐다.


“아, 그렇지. 장문인.”


노인이 떠나는 선비를 불러 세웠다. 선비는 걸음을 멈추고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흑풍회는 언제 깨어나지요?”


“대략 30분 정도 뒤면 깨어날 것이오.”


“조심할 점은 없습니까? 깨어나자마자 움직이면 후유증이 생긴다거나.”


“기절한 것뿐이오. ······걱정이 되면 침대로 옮기시오. 단단하고 찬 바닥에 장시간 누워 있으면 근육통이 생길 수 있으니.”


“흐음. 알겠습니다. 열흘 뒤에 보십시다, 장문인.”


노인의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선비와 마담은 하오문의 근거지를 둘러싼 방벽을 지나쳤다. 등 뒤로 노인의 목소리와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서 안으로 옮겨라.”


노인의 명에 흑풍회는 대답도 없이 서둘러 동료들을 안으로 옮겼다. 선비와 마담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선비는 휘어진 철문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나중에 이것을 보고 화를 내며 마음을 바꾸진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뒤따라오던 마담은 휘어진 철문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선비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인수를 보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인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담에게 목례를 건넸다. 침착함을 되찾은 마담은 그제야 인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선비를 번갈아보더니 지난날의 자초지종을 깨달았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장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철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카메라를 든 인수가 앞장섰고 그 뒤를 선비와 마담이 뒤따랐다. 인수의 기척을 따라 걸을 만큼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마담은 선비의 두루마기 자락을 부여잡고 걸을 뿐이었다.


부지런히 걷고 걸었다. 그렇게 한참 뒤에 세 사람은 길고 긴 틈새와 하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공사장의 맨홀이 열리고 세 사람이 차례로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밤을 지새우고도 멀쩡한 인수와 선비와 달리 마담의 몰골은 초췌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 완전히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자리에 있었으니 다른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오. 열흘 뒤 가게 문을 닫는 시간에 맞춰 이곳에서 기다리겠소. 허튼 짓은 하지 마시오. 아무도 없는 산속에 숨어 살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오.”


“알겠어요.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선비는 대답 대신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접선을 펼쳐 얼굴을 가리며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승천하는 신선과 같았다.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인수도 급하게 마담에게 목례를 하고는 선비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선비보법의 유려한 자태는 인수마저도 또 한 명의 신선처럼 보이게 했다.


대낮임에도 정적하기 그지없는 공사장에 마담은 홀로 남았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은 피로에도 마담은 좀처럼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여운에 잠겨 있더니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공사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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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 크리에이터 (3) 19.04.10 1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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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3. 마담 (8) 19.03.27 35 0 14쪽
28 3. 마담 (7) 19.03.25 39 0 14쪽
» 3. 마담 (6) 19.03.22 38 0 12쪽
26 3. 마담 (5) 19.03.20 42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40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42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40 0 18쪽
22 3. 마담 (1) 19.03.11 55 0 13쪽
21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0) 19.03.08 48 0 12쪽
20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9) 19.03.06 34 0 10쪽
19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8) 19.03.04 47 0 16쪽
18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7) 19.03.01 48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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