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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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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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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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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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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담 (7)

DUMMY

늦은 오후. 하오문의 장로와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비와 인수는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본채 뒤쪽의 담벼락 아래에 모였다.


담벼락 아래 바닥에는 네모난 나무문짝이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에 흙먼지가 수북했다.


“이곳이오.”


“몰랐어요. 이런 곳이 있는 줄. 양조장이라니. 선조들이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셨나 봐요.”


“안빈낙도라지만 다들 술은 포기하지 못하셨던 모양이오. 술에 쏟은 정성을 무공에 쏟았다면 강대문파가 되었으리라 생각하오.”


“그럼 다른 문파들이 폐문할 때 함께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오.”


선비는 반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흑접선을 펼치더니 바람을 일으켜 나무문짝을 뒤덮은 흙먼지를 몰아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나무문짝의 외관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끔했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가 묻어났다. 입구에서부터 선조들이 양조장을 얼마나 끔찍이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무문짝을 열자 양조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이어지는 완만하고 평탄한 내리막길이었다. 인수는 양조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가져온 촛불에 불을 붙였다.


“손전등을 하나 사놔야겠어요.”


“그러는 게 좋겠소.”


선비와 인수는 촛불에 의지해 아래로 내려갔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내리막길은 어느새 평지가 되었고, 그 앞에 또 다른 나무문짝이 나타났다. 같은 장인이 만들었는지 비슷한 모양새였다.


“되게 가깝네요.”


“본채 바로 옆인 것 같소.”


양조장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슬쩍 잡아당기자 나무문짝이 놀랄 만큼 부드럽게 스르르 열렸다. 얼마나 부지런히 유지보수를 해왔는지 천 년의 세월이 무색했다.


양조장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도 충분한 크기의 항아리가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섰다. 어림잡아 스무 개. 선비문의 규모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많은 수였다.


인수는 늘어선 항아리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상상 이상인데요? 기껏해야 한 번에 대여섯 병씩 생산하는 작은 양조장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놀란 건 마찬가지요. 술이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선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스무 개의 항아리는 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죠?”


“예상했던 일이오. 술독에 술이 남아 있었다면 전대 장문인께서도 아쉬움에 눈을 감지 않으셨을 테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야기에 인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양조장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내 걱정이 가득했다.


“······안 알려진 전통주 파는 곳이라도 있는지 찾아볼까요?”


“말하지 않았소. 술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오. 온전히 보관되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소.”


“그럼······.”


“직접 술을 만들 것이오.”


“네? 술을요? 직접? 아니, 양조장도 처음이라면서요.”


“백학당 안에 백학주의 비법이 있다고 하였소.”


“여기서 만든 술이 백학주인가 보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했어야 하지 않아요? 열흘 안에 술을 빚을 수 있어요? 된다고 해도 맛이 있을지······.”


“전대 장문인께서는 술이 떨어질 즈음이면 백학당에 들르곤 하셨소. 그렇게 열흘 무렵을 들락날락하다보면 어느새 새 술이 손에 들려 있었다오.”


“숙련된 상태라 가능했던 거 아닐까요? 저흰 걸음마부터 배워야 하잖아요.”


“장로를 설득하려면 어쩔 수 없었소. 마음 같아서는 한 달 이상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랬다면 설득이 어려웠을 것이오.”


대화를 나누며 백학당 내부를 둘러보던 선비는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겉표지에는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백학주 양조술>이라 쓰여 있었다.


선비는 촛불에 의지해 책장을 넘겼다. 책 안에는 효모를 만드는 법과 쌀과 물을 고르는 법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선비의 눈이 빛났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책의 뒷부분에는 백학주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구결이 적혀 있었다. 백학양조수(白鶴釀造手)라 부르는 무공의 구결이었다.




백학양조수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맛있는 술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빚을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민에서 탄생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개선되어 온 백학주는 비로소 백학양조수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심공을 익힌 자라면 경지에 무관하게 누구나 손수 만든 백학주의 향에 취할 수 있으리라. 선비문의 제자가 아닌 자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니 모종의 사정으로 이 책을 손에 넣었다면 괜한 시도를 할 시간에 주막에서 동동주나 사먹길 바라는 바이다.


한마디 당부의 말을 덧붙이자면 이 책의 내용을 반드시 따르길 바란다. 찰나의 게으름에 눈대중으로 양을 측정하거나 시간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백학주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맛과 향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기고만장하여 섣불리 개량을 시도하지 말라. 제아무리 그대가 몇날며칠의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라 할지라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선조들이 이미 시도했던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함을 인지하라.




책의 마지막 장에 덧붙여진 글귀였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백학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책 어디에도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맥락상 백학양조수를 창시한 선조가 남겼을 것이라는 짐작만이 가능했다.


책을 들고 바깥으로 나오자 어느덧 하늘은 어두웠다. 선비와 인수는 본채의 서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며 백학양조수의 구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책은 한 권뿐이었기에 두 사람은 속력을 맞춰야 했다.


백학양조수의 구결은 선조가 남긴 첨언 중 ‘경지에 무관하게 누구나’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간단했다. 한 가지 답답한 점이 있다면 구결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학양조수는 존재감이 미미한 무공이었다. 손끝과 손바닥에서 어떤 기운이 아주 약하게 발산되는 느낌만이 존재했다. 초식의 차이라고는 고작 느껴지는 기운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정도. 그것이 전부였다.


기운의 정체는 <백학주 양조술>의 앞부분을 한 차례 정독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룩을 만들고, 물의 맛을 결정하고, 발효과정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그야말로 오로지 양조를 위한 무공이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열흘 안에 가능할 것 같소. ······고민이오. 역할을 나눠서 함께 술을 빚을지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각자 만들어 맛을 비교해볼지.”


“같이 만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우리 둘 다 처음이잖아요. 재료의 양과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맛이 안 날 거라고 책에서도 경고하는 걸 보면 실수를 줄이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대의 의견에 따르겠소. 일리 있는 말이오.”


“그런데 재료는 어쩌죠? 음식이나 술이나 재료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전국에서 좋은 것들 공수해서 쓰고 그러던데 우린 돈도 빠듯하고, 시간도 촉박해요.”


“어쩔 수 없지 않소. 상황이 허락하는 내에서 해봅시다.”


“그럼 내일 날 밝으면 마트에서 재료를 사올게요.”


“알았소. 이만 쉬도록 합시다. 내일부터 한동안 바쁜 나날이 계속될 것이오.”


선비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에 인수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자러 갈게요. 고생 많았어요, 선비님.”


“고생 많았소. 잘 자시오.”


“선비님도 잘 자요.”


늦은 취침인사를 나누고 인수는 별채로 돌아갔다. 인수가 떠난 뒤에도 선비는 한동안 서고를 떠나지 않았다. 다시 <백학주 양조술>을 펼쳐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잠시 뒤 선비도 책을 덮고 침실로 향했다. 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는 선비의 눈빛이 아련했다. 바쁘게 살아온 탓이리라. 부모나 다름없었던 전대 장문인의 향수를 지금에서야 느끼게 된 것은.




* * *




이른 아침부터 외출에 나섰던 선비와 인수가 돌아오자 백학당 입구에 짐이 한가득 쌓였다. 쌀 두 포대, 통밀 두 포대 그리고 생수 묶음이 네 개나 되었다.


두 사람은 곧장 운기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도 옥상을 뛰어넘어 왔기 때문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범벅이 될 만큼 무거웠다.


먼저 운기를 마치고 한숨을 돌린 선비는 입구에 놓은 짐들을 백학당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등잔에 새로 사온 기름을 채워 불을 붙였다.


은은한 붉은 조명이 백학당 내부를 밝혔다. 잘 관리된 유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밤 작은 촛불에 의지했던 풍경과는 또 달랐다. 운기를 마친 인수도 발을 들이자마자 감탄을 내뱉을 만큼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기서 술을 만들고 있으면 장인이 된 기분일 것 같아요.”


“동감이오. 왜 진작 오지 않았는지 후회스럽소. 시간에 쫓겨 술을 빚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오.”


“앞으로도 시간은 많잖아요. 이러다 선비님도 술을 즐기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라는 확답은 하지 않겠소.”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백학당의 분위기는 평생 술에 입을 대지 않았던 선비조차도 술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곧 현실로 돌아왔다.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비는 <백학주 양조술>을 펴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정했다.


“가장 먼저 누룩을 만들어야 하오. 먼저 절구로 통밀을 빻아 통밀가루를 준비해주시오. 난 그동안 백학수를 만들고 있겠소.”


“본격적인 시작이네요.”


인수는 긴장된 표정으로 통밀 포대를 양손에 들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백학당 안쪽에는 절구부터 크고 작은 그릇까지 술을 빚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곧 백학당 안에는 절구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통밀을 빻는 인수의 자세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백학주를 빚기에 좋은 누룩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되는 통밀을 너무 곱지도 굵지도 않게 빻아야 한다고 했다. 적당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인수가 절구질에 열중하는 사이 선비는 빈 나무통에 생수를 채웠다. 누룩을 만들 때 사용할 백학수(白鶴水)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손목 깊이까지 담은 물에 손을 담갔다. 백학양조수의 첫 번째 초식인 가향수(佳香手)를 운용하자 손끝에서 미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물 표면에 잔물결에 일었다.


가향수는 질 좋은 누룩을 만들기에 최적의 맛과 향, 온도를 유지한 물을 만드는 초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변화라고는 잔물결뿐이었다. 직관적인 보통의 무공과 달리 백학양조수의 모든 초식은 술이 완성되기 전에는 효과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졌다.


선비는 손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책에서는 백학수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온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기에 차갑게 식은 물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백화수의 적정 수온은 체온과 비슷한 온도. 선비는 물의 온도가 체온과 비슷해지길 기다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와 달리 수온은 좀처럼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차갑게 느껴졌다.


고민에 빠졌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백학양조수의 구결이 잘못되었을 리는 만무했다. 어린아이조차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만큼 간단했으니.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까 기다렸지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수온은 차갑기만 했다. 선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에 담갔던 손을 뺐다.


“인수. 이리로 와 보겠소?”


“왜요? 잘못됐어요?”


절구질에 열중이던 인수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선비에게 다가갔다. 절구통에는 이미 잘 빻은 통밀가루가 가득했다.


“어찌된 일인지 백학수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오. 그대가 한 번 해보지 않겠소?”


“그래요? 이상하네요. 음, 선비님이 못한 걸 제가 한다고 될 것 같지 않은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아봐야 하니 말이오.”


“흠. 해볼게요.”


인수는 곁에 있는 생수로 손을 씻고 선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무통에 손을 넣었다. 과정은 다르지 않았다. 백학양조수의 가향수가 인수의 손에서 펼쳐지자 물 표면에 잔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나무통에 담긴 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인수는 물의 변화에 감각을 집중했고, 선비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 전체로 느껴지는 변화에 그는 고개를 들어 슬쩍 선비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선비도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어떻소?”


“······물이 조금 따뜻해지는 거 같아요.”


인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선비는 곧장 나무통 안에 손을 넣어 수온을 확인했다. 확실히 물은 조금 전에 비해 따뜻했다. 시간이 흘러 자연히 냉기가 날아간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확실히 다르오.”


“······뭐가 다른 걸까요? 선비님의 기운이 더 정순하고, 기술도 더 정교할 텐데요.”


“아무래도 백년설삼의 영향으로 한기를 머금게 된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오. 선비문의 제자가 아니면 무용지물이라더니. 백학양조수를 온전히 펼치려면 순수한 선비심공의 기운이 필요한 것 같소.”


선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선비문의 장문인이건만 순수한 선비심공의 기운이 필요한 무공을 펼치지 못한다니. 너무도 모순적이지 않은가.


상념에 빠진 선비의 모습에 인수는 눈치를 보며 나무통에서 슬며시 손을 뺐다. 그 또한 이제는 어엿한 무림인이었기에 선비가 느끼고 있을 기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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