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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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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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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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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담 (8)

DUMMY

그때 정신을 차린 선비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물이 담긴 나무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나무통을 붙잡고 옆으로 기울이더니 급기야 담겨 있던 물을 쏟아버렸다.


이에 놀란 인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선비의 눈치만 보았다. 그 사이 나무통을 완전히 비운 선비는 다시 생수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반드시 따르라 하였으니 온전히 순수한 선비심공의 기운으로만 백학수를 만드는 편이 좋을 것이오. 힘들겠지만 그대가 홀로 백학주를 빚어야 할 것 같소.”


인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곁에 쌓여 있는 쌀 포대와 통밀 포대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백학주의 양조 과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히 전 과정에서 백학양조수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신 백학양조수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내가 도맡겠소. 그럼에도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걸 잘 안다오. 할 수 있겠소?”


“······해야 하는 거잖아요? 해야죠. 일단 해보고 결과를 봐야죠.”


“알겠소.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바로 시작합시다.”


선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절구로 향했다. 백학당 안에는 다시 절구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절구질 소리를 들으며 인수도 나무통에 담긴 물에 손을 담갔다. 가향수의 구결을 따라 기운을 끌어올리자 곧 물결이 일었다.


늦가을의 냉기를 머금고 있던 물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따뜻함을 느낄 정도에 이르자 수온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백학수가 완성되기까지는 40분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나무통 안에는 물결만 일었다. 다른 변화는 없었다. 인수에게는 지루한 시간이 계속됐다. 그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절구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변화를 느낀 것은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인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무통 속의 물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여 물 표면에 코를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냄새는 다시 코끝을 스쳤다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반복이었다.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며 관심을 돌리면 슬쩍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름 모를 꽃의 은은한 향기 같았다. 의식하면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버렸다. 기억을 더듬어야만 남기고 간 흔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인수는 물에서 손을 뺐다. 완성된 백학수는 겉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향기를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물과 같았다.


때마침 선비도 절굿공이를 손에서 놓았다. 곁에는 통밀가루를 옮겨 담은 나무통이 네 개나 되었다.


다음 단계는 온전히 인수의 몫이었다. 통밀가루와 백학수를 섞어 누룩이 될 반죽을 만드는 과정. 그것 또한 백학양조수의 손길이 필요했다.


“운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아직 팔팔해요. 괜찮아요.”


“반죽해야 할 통밀가루가 이토록 많은 데도 말이오?”


선비가 나무통들을 가리켰다. 통밀가루가 든 네 개의 나무통은 얼핏 보기에 많지 않아 보였으나 무려 두 포대의 통밀을 빻은 결과물이었다. 그것들을 반죽하는 모습을 상상한 인수는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인수가 운기를 하는 사이 선비는 주변을 정리하며 누룩을 만들 준비를 했다. 백학수가 든 나무통을 들어 통밀가루 옆에 옮겨 놓았고, 백학수를 풀 커다란 나무국자도 함께 놓았다.


선조들이 누룩을 만들 때 사용했을 나무틀과 헝겊도 미리 가져다 놓았다. 헝겊조차 예사 물건은 아닌지 긴 세월에도 해지거나 삭은 흔적이 없었다. 천잠사에 버금가는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수가 운기를 마쳤다. 짧은 시간 동안 달라진 주변 모습에 그는 머쓱한 얼굴로 통밀가루가 든 나무통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주도적인 역할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선비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던 그였으니.


“준비가 되면 말해주시오.”


선비가 인수의 곁에 서며 말했다. 손에는 벌써 나무국자가 들려 있었다.


“네? 물 푸는 건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지금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렇소.”


“그렇다면야······. 준비됐어요. 흠흠.”


어색함을 숨기려 인수는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선비는 그것을 모른 척하며 자루가 긴 나무국자로 백학수를 떠서 조심스럽게 통밀가루 위에 부었다.


인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반죽을 시작했다. 통밀가루와 백학수가 뒤섞이며 작은 덩어리들이 생겨났다. 반죽이 뻑뻑하다 싶으면 선비가 백학수를 추가했고, 인수는 열심히 반죽을 빚었다.


반죽을 빚는 인수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지함만 남았다. 제대로 된 술이 완성되느냐 마느냐의 열쇠는 누룩에 달려 있었다. 숙성의 과정까지 거쳐야만 완성되는 누룩이다. 두 번이나 시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반죽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자 백학양조수를 펼쳤다. 두 번째 초식 무육수(撫育手). 가향수와 마찬가지로 손에서 미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효능은 달랐다. 이 과정에서 무육수의 역할은 누룩이 썩지 않고 제대로 발효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 했다.


반죽은 이제 흩어지지 않고 완전하게 뭉쳐졌다. 미지근한 백학수와 무육수의 손길에 반죽은 따뜻했다. 책의 내용대로였다. 이제 할 일은 누룩을 헝겊으로 싸서 틀에 넣어 더욱 단단하게 뭉치는 일이었다.


선비는 미리 준비한 틀에 헝겊을 깔아 인수의 앞에 놓았다. 달리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순한 과정이지만 여전히 무육수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무육수의 기운을 품어내며 인수가 반죽을 틀 안에 눌러 담았다. 그리고 헝겊으로 반죽을 감싸 단단히 묶었다.


이제 힘을 쓸 차례였다. 체중을 실어 헝겊으로 감싼 반죽을 있는 힘껏 눌렀다. 틀 안에 갇힌 반죽이 갈 곳을 잃고 단단히 뭉쳐졌다.


인수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제대로 된 누룩을 만들려면 단전의 기운은 온전히 무육수를 운용하는 데에 집중해야 하고, 반죽을 단단히 굳히는 데에는 순수하게 육체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책은 말하고 있었다.


반죽을 누를 때마다 무육수의 기운이 반죽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성을 들인 만큼 좋은 누룩이 완성되길 바랄 뿐이었다.


반죽이 더 이상 뭉쳐지지 않자 헝겊을 풀었다. 반죽은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작은 틈도 보이지 않았다. 뿌듯할 만큼 완벽했다.


완성된 반죽은 선비가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한눈에 누룩을 위한 자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층층이 위아래로 공기가 통하도록 제작된 선반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반죽이 많았다. 반죽들을 틀에 넣고 단단하게 뭉치기를 여러 번. 선반 위에는 사람 머리보다 커다란 반죽 덩어리 여덟 개가 줄지어 늘어섰다.


인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공사장에서 일을 할 때도 좀처럼 흘리지 않던 땀이었다. 무공을 배운 뒤로 이토록 힘을 쓴 적은 처음이었다.


“힘에 부치면 양을 좀 줄여도 괜찮을 것 같소. 이미 술을 빚기에는 충분한 양이오.”


선비가 인수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열흘 뒤 장로에게 가져다줄 술은 한 병. 발효에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하더라도 여덟 개의 누룩이면 이미 충분했다.


“저 항아리에 가득 채울 작정으로 사온 재료니까 계획대로 해보고 싶어요. 많이 만들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잖아요.”


“오늘이 첫날임을 명심하시오. 그대가 감당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오.”


“뭐······ 며칠 고생 좀 해야죠. 죽기야 하겠어요? 열흘 고생해서 한 사람 인생 구하면 남는 장사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선비는 그 이상의 말을 아꼈다. 대신 나무국자로 백학수를 퍼서 통밀가루에 부었다. 인수는 다시 반죽을 시작했고, 선비는 그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반복 또 반복이었다. 아직 반죽해야 할 통밀가루가 많았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홀로 감당하기에 가혹한 노동량이었다. 단전의 기운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공의 소모보다 육체적인 피로가 더 컸다.


선반에 하나둘 반죽 덩어리가 늘어났다. 그 수가 서른둘에 달해서야 인수는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콧바람을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자 어둠이 그를 반겼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작업이었건만 벌써 저녁이었다.


인수가 저녁의 찬바람을 맞으며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작업이 끝날 무렵에 먼저 자리를 비웠던 선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운기를 하기 전에 식사부터 하시오. 몸의 피로에는 밥이 제일이라오.”


“와, 선비님이 준비한 거예요?”


“대단치 않소. 시간이 많지 않아 간단히 준비했다오.”


“평소보다 더 나은데요.”


선비가 가져온 쟁반에는 밥 두 공기와 참치 통조림 두 개, 묵은지가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의 식사보다 나았다. 선비문의 재정은 언제나 빠듯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인수는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식후의 포만감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선비가 다가왔다.


“운기를 하기 전에 이걸 드시오.”


“아, 이게······.”


“책을 보면 앞으로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요. 이것이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것이오. 선비심공의 기운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골라왔소.”


선비가 내민 것은 종이에 정성스럽게 싸인 환약이었다. 종이를 벗기자 고여 있던 씁쓸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환약의 정체를 짐작한 인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는 비약이었다.


“이 귀한 걸······.”


“비고에 아직 많이 남아 있소. 부담 갖지 않아도 좋소.”


선비의 말에도 인수는 손바닥 위에 놓인 환약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운기를 하며 단전에 기운을 축적했기에 빠르게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환약의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야말로 시간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벅차오르는 기분에 휩싸여 인수는 조심스럽게 환약을 입 안에 넣었다. 환약은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박하사탕처럼 화한 느낌이 입 안에 감돌았다. 녹아내린 환약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온몸에 낯선 기운이 퍼져나갔다. 인수는 서둘러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선비심공의 기운은 길잡이였다. 혈도를 타고 흐르며 곳곳에 흩어진 길 잃은 환약의 기운을 이끌었다. 손을 놓치지 않도록 느리고 신중했다.


한 번의 소주천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두 번, 세 번. 길 잃은 환약을 모두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인수는 몇 번이고 소주천을 반복했다. 미세한 기운조차 놓칠 수 없었다. 이제는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약이었다.


운기를 마치고 눈을 뜬 인수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숙면을 취한 기분이었다.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의 충만함이 단전에 느껴졌다.


“휴우―. 상하차 알바라도 종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 달리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다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사실 이상하게 기분은 좋아요.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요. 지금까지는 뭐라고 해야 하나. 정식 제자가 아니라 수습 제자 같았다고 할까요? 이제야 제 역할을 찾은 기분이에요.”


“그대가 선비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 않소?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말이오.”


“오래된 원룸에서 살다가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생활비 정도는 보태는 게 맞죠. 그리고 역사를 기록한다고 거창하게 말해주곤 하지만 그것도 사실 제 사리사욕에서 시작된 일이잖아요. 그런데 백학주를 만드는 일은······ 좀 달라요. 네. 달라요.”


인수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말들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그것을 전부 풀어내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적절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비도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저 인수의 말을 곱씹으며 그가 느끼고 있을 기분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의도치 않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평소와 달리 인수가 먼저 백학당의 문을 열며 정적을 깼다.


“어영부영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선비님은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쉬어요. 그럼 이만 일하러 갈게요.”


인수는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서둘러 백학당 안으로 들어갔다. 선비도 그의 의도를 알고 구태여 붙잡지도, 뒤를 따르지도 않았다. 곁에 있어 봐야 지켜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선비는 발길을 돌렸다.


백학당 안에 들어선 인수는 등불을 밝히고 남아 있는 백학수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누룩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반죽 덩어리들 앞에 섰다.


반죽 덩어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누룩이 완성될 때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무육수의 손길로 어루만져줘야 했다. 발효가 되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썩거나 다른 균들이 자라나지 않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백학주에 사용될 누룩에 들어가는 정성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결코 혼자서 할 일은 아니었다. 책에서도 제자들이 순번을 정해 누룩을 보살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반죽 덩어리가 발효되어 서서히 뜨끈해지는 시기를 겪은 뒤 완전히 식게 되면 누룩이 완성된 것이라 했다. 그 시간이 적어도 이틀이었다.


달리 말하면 적어도 이틀 동안은 백학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서른두 개의 반죽 덩어리를 차례대로 어루만지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반죽 덩어리를 만져줘야 하는 것이다.


백학양조수 무육수의 기운이 인수의 손바닥을 덮었다. 48시간.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외롭고 고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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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 마담 (9) 19.03.29 33 0 18쪽
» 3. 마담 (8) 19.03.27 4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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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마담 (5) 19.03.20 43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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