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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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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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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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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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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담 (9)

DUMMY

불 꺼진 별채. 눈을 뜬 인수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둥글고 반들반들한 반죽 덩어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인수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이 저녁인지 아니면 이른 아침인지.


아무리 바빠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움직이는 시곗바늘처럼 하늘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하늘은 아주 서서히 물들었다. 저녁이었다.


저녁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보던 인수의 눈에서 잠기운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당황한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마지막 기억 속 하늘도 지금처럼 짙어지고 있었다.


인수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급한 마음과 달리 우아하고 여유 있는 자태로 본채를 향해 달렸다. 짧은 거리임에도 경공을 사용할 만큼 마음이 급했다.


“일어나셨소? 어딜 그리 바삐 가시오?”


때마침 걸어 나오던 선비가 그를 맞이했다. 때가 타지 않는다며 좀처럼 갈아입지 않는 검은색 천잠사 원피스와 흑비녀를 꽂아 정리한 머리카락. 그리고 침착한 표정까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가 그러니까······ 꼬박 하루를 잤나 봐요.”


“그렇소. 어제 이 무렵에 침실에 들어갔으니.”


“아······.”


인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장탄식을 내뱉었다. 온갖 생각들이 스쳐갔다. 하루의 공백. 그것으로 훗날 어떤 영향을 줄지 상상만으로도 덜컥 겁이 났다.


인수의 발은 이미 백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비조차 반응하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등불을 붙인 뒤 선반에 늘어서 있는 누룩을 살피는 인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져 무엇을 해야 할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사흘이 지났소. 그대에게 재능이 있나 보오. 불과 이틀 만에 누룩을 완성시키지 않았소? 하루 더 숙성했다고 생각합시다. 대신 맛은 더 좋아지지 않았겠소?”


“너무 많이 잤어요.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사람을 도우려다 그대가 큰일 나겠소. 정 시간이 부족하면 장로와 단판을 지으면 될 일 아니오?”


“안 돼요. 선비님도 그걸 피하려고 협상을 한 거잖아요. 엄청 큰 조직이라면서요. 평생 나가지 못하고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몰라요.”


“폐관수련을 하며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함께 힘을 키우면 되지 않겠소? 그대는 이미 할 만큼 했다오.”


선비답지 않은 다분히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인수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럴 시간에 빨리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잠도 충분히 잤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그러니까······.”


“밥을 지어야 하오.”


“아, 그랬죠. 밥이랑 누룩을 섞어서 백학수랑 같이 항아리에 담아야 하는데. 아! 쌀을 하루 동안 불려 놓으라고 했었는데!”


인수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물들었다. 급한 마음에 쌀 포대를 찾으려 정신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남은 백학수에 담아 이미 불려 놓았소.”


“아······!”


“백학양조수가 필요치 않은 일은 도맡겠다고 하지 않았소? 마음을 편히 드시오. 내가 있지 않소? 행여나 실수를 하더라도 곁에서 보고 있으니 바로잡아줄 것이오.”


“······알았어요, 선비님.”


“그럼 백학수를 만들어주시겠소? 밥을 지어야 하니 말이오.”


인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통에 생수를 부었다. 가향수의 기운이 감싼 손을 넣자 잔물결이 일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변화에 집중하며 백학수가 완성되길 기다렸다.


이내 물의 온도가 뜨끈해졌다. 은은한 향기도 이따금씩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밥을 지을 때 쓸 백학수가 완성될 무렵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선비가 돌아왔다.


“완성했어요.”


“그럼 가져가서 밥을 짓겠소.”


“두 포대나 되는데 오래 걸리겠죠?”


“가마솥을 꺼내 놓았소. 그토록 커다란 가마솥이 왜 있는지 어릴 적부터 의아했건만 선조들이 대량의 백학주를 만들 때 사용했던 모양이오. 그래도 워낙 많은 양이라 나눠서 밥을 해야 하니 시간은 좀 걸릴 것이오.”


“어차피 저도 시간이 필요해요.”


인수의 시선이 구석에 쌓여 있는 생수병들에 향했다. 누룩을 빚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생수 더미에 다가가려 할 때였다. 선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전에 이것부터 드시오.”


“네? 어?”


인수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선비의 손이 불쑥 입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선비를 상대했던 자들이 겪었을 무력감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입 안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온 것이다.


혀에 닿는 순간 입 안이 화했다. 환약이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내렸다. 단맛이 섞인 씁쓸함을 머금은 한 줌의 액체가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 처음 먹었던 환약과 다른 것이었다.


“이전의 것보다 효과가 좋은 약이오. 내공이 늘었으니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오.”


선비는 백학수가 든 나무통을 들고 당혹스러워하는 인수를 남겨둔 채 백학당을 떠났다. 인수는 선비가 나간 뒤에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가부좌를 틀었다.


단전의 기운은 이번에도 길잡이가 되어 곳곳에 흩어진 환약의 기운을 이끌었다. 선비의 말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환약의 기운은 전보다 많았다. 그러나 인수도 전보다 많은 길잡이를 갖고 있었고, 이번에는 전과 달리 경력도 있었다.


꼼꼼하게 환약의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 모았다. 환약의 기운은 혈도를 돌면서 점차 선비심공의 기운에 동화되었고, 이내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이질감 없이 섞여 들었다.


단전에 느껴지는 충만함이 뿌듯했다. 내공이 쌓여 간다는 것. 그것은 여타 경험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특별하고 유일했다. 무엇보다 가시적인 성취였다.


운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인수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걸려 있었다. 다시 한 번 이틀 밤을 새우라고 해도 새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쁨도 잠시.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에 표정을 굳혔다. 짧은 시간 동안 귀한 환약을 두 첩이나 먹었다. 과할 정도의 투자였다. 선비문의 일원이 되었다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항아리 내부를 살폈다. 걱정과 달리 깨끗했다. 케케묵은 냄새나 먼지도 없었다. 최근에 청소한 흔적이었다. 다른 항아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선비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온몸을 감싸는 선비심공의 정순한 기운에 정신을 집중하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썼다. 폭풍에 격하게 파도치던 마음이 서서히 진정하며 잔물결만이 남았다.


인수의 눈동자는 풍족해진 단전의 기운만큼 전에 없이 맑았다. 선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어엿한 한 명의 선비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수는 항아리에 남은 생수를 쏟아 부었다. 어찌나 큰지 50리터에 가까운 물을 쏟아 부었음에도 항아리의 물은 넘치지 않았다.


새삼스레 남은 열아홉 개의 항아리에 시선이 돌아갔다. 선비문의 선조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저 술을 즐겼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주변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로 기대감도 부풀었다. 그토록 술을 좋아했던 선조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백학주는 얼마나 맛이 있을는지.


백학양조수의 구결을 외우며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에 손을 담갔다. 이전의 백학수를 만들 때와는 달리 인수의 손이 그 안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백학양조수의 세 번째 초식 가향백수(佳香百手)가 펼쳐졌다. 고두밥, 누룩과 함께 술의 주재료가 될 백학태수(白鶴太水)를 만드는 초식이다.


<백학주 양조술>에서 이르길, 곡주의 기본적인 재료인 밥, 누룩, 물 중 술의 맛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물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가향백수를 운용하는 인수의 손길은 신중했다.


인수의 손은 같은 궤도, 같은 속력으로 움직였다. 항아리 속 소용돌이가 어느 순간 회전을 멈췄다. 아니,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소용돌이는 마치 물 표면에 그려진 그림인 것처럼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백학태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정신을 부여잡는 일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를 쳐다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물살에 손을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고요하고 질서 있게 흘러가던 물살에 굴곡이 생겼다.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물은 방심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나 즉각적인 반응을 보냈다. 경고였다. 불안정한 물살만큼 백학주의 맛에도 불완전한 잡음이 생길 것이라는 경고 말이다.


기나긴 지구력 싸움이었다. 항아리 안의 물을 휘저은 지 세 시간이 흘렀다. 그제야 간간이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은은한 풀내음과 꽃향기는 비온 뒤의 숲속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커다란 보자기를 짊어지고 선비가 백학당으로 들어왔다. 발을 들이자마자 풍겨오는 숲내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이 항아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가 항아리에서 손을 빼낸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항아리 속 소용돌이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잔잔하고 투명한 호수를 만들었다.


“휴, 겨우 완성했어요.”


“고생했소.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라오.”


선비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인수도 함께 눈을 감고 새삼 숨을 들이켰다. 진한 숲내음이 사방에 진동했다. 백학당 안은 이미 숲 한가운데나 마찬가지였다.


“백학태수를 만들면서 선조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이런 짓을 계속 해왔는지······. 이건 교대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정말 정성이 많이 들어간 술이에요. 어쩌면 선비문은 양조장이 주업이고, 부업으로 무공을 배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까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의심이오. 하지만 이 백학주를 외부에 팔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오.”


선비의 말을 듣고 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마시기 위해 이런 고생을 감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찰나의 휴식이었다. 인수는 곧장 다음 할 일을 떠올렸다. 선비가 가져온 고두밥과 누룩을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백학태수를 부을 차례였다.


이번에는 선비와 인수가 함께했다. 각자 나무통 앞에 앉아 미리 식힌 고두밥을 담고 누룩과 잘 섞었다. 밥과 누룩의 비율은 이 대 일. 그것을 여섯 개의 항아리에 적당히 나눠 담았다.


이제는 백학태수를 담을 차례였다. 풍기는 향과 달리 평범한 물과 다를 바 없는 투명한 색이었다. 그것을 나무통에 담아 여섯 개의 항아리에 차례로 부었다.


나무통을 몇 번인가 왕복하자 백학태수가 바닥을 보였다. 남은 일은 기다림뿐이었다. 그저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며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주면 대략 일주일 뒤 백학주가 완성된다고 했다.


백학당을 나오자 하늘은 어둠이 짙었다. 자정을 넘긴 깊은 새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밤낮의 구분이 애매해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담벼락 앞에 가만히 서서 하늘만 쳐다보았다.


“이제······ 뭐하죠?”


“기다리시오. 기다려야 할 때라오.”


인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길었던 싸움이 끝이었다. 이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차례였다. 그저 그동안의 정성이 부족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선비가 그런 인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며칠 사이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소.”


“네? 어떻게요?”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든다오.”


“어······ 제가 나이가 더 많은 건 잊지 않은 거죠?”


“사회초년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처음 만났을 때는 사실 막 사회에 나와 모든 것이 새로운 초년생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오.”


인수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비님은 제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었는데요.”


“그래도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소?”


“그렇긴 했죠. 아무래도 그렇긴 했는데. 지금 같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애늙은이 같았다고 할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어린아이가 진하게 화장한 느낌?”


선비는 곰곰이 지난날을 곱씹었다. 전대 장문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살아가기 위해 선비문 밖으로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배워야 할 것투성이였다. 지금은 익숙해진 대부분의 것들이 생소했고 낯설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아직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선비문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무게감 있게 말과 행동을 하려 애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어설퍼보였던 것이리라.


“뭐, 어쩌겠소. 전대 장문인 아래에서 손녀처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으니 말이오.”


“마찬가지에요. 요즘 세상에 스물셋의 남자는 어른이라는 말을 듣기에도 민망하다구요. 그렇다고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신체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분명 어른인데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고, 모든 게 어설퍼요. 혼자서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죠.”


“슬슬 준비가 되어 가는 모양이오. 최근에는 어설프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소. 분위기가 달라진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려.”


“선비님도 요즘 부쩍 듬직해졌어요.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내가 바로 선비문의 장문인이올시다!’ 외쳐도 다들 인정할 거예요.”


“이러다 그대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네? 살벌하게 목숨은 왜요?”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않소?”


“에이······. 그렇게 치면 저도 선비님한테 목숨을 바쳐야 되는데요? 죽는 건 무서우니까 퉁쳐요, 퉁.”


인수가 주먹을 내밀며 말했다. 선비는 그가 내민 주먹을 쳐다보더니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주먹을 마주 내밀며 부딪쳤다.


“퉁.”


“좋아요. 오래 살아야죠. 세상엔 악당들이 산더미처럼 많다구요.”


“수뇌부를 찾아내야 하오. 잎을 아무리 뜯어본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소용없소. 단지······ 그들의 영향력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라오.”


“옆에서 도와줄게요. 영웅 곁에는 언제나 조력자가 있잖아요.”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오. 이번 일도 그대가 수상하게 여긴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 상황에 이르지 않았소?”


“그랬었죠. 다시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지만 길가 바로 근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는 범죄조직의 간부가 살고 있고요.”


“차라리 지하에 숨어 있다면 다행이오. 허나 일전의 어학원의 경우처럼 양지에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싸움이 되리라 생각하오.”


“······도시 한복판 빌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었죠.”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바쁜 나날에 잠시 잊었던 악몽이었다. 선비도, 인수도 말을 잊었다. 그 어떤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었다. 그저 그날 한 줌의 재로 사라졌을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만이 침묵 속에 담겼다.


한순간 무거워진 분위기에 선비와 인수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무거운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 서로에게 숨 막히는 침묵을 강요했다.


어딘지 찜찜한 마무리의 하루가 지났다. 눈코 뜰 새 없었던 시간은 끝났고, 오히려 평소보다 여유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아침저녁으로 백학주의 온도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한가롭기만 했다.


선비는 여느 때처럼 서고에 틀어박혔고, 인수는 연무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사이 갑자기 늘어난 내공이 그를 수련에 심취하게 했다.


혈도를 흐르던 기운의 줄기가 실개천이라면 지금은 시냇물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느끼고 있노라면 그리운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몸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기운들. 내공을 다루는 것이 서툴렀던 지난날, 등에 슬며시 손을 대고 옳은 길을 이끌어주던 선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은 어느새 선비를 처음 만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고, 이내 더 먼 기억까지 흘러가곤 했다. 선비심공의 기운은 자신이 그러하듯 온기를 지닌 기억들을 불러왔다. 소주천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솜씨 좋은 술래처럼 오랫동안 꼭꼭 숨어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들까지 찾아냈다.


감히 손대지 못할 온기를 가진 옛 기억이 고개를 들 때면 서고에 틀어박혀 있던 선비마저 바깥으로 걸음을 할 만큼 청명하고 맑은 기운이 선비문 안에 퍼지는 것이었다.


인수를 바라보는 선비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모습이었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의 전조였다. 인수가 이대로 더욱 수련에 매진한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이 분명했다.


누구나 가진 힘에 어울리는 역할과 옷을 원하는 것이 섭리. 시기상조였다. 의심할 나위 없는 심성을 가진 선비문의 유일한 제자. 위험한 전투는 아직 혼자서 감당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전대 장문인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에도 서고에 앉아 있노라면 느껴지는 인수의 기운에 선비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들었다. 선조들의 기록에서 눈을 돌릴 만큼 선비의 걱정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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