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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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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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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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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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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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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3. 마담 (11)

DUMMY

백학주 세 병을 받아든 노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투명한 액체는 겉으로 보기에 물과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곧장 준비해둔 잔을 꺼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잔이었다. 첫 번째 병의 마개를 따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잔을 입 앞에 가져갔다.


“흐음······.”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신음을 내뱉었다. 미간의 주름도 깊어졌다. 보통의 술과 달리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잔을 기울이는 순간 노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어느새 사라졌고, 얼굴에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푸근하고 편안한 미소가 퍼졌다.


노인은 여운을 느끼듯 석재의자에 등을 기댔다. 굳었던 어깨는 아래로 늘어졌고,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는 굽었다. 모든 신경을 혀에 집중한 듯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첫 번째 백학주를 음미한 뒤 노인은 두 번째 술병을 집었다. 술을 채우고 다시 잔을 기울였다. 입 안에 술을 머금은 노인은 차이를 느껴보려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노인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술이 넘어갈 때의 느낌에 집중하려는 듯 노인의 표정은 더욱 신중해졌다. 그리고는 다시 석재의자에 기댄 채 여운을 즐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백학주도 마찬가지였다. 소믈리에처럼 신중하게 맛을 보았다. 입 안에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맛과 향을 음미했다.


시음을 끝낸 노인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는 선비를 쳐다보더니 마담에게 시선을 돌려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선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이 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백학주라 하오.”


“백학주라······.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자연의 맛이로군요. 잠시 이곳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지하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노인의 솔직한 감상에 선비는 안도하며 마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담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의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소?”


“흐음. 아주 좋은 술입니다.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맛과 여운······. 두고두고 먹고 싶을 정도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위약금을 상쇄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오?”


“아니, 아닙니다. 맛은 충분합니다만 눈에 보이는 게 이렇다 보니. 단순히 계산하면 한 병에 4억이지요.”


“열흘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소. 그때도 원하는 만큼 빚어주겠다고 말했을 것이오.”


“기억납니다. 나다마다요. 그런데 그보다 양조법을 넘겨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선비는 그제야 노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양조법을 얻으려는 속셈이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맛을 본 뒤에 갑자기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양조법을 노리는 노인의 욕심에도 선비는 차분하기만 했다. 애초에 주인이 정해진 양조법이 아니던가.


“알려줘도 빚지 못할 것이오.”


“시설 때문에 그럽니까? 시설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고.”


“선택 받은 사람만이 빚을 수 있소. 선비문의 독문심공을 익힌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라오.”


“그렇겠지요. 선비문의 제자에게만 허락된 비법이란 건 잘 압니다.”


“그런 뜻이 아니오. 말 그대로 백학주는 선비문의 독문심공으로 빚은 술이오. 그마저도 순수한 내공을 필요로 해 장문인인 나조차 실패하였소.”


“호오······. 그런 일이?”


노인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새삼스럽게 다시 백학주가 담긴 병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선비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인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비도 노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인수는 긴장한 얼굴로 노인을 마주보았다.


노인은 인수와 백학주가 담긴 술병을 번갈아보았다.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깊은 세월이 느껴지는 맛이었습니다. 자연 그 자체라고 할까요? 그런 맛을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만들어냈다 이 말입니까?”


“그렇소.”


선비는 괜히 흑립을 눌러쓰며 대답했다. 이미 노인은 흑비녀로 변신하기 전의 모습을 분명 봤을 텐데도 선비의 나이를 잊은 듯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백학주를 맛봤다. 세 병의 백학주를 차례로 마시며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고갯짓을 반복했다.


“장문인.”


“왜 그러시오?”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마흔 병 이상 될 것이오.”


“열흘에 마흔 병이라······.”


“미리 말하자면 매번 열흘에 마흔 병은 불가능하오.”


“아아, 알고 있습니다. 마흔 병이면 석 달은 먹을 테니 걱정 마시지요. 이런 술은 조금씩 여운을 느끼며 마셔야 합니다.”


대화를 들으며 가슴을 졸이고 있던 인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양조업자로 전업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흐음. 그런 특별한 술이라니. 좋습니다. 여주인은 오늘부터 우리 하오문과 모르는 사입니다.”


결국 노인은 백학주의 맛에 매료되어 마담의 탈문을 선언했다. 그저 말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마담은 망연히 서서 노인의 말을 곱씹었다. 그 흔한 계약서도 없이 짧은 말 한마디로 시작된 하오문과의 인연이었다. 말 한마디로 마무리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리라.


마담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려는 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마담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끊은 모습이었다. 관심은 오로지 술. 일곱 번째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선비는 노인이 술잔을 비운 뒤 마담을 대신해서 대화를 이었다.


“끝난 것이오?”


“끝났습니다.”


“마담은 이제 이대로 가면 되는 것이오?”


“맞습니다.”


“그냥 떠나면 된다는 말이오?”


“그래요, 그렇습니다. 처음 왔을 때처럼 그냥 떠나면 되는 겁니다. 여주인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떠나면 남은 사람이 자연히 그 자리를 채운다는 걸.”


노인은 마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탈문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닌 무관심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선비는 마담의 안색을 살폈다. 애써 차분함을 지키던 모습은 없었고 복잡한 심정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선비가 인수를 보며 눈치를 주자 그는 눈치껏 마담을 데리고 방벽 바깥으로 향했다.


인수와 마담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선비는 노인과 마주섰다. 선비의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인도 마담을 대할 때와는 달리 술잔을 내려놓고 선비를 마주했다.


“아직 용건이 남은 모양입니다.”


“그렇소. 대화를 좀 나누고 싶소.”


“그러시지요. 예상대롭니다. 아무 이유 없이 여주인을 도와주진 않았을 테니.”


노인은 흔쾌히 선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술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오문에 대해 알고 싶소.”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처럼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정보를 캐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그럼 돌려 말하지 않겠소. 하오문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오.”


“문주라······.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만나서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소.”


“정보를 원할 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저보다는 선비문의 장문인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원하는 게 무엇이오?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소.”


“문주를 만나려는 진짜 이유를 알려주면 알려드리지요.”


시종일관 침착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선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하오문주를 만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악행을 멈추고, 검계의 소재를 파악해내는 것.


그러나 상대는 하오문의 장로였다. 목적을 말하는 순간 하오문의 공적으로 낙인이 찍히는 것은 물론이고, 검계의 행방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이 뻔했다.


“거래할 물건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시간은 많습니다. 장문인은 앞으로도 종종 이곳에 와야 할 테고, 전 이곳을 떠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노인의 말투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을 만나려고 하는 수상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는 볼 수 없었다.


선비는 흑립의 챙 너머로 노인의 의중을 살폈다.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주름 사이로 감춘 표정은 웃는 듯 보이기도 했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노인은 무던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던 흑풍회마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장로는 왜 이곳에 살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소?”


선비는 문주와 관련된 질문을 포기했다. 대신 개인적인 질문으로 이어갔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아쉬웠다.


“뜬금없이 말입니까?”


“이런 질문도 대가가 필요한 것이오?”


“흐음. 그런 건 아닙니다만. 으음. 이런 질문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군요.”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았기에 그러시오?”


“10년이 조금 안 됐습니다.”


선비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긴 시간이었다. 선비문처럼 은밀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어둡고 좁았다. 이런 지하에서 10년이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 이곳에 살게 되었소? 아무리 생각해도 장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요.”


“장문인은 제 나이가 몇으로 보입니까?”


“칠순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오.”


“진작 넘었습니다. 현장은 물론이고 곧 인생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다 말입니다.”


“더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지 않소?”


“평생을 하오문에서 살아왔습니다. 음모와 암투가 일상처럼 벌어지는 곳이지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본인도 다르지 않았지요.”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같을 겁니다. 경중이야 있겠지만 세상 어디든 다르겠습니까? 게다가 높은 곳은 더욱 그럴 겁니다. 음모와 암투에 물들지 못하고 사람을 믿은 이들은 그저 발판이 되어 아래에 머물 뿐이니 말입니다.”


“장로는 잘 녹아든 모양이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보고 자란 것이 그것이니 거리낄 것이 없었지요. 나름대로 화려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 반작용이지요.”


노인도 선비가 그랬던 것처럼 새삼스럽게 자신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작은 대나무 정원과 그것들을 엮어 만든 집들이 전부였다.


“험한 세상입니다. 지금 장문인이 보고 있는 세상은 평화롭겠지만, 글쎄요?”


“무슨 뜻이오?”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작은 조언이라고 합시다. 사소한 범죄들, 장문인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말입니다. 그런 일들을 넘기지 못하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상당한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선비는 눈앞의 불의를 지나치지 않소.”


“가히 정의의 사도라 칭할 만합니다. 선비문의 제자들은 모두 그런 겁니까?”


“······선비문이지 않소.”


“하하, 그렇지요. 선비란 그런 것이지요. 저도 장문인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고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어보시오.”


“어디까지 갈 생각입니까? 혼자서는 여럿을 이길 수 없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만.”


“혼자가 아니오.”


“여럿도 그냥 여럿이 아닙니다. 특별히 귀띔을 해드리자면 장문인은 그 규모를 영원히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아무리 걸어봐야 볼 수 있는 건 고작 눈이 허락하는 일부분이지요.”


“이미 알고 있던 일이오.”


“위를 쳐내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군요.”


“마음이 바뀌었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겠소?”


“그럴 리가요. 전 여전히 하오문의 장로입니다.”


선비는 노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노인의 의중을 살피는 일은 무의미했다. 선비가 살아온 세월보다 오래된 주름 사이로 숨긴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노인을 만날 기회는 이번만이 아니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지 않았으리라.


“나중에 말입니다.”


노인의 중얼거림이 멀어지는 선비의 등을 두드렸다. 선비는 걸음을 멈추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만약에 장문인이 정말 혼자서 세상을 바꿀 힘을 얻는다면 말입니다. 조언에 대한 보답을 받고 싶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아이들이 조금 거슬리게 하더라도 한 번쯤은 놓아줬으면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조용히 살아가도록 무시할 수도 있겠지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아이들?”


노인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선비는 그것이 조용히 기척을 지운 채 숨어 있을 흑풍회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장로의 자식들이었구려.”


“어감이 이상하군요. 맞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도 하오문의 제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언제가 될지 몰라도 미리 부탁드리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나······.”


“하오문은 셀 수 없이 많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장로는 높은 자리지요. 뜬구름 잡는 말 같지만 언젠가 알게 될 겁니다. 제 조언은 정말로 여기까집니다.”


선비는 노인의 말을 곱씹더니 이내 방벽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린 철문 옆에는 인수가 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담은 어디 있소?”


“먼저 가겠다고 해서 보냈어요. 위험하다고 했더니 누가 더 험한 삶을 살았는지 얘기해보자고 하더라고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보냈어요.”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무도 없는 하수도를 지나면 곧장 마담의 터전이다. 과잉보호를 할 필요는 없었다.


떠나기 전 선비는 마지막으로 장로의 은신처를 돌아보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흑풍회의 기척은 여전히 찾아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무공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토록 완벽하게 기척을 감출 수 없을 테니.


처음 그랬던 것처럼 선비가 먼저 하수도로 이어지는 틈새로 사라졌고, 인수가 카메라를 켜고 뒤따르며 철문을 닫았다.


이미 마담은 틈새를 빠져나갔는지 모습은 물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철문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 인수는 참았던 궁금증을 풀어냈다.


“장로한테 뭔가 알아냈어요?”


“조언을 받았소.”


“조언이요?”


“세상은 보기보다 험하고, 조직은 눈에 담지 못할 만큼 크다고 했소. 그리고 하오문은 셀 수 없이 많은 눈과 귀를 가졌고, 장로는 높은 자리라는 말도 했고 말이오.”


“당연한 말 늘어놓는 게 언제부터 조언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아, 원래 대부분 조언들은 당연한 말이죠.”


“사람들은 당연한 걸 하기 싫어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오. 하지만 이 경우는······ 동의하오. 너무도 당연해서 생각할 거리도 없는 것 같소.”


“사람 한 명 살린 걸로 만족해야겠네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선비는 고개를 저었다. 뒤따라오던 인수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라오. 장로의 이름. 기억하시오?”


“그럼요. 한 번 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잖아요. 사마귀라니.”


“성씨가 사 혹은 사마일 것이오. 어느 것이든 중국의 성씨일 가능성이 높소. 그건 이들이 중국에서 넘어온 자들이라는 의미라오.”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에요?”


“중국에서 활동하던 하오문의 일부가 조선으로 넘어왔고, 그로부터 몇 세대나 흘렀소. 그럼에도 장로의 자리에 중국인이 앉아 있다는 건 생각해볼 만한 특징이오.”


“자기들끼리 세력을 키운 게 아닐까요?”


“그게 의아하다는 말이라오. 검계가 하오문을 끌어들인 건 자신의 몸집을 불리기 위함이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주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오.”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나 봐요.”


“하오문은 검계의 하위조직으로 있을 것이라 예상했건만 아니었던 모양이오.”


“휴,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네요.”


“검계와 하오문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오.”


“그렇겠죠. 걱정이네요, 걱정. 일본에서 넘어온 조직도 있다고 했었잖아요. 닌자요.”


“······그저 서로 우호적이지 않길 바랄 뿐이오.”


선비는 근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노인과의 대화를 돌이켜 보았다.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될 정보를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아닌지 노인의 조언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인수도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카메라를 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고 카메라만 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흑풍회를 제압하던 선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수적 열세 때문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대신 상대를 해줬다면 훨씬 수월했으리라.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렸다. 환약의 도움으로 몸집이 비약적으로 불어났건만 술을 빚고, 옥상을 뛰어넘고, 기척을 숨기는 데에 사용할 뿐이었다.


스르륵 맨홀 뚜껑이 열렸다. 하수도를 나왔을 때 바깥은 열흘 전과 마찬가지로 한낮이었다. 늘 그렇듯 공사장 주변은 고요했다.


선비와 인수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건물 위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췄다. 주변을 살핀 뒤 그들이 향한 곳은 마담의 가게가 보이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나 문이 굳게 닫힌 가게 안에는 평소와 다른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소 부산스러운 인기척 뒤에 닫힌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마담은 작은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조촐한 이삿짐이었다. 마중을 나오는 이도 없었다. 다 함께 손목을 그을 만큼 피보다 진한 결속력도 탈문을 한 순간 끊어진 모양이었다.


마담은 곧 떠나게 될 자신의 가게를 쳐다보았다. 이렇다 할 간판도 없는 허름한 인테리어. 평범한 사람은 가게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가게를 쳐다보는 시선에 미련은 없었다. 후련함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날과 같았다. 잠시 휴가를 떠나는 모습이었다.


이내 마담은 몸을 돌려 가게를 등졌다. 그리고 늘 선비와 인수가 몸을 숨기고 있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마담은 거리의 좌우를 살피며 행선지를 고민했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살피며 고민하던 그녀는 곧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늘 거닐던 한산한 거리를 지나 시끌벅적한 대로변에 섰다. 점심시간을 맞은 거리는 식당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담은 단연 돋보였다. 다른 행인들에 비해 화려한 옷차림과 짐 가방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의아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마담을 쳐다보곤 지나쳤다. 행인들의 눈에 마담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담은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한지 겉옷을 여몄다. 그리고 다시 행선지를 고르려는 듯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평소와 다른 건물의 옥상. 그곳에서 마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인수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소? 이곳만 아니라면. 평범한 인생을 원했으니 마담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갈 것이오.”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 저라면······ 감도 안 잡히네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요.”


“나라면······ 이쪽 세계에 발을 딛기 전에 살던 곳을 찾아갈 것 같소. 발을 잘못 디딘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말이오.”


“선비님다운 대답이네요.”


“어떤 면이 그렇소?”


“교과서에 나올 법한 착실한 사람의 대답이잖아요. 애초에 착실한 사람은 그런 길에 빠지지 않겠지만요.”


“누구나 실수는 하지 않겠소? 그대도, 나도 말이오. 이만 갑시다. 날씨가 쌀쌀하오.”


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보다 바람이 찼다. 마담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만큼 거리는 아침보다 황량했다.


거리를 떠나며 두 사람은 나란히 하늘을 날았다. 인수의 경공도 이제는 선비의 속력에 맞춰 도시 위를 뛰어다니기에 충분했다.


발아래의 풍경은 어느새 바뀌어 사람들과 차들로 가득했다. 그들에게는 단 한 걸음으로 충분했다. 무법지대를 벗어나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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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3. 마담 (7) 19.03.25 53 0 14쪽
27 3. 마담 (6) 19.03.22 48 0 12쪽
26 3. 마담 (5) 19.03.20 45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54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50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48 0 18쪽
22 3. 마담 (1) 19.03.11 79 0 13쪽
21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0) 19.03.08 56 0 12쪽
20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9) 19.03.06 36 0 10쪽
19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8) 19.03.04 56 0 16쪽
18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7) 19.03.01 57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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