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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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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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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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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5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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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리에이터 (1)

DUMMY

새벽부터 첫눈이 내렸다. 선비문도 눈으로 하얗게 덮였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막는 묘자진이 허락하는 몇 안 되는 손님 중 하나였다.


이른 아침부터 선비는 싸리비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검은 원피스를 입은 선비의 모습은 새하얀 풍경과 대비를 이뤘다.


아름다움은 찰나였다. 녹아내려 흙과 섞인 눈만큼 볼품없는 것이 또 있을까. 해가 뜨자 벌써부터 지붕에서는 녹은 눈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비는 담벼락 주위를 돌며 형태를 잃어가는 눈을 쓸어냈다. 바닥은 갈색을 빠르게 갈색을 되찾았다. 소복하게 쌓인 눈에 첫 발자국을 내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위에 첫 발자국을 새기는 영광은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였다. 담벼락을 따라서 새겨진 발자국을 싸리비로 쓸어내며 쫓다보면 백학당의 네모난 나무문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수는 새벽부터 백학당에서 백학주를 빚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인수는 공사장 일용직을 그만두고 술을 빚는 일에 집중했다.


마담이 떠난 다음 날, 약속한 술들을 가져다주러 갔을 때는 이미 세 병의 술을 모두 비운 상태였다. 노인은 백학주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준비한 예순 병 중 마흔 병을 마담의 위약금으로 받았고, 나머지는 값을 치러주었다.


백학주 스무 병의 값어치는 생활비를 감당하고도 남았다. 공사장 일용직을 다닐 때보다 나았다. 이미 확보된 거래처가 있고, 술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만족시킬 술이다. 그것이 계속 술을 빚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선비문의 재정은 전대 장문인이 떠난 이래로 가장 풍족했다. 그러나 백학당의 입구를 바라보는 선비의 얼굴에는 걱정이 짙었다. 최근 들어 표정이 좋지 않은 인수 때문이었다.


백학주 때문이 아님은 분명했다. 지금은 전처럼 무리하게 술을 빚지 않았다. 촉박한 마감기한도 없었고, 한 번에 빚는 술의 양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인수는 노트북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는 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본업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날 오후.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을 하던 선비는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작업을 마치고 백학당에서 나오는 인수의 인기척이었다.


“오늘 일은 끝난 모양이오. 고생했소.”


“고생은요.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쉬고 계시오. 식사를 준비하겠소.”


“같이해요.”


“둘이 해야 할 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않소? 좀 쉬고 계시오. 나도 할 일이 없어 무료하던 참이오.”


선비는 서둘러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안절부절못하는 인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장문인이라고 뒷짐만 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차려온 점심식사는 단출했다. 생활비가 넉넉해졌다고 해서 반찬이 바뀌지는 않았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선비는 식무구포(食無求飽)라며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수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덧 선비를 닮아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선비와 인수는 대청마루에 앉아 차를 마셨다. 겨울의 찬 공기와 어우리지면 깊은 향을 낸다고 알려진 특별한 설차(雪茶)로, 비고에서 찾아낸 찻잎이었다.


오랜만의 여유였다. 따뜻하게 달궈진 찻잔과 식도를 타고 흐르는 차는 첫눈이 내린 겨울날의 오후와 어울렸다.


선비는 구름이 개어 새파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경은 온통 시야의 가장자리에 보이는 인수의 얼굴에 집중됐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는 인수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오후의 여유도 인수의 근심을 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슨 근심이기에 그리 오래도록 붙잡고 있소?”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은요.”


보다 못한 선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인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소. 벌써 며칠 째 그늘이 얼굴을 덮고 있지 않소?”


“그냥 연말이라 그럴 거예요.”


“모른 척 믿어주기에는 너무 어설픈 핑계라오. 말해보시오.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던데, 그대의 본업과 관련된 일이라면 나와 무관한 일은 아닐 것 같소만.”


“선비님 신경 쓰이게 할 일은 아닌데······.”


“사적인 일이라면 더 이상 묻지 않겠소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묻는 것이오.”


인수는 찻잔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는 어느새 식어 김도 올라오지 않았다.


선비는 인수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어떤 고민이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걱정만 깊어졌다.


머리 꼭대기에 솟았던 해가 꽤나 기울어졌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인수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 선비님이랑 상관없는 일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결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아, 물론 저도 해결 못하고 있죠.”


“함께 고민하면 다른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오.”


“그랬으면 좋겠지만······. 하, 전 선비님의 모습을 편집한 영상을 올리곤 했어요.”


“알고 있소. 원래 그러기로 하지 않았소?”


“사건을 파헤치는 영상 말고요. 선비님이 활약하는 모습들만 잘라서 편집한 영상이에요. 흑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찬가지라오. 흑비녀가 바꿔주는 모습을 나도 좋아하오.”


“맞아요. 정말 멋있거든요. 편집도 되게 잘 됐어요. 혼신을 기울인 역작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영상은 스무 명 정도 봤더라고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일단 소문이 나야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죠.”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오. 다른 문제가 있던 모양이오. 그대가 그런 일로 걱정할 것 같진 않소.”


“맞아요. 저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 꾸준히 영상을 올렸어요. 조회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그중에 보는 걸로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어요.”


“무슨 뜻이오?”


“영상을 가져갔거든요. 자기가 찍은 것처럼 꾸며서요.”


“그게 가능한 일이오?”


“가능하더라고요. 교묘하게도 꾸몄어요. 목소리도 새로 입히고. 그 영상은 순식간에 수만 명이 봤어요. 워낙에 팬이 많았던 사람이었거든요. 금방 십만 단위의 사람들이 보더라고요. 완전히 그 사람의 영상이 된 거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봤든 영상의 주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소?”


“달라지더라고요. 원본이 따로 있다는 글을 남겨봤는데 사람들은 신경도 안 썼어요.”


인수는 한숨을 내뱉었다. 대화를 하면 기분이라도 나아질 것 같았건만 여전히 답답했다.


선비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사태를 해결할 방법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세상 누구보다 문외한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흔하디흔한 조언조차 해줄 수 없었다.


“자신의 권리를 찾으시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대답이었다. 피상적인 대답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난 그쪽 세계의 규율을 모르오. 허나 현실의 일부분일 테니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하오. 여론이 중요하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소? 눈과 귀를 막고 진실을 무시하는 사람들보다 진실을 보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소.”


“끈질기게 싸워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거죠?”


“그 일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소?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들었소.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강탈당하고도 손을 놓으면 앞으로 그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겠소?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또 같은 선택을 할 생각이오?”


“두 번은 못 참죠.”


“왜 두 번째를 기다려야 하오? 잘못된 일은 처음부터 바로잡는 편이 좋지 않겠소?”


인수는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일반론에 가까운 조언 외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선비는 그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하루하루 인수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선비의 일과였다. 인수의 표정은 나날이 어두워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절망이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인수의 이마에서는 굴곡진 근심이 종일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비는 설차 두 잔을 타서 별채로 향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 좀 드시오. 전에 마셨던 설차라오.”


“고마워요.”


“그러니까······ 일은 어떻게 되고 있소?”


“하아······. 정말 안 좋아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별 신경 안 쓰거나 오히려 절 사기꾼 취급해요. 분명 영상을 올린 날짜는 제가 훨씬 빠른데 말이에요. 가끔 뭐가 진실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사람을 욕하더라고요.”


“여전하구려.”


“정말 화가 나는 건 제가 주인인 걸 인정하면서도 영상을 훔칠 걸 오히려 잘한 일처럼 말하는 사람이에요. 흥미로운 영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갖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이 일로 홍보가 됐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거든요.”


“그런 식의 적반하장이라니. 상상 이상이오.”


“놀랍죠? 저도 놀랐어요. 장난삼아 남긴 글이라기엔 상당히 진지해보였거든요. 누가 봐도 진심이었어요. 진심처럼 보이려는 장난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정상이 아니죠.”


“대화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해결 못해요. 어떤 사람이 비폭력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양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해요. 대화는 충분히 시도한 것 같아요. 애초에 양심이 있는 사람은 남의 걸 아무렇지 않게 훔치지 않을 거예요.”


“다른 방법이 있소?”


“······보통은 고소를 한다고 들었어요. 법의 처벌을 받게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거든요. 소송을 시작하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대요. 소송에서 이기면 진 쪽에서 이긴 쪽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소송하는 동안에는 제가 비용을 대야 하거든요. 변호사 비용이요. 알다시피······ 그런 돈이 어딨겠어요.”


“죗값을 치르게 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라니.”


“죄가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죄가 없는 사람도 죄를 뒤집어쓰게 되니까요. 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화는 안 통하고, 법에 호소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그대에게는 명백한 증거가 있지 않소? 직접 찍은 영상이 있고, 영상에 올린 날짜도 훨씬 앞선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죠. 돈이 조금만 여유가 있었어도 망설임 없이 고소했을 텐데······. 그리고 상대에게 팬들이 너무 많아요. 팬이 많다는 건 돈도 많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 사람이 속한 매니지먼트사에는 법무팀도 있고요. 명백하게 내 것인데도 그걸 명확하게 증명하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세상이에요. 그리고 실력 좋은 변호사들은 그걸 가능하게 해요.”


선비의 얼굴에도 근심이 드리웠다.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더 이상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일은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영상 속 주인공은 앞으로도 계속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그대가 영상을 찍은 촬영자라는 것을 알리는 편이 좋겠소.”


“어떻게요?”


“영상을 찍을 때 그대의 얼굴이 나오면 되지 않겠소? 얼굴을 드러내고 그대가 촬영했음을 밝히는 것이오.”


“얼굴을 밝히는 게······ 괜찮을지······.”


“생각나는 방법이 그뿐이오. 선택은 그대의 몫이라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얼굴이 너무 알려지잖아요. 하오문이라든지 검계라든지.”


“너무 늦은 걱정 아니오? 지금까지 얼굴을 가리고 다닌 적이 없으니 하오문은 이미 그대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오.”


“아,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고 했죠. 갑자기 불안해지는데요?”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하면 되지 않겠소? 마침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하기도 했고 말이오. 다른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함께 행동하도록 합시다. 어떻소?”


의외의 제안에 인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비를 쳐다보았다. 거대한 조직을 쫓는 일이 하루 이틀에 끝날 리 만무했다. 앞으로 수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선비는 그렇게 말했다. 인수는 그것이 놀라웠다.


“너무 극단적인 방법······은 아니겠죠? 그러니까 영상마다 얼굴을 드러내는 거요.”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소. 하지만 당연하게도 선택은 그대의 몫이오. 다른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잠시 시간적 여유를 갖는 선택지도 있다오.”


“······휴. 일단 다음 촬영 때까지 생각을 좀 해보죠.”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모락모락 김을 내뿜던 설차는 이미 식어 한기가 감돌기 직전이었다. 식은 차를 홀짝거리며 맞은편에 앉은 인수를 훔쳐보았다.


인수는 노트북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을 덮었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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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 크리에이터 (8) 19.04.22 1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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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4. 크리에이터 (6) 19.04.17 19 0 15쪽
37 4. 크리에이터 (5) 19.04.15 16 0 18쪽
36 4. 크리에이터 (4) 19.04.12 25 0 14쪽
35 4. 크리에이터 (3) 19.04.10 12 0 16쪽
34 4. 크리에이터 (2) 19.04.08 15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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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 마담 (10) 19.04.01 3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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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3. 마담 (8) 19.03.27 3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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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마담 (5) 19.03.20 42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44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43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43 0 18쪽
22 3. 마담 (1) 19.03.11 5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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