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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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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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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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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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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리에이터 (7)

DUMMY

턱 아래에 동여맨 흑립의 갓끈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한계에 다다른 분노에 동요하는 것 같았다. 이에 반응하듯 대기를 찢는 을씨년스러운 굉음이 숲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힘을 머금은 흑접선이 괴한의 머리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선비의 팔에서 길게 선혈이 튀었다. 삼인조 중 한 명의 짓이었다. 팔을 잘라버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흑접선 주변의 무거운 공기에 괴한도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충격파와 굉음이 숲을 덮쳤다. 주변의 모든 낙엽들이 회오리치며 산산이 갈려나갔다. 잘게 갈린 돌멩이들이 모래로 변해 매서운 암기가 되어 나무들을 두드렸다.


한 차례 시끄러운 폭풍이 지나간 뒤 정적이 자리했다. 숲은 완전히 쑥대밭이었다. 흑접선이 내리친 자리에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 두꺼운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나무껍질들도 상당수 벗겨져 매끈한 속살을 드러냈다.


“끄아아······.”


고통스러운 신음이 폭풍 뒤의 정적을 깼다. 머리가 깨진 괴한의 신음소리였다. 곁에는 다른 동료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깊고 넓게 파인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선비의 공격을 직격으로 맞는 일은 피한 모양이지만 피해는 상당했다. 두 사람 모두 옷이 볼품없는 넝마가 되어 있었다. 모자도 날아갔고, 얼굴을 가린 마스크도 찢어진 상태였다.


동료를 구하려 다급히 달려왔던 자는 어깨와 목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충격의 여파로 생긴 모래 소용돌이가 할퀴고 간 상처였다.


그러나 선비의 목표가 되었던 자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며 연신 다리를 살폈다.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에 손도 대지 못했다. 심지어 무릎 아래로는 살이 완전히 뜯겨져 있었다.


끔찍한 광경에 선비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분노마저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지독한 살초였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다리가 아니라 머리가 사라졌으리라.


선비가 망연한 표정으로 괴한들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그들은 경계하며 한데 모였다. 일격에 공터 하나를 만들어낸 위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만만했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분노가 사라지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살초를 사용하지 않는 선비문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이 아닐까, 라는 후회였다. 선비문은 누군가를 죽이고 상처 입히기 위해 무공을 수련하는 문파가 아니지 않던가.


선비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괴한들의 낌새가 수상했다. 전투불능의 상처를 입은 자의 곁에 서 있던 두 명이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더니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다.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는 것일까. 선비는 마음을 다잡으며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라졌던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비가 만든 커다란 구덩이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보던 선비는 이내 경악했다. 괴한들이 입에서 불을 뿜은 것이다. 화염방사기와 같은 불길에 바닥을 덮은 마른 낙엽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의 나무에 옮겨 붙었다.


산불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떻게든 불을 끄기 위해 달려 나가려던 선비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괴한들이 품에서 구슬을 꺼내 던지자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다.


역한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를 찔렀다. 괴한들이 던진 것은 기름이 담긴 구슬이었다. 그들은 온 산을 불태우려는 듯 쉬지 않고 입에서 불을 뿜었고, 손으로는 기름이 담긴 구슬을 던져댔다.


구덩이 주변이 온통 불바다였다. 매캐한 연기가 벌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인수도 불길을 피해 선비 곁으로 다가왔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사태에 그들은 말을 잃었다.


선비를 쳐다보는 인수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흑립으로 가려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웠다.


“선비님······?”


“이 불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선비의 목소리가 망연했다. 불길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붉은 죄책감이 서렸다. 삽시간에 번진 불길은 이미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


“선비님. 어서 도망쳐야 할 거 같아요.”


인수가 선비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미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는 퇴로가 보이지 않을 만큼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땅은 물론 하늘에서도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선비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괴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동료는 보이지 않았다. 냉정한 자들이었다.


몇 걸음을 걸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왔다. 선비는 반사적으로 흑접선을 펼쳤다. 그러나 암기의 방향은 그녀가 아니었다.


“크윽······.”


괴한이 신음을 흘렸다. 등에 작은 암기가 꽂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암기를 확인하더니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선비는 순식간에 괴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쓰러진 괴한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등에 꽂힌 암기는 겉으로 보기에도 위험한 기운을 풍겼다.


이미 선비에게 당해 반쯤 찢겨진 마스크 사이로 거무죽죽하게 변한 얼굴색이 드러났다. 독이었다. 아주 지독한 독인지 벌써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선비는 괴한의 팔을 붙잡고 선비심공을 불어넣었다. 독을 밀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괴한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했다.


“쿨럭······!”


괴한은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검은 피를 토해냈다. 뼈가 드러난 다리의 상처에서도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선비는 즉시 선비심공을 거둬들였다. 괴한의 기혈이 뒤틀리고 있었다. 원인은 독이 아닌 선비심공이었다. 선비심공의 기운에 그림자 인형이 사라졌던 일을 잠시 잊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괴한이 익힌 술법의 근원은 선비심공의 기운과 상극임이 분명했다.


다급히 기운을 거두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독으로 죽어가던 괴한은 벌써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내 말 들리시오? 들리면 아무 말이나 해보시오!”


“큭······.”


“정신이 드시오? 대답 좀 해보시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내가 당할 줄이야.”


괴한은 선비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탈한 듯 넋두리를 읊조렸다. 슬픈 목소리도, 억울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단지 아쉬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선비가 괴한의 모자와 마스크를 벗기고는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눈빛이 흐리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았다.


“왜 우릴 공격한 것이오!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지 말해주시오!”


“어차피 죽는 마당에······. 말하지 않으면······ 뭘 어쩌려고?”


괴한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벌써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는지 어눌한 말투였다. 숨도 거칠었다. 남은 대화는 이제 몇 마디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답답하게 지켜보던 인수가 달려왔다. 선비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기에 하나라도 많은 정보를 얻으려는 생각이리라. 그러나 인수에게는 숲을 집어삼키고 있는 불길이 더 위급해보였다.


“선비님 이럴 시간 없어요. 이러다 질식해서 죽을 거예요.”


“······아직 괜찮소. 아직은.”


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선비와 괴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선비를 물러나게 하고 괴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죽는 마당에 의리 지킬 거예요? 버리고 간 사람들이잖아요. 그냥 버린 것도 아니고 확실히 죽이겠다고 독으로 중독까지 시켰어요. 아니면 죽기 전에 회개라도 하려는 거예요? 회개를 하고 싶으면 그냥 말해요. 당신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괴한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그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죽음이 가까워져 고통에서 해방된 것인지 인수의 말을 비웃는 것인지.


“생각할 시간 없다는 거 알죠? 남은 시간이 1분일 수도 있고, 30초일 수도 있어요.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있네요.”


인수는 괴한의 반응을 무시하고 다시 속삭였다. 머리 위로 불길이 넘실거리고, 불에 휩싸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가지에 쿵쾅거리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의연한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했다.


괴한의 입가가 또 한 번 실룩였다. 설득에 실패했다는 생각에 선비를 재촉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괴한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렇지······. 나만 당할 수는 없지. 망할 땐 같이 망해야지.”


괴한의 목소리에는 죽기 직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기가 돌았다. 생각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인수는 선비를 쳐다보았다. 어서 질문을 하라는 눈짓이었다. 선비는 다급히 괴한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몸담고 있는 조직이 어디인지 말하시오. 검계요? 하오문이오?”


“너 같은 선비를 싫어하는 곳이지.”


“선비를 싫어한다? 무슨 뜻이오?”


“우린 선비가 싫다고.”


“왜 싫은 것이오?”


“······모르겠다.”


선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인수와의 대화에서 했던 말은 순순히 말해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일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괴한의 안색은 이미 시체와 다르지 않았다.


“왜 우리를 노렸소?”


“명령.”


“죽이라는 명령이오?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알아야 할 만큼. 지금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만큼.”


“난 조직의 수장을 만나고 싶소. 어디로 가야 하오?”


“오늘처럼 살아남으면 자연히 만나게 되겠지.”


“말마따나 배신당한 조직의 의리를 지키려는······!”


“내가 죽어도 가족은 남아 있다.”


괴한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런 짓을 벌이는 자들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해보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이기적일 악당들에게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가족을 생각할 이타심이 남아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가족의 안위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대가 속한 조직이 괴멸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


“정말 간단한 계산이지. 말을 하면 조직은 보복을 하지만 너 같은 선비는 보복하지 않아.”


“······대신 보호해줄 수 있소.”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보호하겠지. 죄인이라고 가족까지 죄를 지은 건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


“확신할 수 있소? 날 잘 모르지 않소?”


“널 믿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성공률 높은 도박이다. 나쁜 놈도 같은 나쁜 놈보다 착한 놈을 믿지. 절대 모른 척 못해. 소위 말하는 착한 놈이잖아.”


“무슨 말이든 해주시오!”


선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괴한의 얼굴은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다. 유언다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괴한은 생을 마감했다. 그조차 이런 끝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애매하게 입을 벌린 모습이었다.


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를 바라보는 선비의 표정이 착잡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목숨을 노렸던 자였건만 분노나 후련함 따위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생전에 무슨 일을 했든 죽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때 괴한의 피부가 꿈틀거렸다. 끓는 물처럼 기포가 생겼다가 사라기를 반복했다. 피부는 이내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액화된 피부가 촛농처럼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 괴한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얼룩만이 남아 있었다.


선비는 시신이 있던 자리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떠나기 전 시신이라도 수습해주려 했건만.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들은 이승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비님!”


인수가 넋을 잃고 서 있는 선비를 불렀다. 산불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붉은 불꽃들이 사방에 만개해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의 힘으로 불을 잠재우기란 불가능했다.


“선비님! 어서 가요!”


“이대로 두면······ 산이 전부 타 버릴 것이오.”


“사람들이 벌써 신고했을 거예요. 소방차가 곧 오겠죠. 벌써 와 있을지도 몰라요. 더 늦으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된다니까요!”


다급한 인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선비는 흑접선을 손에 쥐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불을 꺼볼 속셈이었다.


“선비님······!”


인수가 또 한 번 선비를 불렀다. 자세를 잡은 선비와 불길로 덮인 숲을 초조하게 번갈아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어설픈 시도는 오히려 불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비의 두루마기 소매가 부풀었다. 낙낙낙에 비할 바는 아니나 상당한 양의 내공이 흑접선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바닥을 내려쳤다.


불길에 휩싸인 숲 너머에 거대한 장벽처럼 대나무가 일자로 솟아올랐다. 다 자란 나무에 맞먹을 만큼 높았다. 또 한 번 전개된 군자검법 기개였다.


한순간에 많은 양의 내공을 소모한 선비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선비심공의 기운으로 똘똘 뭉친 대나무를 올려다보며 서둘러 흑접선을 펼쳤다.


흑접선을 펼친 것이 얼마만이던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때였다. 내공이 모여들었다. 흑접선은 언제나 그랬듯 칠흑의 안개를 뱉어냈다.


선비는 숨도 멈추고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흑접선에 전해지는 공기의 저항이 팔을 강하게 자극했다. 부채를 부치는 손짓이 이어질수록 바람은 강해졌고, 팔에 전해지는 부하도 점점 더 강해졌다.


바람이 대기를 할퀴듯 날아갔다. 흑접선이 뱉어내는 안개가 섞여 바람결이 선명했다. 거친 붓질로 그려낸 수묵화 속의 바람이 이러하리라.


한 번의 붓질에 불길이 요동쳤다. 화풀이를 하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사방으로 손을 뻗었다. 두 번째 붓질이 그 거친 손길들을 쳐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쉼 없이 이어지는 붓질에 불붙은 나뭇가지들도 휘청거렸고, 이내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인수는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산불이 번질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괜한 우려였다. 듬직하게 솟은 대나무들이 요동치는 불길들을 막아주고 있었다.


한바탕 퍼부은 부채질을 멈추자 선비의 정면에서는 더 이상 불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검은 재들이 한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사방에 날아다닐 뿐이었다.


역할을 다한 대나무 장벽은 어느덧 모습을 감췄다. 검게 탄 나무들과 휘날리는 재들은 모든 것이 마무리된 듯한 인상을 풍겼으나 결코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면 게걸스럽게 숲을 집어삼키고 있는 불길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흑접선에 다시 내공이 밀려들었다. 선비의 안색이 창백했다. 단전이 바닥을 보였으나 멈출 수 없었다. 주변의 불길이 애써 진화한 숲에 다시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바닥을 내려치자 불길에 휩싸인 숲 너머에 다시 대나무 장벽이 세워졌다. 선비는 곧장 흑접선을 펼쳐 휘둘렀다. 힘찬 붓질이 허공에 바람을 그렸다.


거친 바람이 불이 꺼진 숲 반대편으로 불길을 몰아넣었다. 휘청거리며 불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이내 반대편에서 덮쳐오는 묵색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선비는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부채를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천근처럼 무거웠다. 핏기 없는 안색으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한바탕 바람이 스쳐간 숲이 회색의 연기를 뱉어내며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몸을 돌린 선비는 시린 눈을 질끈 감았다. 붉다 못해 하얀 불꽃의 다발들이 일렁였다. 역부족이었다. 절반이 한계였다. 모든 힘을 쏟았음에도 절반의 산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부채 하나로 산불을 진화하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던 인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친 몰골로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은 선비의 곁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선비님, 이제 가요. 할 만큼 했어요.”


“기껏······.”


“선비님은 정말 할 만큼 했어요. 이만큼 불을 끈 것도 기적이라구요. 나머지는 전문가들한테 맡겨요. 봐요. 소리 들리잖아요.”


인수가 타오르는 산불 너머를 가리켰다. 선비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커다란 불길이 내는 미묘하게 고요한 소음의 장막을 뚫고 익숙한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번 신세를 지겠구려.”


선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수는 묵묵히 선비를 부축하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숲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던가. 지난 기억이 스쳐갔다.


처음 큰일을 치른 사건. 어학원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도 불이 났었다. 주변에 피해를 번지게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자들이었다. 한밤중 산속이라 인명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리라.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숲속을 걷다보니 머리 위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방헬기였다. 산불의 규모를 가늠하려는지 느리게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뒤이어 숲속으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불길은 곧 잠잠해질 것으로 보였다. 그 광경에 숲을 떠나면서도 산불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선비도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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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 마담 (6) 19.03.22 44 0 12쪽
26 3. 마담 (5) 19.03.20 43 0 17쪽
25 3. 마담 (4) 19.03.18 46 0 19쪽
24 3. 마담 (3) 19.03.15 48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45 0 18쪽
22 3. 마담 (1) 19.03.11 6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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